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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임명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0장 1-15절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부분으로 사용답기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부분에서 사용되면 사용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에 사용하시면 좋을 것인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사도로 임명하신 후, 자신의 권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송하시며, 전도자의 자세와 필요한 것, 그리고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1-4)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거짓 제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면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원치 않는 길로 가라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진실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1-4)
앞 9:37-38에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긴박한 상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제자들을 일꾼으로 추수할 곳에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1)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심(1)
예수님의 제자를 ‘열두 제자’로 특정하신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열둘을 세우신 것은 분명한 의도하신 바입니다. 하늘나라 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 것입니다(19:28). 지금껏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하늘나라 사역의 목격자로서 동행했습니다. 이제는 본인들이 직접 그 사역의 당사자들로 보냄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 전에 그들을 세우시고, 자신이 보여주었던 귀신을 쫓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4:23;9:35;8:16) 권능을 부여하십니다(1). 예수님의 사역을 특정했던 ‘가르치심’은 등장하지 않습니다(4:23; 9:35). 예수님께서 주신 신적 권능으로 제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늘나라의 실체를 경험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며 죄 된 현실 속에 뒤틀린 육체와 영혼을 치유합니다. 제자들을 통한 권능의 사역은 곧 권능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권능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2) 열두 제자의 이름(2-4)
본 절에서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공개합니다. 한참 후에 일어날 가룟 유다의 배교까지 포함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사도’(2)는 파송하는 주체인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고, 예수님의 임명을 받은 것이므로 제자들의 권위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맨 먼저 등장하는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부르신 다섯 명 중에 초반 네 명입니다(4:18-22). 열두 제자의 명단에서 가장 먼저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때 함께 부름 받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뒤를 잇습니다.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는 베드로의 으뜸인, 특별한 위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12 제자들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16:16-19). 베드로의 이름이 맨 앞에, 유다가 맨 뒤에 기록된 것은 의도적입니다. 시몬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첫 번째로 선호하던 이름이었기에, 식별을 위해 반석을 뜻하는 ‘페트로스’나 ‘게바’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제자 목록에서 가룟 유다를 맨 끝에 둡니다. 유다가 제자들의 서열에서 열두째였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불명예스러운 제자임을 의미합니다. 네 복음서의 목록은 공통적으로 베드로, 빌립, 야고보를 각 그룹의 맨 앞에 배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보여주신 사역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제자의 사명은 예수님을 닮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1). 예수님께서는 8-9장의 핵심 주제인 ‘권위’를 긍휼을 베풀기 위해 사용하셨기 때문에 긍휼의 사역을 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시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목자 없는 양처럼 낙담하고 지쳐 주저앉은 사람들과(9:36) 질병과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쓰러진 사람들(10:2,8)을 회복하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파송 받을 때 ‘사도’, 즉 보낸 자의 권위를 주신 것처럼, 예수께서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명과 권위를 위임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우선권은 예수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할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일 뿐, 그들에게 내재된 권위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사도인 제자들의 정체성은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제자들의 주된 과제는 그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1절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열두 사도의 파송과 사명(5-15)
‘보냄을 받은 자’를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의 권위는 보내신 이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신 이의 주권을 선포하기 위해 보내신 곳으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의지할 것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그만큼 책임지신다는 약속입니다.
5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5-15)
본문은 갓 부름 받은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선교 전반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느 마을로 가든지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집에 머물라고 명하십니다. 무례해서는 안 되지만 당당함을 잃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어느 성이든지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주께서 그 완악한 마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사역 범위(5-6)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주시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명령하신 내용은 전도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상자를 제한하고 특정하는 것이 놀랍니다. 먼저, 지역적으로는 갈릴리에 제한되는 모습입니다.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도 가지 말도록 하십니다(5). 분명히 이 범위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삶의 경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6).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8:7;15:24,26),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묘사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5절의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삼는 것일 뿐, 이스라엘 외의 이방인들을 선교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질서의 회복을 고대하는 이방인들을 향합니다(마 12:17-21; 사 42:14). 제자들은 현 단계에서 이스라엘을 선교 대상으로 삼지만, 마태복음의 끝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십니다(28:19). 따라서 본문은 구원사의 시각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유대인들인 제자들이 사도로 세움을 받자마자 이방인들에게 갈 마음을 품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방의 빛인 이스라엘(49:4-7)의 회복 창조 세계, 즉 열방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째 지침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고 파송되는 사람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사명은 회복입니다. 회복의 대상은 구원사의 흐름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이며, 다음에는 열방이 될 것입니다.
(2) 사역 내용(7-8)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이양 받은 제자들이 가서 전파해야 할 일은 확실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각종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스승 예수님처럼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선포합니다(3:2; 4:17).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8-9장에서 보여주었던 동일한 능력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일은 병자를 고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예수님께서 8-9장에서 행하신 기적에 해당하며(8:2-4, 14-17, 28-34; 9:18-26), 9:35-36과 연결해보면 제자들의 임무는 목자의 동정심에서 나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부활이 아니라 소생)은 구약에서 엘리야(왕상 17:17-24)와 엘리사(4:32-37) 외에는 하지 못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7-8a절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대가를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치유 능력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에, 이 능력을 행해서 사적인 이득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그들을 보내신 예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관심사를 반영해야 합니다.
(3) 사역할 방식(9-10)
예수님께서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전도여행의 채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전대, 배낭, 샌들, 자팡이와 같이 순회하는 선교 사역에서 꼭 필요한 것으로 간주 되는 것들을 지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일꾼은 보내신 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 때문입니다(9:38).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에 기대어 살아갈 때, 제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신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참조, 고전 9:11-12; 살전 2:9; 빌 4:10-17).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믿고 살아가는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제자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4) 사명에 반응과 결과(11-15)
제자들은 성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합당한 자’를 찾아 그곳을 사역의 거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하늘나라 복음의 메시지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가정에 머물러야 합니다(11). 제자들은 호의적으로 대하는 가정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영접한 가정에 가야 하는데, 이것은 가정들을 비교하여 더 잘 대해주는 곳에 묵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합당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평화를 빌어야 합니다(12). 평화를 비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하늘나라 복음(사 52:7)의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미래는 평화의 시대이며(사 8:23-97; 11:5-10; 66:25; 슥 9:9-10; 말 3:23-24), 하늘나라의 평화는 갱신과 회복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만일 그 사람의 집이 합당하면 제자들이 빈 평안이 반응한 그들에게 선물로 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13절 내용은 이사야 55:11과 유사합니다(참조, 사 31:2; 45:23).
14-15절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제자들이 보여야 할 자세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에는 항상 영접과 거절이라는 두 가지 반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배척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척하면 제자들이 평안을 빌 가능성 자체가 허락되지 않기에 그때는 발의 먼저를 털어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환대 거부는 개인의 수치를 넘어 마을의 수치를 안겨준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눅 11:5-13).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은 역시 당찬 거절 행위입니다. 제자들이 전한 평화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에게 그대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반대와 배척은 제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파송을 받는 인생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것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수용과 거절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수용은 샬롬이고 거절은 심판입니다.
가치관이 무너지고 어디에 진리인지 몰라 기대야 할지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제자의 삶을 보고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가늠하게 합니다. 제자의 삶과 태도가 복음으로 세상에 향기를 드러낼 때, 주의 복음이 더욱 힘 있게 세상으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꾼을 찾으시고 제자를 부르십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도록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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