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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5장
5:1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당신은 꽃들과 과일들로 가득찬 아름다운 정원과도 같다. 사랑하는 당신의 님을 초청하여 그분의 정원을 즐기라고 부탁하라. 당신은 그분과 떨어져서는 당신의 정원을 즐길 수 없다. ‘당신의 정원에 오셔서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이 그 열매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취하십시오’
신랑은 그가 사랑하는 자의 정원에 기쁨으로 들어가신다. 신랑이 모든 것들을 취하시겠지만, 그분은 자신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차려 놓은 식탁에서 먼저 드신다는 것을 당신이 알기 원하신다.
신랑은 당신을 위해 몰약을 거두셨다. 몰약은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갈 때에 경험하게 될 고난이다. 하지만 몰약은 향기로운 향재료와 함께 거두어졌다. 이 향재료는 신랑을 위한 것이고, 몰약은 신부를 위한 것이다.
신랑은 사랑의 달콤함을 즐기신다. 자기 신부의 관대함에 매료된 그는 자기의 모든 친구들을 초대하여 자기 신부 곁에서 먹고 마시게 한다. 당신은 열매들로 가득 찬 정원이며, 우유와 꿀로 적셔졌다. 당신은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풍성한 자원들을 갖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초대하여 교회가 맺은 열매를 드시게 한다. 신랑은 육체로 오셨을 때에 그의 정원에 들어오셨다. 그분은 심지어 그의 신부가 거두기 전에 그의 몰약을 그의 향재료들과 함께 거두셨다. 그는 수난의 아픔을 겪으셨고, 그것을 통하여 달콤한 향기를 자기 아버지에게 올려 보내셨다.
예수님은 꿀송이와 꿀을 함께 드셨다. 주님은 자기가 선포한 말씀을 실천하셨고, 자기가 먼저 겪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 그분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생명은 당신 안에서 꿀송이와 같다. 이 꿀송이의 달콤함은 행복 그 자체이며, 주님은 이것을 자기 아버지와 함께 나누신다.
사랑하는 자는 ‘내 포도주와 젖을 마셨다’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을 완전히 잊게 하는 그 포도주가 도대체 어떤 포도주입니까?’ ‘이 포도주는 너희들을 위해 내 안에서 넘쳐나는 사랑의 포도주란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 잊으신 후, 오직 자기 백성의 구원에 대해서만 생각하셨다. 사랑으로 충만하신 주님은 모든 비난과 조롱을 견뎌내셨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살과 피를 내어 주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된 포도주는 그분의 수난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포도주는 그분의 신성을 나탄내며, 젖은 그분의 인성을 나타낸다.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혼합된다
구원자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분의 고통과 비난을 그분과 함께 나누게 하신다. 그분의 모범은 포도주와 젖과 같다. 포도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젖은 예수님의 달콤한 가르침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같이 되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
5:2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당신의 겉모습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육체와 같이 죽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의 영은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연합을 이루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해 감에 따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낮보다 밤중에 더 강력하게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은 당신 안에서 들려오는 사랑하는 임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려주고 싶어 하신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의 신부로 선택을 받은 나의 사랑아, 내가 너에게 왔노라. 너는 나의 단순한 비둘기란다. 완전하고 아름답고 정결한 나의 신부란다. 내가 너를 위해 당한 모든 것으로 내 머리가 가득 채워진 것을 보아라. 나는 가장 잔인한 핍박을 받아 흘린 것들로 흠뻑 적셔졌단다. 내가 이제 너에게 왔노라. 고난과 비난 그리고 심지어 혼동까지도 견디어 내는 일에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느냐?
당신은 지금까지 단지 십자가의 쓴맛만을 경험해 왔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십자가가 주는 혼동과 치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경험들이 각기 다르며, 모든 경험들이 끔찍할 것이다.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겟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당신이 알다시피 당신의 신랑은 당신을 그분의 고통에 참여하게 하려 하지만, 당신은 안타깝게도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견뎌야 하는 수치를 두려워하고 있다. 비록 당신이 이전에는 십자가를 대담하게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십자가의 수치와 오명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당신은 다가오는 이 수치를 바라보면서 두 가지를 두려워하고 있다. 하나는 당신이 이전에 버렸던 것들, 즉 당신 자신과 당신의 연약함에 의해서 압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창조자보다 피조물에 더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당신은 술람미 여인과 같이 당신의 옛 방식들, 즉 당신의 흠들과 이전의 삶을 벗어버렸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떻게 다시 입을 수 있겠는가? 어떤 다른 것들도 당신에게 그러한 깊은 수치와 혼동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ㄸ너 이유들을 가지고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러한 것은 견디기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핍박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신랑을 향한 애정은 이미 정결하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세상의 길로 되돌아 갈 수 있단 말인가?
가련하고 눈먼 인생이여! 당신은 무엇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가? 신랑은 단지 당신의 신실함과, 당신이 정말로 그분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시험하시려 하고 있다. 그분은 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거절당하셨으며, 하나님에게 매를 맞고 고초를 당하셨다(사53장 참조). 순전함 자체이셨던 그분이 죄인들과 함께 계수되셨다. 하지만 당신은 죄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고발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비록 당신이 저항과 핍박과 함께 오는 수치를 아무리 싫어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5: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당신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신랑은 자기 부인의 틈새 안으로 그분의 손을 밀어 넣으신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될 때에, 당신은 하나님께서 요청하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그분의 계획을 상세히 계시하고 당신의 순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실 때에, 당신은 그분의 만지심으로 인하여 깊은 감명을 받지만, 아직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은 그분의 만지심으로 인하여 떨며, 그분의 뜻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인하여 괴로움을 느낀다. 욥은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욥19:21)’라고 말했다. 당신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만지심으로 인하여 떨고 있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은 당신의 신부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요! 간단한 변명 하나가 어떻게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상하게 할 수 있는지요? 당신은 사랑스럽고 신실한 당신의 신부가 당신을 거부하는 것을 막으실 수는 없었나요?’
이러한 모든 것으 당신이 완벽하게 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당신의 신랑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흠을 보게 하심으로서 당신을 자기 만족으로부터 구원하려 하신다. 당신은 이미 어느 정도의 순수함과 정결함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의로움을 벗어버렸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의로움은 당신의 신랑께 속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이러한 의로움을 고수하면서,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을 자신의 공로로 삼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5: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당신은 당신의 흠들을 인식하자마자 빨리 회개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결심을 새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을 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고통과 아픔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당신의 연약함 위에 고통이 더해질 것이며, 당신이 느끼는 아픔은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것보다 진할 것이다
5: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이제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자 사이에 존재했던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되어졌다. 주님께 온전히 복종하지 않은 채로 어떻게 그분과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하늘과 땅에서 가장 대담한 포기이며 가장 순결한 희생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자를 위해 문을 열어 놓았으며, 그분이 들어오셔서 그분이 만지심으로 인하여 야기된 슬픔을 치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치유가 급속히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감추기도 하시며, 돌아서서 사라지기도 하신다. 신랑은 당신의 불순함과 지연에 의해 야기된 고통만을 남겨 놓은 채 떠나가 버렸다.
하지만, 신랑은 선하신 분이다. 그분은 자신을 숨기실 때에도 계속해서 당신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다. 시련이 길고 심하면 심할수록, 그러한 은통은 더욱 풍성하게 베풀어질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신랑은 당신 안에서 이러한 은총을 베풀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그분이 말할 때에 혼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게 되며, 이것으로 인하여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당신의 성품들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신랑을 발견할 수 없을 때에 차마 믿기조차 힘든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5: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어찌 이러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고통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신랑은 당신을 잘 보호해 주었으며, 당신은 그의 보호 아래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분은 당신을 떠나갔다. 그런데 그 원인이 당신에게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당신은 당신의 신실함을 시험했었던 많은 시련들을 통하여 이미 충분한 고통을 당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당신이 지금 경험하는 고통과 비교해 볼 때에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당해온 것들은 고통의 그림자일 뿐이다. 당신이 그것보다 작은 고난을 기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당신이 주님과 같이 상처로 얼룩지고, 못이 박히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경험을 하지 않은 채로 그분과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성을 지키는 자들에 의하여 상처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 파수꾼들은 그들이 인간이건 악한 영들이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들일 뿐이다. 이 전에, 당신의 적들은 당신을 계속해서 주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감히 공격하지 못했었다. 이제 ‘파수꾼들’이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당신을 덮고 있는 자기 의를 벗겨 버렸다
당신은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파수꾼들에 의해서 심하게 상처를 입은 후에도 신랑은 당신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파수꾼들이 당신을 가리고 있던 너울을 벗겨 버렸다. 당신이 그러한 모습으로 당신의 신랑을 계속해서 찾으려 한다면, 당신은 미친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분을 찾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움으로 인하여 죽게 될 것이다. 누가 이러한 고뇌를 알고 있는가?
5: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참 사랑은 자기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 당신의 상처와 상실을 잊은 채 오직 그분만을 생각하라. 어떠한 장애물들이 당신을 가로막고 있든지,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라. 당신은 연약함 가운데에서 다른 영적인 성도들에게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분은 그분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드시 자신을 보여주실 것이다.
당신의 말은 간단하다: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습니다’ 어여쁜 여인이여! 당신은 당신의 상처들과 그분을 발견하기 위하여 참아온 모든 아픔들을 그분에게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이 사랑으로 인하여 병이 났다는 말뿐이다. 당신의 상처는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다른 모든 외적인 고통들을 거의 인식도 못하고 있다. 사실 그것들을 상대적으로 볼 때에 심지어 하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5:9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예루살렘의 딸들은 당신을 여자들 중에서 가장 어여쁜 자라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당신의 고통스러운 상처들은 숨겨져 있으며, 드러난 것들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재앙 가운데에서 어떻게 그렇게 강한 사랑 – 지속적이고 신실한 사랑 – 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면서 의아해 한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질문한다. 그들은 당신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히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길이 얼마나 곧고 얼마나 순전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안에서 아무런 아름다움도 보지 못하고 있다. ‘나를 아름답다고 부르지 마라(룻1:20)’ 당신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당신의 온 관심은 그분을 더욱 추구하는 일에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분을 찾기 위해 벼랑을 뛰어내려야 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의 찌꺼기들로 오염될까 두려워함으로 온전한 포기를 하지 못했을 때에 당신을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그 값은 당신의 신랑이 떠나간 것이었다. 당신의 아름다움이나 편안함은 별로 중요치 않다. 당신은 오직 그분만을 찾고 있다.
5:11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야자 송이와 같고 (고불고불하고 – 개역성경) 또한 까마귀같이 검구나
그의 머리를 덮고 있는 머리털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덮고 있는 인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의 인성은 야자 송이와 같다. 그분이 인류를 위하여 거기에서 죽은 것과 같이, 그분은 당신의 적들과 싸워 승리하셨고, 당신을 위하여 구원의 열매들을 획득하셨다. 이러한 열매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맺혀졌다. 그 후에 야자나무의 봉오리가 발하되었다. 즉 교회가 신랑의 마음으로부터 출현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분의 인성은 까마귀처럼 검게 보였다. 왜냐하면 그분이 온통 상처들로 뒤덮이고, 모든 인간들의 죄와 검은 것들을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검은 것들이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깨끗함과 정결함 위에 놓여졌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비난을 받으셨다(시23:6). 그분은 검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러한 검음이 그분의 아름다움을 발산하였다. 검은 것들이 온 세상으로부터 벗겨질 수 있기 위하여 그분이 그것들을 입으셨던 것이다.
5: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넘쳐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있구나(아름답게도 박혔구나 – 개역성경)
신부는 신랑의 완벽함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떠받치고 있다. 그분의 풍요로운 성품과 멋진 특성들은 당신으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다.
주님의 눈은 정결하고, 순결하고, 단순하다. 그분의 지식에는 어떠한 흠도 묻어있지 않다. 당신이 사랑하는 임의 눈은 평범한 비둘기의 눈과 같지 않다. 그분의 눈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젖으로 씻겨졌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에게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임하고 있으며, 그분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채운다 (골2:3). 그분은 마음의 낮은 곳을 통과하는 작은 시냇가에서 쉬고 있다. 당신은 영적으로 크게 앞서가고 있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분에게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온 마음속에 거하시지만, 특히 외진 구석에 거하고 싶어 하신다. 이곳은 아무 것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지 않는 곳으로서 급류가 빠르고 물이 넘쳐흐르는 시냇가 근처에 있다. 이 시냇물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으려 할 때에는 더욱 세차게 앞으로 흘러나가려 할 것이다.
5:13 뺨은 향기를 발하는 자에 의해 마련된 향기로운 꽃밭 같고 그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뺨이 머리의 부분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의 신성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뺨은 예수님의 혼을 나타내고, 향기로운 꽃밭은 그분의 완벽한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나타낸다. 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이신 성령께서 그러한 것들을 택하셔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심어 놓으셨다.
입술은 시리아의 빨간 백합에 비유되는데, 이것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꽃이다. 어떤 입술이 영과 생명의 말씀을 주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달콤하겠는가? 이 입술은 또한 회개하는 마음과 자신에 대해 기꺼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5:15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몸의 낮은 부분들에 있는 다리와 발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상징한다. 화반석은 부패하지 않는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분은 몇 시간 동안 죽음에 굴복하셨지만, 그의 아버지와 연합하셨기 때문에(정금 받침에 세워진) 육신의 부패를 경험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부패하지 않는 말씀에 의해 떠받쳐지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레바논처럼 아름답다. 성도들은 백향목 숲과 같이 그분 안에 심겨져 있다. 그분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택된 분이며, 그분이 모든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그분이 선택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선택 받지 못한다. 그분이 그의 형상을 본받을 모든 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분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시다 (롬8:29)
5:16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좋은 특징들은 찬사를 받을 수 있지만, 어떤 특징들은 너무 훌륭하여 찬사만으로는 부족한 것들이 있다. 신랑이 그러한 분이시다. 그분의 완벽함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 따라서 신부는 그분의 가치를 말하려 할 때에 어떤 합당한 말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신부의 열정이 그녀로 하여금 그분의 뛰어남을 찬양하고 싶어지게 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시도한 후에, 신부는 갑자기 잠잠케 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시도한 후에, 신부는 갑자기 잠잠케 된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으로 인하여 자극되었던 열정적인 언어들을 멈춘다. 그녀는 친구들로 하여금 가장 소중한 이분을 사랑하라고 초청한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다물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 나온다. ‘그분의 목은 심히 다니’
목은 소리를 발하는 기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표현이시다. 그분은 완전히 아름답다. 그분의 사랑스러움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부가 그녀의 친구들에게 말한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님에 대해 너희들에게 말한 것으로 인하여 나를 믿지 말고, 너희들이 직접 맛보거라’그분은 진귀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 아름다움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이제 내가 왜 사랑으로 병이 났는지를 알겠는가?
5:17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당신은 그분과 떨어진 곳에서 위대한 선교사가 된다. 당신은 그분의 완벽함과 달콤함과 다함이 없는 사랑스러움을 전파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그들 스스로 그분을 찾게 한다. 모든 것을 정복하는 사랑! 당신의 승리가 어찌 그리 멋진가! 급류처럼 강한 당신의 사랑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함께 몰고 다닐 수 있다. 그렇게 강력한 사랑을 누가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5장 각주
(1) 따라서 영적인 사람의 온 생애는 오직 십자가와 치욕과 혼동의 끊임없는 연속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특정한 십자가들은 기꺼이 짊어지지만, 모든 십자가들을 짊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명예를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한 번이라도 노력해보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겨낭하시는 바로 그 목표물이다. 신부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려 할 때에 극단적인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신부는 내면으로의 물러남을 좋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가 그녀의 고독함을 떠나지 않는 한 이러한 모든 십자가들을 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진실로 스스로에 대하여 죽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그들 안에 명백하게 그릇된 어떤 걸음들을 허용하신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그들의 명예가 완전히 실추될 것이다. 나는 내가 알고 지내던 한 내성적인 사람 앞에 많은 힘든 십자가들이 놓여 잇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명예의 실추라는 십자가도 있었는데, 그녀는 사실 포기할 수 없었고, 이것 외의 다른 십자가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녀는 그 이후로는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지녀오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로 인하여 그녀의 진보에 큰 치명타가 입혀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 후로 우리 주님에 의하여 치욕을 경험하는 은총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저자는 치욕도 은총으로 간주했다 – 역주) 어떤 은혜도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다
(2) 우리의 혼은 벌거벗은 이러한 상태에서 오래 견딜 수 없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옛 아담을 벗은 후에 새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골3:9,10) 우리는 모든 것, 심지어 그 자체로 선한 것들에 대한 애착까지도 단념하고,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추구하지 않는 법을 배운 후에,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덧입고 그분과의 끊임없는 교통함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유쾌하거나, 편리하거나, 우리의 자기 사랑을 만족시켜주는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을 더욱 더 영화롭게 하는 일에 합당한 어떤 것을 추구한다
(3) 하나님은 믿는 자의 영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혼의 깊은 밤’이라 부르는 것을 사용하신다. 믿는 자들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가정했던 단점들을 그러한 시기 동안에 나타나게 하시는데, 그것도 아주 뚜렷하게 계속해서 하나님은 드러나게 하신다. 그러한 단점들 중에는 분노적 성향, 조급한 말이나 행동, 변덕, 반역적인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서 경건한 행동이나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박탈해 버리신다. 따라서 그의 불완전한 모든 것들이 다시 드러나게 되고, 그는 사방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거운 손을 그 사람 위에 놓으신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중상하고 핍박한다. 그 자신의 생각들은 반역적인 생각들이며, 심지어 악한 영들까지 그를 포위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는 도구들을 통하여 항복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도구들 중 하나라도 빠지게 되어 그리스도인 안에 공격을 받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이 피난처와 일시적 유예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자아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결함들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며, 성도들 공격하여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그러한 연약함도 아니다. 또한 성도는 이러한 것을 항상 인식하지도 못한다. 신부가 신랑을 향하여 돌아서는가? 그녀는 버림받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분의 진노만을 경험한다. 그녀는 자기의 내면 안에 있는 유혹, 초라한 모습, 가난, 불완전함을 들여다 보는가? 그녀가 세상을 향하여 애걸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그녀를 찌르고 거부하는 가시들이다. 그녀는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비참함을 완성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한 시기에 가련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문 밖으로 몰아내시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섭리에 따라 그들이 홀로 처하는 고독을 떠나서 세상 속에 거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를 갈망하는 동안에, 그들의 가장 큰 고통은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계속해서 세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세상과 그들 자신의 흠들, 하나님의 능하신 팔, 연약함에 대한 스스로의 경험, 그리고 인간들과 사탄의 사악함이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했을 때에, 하나님은 일순간에 그들을 모든 적으로부터 구원하사 완벽하게 정결케 된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러한 과정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평생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핍박과 중상을 당하면서 그러한 것들이 마땅치 않은 것이라고 결정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성장해 가는 동안 죄 된 모든 생각들에 더욱 민감해진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며, 그러한 모든 고통과 아픔들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혼동과 수치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자신보다 더 악한 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과 영적인 축복에 대한 이기적인 쾌락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는 더욱 비참함을 느끼면서, 자가기 얼마나 세상과 세상의 무거운 짐에 얽혀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너무도 힘들어서 그는 하루에도 수천 번씩 진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사실 그 어느 때보다 이러한 쾌락을 더 멀리하지만, 그것들을 더욱 즐기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인은 이때에 능동적인 삶을 살도록 내던져졌다. 즉, 그의 상황이나 예측할 수 없는 환경들로 인하여 그는 세상과 어울려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그 이전에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통스럽게 분리시키면서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그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결코 알수 없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연약함과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으며, 오직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그분을 신뢰하고, 자신을 단념하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자기 스스로에게 어떤 자격을 부여하는 자들에 의해서는 경험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소멸하며 하나님을 잊으면서 자발적으로 악에게 굴복하기 때문에, 악의 독침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오래 살면 살수록, 더욱 타락하게 된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시험과 연단을 통과한 후에는, 그들의 무의식적인 신실함으로 인하여 더욱 더 하나님의 품 안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4) 여기에서 처음에 말한 것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는 하나님의 일에 완전한 제동을 거는 자발적인 저항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인간의 의지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저항이 있는데, 이것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파멸되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감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자기가 멸절되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항이 얼마나 크든지,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이미 결정했던 헌신과 그가 결코 철회하지 않은 온전한 포기를 이용하시면서 – 그리스도인은 비록 반항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적이고 그분께 복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그리스도인의 자기 의를 멸하기 위하여 시작하신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이러한 의지적 포기와 순종은 믿는 자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서 때로 그 자신도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는 통로라 불러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유 의지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정화시키는 일을 계속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5) 내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포기될 것들과 희생될 것들이 어떠한 것인지 상세하게 지적하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행하시는 것과 동등한 것이라고 종종 말해왔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가장 힘든 시련의 용광로 안에 던져 넣으심으로서 그분의 계획들을 설명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그의 소유뿐만 아니라 그의 전 존재를 희생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끄신다. 또한 이생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끄신다. 그러면 이러한 희생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자기를 완전히 단념함으로서 가능하다. 자기를 단념할 때에 인간적인 힘을 의지하던 것이 모두 제거되며,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단념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확신하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에게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모든 것이 제거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자기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어떤 것을 거둬가실 때마다, 그것은 일종의 희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 중에서 맨 마지막 희생이면서, 내가 순수한 희생이라 부르는 희생은 믿는 자가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 버려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후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외치며, 그 후에 즉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할 때에 일어나는 희생이다. 이것은 완전하고 온전한 주님의 희생이었다. 내가 마지막 희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렇게 이생과 영원을 위해 자기의 온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 ‘다 이루었다 (요19:30)’는 영혼의 희생이 완성된 것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 말과 함께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저항으로부터 생겨나며, 우리의 저항은 우리의 애착으로부터 생겨난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우리 스스로를 더욱 괴롭게하면 할수록, 그 고통은 더욱 예리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에 순응하면 할수록,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이 방해 없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러한 고통은 훨씬 부드러워진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진보에 방해되는 것이 제거될 때에만 그러한 방해물들을 보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6) 여기에서 말하는 저항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이것들은 이 구절의 이전 절들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들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신랑이 신부에게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문을 열어다오! 내가 고난의 이슬방울들로 젖어 있구나’라고 말하는 신랑의 음성을 들었다. 그때에 신부는 비탄으로 가득 찬 신랑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그녀를 그의 고통에 참여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통하여 그녀는 모든 가능한 슬픔들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어떤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고통 가운데에서 여전히 강할 수 있다면, 그녀는 고통을 기꺼이 가지려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녀가 명예를 잃을 수 있으며, 중상적인 핍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이것을 현실화시켜 나간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들과 더불어 그녀 자신이 한없이 연약하다는 것과 비참하다는 느낌,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힘을 완전히 잃었다는 의식을 동반시킨다. 따라서 신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혼동과 고통으로 뒤덮이게 된다. 마침내, 신부는 거리낌없이 그리고 어떤 명확한 견해도 없이, 가혹한 하나님의 정의에 굴복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받으실 것이다. 시련이 지속되는 동안에, 그녀의 마음은 고통에 대한 극심한 반항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마음 안에서 이전에 내렸던 포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은 온 힘을 다하여 구해달라고 외칠 것이다. 때때로 찾아오는 고요한 시기에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돌아온다. 따라서 신부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제단 위에서 새롭게 희생을 드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 폭풍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그 후에는 다시 정의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잊고, 그것을 혐오하면서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은 또한 때로 믿는 자를 시련에 굴복시키기 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장 극심한 고통을 그 앞에 두면서 그의 승낙을 요구하신다. 어떤 이들은 희생을 각오할 수 없어서 그것을 거부하는데, 어떤 이는 아주 거부하며, 또 어떤 다른 이들은 단지 며칠 동안만 거부한다. 그러면 그러한 그들의 저항은 그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시키는데, 특별히 그들이 이전에 순종적이었다면 더욱 그러할 거시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이전에 그들이 신실했던 것과 하나님께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면서 –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아무리 가혹하다 했을지라도 – 더욱 큰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은 신부가 십자가 위의 희생을 거부하는 것과, 피로 젖어 있고 비탄에 잠긴 신랑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혐오감도 허락하신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좀처럼 오랫동안 거부하지는 않는다. 저항은 그들에게 그들이 연약하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상상했던 용기를 가지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사랑의 즐거움을 아주 섬세하게 경험한 이후에, 사랑이 십자가에 못 박히라는 요구를 제시할 때에 스스로가 매우 연약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들이 이전에 신실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이러한 저항으로 인해 생긴 영적 불순함 때문에 매우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7) 이렇게 문을 열어주는 행위는 새로운 헌신을 나타낸다. 최근에 일어났던 저항이 멈추었기 때문에, 혼은 새롭고 명확한 포기적 행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이것을 요구하시는데, 이것은 혼이 신실하지 못해왔음을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혼은 돌아서서 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는 행위들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8) 다윗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마음이 밀초와 같아서, 내 창자 속에서 녹아 내립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하며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동양의 진주와 같은 우리 구세주의 마음이 수난의 시기에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신랄한 쓴 마음의 바다로 내던져져서, 녹아 내렸으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무게 아래에서 분해되었다. 하지만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은 마음을 만져서 부드럽게 할 수 있으며, 어떤 다른 능력들보다 더 빨리 그것을 녹일 수 있다. 신부는 그분이 말씀하셨을 때에 내 혼이 녹아내렸다고 말한다. 그녀의 이러한 표현은 그녀의 혼이 더 이상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그녀의 연인을 향하여 흘러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에게 외쳐서 물을 내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민20:8)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실 때에, 신부의 혼이 그녀 안에서 녹아 내린다면 이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발삼이라는 향유는 본래 걸쭉해서 쏟아 부어지거나 잘 흐르지 않는다. 이것이 오래 보관되어 질수록, 그것은 마침내 빨갛고 딱딱한 투명체로 변할 때까지 계속해서 응고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열이 닿을 때에 용해되어 액체로 변한다. 사랑이 신랑을 액체화시켰다. 따라서 신부는 신랑을 쏟아 부어진 기름이라 부른다. 이제 신부의 차례가 되었다. 신부는 그녀가 사랑으로 녹아내렸다고 선포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가 말할 때에 내 혼이 흘러내렸다’고 말한다. 신랑의 사랑이 그녀의 마음 속에 있으며, 가죽 부대 안에 고스란히 갇혀 있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강하여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새 포도주와 같이 그녀의 가슴 밑에 자리하고 있다
(9) 나는 경헌한 세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았다. 첫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 속에 그의 고통을 묻어 버렸다. 두 번째 사람은 상급을 소망하면서 그러한 괴로움을 즐겼으며,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한 사람을 위하여 괴로움을 당했다. 세 번째 사람은 자기를 완전히 잊은 채로, 그를 괴롭힌 자가 잘못을 범함으로서 그 스스로에게 가한 상해 때문에 울었다. 이 존귀한 세 챔피언들의 덕목들을 보라, 한 사람은 두려움으로, 두 번째 사람은 보상에 대한 희망으로, 세 번째 사람은 이타적인 완전한 사랑으로 부당한 대우를 이겨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