시를 쓰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멋져보여서 아버지처럼 시인이 되려고 했는데 앞으로는 시를 쓰지 않고 소설을 쓰겠다는 이야기를 써 놓았던 것이었다. 시를 잘 짓는 아버지께서 소설은 한 줄도 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까지 써 놓았다. 석경숙은 “야 이 오기 좀 봐라. 인자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 되는 아이가 소설이 뭔지 그건 어찌 아노?”라고 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둘째딸은 정말 두 번 다시 동시를 쓰지 않았다. 평소에 세종대왕을 존경해 오고 있었고 국어교사에 대한 꿈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지 이수정은 불현듯 중등교사 자격검정고시 시험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쉽게 뜻을 정하지 않는 반면 한 번 뜻을 세우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취하고 마는 성품이었다. 이수정은 자격고시 시험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요즘엔 고시학원들이 많아서 필요한 시험 준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학원들이 많지만 그때는 그런 학원이 없던 시절이었다. 설사 학원이 있어도 교편생활을 하고 있던 터여서 짬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수정은 시험과목에 필요한 책들을 구하여 독학에 들어갔다.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이수정의 식구들은 두레상에 온 식구가 함께 식사하곤 했는데 웬일인지 석경숙이 밥상만 차려 놓고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이수정을 슬슬 피하는 느낌도 주었다. 이수정과 아이들이 빨리 와서 식사를 같이하자고 해도 알았다고만 하고 같이 밥상머리에 앉지 않는 것이었다. 쌀이 모자라서 밥을 한 그릇 작게 했다고 생각한 이수정은 빈 그릇을 들고 와서 밥을 나누어 담아놓고 석경숙을 불렀다. 석경숙은 밥상 앞에 모습을 보이는 대신 소리 내어 웃으며 쌀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눈병이 나서 옮을까봐 눈을 마주치지 않고 숨어 있다고 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눈병이라는 것이 가족 중 누군가가 발병하면 식구 전체에게 옮겨 가는 것이다. 당시는 안과를 찾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눈병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약을 구하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특히 평소에 책을 끼고 사는 이수정은 늘 눈이 피로 했고 한 번 눈병이 났다 하면 한 달 이상 고생을 하곤 했다. 시험을 며칠 앞둔 이수정에게 눈병이 옮길까봐 걱정이 되었던 석경숙은 애써 가족과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피했던 것이다. 1968년 문교부 시행 중등학교 자격고시 국어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되어 국어교사의 꿈을 실현하게 되었다. 1969년 봄 부산의 모 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이 났으나 반려하고 시심에 열을 올리고 있다가 1970년 진주의 선명여자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진주로 이사를 왔고 새로운 진주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8년에는 <통일문예> 신춘문예 시부(詩部)에 ‘이 땅에 돋아난’이 당선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975년 6월이 여름을 부추기고 있었다. 진주 남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이수정은 그 동안 교단생활에서 아이들을 보며 느낀 심연의 세계를 글로 풀어낸 시들을 책으로 엮어 처녀시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의식의 씨앗’이라는 책제로 시집을 출판하게 된 이 시집의 서문은 이수정의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박목월 시인이 써 주었다. 서문에서 박목월 시인은 ‘이 시인의 작품은 한 마디로 교단생활에서 얻은 애환을 경건한 긍정적 세계 위에 구축해 놓은 인생찬가라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항상 새롭게 볼 수 있는 신선한 눈과 자신의 허망을 돌아보는 안타까움이 그의 겸허하고 성실한 인간성과 交織, 配合되어 오묘한 紋彩를 띠고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 이수정은 시 한 편 한 편을 통하여 교단생활의 즐거운 번뇌를 고스란히 녹여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