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9. 큐티
민수기 25:1 ~ 9
바알브올 사건과 비느하스의 열심
관찰 :
1) 브올에서 생긴 일
- 1절.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 “싯딤”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황에서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이다. 모세는 이곳에서 긴 설교 3편을 통해서 광야생활을 정리하게 하고, 가나안 입성을 위한 신앙교육을 진행한다. 발람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미디안과 모압에 의해서 진행된 미인계에 이스라엘 장정들이 넘어가 버렸다. 바알 브올의 하나님의 진노가 이방 선지자 발람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민 31:16 그리고 계 2:14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 2절.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 미디안과 모압의 사람들은 큰 제사를 준비했고, 그 자리에서 매우 음란한 예식을 거행했다. 그 자리에 이스라엘의 장정들, 그 중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대거 초대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여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여인들이 접근해서 우상 숭배에 빠지게 만들었다.
- 3절.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 “바알브올”은 ‘브올 지역의 바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브올 지역에서 바알을 섬기는 행위가 몹시 음란했고, 혼음과 난교가 벌어지는 특별한 것이었기에 “바알브올”이라는 의미가 우상숭배하고, 음란한 성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뭉뚱그려서 표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몹시 진노하셨다. 이스라엘이 구별됨의 중요성을 광야생활에서 누누이 강조하셨고,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먹는 것, 입는 것, 자고 눕는 것 모든 것들을 구별하게 하셨는데, 광야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이렇듯 무너지는 것을 보신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백성들 모두를 죽이지 않으시고, 지도자들을 치시는 것을 통해서 일벌백계로 삼고자 하신다.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을 다 목매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일에 참여한 자들을 발본색원해서 처단할 것을 하나님은 엄하게 명하셨다.
2) 비느하스의 열심
- 5절.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감정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들을 철저하게 규명해서 죽일 것을 명하고 있다. 모세는 반석을 칠 때와 다르게 흥분하지 않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고자 집중하고 있다.
- 6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온 것을 깨닫고 울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말 눈치도 없는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 ‘시므리’가 미디안 족속의 한 지도자인 수르의 딸 ‘고스비’와 성관계를 맺고자 회개하고 울고 있던 회중들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던 것이다.
- 7절.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 비느하스는 엘르아살의 아들로 3대 대제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회중 모두가 어처구니 없이 그저 시므리와 고스비의 악행을 쳐다만 보고 있던 상황에서 이 문제에 분개하여 ‘열받아’ 손에 창을 들고 따라간 것이다.
- 8절.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 비느하스는 이 문제를 그냥 둘 수 없다고 분명히 여겼다. 이 후에 시므온 지파의 사람들과 원수가 되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장막에 쫓아들어가 성관계를 맺고 있던 시므리와 고스비를 한꺼번에 창에 뚫어버렸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멈추게 되었다. 회막문 앞에서의 눈물의 회개가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느하스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때의 비느하스의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제사장의 중보적 행위로 보게 된다. 이후에 사무엘이 아말렉 왕 아각을 쪼개 죽인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모범으로 이해한다.
- 9절.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 사도 바울은 이 때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2만 3천으로 말한다(고전 10:8).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가말리엘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바울 시대의 랍비들은 바알브올 사건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의 숫자가 2만 3천 명이고, 5절에 언급된 재판장들에 의해서 1천 명이 죽었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숫자는 2만 4천명이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게 몰아쳤는지를 알게 된다.
가르침 :
1) 발람의 궤계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미디안과 모압의 미인계에 무너지게 된다. 바알을 섬기며 지독한 음란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거룩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구별이 혼잡하게 된 무서운 사건이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을 가나안에 보내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과 온 나라 온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는 악독한 궤계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합당하고 이스라엘이 망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2) 비느하스의 열심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게 하는 역사를 이끌어 낸 행위였다. 대제사장으로서 인간의 범죄를 대속하는 역할을 비느하스는 감당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비느하스의 열심이 단지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이 된 참된 열심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칫 가나안을 목전에 둔 모압 광야에서 몰살하고 끝날 뻔 한 무서운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발람의 궤계가 단순한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고자 하는, 여자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실 예수님을 막아서고자 하는 지독하고 악독한 궤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3) 하나님은 이 땅에 메시야를 통해서 모든 죄악을 멸하시고,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다. 이 일을 막아서는 사탄의 영적전쟁의 양상은 쉼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 이면에 흐르는 그러한 기조는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 하나님은 비느하스를 세우시고, 그의 열심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다. 그렇기에 2만 4천명이 죽은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다루심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의 중심이 세워지게 됨으로 이제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이끄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하시게 된다.
적용 :
1) 사탄은 틈이 있던지 없던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너지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식의 열심을 이룬다. 발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였다. 엎드려서 눈 뜬 자였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어둡게 되자 사탄의 병정이 되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자가 된다. 그의 악한 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처하게 되고, 다 죽는 것이 맞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느하스를 준비하셨고, 그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거두시는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하해와 같다.
2)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발락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던 일이 발람에 의해서 축복으로 점철되리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그런 발람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스라엘을 진짜 죽는 길로 인도하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탄은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승리하리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느하스를 준비하심으로 그 모든 일을 마무리하신다. 이스라엘은 2만 4천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주님의 은혜로 마지막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다루심에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였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회개함으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는 존재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시고 알려주시는 바이시다.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이다.
3)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서 그야말로 어리둥절 ~,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지금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 1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막막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상황일 따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크고 귀하고 놀랍게 일하실 것임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금 깊게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