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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 士 學 位 論 文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자연관의 양상
指導敎授 卞 鐘 民
濟州大學校 敎育大學院
英語敎育專攻
姜 致 英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자연관의 양상
指導敎授 卞 鐘 民
이 論文을 敎育學 碩士學位論文으로 提出함.
濟州大學校 敎育大學院 英語敎育專攻
提出者 姜 致 英
姜 致 英의 敎育學 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審 査 委 員 長 印
審 査 委 員 印
審 査 委 員 印
<國文抄錄>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자연관의 양상
姜 致 英
濟州大學校 敎育大學院 英語敎育專攻
指導敎授 卞 鐘 民
이 논문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에 나타난 자연관들을 살 펴보는 데 초점을 두었다. 먼저 인간중심의 자연관을 들 수 있다. 어부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 는 산티아고는 자신의 비범함을 증명할 수 있는 고기를 잡기 위해 희망에 부푼다. 그는 큰 고 기를 잡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먼 바다로 떠난다.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과 투쟁하여 인간 의 삶의 가치를 고양시킨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의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산티아고와 마린과 대적하고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삶을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헤밍웨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나타내는 훌륭한 행동 덕목으로 강한 의지, 힘, 기술, 열 정, 위엄 내세우고 있다. 다음으로 논의될 수 있는 자연관은 원시주의 자연관이다. 산티아고의 오두막집, 산티아고의 원시적 모습의 외모 ( 맨발, 상처, 골이 깊은 주름, 자연식 등),
무동력 및 나침반 없는 배, 순결과 용맹의 사자, 아프리카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원시주의 요소들이 이 런 자연관을 잘 나타낸다. 문명을 멀리하고 자연으로의 도전을 유혹하듯, 산티아고의 생활은 소박하면서도 원시적이다. 마지막으로 거북이 심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연관을 생태학적 자 연관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두 손과 발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일성이 강조되며, 이는 곧 심층생태학적 자연관의 강조점이다. 거 북이, 새, 별, 달, 해, 및 고기들을 형제 혹은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전일성의 자연관이다. 자연 의 생명력을 중시하고 원시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중심적 자연관에서 자연스럽게 생태학적 자연 관으로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전환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본 논문은 2005년 8월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위원회에 제출된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임.
목 차
Ⅰ. 서론............................................................................................1
Ⅱ.『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자연관의 양상
1. 인간중심의 자연관.............................................................5
2. 원시주의의 자연관 .........................................................11
3. 생태학적 자연관...............................................................26
Ⅲ. 결 론 ..................................................................................43
참고문헌.......................................................................................45
Abstract ......................................................................................48
1. 서론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1910년대에 시작하여 20년대, 30 년대에 걸쳐 미국의 현대문학을 주도한 대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후 소위 ‘상실의 세대 (Lost Generation)’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유럽의 문화와는 상대적으로 문화적 전통이 결여되어 있는 미국인의 절망감, 고향 상실 등의 아픔을 담고 있다. 초기의 작품인 『태양은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1926) 에서는 ‘환멸’과 ‘무’를 다루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1929)에서는 ‘허무주의’를 부각시키 며, 운명과 환멸적 스토이시즘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그 후의 작품, 『부자 와 빈자』(To Have and Have Not, 1937)를 통해 헤밍웨이는 전 작품에서 구체 화시켰던 니힐리즘을 현실적인 시각으로 수용하는 변화를 보인다.
그리고 다 음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0)를 발표했을 때는 작가의 세계관이 뚜렷하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생을 보 는 기본적인 시각이 ‘허무적 삶’에서 ‘긍정적인 참여의 삶’으로 이동하게 된 다. 이토록 작품의 주제의식을 적극적 ‘참여’와 ‘긍정’의 인생관으로 전환하면 서 헤밍웨이의 문학세계는 한층 성숙하게 된다. 헤밍웨이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는 이런 긍정적 인생관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년의 대작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연구된 『노인과 바다』에 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면, 극기주의(Stoicism)를 중심으로 한 가치관 중심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극기정신은 바다에서 벌어지는 물고기와의 치열한 사투를 통해 나타나는 노 인 산티아고의 불굴의 정신을 일컫는다. 외관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산티아 고는 패배자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통해 그는 정신적 승리자임을 보여준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를 통하여 믿음과 용기에 대한 치밀한 행동규범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산티아고는 믿음직스러운 것, 용감한 것, 단순한 것, 원시적 인 것,
확고한 것 등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1) “인 간은 파괴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2)라고 선언한 산티아고의 확신은 철학의 범주를 넘은 인간의 종교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이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연구는 범애주의(pantheism)를 들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노인 산티아고는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과 물상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까지도 자기 형제처럼 생각한다. 이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우주의 만물을 하나로 보는 범애주의 사상을 나타낸다. 자연의 순리에 입각하 여 모든 삼라만상을 친구와 형제로 간주하며 바다에서 날고 있는 연약한 새 에게도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산티아고의 정서는 곧 범애 정신과 일치한다. 산 티아고가 어려운 난관에 처해 있을 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준 소년 마놀린 (Manolin)과의 관계 즉, 노인과 소년과의 관계 또한 진정한 인류애를 상징한 다고 할 수 있다.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자연관은 몇 가지로 나누어 고찰이 가능하다. 먼저 산티아고 노인에 대한 인간중심적 자연관을 살펴 볼 수 있다. 자연과 인 간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인간중심의 자연관은 삶을 ‘투쟁’으로 보고 ‘어 부’라는 자신의 일에
최고의 자부심을 갖는 노인의 태도에서 엿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인간중심적 자연관을 벗어나 작가 헤밍웨이를 보여주는 원시주의 자연관을 살펴본다. 문명과 편리함을 멀리하고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원시주의 적 자연관은 오늘날 논의되는 웰빙 문화와 같은 생태주의와 크게 상통한다고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노인과 바다』의 작품 전반에 걸쳐 잘 드러나고 있는 자연의 속성들을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노 인과 바다』에 관한 자연관의 연구는 일부 있었지만 21세기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생태주의 관련 연구는 흔치 않다. 더욱이 노인과 청새치의 피할 수없는 투쟁 및 대립이 주는 선입감으로 인해 이 작품에 내재된 생태적 자연관 은 간과되어 왔다. 하지만 자연과 문학과의 관계를 생각하자면 『노인과 바 다』는 생태학적 자연관의 입장에서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각도의 연구가 가 능하다고 판단된다.
어부로서 노인이 보여주는 행위 역시 다양한 자연관을 복합적으로 보여준 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나누어 보자면, 우선 바다로 떠나기 전에는 멋지고 많은 고기를 잡고 싶은 어부들의 희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가장 좋은 시 기를 잡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연을 향해 정복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토록 직업의식이 투철한 노인의 모습은 바로 인간중심의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한 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동원하여 가장 큰 고기를 잡고 싶은 어부는 뭇 어부들 과는 달리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서 고기들의 행동 일체를 파악하고 숨죽여 멋진 어부가 미끼에 걸려들기를 기다린다. 이 때 노련한 어부는 일체의 편리 한 도구를 마다하고 자신의 노련한 감각으로 고기를 잡으려고 한다. 이토록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한 고기를 잡으려는 태도는 원시적 자연관을 반영 한다. 의식주를 비롯한 어부의 생활이 문명을 멀리한 원시성을 상징하고 있 다. 현대인들의 생명의식을 일깨워주는 원시적 자연관의 모습을 이곳에서 찾 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상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지만 노인의 삶이 가꾸어지고 풍성해지는 인간사회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은 희망을 꿈 꾼 것 만큼이나 절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배경에는 노인을 염려하고 그의 귀환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생태학적으로 보면 실패로 판정되는 고기잡이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고비임을 알 수 있다. 그이 실패의 경험의 다른 사람들에게 는 썩어 다시 태어나는 씨앗의 양분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어나고 소 멸하는 과정이 자연의 절대적 순리인 것처럼 인간의 노년 혹은 실패의 한 과 정은 성공 혹은 다음 세대로의 커다란 순환의 고리임을 인식하고자 하는 생 태학적 자연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작연관의 양상에 따라 다음 장 에서는 이 작품에 나타난 자연관을 인간중심 자연관, 원시주의 자연관, 그리 고 생태학적 자연관으로 나누어 논의해 보고자 한다.
Ⅱ.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자연관의 양상
1. 인간중심의 자연관
계몽주의 이래 인간은 ‘자연’을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자연은 생산력의 원천으로 인간에게 봉사하게 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고들이 발 전하면서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황야, 길들지 않은 자연은 이성이 정복하고 복종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고 과학과 기술 중심 사회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서구의 자연관은 개별 생명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을 생존을 위한 투쟁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경쟁은 자연계의 보편적 이치라고 강조함으로써 자연을 다루는 도구들이 무수히 등장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지배원리는 약육 강식, 자연도태, 적자생존 등을 자연계의 법칙으로 보고 있는 다윈의 생태학 적 인식을 이론적 근거로 하고 있다.
소설『노인과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고 살아가며 많은 고기를 잡아 공장에서 가공을 하는 어부들의 삶이 생동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운이 좋아서 풍 어를 기원하고 많은 돈을 벌고 더 좋은 도구들을 사서 더 많은 고기를 잡고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를 희망하며 바다를 생활공간으로 삼아 살아가 는 어부들의 모습은 인간 중심의 자연관을 잘 설명한다. 인간의 양식으로 사 용할 고기를 많이 잡으면 잡을수록 어부들은 그 가치가 높아질 것이고 바다 의 물고기는 당연히 인간의 손에서 잡힐 수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이 토록 인간과 물고기 사이에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한 치의 의 심도 없이 자신의 경험을 깃대 삼아 보다 큰 고기를 찾아 먼 바다로 자꾸만 나아간다. 그는 큰 고기가 노는 장소와 큰 고기를 어떻게 수확할 수 있는지를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스스로 좀 더 큰 고기를 원했던 노인은 쉽사리 잡혀주지 않는 물고기와 한 치도 물러 설 수 없는 투쟁을 하게 된다. 그 팽팽한 긴장의 시간은 삼 일 동안 이어진다. 다음의 장면에서는 자연과의 투쟁이며 대립적 자연관을 잘 나타나 있다. 노인이 “물고기야, 난 죽을 때까 지 너와 함께 싸우련다. 싸워야지”라고비장하게 말하는 데서 투쟁적이며 대 립적인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다. 노인은 상어의 두 눈 사이의 급소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작살을 내래 꽂았다. 순간 상어의 살과 껍질이 한꺼번에 뜯겨 나가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리 꽂은 작살에 힘을 주어 더욱 깊숙이 쑤셔 넣었다. 자기가 상어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없었으나, 그에게는 상어에 대한 증오심만은 남아 있었다(89).
상대의 죽음을 지켜보겠다는 강자로서의 인간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 는 대목이다. 강자와 약자, 인간과 동물, 자연과 물질로 이원화되면서 그 과정 에 수반되어 온 폭력과 싸움을 볼 수 있다. 이 싸움은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어부로서의 구조적 필연에 의한 것이며, 물고기와 어부는 서로 철저한 타자일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는 항상 물고기보다 한 단계 위에 서 군림하고 있어야 한다. 동물은 늘 만물의 영장인 인간보다 한 수 아래이며 더욱이 노련한 어부에게 물고기란 주어진 미끼를 덥석 물고 생명을 내주어야 하는 생물체에 불과하다. 즉 자연에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엄연한 경 쟁과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자연관은 자연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노인인 어부 본연의 임무인 고기잡이를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고, 이때 자연은 자원의 보고이자 생존 의 장이 된다. 산티아고는
어부로서의 자신의 능력과 인내심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늘 자신을 보통의 어부와는 다른 비범한 어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말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고기와의 싸움에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한다. 그는 인간적인 자부심과 영웅심으로 자신의 의지를 높게 다지고있다. 마치 뜨거운 혈기와 모험심으로 자연에 대한 도전장을 던지는 챔피언 과 같은 행동이다. 그는 “난 저 놈을 죽일 거야. 제 아무리 위대하고 영화에 둘 러싸인 놈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그는 그것이 물고기에 게는 부당한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어부라는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정 당화 시킨다. 그는 “난 그 애한테 내가 이상한 늙은이라고 말했었지. 바로 그렇다 는 걸 증명할 때가 된 거야.” 라고 거듭 다짐한다. 그가 그걸 지금까지 수천 번 증명했다 해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는 그 사실을 다시 증명해야만 한다. 그것은 번번이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그는 작업을 하는 동안 과거의 일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95).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의 탐욕은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부추기게 되 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하려는 결과를 낳는다. 기술이 곧 인간 의 발전을 위한 중심 과제가 된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연을 정복할 수 있으며 또한 그 결과를 증명하여 보여 줄 것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은 곧 인간 중심적 가치관에서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인간의 삶을 위해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자연 위에서 군림하 는 자세이다. 이러한 자연관에서는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이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계의 영장임을 강조하게 된 다. 도구를 사용하고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어떠한 자연적 조건도 인간의 이성으로 정복하고 무한한 우주의 세계에 정복의 깃발을 올리 는 것을 참다운 승리로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문명의 발달을 유도하 고 미개척 장소를 인간의 사용에 맞도록 개발하며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인 간의 한계에 도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연의 비밀을 분석적으로 밝히고 자 연의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추구하게 된다.인간중심적 자연관에서는 삶은 곧 투쟁이란 사실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인다. 보잘 것 없는 늙은이지만 힘과 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 인간은 파괴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134)라고 불굴의 의지를 피력한다. 이는 곧 모든 생명을 파괴시킬 수 있는 자연의 힘에 대항하여 인간의 살아있는 생명의 힘 을 강하게 역설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가장 생태학적인 인식은 필연적으로 사라져야 할 운명 앞에서 주체적으로 생존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다른 생물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고양시키고자 하는 인식이야말로 인 간의 존엄을 스스로 높이는 생태의식의 진정한 방향이라고 다윈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난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긴 하지만 고기를 죽이는 것도 죄가 될거야. 내 가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해도, 다른 여러 사람을 먹이기 위해서라고 해 도 그건 죄가 될 것 같아. 아니 죄 따위는 생각하지 말자. 그런 것을 전문 으로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은 그런 사 람들이나 하라지. 고기가 고기로 되려고 태어난 것처럼 넌 고기잡이로 태 어난 사람이야. 이 세상 무엇이든지 뭔가를 죽이도록 되어 있어, 어떤 형 태로든지 말이지.
고기는 단지 고기로서 자신의 생을 다하고 자연계에서 사라지지만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 탄생되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 다. 고기는 자연의 일원으로서 다른 고기를 먹기도 하고 다른 고기의 먹이도 되고 인간에게 잡히기도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거나 다른 운명을 선택 할 의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즉 물고기는 고기라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만 어부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경험을 쌓고 그로 인해 고기를 알게 되고 진정한 어부가 되기 위해 변화무쌍한 자연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 속에서 노련하고 진정한 어부로 거듭 태어난다. 이는 자연계의 다른 생물과는 달리 인간은 삶의 전략과 기술이 필요하여 진정한 어부가 되기 위해서도 이런 삶의 목표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인간중심적 자연관에서 볼 때 인간이란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자신의 가치를 고양하기 위해 삶의 의의를 두게 된다. 따라서 주어진 자연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거나 혹은 패배하는 개개 인의 인간의 실존이 중요한 문제이다.
큰 고기와 만난 지 삼일 째 되는 날 밤 노 어부 산티아고는 상어와 운명적 대결을 치를 각오를 한다. 자연과 타협하고 순응하는 자세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고기를 잡는 것을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정확성이야말 로 운을 따르게 하는 법이지” 라고 생각하며 오랜 경험과 기술을 다해 투쟁 하겠다는 소신을 나타낸다.3) 상어들과 연속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싸움이 벌어진다. 사투를 벌여 취득한 자신의 노획물을 상어에게 모두 빼앗기는 최악 의 상황을 막기 위해 노인은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피 냄새를 맡고 먹이를 향해 사냥개처럼 다가오는 상어들과 싸운다는 것이 힘든 모험임을 산티아고 는 잘 알고 있다. 이미 고기를 잡느라 기력이 소진된 산티아고는 온몸의 상태 가 지쳐버려 그의 상처 난 손은 굳어져 가고 있다. 그의 등과 어깨의 근육들 은 아픔으로 엉켜져 있었고, 그의 피로는 뼛속까지 미치고 있었다. 저녁이 되 어 그가 여섯 번째의 상어를
죽였을 때는 이미 마린의 몸뚱이가 반 정도는 뜯겨져 나간 상태였다. 그러나 “이제 상어들이 또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산티아고는 “싸워야지” 라고 한다. 그는 "난 죽을 때 까지 싸우겠어." (147) 라고 자답하며 결연한 의지를 불태운다.어부의 삶도 자연의 순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바다의 생물들도 먹고 먹히며 팽팽하게 순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돌고래 떼가 나타나고 그 고래는 날치를 뒤쫓아 가고 있으며 날치는 살아 날을 기회가 거의 없어 보인다. 새 또한 돌고래 무리의
득세와 날치의 속도와 크기에 밀려 먹이를 먹지 못하고 있다.
그는 새가 또 다시 날개를 뒤로 젖히고 물로 돌입해 들어가는 것을 보았 고, 달아나는 물고기를 맹렬하게 쫓아가지만 소득 없는 날개 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돌고래들이 도망치고 있는 날치들을 쫓느라고 짓는 물 의 완만한 융기를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물고기가 나가 떨어 질 때 돌고 래들은 물고기를 추적하여 떨어지는 물밑에 가서 있으리라. 돌고래의 큰 떼거리인 것 같다고 늙은이는 생각했다. 그것들은 넓게 퍼져 있는 것 같 았다. 날치들은 살아날 도리가 없었다. 새에게도 별 희망이 없었다. 새에 게는 날치가 너무 컸고, 또 너무 빨리 움직였다. (61)
약육강식의 바다 생태계에서 돌고래, 날치, 새들은 서로 먹이 사슬에 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바다에 새가 생존할 수 있는 근원은 날치만이 아 니다. 돌고래 또한 새를 살리는 역할을 한다. 육지에서의 생태계와 마찬가지 로 바다 또한 먹고 먹히는 거대한 생태계가 존재하고 있다. 작은 플랑크톤을 작은 고기가 먹고 그 고기를 큰 고기가 먹고 또한 고기들을 인간이 섭취하는 그런 먹이의 연쇄가 탄탄한 것처럼 자연계에의 질서는 인간이 감지할 수 있 는 범위를 넘어서 완벽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자신과 투쟁해야 할 운명 앞에서도 산티아고 노 어부는 자연에 대한 강한 의 지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물고기야, 난 너를 사랑하고 굉장히 존경한단 다. 하지만 난 오늘 안으로 널 죽이게 될 거야." (82)라고 말하며 고기에 대한 애정과 투쟁을 함께 피력한다.커다란 고기는 노인의 경험과 인내에 의하여 3일 동안의 대결 끝에 노인 의 손에 잡힌다. 하지만 망망한 바다를 지나 집으로 귀항했을 때 노인이 갖고 있었던 것은 18피트 크기의 커다란 고기 뼈뿐 이었다. 팽팽한 삶의 대결만이 있었음을 보여줄 뿐, 포획물로 인한 어떠한 풍요로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빈 손으로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바다와의 싸움이었다. 결국 잡고 싶었던 커다란 고기는 인간의 목표를 아랑곳하지 않는 자연계의 필요에 의하여 인간의 손에 닿기도 전에 또 다른 고기의 먹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토록 현실은 자 연계의 법칙에 의하여 인간의 목표와 긍지가 항상 통하지는 않는 엄정한 물 리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하여 베이커는, 자연은 영 원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다고 헤밍웨이의 자연관이라고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도덕적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신에 대한 의식이 그의 작품 속에 내재해 있다. 인생에 대한 비극적인 견해는 자연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의 평행적 대비에서 나오는 것이다.4)
다시 말하면 소설 속에 그려진 주인공 산티아고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상 대를 만나서 죽을 때까지 상대와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힘든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상대고기를 죽이는 데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힘겨움이 따라왔다. 하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물질적인 필요성뿐만이 아니라 어부로서 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보다 가까이, 바짝 끌어와야 해. 섣불리 머리를 찔러서는 안 되지. 심장을 노리고 찔러야 해.’...... 그래 내가 저 놈을 움직였어. 이번에는 정말 끝장 을 보고 말테다. 오 손아, 끌어다오, 다리야, 굳게 버텨다오, 이것이 마지 막이다. 머리야, 좀더 견뎌다오,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해다오.‘ (79)
아무리 괴롭고 남은 힘이 없더라도, 그에게는 평생 지녀온 어부로서의 긍지 가 있었다. 그것이 그를 그처럼 강한 고기와 맞서게 한 셈이다. 날카로운 주둥이는 거의 뱃전에 닿을 듯 하였다(80). 하지만 고기와 맞서는 불패의 정신으 로 뭉쳐진 산티아고의 태도는 엄숙하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마치 배위 에 우뚝 솟아오른 돛처럼 자연계에서 영장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고 보이려고 하는 자존심과도 같다.다시 말하면,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는 자신이 어부로 태어났고 어부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긍지는 유명한 야구선수 디마지오 의 야구에 대한 자부심에 뒤지지 않는다. 불운이 덮치고는 있지만 새로운 희 망을 품고 자신의 자부심을 증명할 수 있는 고기잡이가 될 수 있도록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자부심으로 가득 찬 고기와의 탐색이 곧 자신의 죽음 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산티아고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 로 고기와의 ‘투’을 선택하게 된다. 적어도 제아무리 힘이 센 물고기라고 하 더라도 고기에게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는 동물의 영장으로서의
가치관이 지 배한다. 큰 고기와 노련한 어부와이 대결은 산티아고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 나 고기의 죽음의 흔적인 피의 냄새가 또 다른 상어들의 공격을 불러옴으로 써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은 인간의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은 고기잡이라는 작은 승리에 도취하여 때로는 흥이 넘치고, 때로는 운이 없음을 탓하며 고기잡이 일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자연의 본 모습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 바다와 인간의 싸움은 언제나 바다, 즉 자연의 승리인 셈이다. 결국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 불패의 정신이 산티아 고를 영광스럽게 만들고 있다. 모든 삶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견디어 내기에 인간은 너무나 무력하고 나약하지만 그렇게 죽을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인간 의 운명이기도 하다. 불패정신으로 나약함을 이겨냈을 때 산티아고와 같은 삶 의 고비가 넘어간다. 삶의 경험이며 인생 그 자체이기도한 고비를 넘고자 하 는 인간의 의지 속에 인간중심적 자연관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노인은 미끼를 꺼냈다. 미끼 하나는 40길이 되는 곳에, 둘째 것은 75길 되는 곳에, 그리고 셋째와 넷째는 각각 100길과 125길 되는 물 속에 넣었다. 낚시 바늘의 곧은 부분을 미끼 속으로 밀어 넣은 다음 잘 묶어 꿰매고, 굽은 곳과 낚시 끝은 싱싱한 정어리로 쌌다. 정어리는 모두 두 눈을 꿰뚫어 걸었으므로 바늘끝에서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 면 어떤 큰 고기라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29). 노인 산티아고는 잡고 싶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경험을 다 동원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 도 현대적인 장비나 기구를 이용하는 법은 없다. 전적으로 자신의 육체로 경 험한 직감으로 낚시 줄을 드리우고 고기의 동태를 살피고 조류의 흐름을 파 악하고 구름의 상태를 읽어내고 판단한다. 해안이 보이지 않는 먼 바다로 나 왔지만 바다에서의 불규칙한 상황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찾아 볼 수 없다. 자 칫 심술을 부릴 수있는 원시적인 자연을 대하는 산티아고의 대응하는 방법 역시 매우 원시적임을 찾아 볼 수 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지 않 음으로써 문명으로부터 탈출하여 가장 원시적인 곳, 즉 아프리카의 오지, 아 프리카의 원주민 들을 상상하게 한다.
자연이나 자연적인 것을 인간의 삶의 가치로 보는 입장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꾸준히 있어왔다.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운동과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 이 두드러진 1960년대 이후에 자연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영국의 낭만주 의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면서 초래된 부정적인 결과들, 즉 도시화, 도시 노동자의 빈곤화, 인간성 말살, 기계화를 목격하면서 인위적 인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적이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에 관심을 돌렸다. 원시주의 자연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정령론(animism), 자연에 대한 외 경심(natual piety), 그리고 그것들이 표현되는 제례의식(ritual)들 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과 바다』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바다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 물고기와의 대결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소설의 무대인 바다는 소설 속에서 차지하는 물리적인 공간의 범위나 그 비중만큼이나 원시주의 색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다는 때로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원시적 감성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바다는 누구에 게나 특별한 원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시림만큼이나 바다라는 공간은 인간의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공간일 수 있다. 또한 육지의 모 든 강물이 흘러가서 한 곳에 모이는 공간인 바다는 육지의 모든 강물을 수용 하는 넉넉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다는 인간의 모든 것을 용서하 는 넉넉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곧, 산티아고에게 있어서 바다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 어머님과도 같은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람들이 바다를 사랑할 때에는 스페인어로 여성 명사인 라 마르 (la mar) 라고 부른다. 노인도 바다를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라 마르라는 말 로생각했다. 그러나 상어 간으로 돈을 벌어서 모터보트를 사들인 젊은 어부들은 바다를 남성으로 취급하여 엘 마르(le mar)라고 불렀다, 그들에 게 있어서 바다는 마치 경쟁의 상대, 심지어는 적으로까지 생각되는 모양 이었다. 그렇지만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어머니나 누이처럼 여성으로 생 각했다. 바다는 다투어 경쟁할 상대가 아니라 큰 은혜를 베풀어주는 다정 한 벗이다. 아무리 못된 짓을 하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인간의 다정한 벗이다. (28)
원시성은 또한 잔인성과도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 철저한 삶의 균형이 이루어 져 있는 바다는 생명의 기원을 찾는 이에게는 원형 동물의 발생지로서 의미를 가 진다. 바다는 자연이 생겨난 이래 가장 변화하지 않고 그 원형을 보전하고 있는곳으로 가장 원시적인 면을 간직한 세계이다. 그러나 어부로서 산티아고가 바라 본 바다는 인간사회 만큼이나 바다 생물에게는 잔인하고 무서운 곳이다.
바다 새를 보면 노인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도 까만 제비갈매 기처럼 늘 먹을 것을 찾아 헤매면서도 변변히 잡아낼 줄도 모르는 조그마 하고 연약한 새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둑 새들이나 억센 새들 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새들이 사는 것이 우리보다 휠 씬 더 고달플 거야. 때로는 무자비해질 수도 있는 바다가 어쩌자고제비갈매기처럼 예 쁘고 가엾은 것을 만들었을까? 바다는 아름답고 다정하기는 하다. 하지만 한 번 성이 나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가. 저처럼 가냘프고 슬픈 소리로 울며 물에 깃을 적시고 먹이를 찾는 새들은 이 바다에 살기에는 적당치가 않아.’ (28)
『노인과 바다』는 바다라는 자연을 정점으로 하여 엮어 가는 이야기이다. 바 다에서의 며칠 동안의 경험은 노인이 바다, 그리고 큰 고기 마린과 하나가 되 는 순간들이다. 그 순간에 노인은 바다에서 홀로 있으면서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즉 바다는 노인에게는 생활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또한 바다는 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장소이며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이 중 요시되며 진정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문명으로 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 가장 멀리 탈출한 원시적인 시간을 제공해 주는 원시적인 상태인 셈이다. 이런 시점에서 바다란 인간의 성찰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실존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인 간이 성숙해질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바다는 어부인 산티아고에게 있어서 제 2의 부모와 같은 모태로서의 환경을 제공해주는 곳인 셈이다. 복잡한 인간관 계로부터 가장 소원한 곳에 있 때 그 ‘관계’의 순수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 는 힘을 바다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다를 한 번 둘러보았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는 자기의 조각배 외 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외롭지 않다. 햇빛이 깊은 물 속으로 비쳐들어 아름답게 출렁거리는 것도 볼 수 있었고, 앞으로 팽팽하 게 뻗어나간 튼튼한 밧줄이며 잔잔한 바다의 자질하고 고운 율동도 불 수 있었다. 무역풍 따라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한 떼의 물오리가 푸른 하 늘에 뚜렷하게 드러났다가 다시 가물가물하게 사라져버리곤 했다. 하늘에 는 목화 꽃 같은 뭉게구름이 탐스럽게 피어오르고, 휠 씬 위쪽에는 깃털 같은 구름이 엷게 깔려 있었다.
육체적 고통, 혹은 육체적 불편함 또한 원시적인 한 요소이다. 일상의 불편 함, 짜증스러움, 육체적 고통 등을 상큼하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변신시킬 수 있는 기술의 포장술을 현대인이 소유하고 있다면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고 고 통을 고통으로 맞서 온 몸으로 그것들을 느끼며 배겨내려는 인고의 태도는 자연 앞에 그대로 방치된 원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낚시 줄에 베어서 흘리는 피조차도 자연의 치료에 의존하고 육신의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력은 진정한 고통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육체적 통증을 거부 하지 않고 그 아픔의 끝을 거부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인고의 장면에서 독 자들은 문명을 멀리 하고 겪어야할 고통을 당당하게 감수하는 원시주의자들 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적의 저항이 세면 셀수록 거대한 힘에 자기 자신 을 스스로 던져 버림으로써 얻는 자유와 고통이 더 달콤하다는 낭만적 인간 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소금물에다 손을 담갔다. 짜디짠 바닷물은 상처를 잘 소독해준다. 어 부들에게는 그 바닷물이 뭍의 어떤 약보다 좋은 약인 것이다. ...... “괜찮아, 인간에게는 그러한 고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라며 상처를 들여 다보며 혼자 말한다.
경련과 통증이 있을 때에도 산티아고는 어떠한 육체적인 고통도 견디어 낼 각오를 한다. 산티아고는 통증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통이란 인간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고통을 참아낸다. 이러한 의지력은 자 연의 이치나 신의 섭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육체의 고통을 통해 불굴의 용기를 가지는 동시에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 다. 극한 상황 속에서 산티아고는 디마지오의 발뒤꿈치를 떠올리는데 이에 대 하여 버한스(Clinton S. Burhans)는 디마지오가 고통 받는 산티아고에게 어려 움을 극복케 해 주는 용기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산티아고가 힘겨운 육체, 몸에 난 상처, 왼손에 생긴 쥐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끊임없이 용기를 주는 원천의 하나는 디마지오이다. 그 또한 고통에 대한 장애를 극복해야하는 늙은 챔피언이다.5)
산티아고의 외적인 모습은 태양과의 세월을 말해준다. 훌쭉하고 목 뒤에 움 푹 패인 주름살에서 현대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뚱뚱하고 팽팽하고 하얀 살결 을 가지고 있는 그들과 구별되는 원시적 자아로서 자연인 본연의 모습이다. 그늘 막 하나 없이 태양에 의해 검게 탄 피부와 치료하지 않은 오래된 상처 와 우직한 손, 이 모든 것이 고결한 야만인을 닮아 있다. 열대 바다의 강렬함 이 그의 얼굴에 반영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그의 정열적인 젊은 날의 추억들 이 모두 갈색으로 채색된 듯한 강인함을 준다.
노인은 야위었고 꺼칠했으며, 목덜미에는 주름이 깊게 잡혀있었다. 그의 두 볼에 열대바다의 태양반사광선으로 인해 생긴 양성 피부암의 반점들이있었다. 그 반점들은 그의 양쪽 빰 저 아래까지 내리덮고 있었으며, 그의 두 손에는 낚싯줄에 걸린 묵직한 물고기들을 다루느라고 생긴 깊은 상처 가 있었다. 그러나 상처들은 어는 것도 근래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상처 들은 물고기가 살지 않는 사막의 침식만큼이나 해묵은 것이었다. (34)
문명 이전의 자연에 노출된 광대한 바다를 두 눈에 품고 있는 산티아고는 문명을 동경하기보다 자신의 육체로 자연과 부딪히며 생활하는 원시적 자아 가 되고자 한다. 그런 환경은 산티아고의 몸과 마음을 원시적인 힘으로 출렁 이게 한다. 어느덧 바다를 닮은 그의 정신이 늘 활력 있고 모든 것을 수용하 고자 세상의 모든 것을 품어내는 패배하지 않는 바다를 닮아 있었다. 자연에 서 오는 활력, 그것은 노인 산티아고가 바다를 오가며 지니고 있었던 내적 자 아였던 것이다.
노인 산티아고의 눈 색깔은 바다를 닮았다.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은- 그이 두 눈을 제외하곤- 그 어느 것이나 낡아 있었다. 다만 그이 두 눈은 바다와 같은 빛이었고, 밝고, 패배를 모르는 눈빛이었다. (34)
돛단배는 현대적인 시설이 전혀 없는 배다. 배의 방향도 하늘의 별이나 무 역풍을 보고 노인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한다. 돌고래의 출현도 바다 위의 날 치 떼를 보고 예측한다.육지의 오두막집만큼이나 바다 위의 배도 원시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하늘을 보니 동쪽으로부터 구름이 덮이면서 별들이 한 둘 사려졌다. 그는 마치 커다란 구름이 골짜기 안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제 바람도 완전히 멎었다. “사나흘 뒤에는 날씨가 나빠지겠는걸. 그러나 오늘밤이나 내일은 괜찮을 거야.”....... 그는 물 속에 다 손을 담갔다. 짜디 짠 바닷물은 상처를 잘 소독해 준다. 어부들에게는 그 바닷물이 뭍의 어 떤 약보다도 좋은 약인 것이다.......“저렇게 날치가 많은 걸 보니 이 근처어디에 돌고래가 있는 것이 분명해.” (101)
산티아고는 음식도 원시적으로 해결한다. 9월과 10월에 정말 큰 고기를 잡 을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3월 한 달 동안은 정력제로 거북의 흰 알을 먹 었다. 그는 또 어부들이 여러 가지 도구를 맡겨두는 오두막집에서 드럼통에 담긴 상어간유를 날마다 한 잔씩 마셨다. 다른 어부들은 그 맛을 별로 좋아하 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주 맛이 나쁜 것은 아니였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 는 괴로움보다는 나았고, 또 감기나 독감에는 더 없이 좋은 약이 될 뿐만 아 니라 눈에도 아주 좋았다(75).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다랑어를 먹어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건강한 원시인을 닮았다. 원시적인 것은 건강한 생명에 대한 예찬, 즉 고결한 야만인이 추구하는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때 묻지 않은 건 강한 자신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이다.
그러나 저러나 소금이 있으면 좋겠군, 남은 고기를 해가 말릴는지 썩힐는 지 모르니까, 지금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일찌감치 먹어두는 것이 좋겠다. 다랑어가 상하기 전에 먹어야 돼. 힘을 잃지 않도록 말이야. 꼭 기억하라 구, 아무리 먹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도 아침에 생 다랑어를 꼭 먹어야 해. 기억해 둬야 해.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고기잡이에 지친 노 어부가 참 다랑어를 먹고 지친 자신의 원기를 회복하 려 하고 있다. 날치가 썩기 전에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먹고 원기를 회복하고 자 하는 산티아고의 행위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힘을 내적 에너지의 변화과정 을 거쳐 원시적인 고결한 야만인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일에 열중하기 위해 참치를 먹고 힘을 내려는 주인공의 태도는 반문명적이고 원시 적이며, 날고기를 씹고 껍데기를 뱉는 모습은 건강하고 튼튼한 원시인의 모습 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반찬도 없이 물을 반찬으로 삼아 전기불도 없는 밤에 날치를 날것으로 먹어 지친 자신의 에너지를 보충하려는 노 어부의 마음 속에는 반문명적이고 원시주의적 사고방식이 가득 차 있다. 빛은 문명이요, 어둠은 원시적이다. 날로 먹는 것은 자연적, 반문명적이다. 이러한 원시적인 건강한 생명 추구는 새우를 먹는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문명의 상징인 칼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엄지손가락과 네 손가락을 이용하여 새우를 통 째로 씹는 모습 역시 원시인을 닮고 있다.
누런 모자반류 해초 덩어리가 배 옆을 지나갈 때 그는 갈퀴로 그것을 건 져 올렸다. 그것을 배 안에다 툭툭 털어 보니, 그 속에서 새우가 몇 마리 나 떨어졌다. 노인은 벼룩처럼 뛰어오르는 새우들의 머리를 떼어 팽개친 다음, 엄지손가락과 네 손가락으로 껍질도 벗기지 않고 꼬리까지 씹어 삼 켰다. 비록 조그만 것들이지만 그는 새우가 영양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맛도 좋았다. (85)
산티아고의 삶에 구현된 원시주의적인 행동들은 원시 사회에 대한 동경과 동시에 문명 비판적 입장에서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자극한다. 이는 심 리적인 고통과 도덕적 갈등에서 번민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산티아고는 육체적인 고통을 인내하고 배고픔과 갈증과 싸워 낸다.
아니야. 내 머리는 맑기만 해. 우리의 형제인 저 별들처럼 또랑또랑하기만 해. 그러나 모든 건 다 잠을 자는 법이야. 별은 물론 달이나 해도 자고, 가끔 파도가 높지 않은 날은 바다까지 자거든. 그렇지, 자는 일을 잊어서 는 안 돼. 억지로라도 눈을 붙이도록 해야지. (69)
원시적인 요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체적인 격렬함이다. 많은 경험과 기술을 지니고 있지만 노인은 마린과 싸우는 데 있어 신중함을 잃지 않는다.자신의 경험과 기술에 오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타 의 현대식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힘과 칼, 그리고 노를 이용하여 자신을 위협 하는 상어들과 대처한다. 이런 모습에는 노련하고 한 치의 실수도 인정하지 않는 사냥꾼의 면모가 보인다.
노인은 칼이 달린 노로 그 급소를 힘껏 찔렀다. 그리고 다시 노를 뽑아들 고 이번에는 고양이 눈처럼 누런 눈을 내리 찔렀다. 상어는 고기를 놓고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죽어가면서도 그 놈은 뜯은 고기 점을 삼키고 있었 다. 배 밑에서는 다른 한 놈이 아직도 고기를 뜯어먹고 있어서 배는 여전 히 흔들리고 있었다. ......노인은 칼을 상어의 등뼈와 머리 사이의 급소에 다 힘껏 내리박았다. 칼날은 쉽사리 들어갔다. 그러자 뼈가 쪼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노를 다시 쭉 뽑아서 상어의 주둥이에다 칼을 넣었다. 칼을 이리저리 휘젓자 마침내 상어는 물었던 것을 뱉아 놓 았다. (125)
헤밍웨이 작품에 등장하는 낚시, 사냥, 바다, 아프리카, 산, 사자 등은 원시 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소재이다. 특히 노인의 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 는 사자는 상징적이며 원시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사자는 문명과 거리가 먼, 대자연을 무대로 건강하고 야수성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는 생명이기 때문 이다. 따라서 노인은 외양적인 원시주의는 물론 정신세계인 사자 꿈을 통하여 내외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자연성을 회복하고 있다. 사자에 대한 동경과 그리 움이 평소 노 어부의 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바다에서의 잠에서 등장하고 이 야기 끝 장면의 잠에서도 사자 꿈을 꾸고 있을 것이란 암시가 있다. 사자는 산티아고의 청춘과 행복했던 시절의 강함에 대한 동경을 암시하며 삶의 활력 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6) 고기잡이 나가기 전에 나온 사자 이야기는 문명사회를 뒤로하고 순수한 아프리카 밀림의 세계인 원시사회를 동경함을 뜻 한다. 배는 떠남을 상징하며, 자신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자신의 동경을 찾아 바다라는 자연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출 발을 위한 종착역이 시원임을 암시하며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는 시원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제 폭풍우라든가, 여자라든가, 또는 큰 사건, 큰 물고기, 싸움, 힘 겨루기 등에 관한 꿈은 꾸지 않았고, 그의 아내에 관한 꿈도 꾸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여기저기의 장소들과 해변의 사자들만을 꿈꾸었다. 사자들은 으스름 빛 속에서 고양이들처럼 노닐었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듯 사자들 을 사랑했다. (25)
망망대해에서 대어와 대적하고 있을 때 언급되는 사자는 나약해진 자신에 게 힘을 주고 싶어 하는 염원의 상징이다. 사자 꿈을 꿀 수 있기를 간절히 원 하고 있는 노인은 자신에게 힘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그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저 놈이 잠을 잔다면 나도 좀 잘 수 있겠는데. 그리고 사자 꿈도 꿀 수 있고, 그는 생각했다. 어째서 다른 것이 다 사라진 다음 사자만이 거의 홀 로 남아 있을까?
위에서 산티아고가 “어째서 다른 것이 다 사라진 다음 사자만이 거의 홀로 남아 있을까?” 라고 의문을 던지는데 이것은 자연이 힘과 순수함의 제공자이 고 산티아고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사자들은 그가 난관과 실의에 빠지려 할 때마다 그에게 희망과 힘,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일깨워 주는 원천으로 작용 하고 있다. 이 때의 사자는 지친 주인공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초자연적인 힘과 활력의 공급자인 동시에 아프리카라고 하는 반문명적인 사회에 있는 힘과 순결의 제공자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에 있는 해안과 사자에 대한 그리움이 현실에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극복할 수 있는 활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의 산 아래에 길게 놓여있는 해 안선은 마치 용기 있는 인간의 발길을 초대하기나 하는 듯 멀리서 또 다른 원초적 자연의 공기를 제공한다.
도로 저 뒤쪽, 노인의 오두막집에서는 노인이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엎드린 채 자고 있었고, 소년은 그의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사자의 꿈은 지금까지의 사자와는 다른 느낌을 준 다. 다시 말하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자의 꿈은 산티아고가 고기를 잡는 핵심적 행위와는 관련이 없다. 고기잡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이 후 에도 사자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산티아고의 꿈에 등장하는 사자는 자부심 강하고 힘이 강력한 맹수의 왕을 의미하는 한 마리의 사자가 아닌 것은 의 미심장하다. 이는 더 이상 파괴와 폭력과 같은 개인적인 행위들 대신 큰 물고 기를 사냥하고, 사냥한 고기를 상어들에게 뜯기고 난 뒤, 노인에게 찾아온 고독 , 사랑 , 아름다움 그리고 평화를 의미한다. 힘이 들 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자의 이미지에 대하여 웰즈(Arvin R. Wells)는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노인의 꿈속의 정글에서 나온 어떤 도전의 위협도 없이 장난치는 어린 사 자들은 거대한 마린을 잡으려는 노인과 사자들이 갖고 있는 영웅적 기질 사이에의 조화를 암시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노인과 사자들이 내 포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인 자존심 있고 사나운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진 노인이 바다에 나가 3일 동안 고기와 싸운 인내의 보상은, 그가 좋아하는 사자들과 함께 꿈속에서 즐기게 되는 방해받지 않는 행복이다. 그가 바다에서 의 시련 뒤에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제 더욱 성숙된 진정한 노인이 되었음을 의미하고, 사실상 노인은 고령의 산티아고로 남을 것이다. 삶은 하루아침에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산티아고 노인처럼 긴 시간을 통해 조금씩, 그리고 언 제나 새로운 어려움의 크기로 다가와 투쟁의 상처가 바닷물에 치유되듯 상처 의 흔적을 남기며 또한 소멸되어 간다.침대 이야기는 출발하기 전에 오두막집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또 한번 등장한다. 화려하지 않은 단순한 침대이지만 주인공의 침대에 대한 애정과느낌은 남다르다. 이 작품에서 침대는 정신적 재충전과 재탄생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침대에서 편안한 잠을 청하 며 사자 꿈을 기대한다. 잠을 자려 하고 꿈을 꾸려 하는 노인의 모습에는 시 원 즉,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바다색의 눈을 가진 인물이다. 굵고 억센 손에는 옛날의 고기잡이로 인해 생겨난 상처들이 군데 군데 박혀 있다. 적극적인 삶을 살아 온 흔적으로서 태양빛에 검게 그을린 피부의 깊게 패인 주름은 아내도 자식도 곁에 없는 황량한 황무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에게 남아 있는 것은 바닷바람에 휘달리고 더 멀리 나아가고픈 돛대를 세우 는 것처럼 주어진 자신의 삶을 피해가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뭇 어부들 처럼 잘 잡히는 고기잡이를 위해 지략을 쓰는 것이 아니라, 9월의 진정한 어 부가 되기 위해 출어를 하는 것처럼 그는 삶에 대해 원시적 자세를 취한다는것이다. 비행기 경비정이 바다를 순회할 때 그는 조그마한 배에 밀가루 부대 를 기운 것으로 마치 싸움에 진 군대의 깃발처럼 서글픈 느낌을 주는(11) 돛 을 달고 출어를 한다. 그는 좋은 일은 입으로 지껄이면 안 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40) 어부들의 금기사항을 굳게 지킬 정 도로 진지한 어부이기도 하다. 생다랑어와 새우를 날 것으로 먹는가 하면, 웬 만한 상처는 소금물에 씻고 배안의 도구도 낚시와 낚시 줄, 노와 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주는 불편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치 문명이전의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산티아고의 행동에서 바다 생활 그 자체 로의 원시성을 엿 볼 수 있다. 인간적인 행복이나 인간적인 계획을 도모하지 않고 인간 본연의 원시성을 산티아고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자연의 아들 로서 가장 자연답게 원시적인 생활을 하지만 모든 사람의 관심이 노인 산티 아고에게로 돌아간다. 이것이 가난하고 외롭고 초라한 산티아고가 갖고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출어 전 노인은 소년에게 “네가 내 자식이라면 너를 데리고 나가서 한 번 모험을 해 보겠다만, 넌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고 또 지금은 운수가 트 인 배를 타고 있으니.......”(14)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산티아고는 『노인과 바다』에서 아프리카를 동경하고 사자 꿈을 꾸는 어부로 등장하여 우리 현대 인들에게 잊어버린 꿈 혹은 망각된 본능, 즉 모험으로의 시도를 소년 마놀린 을 통하여 자극하고 있다. 요컨대, 첨단의 장비를 갖춘 기계화, 정보화가 현대 인을 특징짓는 가치기준이라면, 산티아고 노인에게는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삶의 방식이 최고의 가치이자 기술인 셈이다.
3. 생태학적 자연관
생태적 자연관이란 인간중심적 자연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출발한다. 이 는ꡐ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다ꡑ라는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새는 날 개가 있지만 그러나 날개가 있는 새는 좀처럼 추락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자 하는 의식을 반영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의 잣대로 세상 만물을 측정하고 판단해 온 것에 대한 오만과 오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우주의 집에살고 있는 세상만물을 인간처럼 똑같이 대접할 때 비로소 인간 중심적 자연관에 서 오는 부정적 모순을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우주공동체를 유지 할 수 있다는 의 식이 생태주의 자연관의 기저를 이룬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생명은 자기 지시 적인 존재이며 만물은 공생하며 더불어 사는 상호적 존재이다. 그것을 심층생태 학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전일성으로 표현한다. 전일성이란 개체현상이 지진 특수성에 궁극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통일성을 의미한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심층 생태학적이다. 즉 노인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모든 물상들은 우주의 한 울 타리 속에 존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연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의 물상을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물고기와의 관계, 소년과 이웃사람들과의 관계에 스며있는 생각들 또한 긴 시간을 달려 목표점에 도달한 마라톤 주자의 심정을 연상케 한다. 인생이란 긴 여정을 통하여 노인이 갖게 된 생각은 인간의 생물학적 주기로 볼 때 그 어느 시기보다 탈인간중심적이고 생태 중심적이며 자연과 인간의 전일성,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심층생태학적 자연관 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산티아고의 생각에 의하면 우리의 몸과 팔의 관계처럼 인간과 지구의 생명체가 단일한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 어부가 거북이의 심장, 발, 그리고 손을 자신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형 제애, 자연과의 전일성, 그리고 동일체를 강조한 생태학적 자연관의 시각을 반영 한다. 유기적 관계로 형성된 세계가 생명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 리 또한 자연과 분리할 수 없게 얽혀 있으면서 중요한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 는 것이다. 거북이와 자신을분리할 수 없는 관계, 피를 공유하는 분신으로 자연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요, 자연의 일부분이 주인공 자신의 신체의 일부 분으로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들여다보자면 노인 산티아고의 거북이에 대 한 사랑과 연민을 다음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아무리 길이가 조각배만 하고 무게가 1톤이나 되는 큰 거북이라 할 지라도 거북이란 놈들은 모두 불쌍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거북을 칼 질을 하여 살을 갈라놓은 후에도 몇 시간이나 심장이 펄떡펄떡 뛰기 때문 에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거북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저런 심장 을 가졌고, 손발도 비슷한데......’
전일성을 강조하는 심층생태학에서는 우리 육신의 몸과 팔의 관계처럼 인간과 지구의 생명체가 단일한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유기적으로 잘 움 직여져야 할 어떤 부품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종합적인 시스템에 대한 반역이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손과 두 발은 머리의 명령에 의하여 잘 제어되어야만 하는 연결고리인 것이다. 그런데 긴 시간의 힘든 작업으로 굳어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산티아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쥐가 나는 것은 딱 질색이야. 그건 자기 몸을 자기가 배반하는 꼴이거든. 하기야 남이 있는데서 꼴사납게 설사하거나 꾸역꾸역 토하는 것보단 낫 지. 그렇지만 이놈의 쥐가 나는 것은 나 혼자 있을 때도 부끄러운 노릇이 란 말이야.’ ....... ‘두 손 다 튼튼하게 태어났으면 좀 좋을 까. 왼손을 잘단련시키지 못한 건 내 잘못인지도 몰라.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 다음 번에 또 쥐가 나면 낚시줄에 끊어지건 말 건 내버려두어 야지.’자신의 손가락을 베면 아픈 것처럼 자연의 생물도 아플 것이란 인식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곧 그들과 같은 거주지에 삶을 영위하는 동반 자로서 우리의 삶도 가꿔야 하지만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그들의 생명도 존 중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바다에서 놀고 장난치고 사랑하는 돌고래를 아 름다운 눈으로 보고 있다. 평생 가장 가슴 아픈 경험으로 돌고래의 암컷을 죽여야 했을 때라고 회고하면서 자신의 슬픔이 최고조로 승화된다. 동시에 자연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담담히 수컷고래를 느끼고 있다.
언젠가 노인은 한 쌍의 마린 중에서 한 마리만 낚아 올린 일이 있었다. 수놈은 언제나 먹이를 암놈으로 하여금 먼저 먹게 하는데, 그 때에도 먼 저 먹이를 챈 것은 암놈이었다. 낚시를 벗어나려고 암놈이 끈질기게 몸부 림을 치는 동안 수놈은 늘어진 낚싯줄을 넘나들면서 암놈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너무 바싹 따라다니다가 그 큰 낫처럼 생긴 날카로운 꼬리로 낚 싯줄을 끊어놓지 않을까 노인은 걱정이 되었다. 마침내 암놈이 지쳐서 나 가떨어지자, 그는 갈퀴로 그 놈을 찍어 올려 창날같이 뽀족한 주둥이를 붙들고서 몽둥이로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노인이 소년과 함께 그놈을 뱃 전으로 끌어들일 때까지도 수놈은 근처를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낚 싯줄을 거둬들이며 작살을 준비하는데 수놈이 갑자기 뱃전 가까이 공중으 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 순간 가슴지느러미가 날개처럼 활짝 펼쳐지며 아 름다운 자주 빛 물무늬가 드러났다. 그놈은 곧 물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 다. ‘그래. 이것이 내가 고기잡이를 하면서 본 제일 가슴 아픈 광경이었어. 아이 녀석도 슬퍼했지. 우리는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고는 곧장 고기에 칼 질을 해 qj렸어.’(75)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화는 타인을 존중하는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기술이 된다. 그러나 영리를 목적으로 한 고기잡이가 될 때 모든 어부들은 침 묵을 해야 했다. 그들의 말소리에 그들의 목적인 고기들이 도망치지 않도록 최대한 인간의 언어를 감춰야 했다. 바다 사람들은 불필요한 말이 행운을 날 려버린다고 생각한다. 노인과 소년이 함께 낚시를 할 때는 항상 꼭 필요할 때 에만 말을 했다. 밤이거나 나쁜 날씨로 바람이 불 때 얘기를 했다. 바다에서 는 필요하지 않은 말을 삼가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노인은 항 상 그 사실을 고려했고 존중했다(67). 그러나 고독한 인간으로 존재할 때 사 람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는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한 수단이 기도 하지만
주변의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훌륭한 통로가 되는 셈이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이 붙었다. 아마 소년이 그의 배를 떠나고부터였다. 그러나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난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겠어. (37)
산티아고에게 바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친근하며 자연스럽고 정감 있는 곳으로 머리 위에는 해와 달과 별이 있고 배 밑에는 바다가 움직이고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다정하게 헤엄치고 있으며 배 주위는 새가 날고 바람이 스 쳐간다. “헤밍웨이의 범애정신의 바탕에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일차적으로 자 리하고 있으며 또한 범애정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물상 모두에게 범신령을 인정하는 범신론적 자연관도 내재해 있으나 신성적 차원 이라기보다는 우주 의 질서라는 다소 막연한 개념으로 나타나 있다.”8) 자연의 모든 물상들이 그 의 친구이며 형제이기에, 자연인인 노인은 물고기와 새와 별들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 바다 위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날치이다. 그는 새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는데 특히 항상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찾고 있으나 거의 먹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작은 갈매기에 대해 애틋한 동정심을 느낀다. 그리고 돌고래 도 날치처럼 그의 친구이며 형제이다. 고기를 자신의 두 손과 함께 형제로 생각함으로써 산티아고의 자연과 하나가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9월의 밤. 진정한 어부가 되는 계절이라는 9월에 해는 빨리 져 어둠이 내 리고 탁 트인 광활한 공간이 어둠으로 변하자 낡은 뱃머리에 어찌어찌 몸 을 뉘었다. 첫 번째 별이 나타났다. 오리온별자리란 것도 몰랐지만 곧 알 게 되었다, 별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들 모두가 멀리 있는 친구들이 된다. (105)
인간이 왜소하게 느껴지며 동시에 자연은 너무도 광대한 순간이다. 자아를 돌아보고 자신의 실존에 대한 반성적 기간이 주어진다. 곧 자연과 동일시되고 그들과의 교감이 이루어져 서로 친구들이란 관계적 자아로 남는다. 자연 앞 에서는 모두가 똑 같은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사투를 벌였 던 물고기와 동일시한 존재로서 물고기의 존재가되어 물고기 위상을 자신의 위치로 끌어 올린다.
네가 날 죽이는구나, 고기야. 넌 그럴 권리가 있지. 너처럼 아름답고 당당 하고 침착한 놈을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위대한 고기야, 내 형제야, 자아, 와서 날 죽여라. 누가 누구를 죽이건 마찬가지다. ...... 훌륭한 어부 답게 괴로움을 견뎌낼 줄 알아야 해. 그래. 저 고기처럼 말이야.’...... 삼 일 간의사투 끝에 잡아 올린 청새치가 결국 상어 떼의 공격으로 살점이 뜯 겨 나가는 것을 보고 노인은 마치 자신의 사지가 뜯겨 나가는 것 같은 아 픔을 느낀다. 물고기의 선택은 모든 함정과 덫, 그리고 계략을 떠나 멀리 깊고 어두운 물 속에 머물러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부인 산티아고의 선택은 사람들이 미치 지 못하는 곳까지 그것을 잡으러 나가는 일이었다. 이는 연륜이 있는 어부로 서 일에 대한 가치이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험을 넘어서자고 하는 범상치 않은 내면의 의식이다. 즉 고기잡이로서의 삶이 아니라 바다를 아는 어부로서 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없는 도전이다. 생명을 건 싸움으로 죽음을 당 한 고기에게 고기의 위엄을 지켜주지 못한 상대자로서의 미안한 감정으로 자 신이 지금껏 고기에 대해서 한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
“반 동강이 된 물고기,” 그는 말했다. “물고기였던 것아. 내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이 후회되는구나. 내가 우리들을 다 망쳐 놓았어. 하지만 너하고 나는 여러 마리의 상어를 죽였지. 또 여러 마리를 병신으로 만들고 말이 야. 넌 전에 상어를 몇 마리나 죽였니, 물고기 늙은이야? 머리에 달린 뽀 죽한 주둥이는 공연히 달고 있진 않았을 거야.”
여기에서는 변화된 노인 산티아고의 자연관을 알 수 있다. 즉 물고기의 곧은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형제’, 혹은 ‘친구’등으로 동일시했기 때문에 가능 한 생각이다. 대립과 투쟁보다는 연민과 사랑으로 귀결되어 자연과 인간을 동 일시하는 심층생태학적 자연관이 주인공의 의식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티아고는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생물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연의 법칙 아래, 인간은 모든 만물과 같은 차원에 위치하며 다만 누가 죽느 냐, 즉 누가 먹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적과의 대전에서 어떻게 적과 싸우느 냐에 관심이 있었다. 이 점을 웰드마이어(Joseph WeldmeIr)는 다음과 같이 논 하고 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죽이느 냐이다...... 패배가 분명하다할지라도 “패배하지 않는 사람들”에서와 같이 문제는 패배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투쟁 그 자체라는 이야기를 통해 점차 분명해진다.9)
어느 누구도 싸움에서 질 것이란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있는 어부도 잡히는 물고기도 죽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생명이 있 는 것들의 속성이다. 생명은 그 어느 순간에서도 살아나려고 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인 것 같다. 그러므로 모두의 생명은 존중 되어야 한다. 그 어떤 상황의 어떤 존재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가꾸고 보존되 어야 한다.
‘내가 고기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 고기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야.’......‘하지만 내 고기를 물어뜯은 그 놈을 죽였어, 그 놈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큰 상어였지만 말이야. 좋은 일이란 올 못 가는 거야. 제기랄,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군. 더구 나 저런 큰 고기는 애초에 잡히지 않았으면 좋았을걸.’......‘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 놈이 공격하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는 없을 거야. 하지 만 잘하면 막을 수 있을는지도 몰라.’......상어가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 다, 하지만 상어는 제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산티아고 노인은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상어들을 상대하여 싸울 도구도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 이 되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난 노인의 생각은 매우 홀가분하고 낙천적 이다. 결과를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달관된 인생관을 느낄 수 있다.도 바람은 우리네 친구야.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 바다는 우리의 친구도 적도 모두 가지고 있지. 아참, 침대 생각이 나는군. 그렇지. 침대야말로 내 다정한 친구야. 몸이나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지쳐있을 때 일수록 그것은 더 편안하거든. 난 그걸 미처 몰랐지. 그런데 무엇이 나를 이처럼 지치게 만들었을까?‘ 이런 자기
생각에 그는 큰 소리로 대꾸했다. “아무 것도 없어. 너무 멀리 나갔던 게 탈이야.”....... “늙은이, 좀더 유쾌 한 일을 생각하지.” 그는 말했다. “이제 시시각각으로 집이 다가오고 있 어. 게다가 40 파운드나 가벼워져서 그만큼 가볍게 달릴 수 있지.” (104)이러한 긍정적인 관점은 상어의 공격을 다시 받자 숯 돌이나 여러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왔으면 하고 바라는 데서도 보여 진다.
“숯 돌을 가져 왔으면 좋았을 걸.” 많은 물건을 가지고 왔어야 했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안 가지고 왔어, 늙은이야. 지금은 가져 오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지,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 해. (110)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거나 과거의 것에 연연하는 모습이 아니라 현재 자기가 있는 곳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이다. 이러한 여유와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생각은 노인이 오두막집에 돌아온 후의 편안한 모습과 연결되며 패자가 아닌 승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 는 절망하지도 않고 환멸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격렬한 노동 후의 깊은 잠 속 에서 다시 사자 꿈을 꾼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노인은 희망을 잃지 않고 내일의 출어를 위해 준비한다.
"잘 드는 창하나 구해서 고기잡이에 나갈 때 가지고 가야겠다. 창날은 낡 은 포드 자동차 스프링 조각으로 만들 수 있어. 구아나바코아에 가서 갈아 오면 돼. 끝을 뽀족하게 갈아야 하지만 잘 부러지지 않도록 달구어야 해. 내 칼은 부러졌단다." (125)
허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희망적이며 내일을 준비하는 패배하지 않 은 자의 모습이다. 마음의 평정과 용기 있는 인내야말로 헤밍웨이가 최후에 도달한 정신의 귀착지인 것이다. 즉 자연에 순응하는 성숙된 인간의 덕목으로 인간의 태연자약, 인내심, 의지력, 자연법칙에 대한 순응, 원시주의 및 숙명론 의 다섯 가지 항목을 열거하고 있다.10) 특히 비애의 감정을 억압함으로써 자 신의 노력의 결과인 물고기도 또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고기를 따라 가는 것인지 고기가 자신을 따라 오 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 머리와 꼬리만 남은 18피트의 물고기를 끌고 귀항한 다. 포수와 사냥감과 같은 산티아고와 마린과의 고리보다 더 큰 생태계의 고 리가 관계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 관계의 작용은 실패와 패배가 아닌 바다 의 생명을 영속케 하는 생물학적 법칙임을 산티아고는 잘 알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주목 받는 대목은 노인 산티아고와 소년 마놀린의 관계 설정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을 바 라보는 노년의 시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했고, 그 삶을 바라보는 소 년의 눈높이를 잘
제시하고 있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생명은 전일성을 강조 한다. 그것은 잠재성이 다양하게 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식물의 새로운 씨 앗, 새로 태어난 유아, 새로 형성된 공동체, 새로 등장한 사회와 같은 정지되 지 않고 무한히 영속 ‘성장’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노인에게 식사와 낚시 미끼를 주는 장면에서 이 소년은 아내 구실을 대신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외로운 노인에게 소년의 아내 같은 역할은 가정적인 분위기를 주고, 부족한 듯한 생활에 풍요로움을 더한다.
물을 길어 와야겠군, 하고 소년을 생각했다. 그리고 비누하고 좋은 수건 도. 내가 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셔츠와 자켓이 하나 있어 야겠고, 겨울 준비로 신을 것이랑 담요도 몇 장 있어야겠다. (21)
이러한 소년의 역할과 노인에 대한 사랑은 남녀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이루 어지는 지극한 우애정신의 발로이다. 헤밍웨이는 “남성과 여성” 의 성 역할에 서 벗어나 인간 간에 상호보완적 역할을 “노인과 소년”에게 찾고 있다. 이에 대하 영 (Philip Young)은 “마놀린은 지금까지는 여주인공에 의해 행해졌던 기능들을 하고 있었다.”11)라고 말했다. 마놀린의 산티아고에 대한 사랑은 여 성적인 사랑이 엿보이기도 하고, 사제의 관계로 보이기도 하며, 부자간의 모 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웰드마이어는, 노인은 소년에게 낚시 방 법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인생의 문제를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12)
소년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건 산티아고 노인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노인에 애정을 품고 있었다......“그리고 최고의 낚시꾼은 할아버지예요.......훌륭한 낚시꾼도 많고 위대한 낚시꾼도 더러 있겠죠. 하지만 할아버지는 단 한 사람인걸요.” (10)
믿음을 가진 어부로서 산타아고는 소년을 제자처럼 이끌고 있다. 소설 속의 노인은 소년에게 어부로서의 모든 것을 전수하고자 한다. 고기를 잡고자 한다 면 고기의 습성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물고기들의 거처로 삼을 가능성이 큰 장소의 특성, 잘 서식하는 지형, 계절에 따른 이동방향, 좋아하는 먹이, 알을 낳는 시기, 위협을 받았을 때의 행동양식, 눈치 채지 않 게 미끼를놓아두는 법, 조류의 방향과 찌의 깊이는 경험을 통하여 육감으로 익혀야 하는 것들이다.
동물의 감정, 동기, 요구를 직접 느끼는 데서 고기잡이라는 목적을 가로막 는 도덕적인 책임감이 잉태됨을 보여주고 한다. 전형적인 어부는 자신이 겨냥 하는 고기를 자신보다 결코 열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고기는 모든 측면에 서 인간과 유사한 의식적 사고와 감정을 가진 존재로 인간과 정신적으로, 영 적으로 동급이거나 심지어 더 상급의 존재로 여긴다.
“저를 떠나게 한 건 아빠예요, 전 아직 아이니까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거든요”
“아빠는 믿음이 적어요.”
“하지만 우린 믿음을 가졌지, 안 그래?” “그래요.” (11)
어부의 아들들은 어릴 적부터 고기에 대한 지식과 이야기들을 접하며 자란 다. 풍어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어른들의 고기잡이 경험을 듣는다. 자라서 어 른이 되면 바다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마치 고기와 가족이나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가깝게 생각하고 느낀다. 고기잡이 어부와 고기의 이런 우애적 관계는 고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예컨대 고기잡이의 성공은 어부의 지식이나 기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에 대한 겸허한 태도와 행동의 대가로 인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만 고기는 자신의 고기를 선물로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고 자신의 죽음을 허락하는 것이다.
“조류가 이런 상태라면 고기잡이가 될 것 같구나”
“어느 쪽으로 나가실 건가요.”
“멀리 나가겠다.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 맞춰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야, 난 날이 밝기 전에 나갈 작정이다.” (15)
진정한 어부는 어렵고 힘들고 불편한 방식으로 낚시를 함으로써 일종의 자 발적인 고행을 바람직하게 여긴다. ‘손쉬운 목표’를 겨냥하는 것은 수준 낮은 고기잡이라고 여기며, 최대한 고난과 궁핍 속에서 몇 시간, 며칠을 보낸 뒤 어려운 상황에서 멋지게 목표물을 포획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만족을 주 는 동시에 죄의식도 가장 덜 하다. 어부로서의 신분을 의식하고 정정당당한 태도를 강조하는 진정한 어부의 정신은 그물, 덧, 날카로운 도구 같은 잔인 하거나 게으르거나 기만적인 사냥방법을 강력히 회피한다.바다에서 첫 날 밤을 새운 뒤 체력을 잃지 않기 위해 생 다랑어를 먹으며 소년과 소금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둘 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 다. 소년과 소금을 필요로 하며 손의 경련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소년이 함께 있지 않음을 아쉬워한다. 그 후 대어가 갑자기 물 위로 솟아 올 라와 낚시 줄이 팽팽해지자마자 줄이 끊어 질까봐 염려를 하면서 또다시 애 절하게 소년을 부른다.
소년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낚시 줄에 물을 적셔줄 덴대, 그는 생각했다. 그래. 소년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소년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 까.
이러한 절규 뒤에는 노인도 모르게 극한의 용기와 힘이 솟아 나온다. 이토 록 노인에게 있어서 소년은 ‘힘과 희망의 메시아’13)이며 결국 자신을 살아있 게 만드는 것은 낚시라기보다는 소년이라고 생각한다. 큰 물고기와의 사투에서 돌아와 잠에서 깬 노인은 말할 수 있는 상대를 갖게 되는 것이 얼마나 즐 거운 일인가를 인식하여 소년에게 그 심정을 고백한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바다에게만 이야기하는 대신에 누군가와 이야기 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를 비로소 알았다. “네가 보고 싶었다.”
노인이 진정으로 보고 싶었다고 하는 말속에는 그가 얼마나 혼자서 힘든 싸움을 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한 마디의 고백 에는 노인이 소년과 함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그 열망이 담겨있 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더불어 살아야 하고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더 이상 노인을 홀로 바다에 보낼 수 없는 소년은 노인의 배로 돌아오겠다고 한다. 40여일 전 보다 자신의 길을 자신이 결정할 정도로 성숙하였으며, 물질 적인 소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애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행운은 제가 가지고 갈게요.” “네 가족들이 뭐라고 할거야.”
“상관없어요. 전 어제 두 마리 잡았어요. 그래도 아직 배울게 많으니까 이
제부터는 저와 함께 고기 잡으러 나가요.” (125)
『노인과 바다』에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어린 소년과의 나이를 초 월한 우정과 사랑, 어려움에 처한 노인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도움을 주는 주 변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삶은 더불어 사는 것임을 깨닫는다. 러셀 (Russel)과 브리그스(Briggs)는 우애정신을 “한 개인의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 없이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14)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개념으로 표현되는 우애정신은 대인관계의 기초를 이룬다. 이것은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조화 를 이루는 것이고 나아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인식하 고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노인이 마린과의 사투 중에 야구 경기와 사자들을 떠올리는 것은 모든 인간은 혼자일 수 없으며, 여러 사람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생활의 원동력과 활력을 얻 게 되는 유기적인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소년과 노 인의 관계는 일반 사회에서 인간의 조직으로 나타내는 서열과 계급적인 관계 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제시한다. 경쟁과 탈락이 존재하는사회에서의 인간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해주는 정서적 지원자로서 사회구성원간이 돈독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개인의 투쟁으로 보여졌던 바다 에서의 어부의
활동은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숭고한 삶의 한 과정이다. 이러한 관계는 산티아고와 테라스 (Terrace) 관의 주인 마틴 (Martin), 바(bar)의 주인 페드리코(Pedrico) 사이에서 잘 드러난다.
“누가 주더냐?”
“마틴이요, 주인 말이예요”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군.......큰 고기를 잡으면 뱃살을 주어야겠다.” 노 인이 말했다. “이 번뿐이 아니고 여러 번 줬었지?”
“그럴 거예요”
“뱃살보다 좀 더 나은 것을 주어야겠구나, 그는 우리에게 퍽 마음을 써주 는 사람이야.” (40)
마틴, 패드리코, 마놀린 그리고 산티아고의 관계를 통하여 생태학적 인간관계 를 생각해 본다. 생태적 감성으로 인간과 인간이 보다 근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과 지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 라 어떤 부류의 구성원도 전체를 형성하는 소중한 일원으로서 가치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다양성을 강조하고 상호협조적 관계를 통하여 의 미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식이 곧 생태중심의 인생관이다. 산티아 고의 이웃에 대한 태도는 경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자 신의 삶을 반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산티아고가 바다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테 라스관 주인 마틴과 술집 주인 페드리코는 언제 대금을 받을지도 모르면서 식품을 소년을 통해 제공하기도 하고 노인의 배와 어구들을 돌보아준다.
“아저씨. 아주 뜨겁게 해서 밀크와 설탕을 많이 넣어주세요.” “더 가져갈 건 없니?”
“내가 퍽 걱정하더라고 전해다오” “고마워요, 아저씨.”......
“모두들 날 찾았었니?”
“그럼요, 경비정이랑 비행기까지 찾아 나섰는걸요.” (123-124)
산티아고의 생명을 무릅쓴 큰 고기와의 경험은 마을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 리 모두의 경험으로 공유되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한다. 자신의 거주지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은 관광객들은 산티아고의 마을에서 가장 이국적인 풍 경과 경험을 통하여 자신을 삶을 반추하는 경험을 얻고자 한다. 잠간 왔다가 스쳐가는 관광객들도 산티아고의 경험과 연결될 수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다. 인간의 어떤 경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에 의하여 무한히 확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그날 오후, 테라스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 었다. 그 한 부인이 놀라서 외쳤다. “아니, 저게 뭐에요? ” 부인은 출렁거리는 물결과 함께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이상한 물체를 보았던 것이 다. 그것은 커다란 꼬리가 끝에 달린 거대한 고기의 흰 뼈였다. “저건 상 어의 일종으로 티뷰론이라고 부르지요.” 웨이터가 일러주었다.
“상어가 저렇게 기품 있게 생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 요.”
“나도 처음인걸.” 부인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126)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자연을 바라보는 생태학적 관점은 자연과의 전일 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다의 고기를 자신의 형제 혹은 친구처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거북이의 심장, 자신의 두 손도 하나의 유기 체로서 함께 관계를 맺고 돌아가는 한 몸임을 느끼게 한다. 바다라는 자연도 사실은 인간의 사랑과 슬픔처럼 바다생물들의 삶이가꾸어지는 물리적 공간 임을 사랑하는 바다고래 한 쌍의 모습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자연과 한 몸 이 되어 마치 형제처럼 느껴지는 별과 달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망쳐놓았다고 표현하는 잡은 물고기의 초라한 최후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함으로써 더욱 따뜻한 인간관계를 원하는 사회를 제시해주고 있다. 즉 흰 뼈로 상징되는 인간의 혼백이 인간과 인간을 이어줄 수 있는 정신적 구심점 인 것처럼 물질과 계급이 중심이 되어 정렬되는 사회보다는 불완전을 숙명처 럼 갖고 태어나는 생명들이 중심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을 다하는 평 화로운 삶을 꿈꾸어 보자. 오두막집에서 지금 깊이 잠들어 있는 노인 산티아 고가 꾸는 꿈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조화된 생태 공동체의 사회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산티아고는 맹목적이고, 말이 없이 잔인하고, 냉혹하거나 필연적인 존재의 자연보다는 창조적이고 자기 지시적이며 호혜적이고 비옥하며 상보성을 중요시 하는 자연을 생각15)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이성, 과학, 그리고 기술의 사용을 피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 는 합리성, 양식, 과학 그리고 기술이 현대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하는 앞으로의 공동체는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적응하며, 자신의 삶에 맞는 조화로운 세계를 관리하고 키워나갈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을 지향하는 사회16)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 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결국 동료인간과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것이 바로 자연과 서로 친화를 맺는 일이 된다.
Ⅳ. 결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노인 산티아고의 3 박 4일에 걸친 경험담이다. 큰 물고기를 잡고 싶어 하는 산티아고는 마린이라는 대어를 만나 어부의 자존심을 건 사투를 벌인다. 물고기와의 결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지만 상어 떼의 습격으로 산티아고는 잡은 물고기의 살점을 모두 빼앗긴다. 이 과정에서 노인이 느끼고 체험하는 자연관은 다양하게 피력된다. 우선 많은 경험을 축적한 실력 있는 어부로서 출어를 앞둔 산티아고의 자연관은 인간중심의 자연관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인간 의 생존을 먼저 생각하는 자연관이다. 즉 인생을 하나의 세상에 던져진 운명체로 보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숙명을 인식하고 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자연관이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으며 소유하고 있는 도구와 장비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무한한 경쟁을통한 인간의 발전을 꿈꾸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위해 치열한 삶을 이끌고자 하 는 산티아고는 마침내 마린을 만나면서 승리를 거둔다.
물고기와 한 판 승부에서 산티아고는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승리를 거두는 방식은 참으로 원시적이다. 우선 싸움의 장소가 바다라는 원시적인 곳이다. 태고 의 원시성을 갖고 있어 예측이 불가능한 위력의 바다 위를 조그만 돛단배에 몸을 싣고 산티아고는 모험을 시작한다. 경험에 의하여 태풍이 없는 9월에 가장 잡고 싶은 고기를 찾아 나선다. 날 다랑어와 새우를 식사로 하고 소금물을 치료약으로 대신하며 노나 칼이 상어를 대적하는 유일한 도구가 된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육체적 극한을 경험하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육체적 고통과 통증을 견디어 내고자 하는 생명의 힘을 발현한다.
인간중심적 자연관의 목표가 인간적 가치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가치는자연 앞에서 파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속성의 것이므로 자연 의 품에서 이를 거부할 인간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고기와 한 치도 물러 설 수
없다는 운명적 다짐을 하면서 고기와 맞서 싸우고 있는 주인공의 모 습은 인간중심적 자연관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잡은 고기가 상어 떼에게 다 먹히자, “내가 너와 나 자신을 모두 망쳐 놓았구나.” (130)라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데서 산티아고의 태도와 사고의 변환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중심적 자연관은 결국생태중심적 자연관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 음을 알 수 있다.
자아의 완성은 자아의 발전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노인은 소년에게, 소멸은 발생에, 죽음은 삶에 이르듯 인간적 존엄의 극치에 달한 인간중심적 자연 관은 다시 어디론가 흘러갈 지향점이 필요해진다. 그곳은 바로 자연과 합일을 이 루는 지점이다. 산티아고는 물고기를 ‘형제‘, ’친구‘ 등으로 표현한다. 물상들이 자신의 형제와 친구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자연과의 사랑과 연민의 끈을 놓지않고 있어서 삶의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자연이기보다는 동반자적인 생태적 자연 관과 일치한다. 요컨대, 『노인과 바다』의 후반부에 나타나고 있는 자연관은 전 반에 비해 매우 자연 친화적임과 동시에 자연과의 관계와 조화를 모색하는 생태 주의 자연관의 눈높이와 일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