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내나이 68세.
요즈음 한창 유행하고 정치판에서 더 유행하고 있는 백세 인생 가사 내용을 보면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60대가 정말 젊은 나이일까?
40년전 오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한다.
오늘이 우리 부부가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린 날이다.
내가 태어나 살고있는 이 면(面)에 거주하는 바로 위 처형 쪽에서
중매를 서 맞선을 보았다.
1973년 11월에 제대를 하고 담배,술을 먹지않고 부지런하다는 평들이
있었는것 같다.
1974년 5월달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나야 소상(小喪)을 치른다는
풍속이 있어 1975년도에 결혼을 했다.
11월 어느날,
나는 엄마와 중매를 하는 몇사람과 함께 wife 친정집에서 선을 보았는데
선을보고 시간이 남으면 다른 곳에도 선을 보기로 약속을 해놓은것 같았다.
겨울해는 너무 짧았고 비포장 자갈길을 촌이라 힘들었고 많이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니 한곳만 보고나니 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내러앉고 있었다.
그 당시 wife는 중학교 서무실에 근무를 하고 있었고,
나는 한국 ㅇㅇ공사 계약직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맞선을 보고난후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신혼 여행지는 1박2일 경주로 갔다.
지금은 사는게 윤택하니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지만 그때는 신혼여행을 간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 될것같다.
결혼식후 어영부영하다 보니 겨울철 짧은해는 저물고 경주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었다.
이튿날은 택시로 하루종일 유적지 중심으로, 아침에는 해돋이 구경으로 석굴암을 갔고
불국사.반월성등 여러군데를 구경했는데 다른곳은 한두번씩 가본 기억이 있는데
김유신 장군묘는 그때 가보고 한번도 가보질 못했다.
31일 처가에 와서 하룻밤을 보냈고 1976년 1월1일,2일을 우리집에서 보낸후
3일 엄마가준 쌀 1가마니를 가지고 총각때 자취하던 집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워낙 가정형편이 어려워 전세 한푼없이 방 한칸 부억한칸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이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고생길이 열려 14번의 이사끝에 지금집에 살고있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1985년 10월달 그만두게 되었다.
업무부장이 취임하면서 부산에 있는 자기 친한 측근들에게 외근 70여명의
회장직을 맡기고 총무까지 맡겨 불화가 시작 되었다.
그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다.
성질머리는 더러워 대책도 없이 앞뒤 가리지 않고 부당하다고 주장을 했다.
기존 근무하던 사람과의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군대 문자가 아니드래도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면되지 웬 말아 만노?"이런 시대였다.
한마디로 답이 먼저나와 있었다.
그래도,
욱하는 성질, 더러운 것을 보고 참지는 못하는 성질이지만
결코 남을 해(害)쳐본 일은 없었는것 같다.
나때문에 손해본 사람있으면 나와봐라 자신있게 말해본다.
나는 짐승도 키워보고 회사에도 조금 다녀보아도 오래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고
노동판에 막노동까지 하면서 대책이 없는 사람이었다.
wife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고 생전 해보지 않은 직업전선으로 뛰어 다니면서도
그래도 불평과 짜증 한번 내지않아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고맙다는 말 이외는
다른말을 할게없다.
긴세월 동안 모진 비바람을 맞으면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동네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를 임대한다는 창문에 붙어있는 쪽지를 보고
형님과 주변의 도움으로 그 상점을 인수해 1993년10월31일 장사를 시작했다.
물건을 하나팔고 돈이 호주머니에 들어오니 안 식구가 신기해 하면서
즐거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
이때 장사를 시작해 지금 이날까지 장사를 하고있다.
16년 6개월 가량 장사를 하면서 하루종일 문을닫고 장사를 안한날이 한번 있는데
내 나이 61세때 환갑해에 무자생 모임에서 4박5일 태국 캄보디아 여행을 갔을때 이다.
앙코르 와트 중심으로 관광을 했다.
오래동안 장사를 할때 집안에 큰 행사도 있었다.
한분뿐인 형님도 타계를 했고 딸내미 결혼식 조카들의 결혼식도 있었지만 행사를
마친후 아이들이 상점을 대신 봐주기도 했다.
입구에 같은 생필품을 파는 가게가 세곳이나 있어도 고향이라 찿아온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동민들께 지금 고맙고 감사하다는 때늦은 인사를 해보고 싶다.
장사를 하는 우리 마음은 이익을 따지는 돈도 중요했지만 인정도 끼워 팔았다.
누가 나에게 지나온날을 묻는다면 벌어 모은돈은 없어도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할수 있다.
안 식구의 장점은 쓸데없는 말을 많이하는 수다쟁이도 아니고
어쩌다 남의집 남의 이야기가 나오면 궂이 알려고 다시 되묻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알면 뭐하나 이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나는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집까지 끌어드리지 않고 특히 친구들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 슬하에는 76년생 딸과 79년생 아들을 두었는데 딸은 유치원을 이사를
오면서 입학 시기를 놓쳐 유치원을 보내지 못했고 아들은 통도사 유치원을 보냈는데
앨범값을 돈이없어 선불을 지불치 않아 졸업때 찿으러 갔더니 수량이 없었다.
30년이 지난 일을 아직 잊지 못하고 가슴에 남아 있는걸 보면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남아 있는것 같다.
딸은 울산시 9급 공무원 공채로 공무원 생활을 하고있고,
아들은 용인에 있는 체육대학을 졸업해 유도 체육관을 운영하고있다.
우리가 도와줄수 있는 여력이 없으니 본인들이 알아서 준비하고 결혼을해
자기 가정을 위해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아들과 며느리가 축하 전화가 오고 점심을 먹자고 했으나 아직 초등학교
방학을 하지않아 조용한 다른 날로 미루었다.
나는 자주가는 영농회 사무실에서 치킨을 주문해 자주 만나는 사람과 소주도 한잔
하기도 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두손을 꽉잡고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시집을 와줘서 고맙고,
참고 잘 견뎌줘서 감사합니다."말했더니 wife말 "부족한 사람하고 같이 산다고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했다.
지금처럼 별탈없이 서로 이해하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東方 徐希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