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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에 속한 것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완전함으로 나아가서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저주함에 가까워 불사름이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이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히6:9). 그렇다면 구원에 속한 것은 무엇일까? '속한 것'의 헬라어 뜻은 '관계, 조건, 동반하다' 등으로 구원에 동반하여 따라오는 것, 구원의 조건과 같이 직접적, 간접적 관계를 가진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에 가까이 있는 성도라면 당연히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에 속해 있는 것이 그의 삶에서 나타날 것이고, 이것을 보고 구원에 속해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지식과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이라고 본다(롬10:8-10). 그리고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믿음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말씀이 마음에 있고 입에 있어 순종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를 위해 예슈아께서 우리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으므로 계명(명령들)에 대한 순종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바울이 신명기 30장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씀을 알지 못하므로 지식이 없어 스스로 멸망하는 이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에 속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즉 구원을 확신하는 여부가 아니라, 구원에 따라오는 증거들이 있고 그것을 보고 그가 완전함에 가까워 복을 받을지 아니면 저주함에 가까워 불사름이 될지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8-10)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30:11-16)
2 구원을 위한 순종과 섬김
우리가 구원으로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면 복으로 가까이 가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으면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불사름에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이 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있는 두가지 척도가 있다. 하나는 무슨 일을 하는가이고 나머지 하나는 성도들과 영혼들을 섬기고 있는가이다. 이 두가지를 통해 그가 어떤 길에 서있는지 알 수 있다(히6:9,10).
첫번째 무슨 일을 하는가부터 생각해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을 기억하시고 행위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말씀으로 검증해야 한다. 일(work)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선행과 악행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라는 일이라면 순종의 선행일 것이고 하지 말라는 일이라면 불순종의 악행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그가 구원에 속한 자인지 그렇지 않은 자인지 알 수 있다. 즉 구원에 속한 자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그분의 모든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두 번째는 섬기는 일이다. 구원에 속해 있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은 섬기는 일이다. 예슈아께서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신 것은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이는 아버지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기에 예슈아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 이웃을 사랑하셨으며 예슈아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도 이러한 사랑의 섬김으로 삶을 살았다.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자라면 이름이 구원이신 예슈아의 마음을 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슈아께서는 성령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셨다. 이처럼 우리가 아버지의 명령들에 순종하는가? 그리고 영혼들 특별히 성도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가를 통해 우리가 구원에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구원을 소망하는 성도라면 이 두가지가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3 섬김과 순종을 잊지 않으신다
구원을 소망하는 성도라면 당연히 두가지가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은 순종과 사랑의 섬김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결코 잊지 않으신다(히6:10). 우리가 말씀을 지킬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킨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과 같다. 또한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씀(계명, 명령들)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요일5:3). 결국 구원에 속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삶에서 나타나는가의 여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아니며 오직 순종을 통해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고, 이웃 사랑은 사랑의 섬김으로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 순종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섬기는 것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섬김은 때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고 우리를 지치게 하기도 하며 낙심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섬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쁜 소식이 있다.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보고 계시고 잊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행한 일을 그분께서 잊으신다면 그분이 불의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결코 그럴 수 없다. 반대로 우리의 악행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공의로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행위대로 심판하게 하시는 것이고 그렇기에 완전히 공평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이처럼 우리의 선행을 아버지께서는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잊지 않으신다. 때로는 손해보는 거 같고 억울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구원에 속한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원받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거로서 삶의 모습이므로 힘을 내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결코 잊지 않을 것이므로 소망을 가지라고 하신다. 사람은 섬김에 대한 댓가를 조금 지불할 수 있으나 아버지께서는 완전하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하늘에 상급을 쌓게 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다. 오히려 이 땅에서 댓가를 받지 않는 것이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므로 온전히 기뻐하자. 우리가 한 사랑의 섬김은 영원한 우리의 보상이 될 것이다(고전13:1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5: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
4 믿음과 인내로 유업을 얻는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구원)은 결국 믿음과 인내로 얻는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실망스럽고 때로는 지치고 억울해도 힘을 내야한다.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자. 즉 아버지께서 공의로 갚아 주실 것을 항한 완벽한 확신, 마치 완벽한 보험을 든 것과 같이 확신한다면 끝까지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오래 참고 구원이라는 유업을 받는 자들을 본받자. 즉 믿음과 인내로 끝까지 순종하고 섬기는 자들의 삶을 살아냄으로 구원의 유업에 이르는 자가 되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두가 동일하게 부지런히 순종하고 섬기기를 바란다고 말한다(히6:11,12). 왜냐하면 이것이 구원에 속해 있는 증거들이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을 즉각 보상하지는 않으신다. 만약 그러셨다면 우린 보상을 위해 일하는 가볍고 이기적인 사람이 됬을 것이다. 그러나 인내를 통해 보상을 받는다면 우린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울 것이고 이를 통해 경건에 이를 것이다(히5:8,9).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백성, 거룩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5,6)
5 아버지보다 더 큰 신이 없다
우리는 맹세할 때 더 큰 것이나 큰 사람을 두고 맹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도 맹세하기 원하셨다. 하지만 우리에게 맹세하시기위해 자신보다 더 큰 분이 없으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스스로에게 맹세하셨다(히6:13). 즉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은 없다. 결코 있을 수 없다. 예슈아께서도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선한 분은 오직 아버지 한분 밖에 없다'(눅18:19) 다시 말해 예슈아께서는 스스로 자신으로 부터 아버지를 구별하셨다. 즉 자신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거룩하다 칭하셨다. 이처럼 아버지는 거룩하시고 선하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예슈아께서 아버지를 구별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신 아버지를 구별해야 한다. 예슈아께서 아버지와 같은 진리를 말씀하시므로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구별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여호와)을 구별해야한다. 이는 예슈아의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세가 바위를 두번치며 '내가 너희에게 물을내랴!'라고 말하며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시한 죄, 하나님을 거룩하게 구별하지 않은 죄의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민20:10). 모세가 하나님을 구별해야 한 것처럼 예슈아께서도 하나님을 구별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마땅히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20:10)
6 복주시겠다고 맹세하셨다
아버지께서 스스로에게 맹세하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복주시고 번성케하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복 받고 자녀들까지 복 받고 번성케 되는 것 그것이 아버지께서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복이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맹세는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다. 다시 말해 분명히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렇지 않을 거 같고 망하는 자와 같고 멸시 받는 자 같으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확정하셨으므로 마음에서 하는 어떠한 논쟁도 필요가 없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분은 말씀대로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복을 받게 하실 것이며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최후 확정이다(히6:14-16).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유업을 얻을 이삭을 낳았고 이삭을 통해 야곱을 낳았다. 쉽지 않은 임신이었고 자식이 귀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언약을 붙들어야 했다. 여호와께서는 결코 숫자로 전쟁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거룩함으로 전쟁하신다. 거룩함이 결국 유업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예슈아를 통해 온 열방으로 퍼져나가는 믿음의 씨를 만나게 되었고 거룩한 씨들이 추수되는 언약의 성취를 마침내 보게 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 70~80년을 바라보면 낙심하게 되고 성취를 보지 못해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우린 1000년을 바라보아야 한다. 대대로 일어날 거룩한 자녀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린 끝까지 인내할 수 있다. 그리고 끝까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꼭 기억하자. 하나님은 숫자로, 병거의 수로 싸우지 않는다. 오직 거룩함으로 싸운다. 그 거룩함이 자녀들에게 대대로 흘러갈 것이다.
7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75세에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그 후 25년이 지나 100세의 나이에 마침내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나았다(창17:17).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변함없이 여호와께서 언약하신 자손을 주실 것을 신뢰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것은 별과 같은 번성함이었다. 그런데 그가 얻은 아들은 이삭 하나였다. 그나마 있던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므로 유업을 얻지 못할 거라며 내어 좇으라고 명하셨다(창21:10). 아브라함이 약속으로 받은 그의 씨가 크게 번성하여 별과 모래와 같고 그의 자손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성취를 그는 보았는가? 그는 보지 못했다. 심지어 이삭도 결혼하고 오래도록 임신이 되지 않았다(창25:21). 그래서 여호와께 간구하여 쌍둥이 야곱과 에서를 나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언제 언약의 성취를 보았는가?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은 그의 자손 예슈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됨으로써 성취가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 성취되고 있다(갈3:16). 실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슈아를 통해 아브라함의 유업에 동참하고 있다(갈3:28). 그러니 아브라함은 얼마나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는가?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은 성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확신 가운데 소망하고 인내함으로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여호와를 신뢰함으로 그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가능했다(창26:4,5).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믿음으로 오래 참고 인내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언약을 성취하는 자가 되어야한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22:16-18)
8 맹세를 통해 이미 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통해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있음을 정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다투고 분쟁한다해도 그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맹세하심으로 최후 확정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즉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로 보증하신 것이다(히6:16,17).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가 유업을 얻고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는 진리이다(신4:1 8:1 레18:5).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8:1)
9 두가지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두가지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시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두번째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뜻이 불변한다는 사실이다. 불변하는 사실은 진리라는 뜻이다(히6:18). 즉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못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뜻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반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는 바뀌었다고 말한다면 또는 구약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지만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유업을 얻는 방법에서 하나님의 뜻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유업의 성취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 뜻이 바뀔 수는 없다. 구원의 조건이 변하고 구약은 율법을 지켜야 유업을 얻지만 신약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 유업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서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뜻이 변할 수 없다는 사실도 믿어야 한다(민23:19). 우리에게 구약과 신약은 거의 6000년과 같이 긴 역사 같으나, 아버지께는 겨우 일주일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우린 결코 유업을 얻는 구원에 대한 다른 교리를 세워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교리는 신성모독과 같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23:19)
10 변하지 않는 진리는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
구원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변하지 않고 우리로 복주고 복주며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아버지의 맹세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풍랑이는 바다위에 떠있는 배와 같은 우리의 삶에 소망을 주고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완전함에 이르게 하신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붙들고 믿음으로 힘차게 풍랑이는 바다를 걸으신 분이 예슈아시다. 우리의 머리이신 예슈아께서 우리보다 앞서 풍랑이는 바다를 믿음으로 걸으셨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중보자이신 대제사장이 되셨다. 따라서 우린 예슈아를 발자취를 따라 변하지 않는 두가지 사실을 붙들고 믿음으로 견고하고 튼튼한 배가 되어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히6:19,20). 그리하여 예슈아께서 이르신 온전한 믿음의 단계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다(유1: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1:24,25)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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