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문학수첩, 2020.
검정은 멀리 갔을까
검정은 묵묵히 어두워졌다 바람이 곁에 있으니 침묵도 살얼음 졌다 나는 견딜 수 없이 비좁은 이곳에 플라스틱 화초처럼 꽂혀 있다 사람들이 검정을 휘휘 저으며 빠르게 일어섰다 검정은 흐린 바깥으로 몸을 돌렸다 중얼거리거나 빙그레 웃거나 작은 소리로 부스럭거렸다 화초가 기울며 그 부드러운 입술과 어두운 시야와 거친 표면을 바라봤다 온몸에 달라붙은 검정이 모서리를 감싸 안자 중력이 사라졌다 더 어두워진 검정이었다 미안해요 저 문은 내가 여는 게 아녜요 그 말을 듣자 검정은 모두 약봉지처럼 구겨지며 화초에 얼굴을 묻었다 지하철이 그 비좁은 시간을 묵묵히 흔들었다
밤의 휘장과 노래
박성현
1
마을에 들어서면
밤의 긴 허밍이 들려왔다
마을은 새파란 숲의 벽과 두께
매일 눅눅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나갔다
이십 년 전에도, 더 오래된 날에도
밤이 부르는 노래는
마을에 있었고 떠나지 않았다
2
밤이 목소리를 연주하면 마을의 창은
빛나기 시작했다 바람과 식물은 물러나 고요했고
밤을 사랑한 사람들은 낯선 잠에 빠졌다
아주 잠깐 밤의 노래가 들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공동묘지와 예배당에 갔던 사람들이 서둘러 돌아왔다
마을 전체가 불타버린 듯 단단한 침묵에 휩싸였고,
뙤약볕이 쏟아지는 동물원처럼 무기력했다
모두 하마와 기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밤이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약속한 듯 밥을 사막과 소금이라 불렀다
형제처럼 밤의 곁을 지키며 밤의 눈과 말과 꿈을 기록했다
밤이 걷는 길과 밤이 노래한 모든 사물을 찾아냈다
밤의 숨결에 묻는 먼 곳의 바람도 냄새도
늦은 오후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물결도
그러므로 밤의 노래는
익숙하지만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휘장과 고립과 용서였다
3
그때 밤은 창을 열고
먼 숲의 기척들을 바라봤다
먼 숲이 밤의 노래로 새파랗게 타올랐다
창과 악기와 무대에 별이 뜨고
구름과 달이 갈라졌다
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
옛날이 찾아왔다 밥과 술을 나눠 먹으며
밤의 악보를 기억했다 누구보다
집중했으므로 밤을 사랑한 사람들은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꿈과 어둠
나는 아직도 그들이 불렀던 노래를 기억한다
흥얼거리면 어느새 밤이 곁을 지키고
어머니와 할머니와 더 오래된 여자와 여자들이 모여
어린 나를 감싸는 것이었다
4
밤은 노래를 부르며
나와 먼 숲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잃어버린 색깔과 글자가
휘장과 고립과 용서 속에서 뚜렷했다
삼십 년 전에도, 더 오래된 날에도
내가 죽었던 마을에는
밤의 길고 긴 노래가 들려왔다
바라보다
마른 볕에 당신이 고여 있었다 뜻밖이라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당신은 꼭 그만큼 물러났다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어 마음만 우둑했다 볕은 숲을 흔들면서 꽃가루를 날렸다 북쪽으로 떠나는 철새처럼 크게 휘어지고 출렁거렸다 하늘이 노랗게 덧칠되다가 물에 씻긴 듯 맑아졌다 너는 어디를 보고 있냐는 당신의 옛 물음 같았다 나는 소리가 없으므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만 몸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