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류중관학파의 칼날은 너무나 예리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아무나 함부로 잡아서는 안 될 무기처럼 말입니다. 진리(진제)라는 이름으로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어 나의 존재나 오랜 믿음까지 통째로 해체해 버리면, 대중은 법을 깨닫기 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거부감과 상처, 즉 단멸견(斷滅見)의 혼란을 먼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원효대사의 일화가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이유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변한 것이구나"라는 유식적(唯識的) 자각이 주는 따뜻한 위로와 직관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마신 그 물조차 실재하지 않는다"며 중관의 칼을 대는 순간, 대중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허무주의의 영역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조금 더 중도적(中道的)인 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누군가 마음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다는 근거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마음의 원인을 말할 것입니다.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마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경험 또한 원인 없이 생겨날 수 없기에 "경험의 시작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고, 이 질문은 무한하게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마음이 공(空)하다고 합니다. "그럼 그 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다시 "공조차도 공하다(空空)"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무한하게 반복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실체가 없음[無]이며, 그 무엇도 규정할 수 없기에 방편으로 '공'이라는 가명(假名)을 사용해서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개념을 세운다면 반드시 어긋나게 됩니다.
마음이 존재한다는 근거가 되는 시작을 분석해도 무한으로 소급되고, 마음을 부정하는 것 또한 무한으로 부정됩니다. 그래서 어떤 원인도 스스로 성립하지 못하고 다시 다른 조건에 의존하며, 공이라는 개념 또한 실체화되는 순간 다시 비워져야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연기(緣起)한 것이므로 공하며, 그렇기에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연기·공·중도의 간략한 설명입니다.
(원인) - (원인) - (원인) - (원인) - (경험) - [마음] - (공) - (공공) - (공공공) - (공공공공) / 부처님은 이것에 대해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인연으로 생겨난 것을 '연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연기로 인해 생겨난 것은 공(空)하다고 하고, 무자성(無自性)하다고 하며,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적용되는 범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은 인정하면서 무아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개념적 이해에 따른 분류
공(空): 연기하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가장 넓은 개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연기하기에 세상의 모든 만물은 실체가 없으므로 공하다고 합니다.
무자성(無自性): 공보다 구체적인 범위의 개념입니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그것이 개별적으로(독립적으로) 생겨날 수 없기에, 그것 자체의 고정된 본성(자성)이 없다고 합니다.
무아(無我): 가장 좁고 인간 존재에 집중된 설명입니다. 사람은 '자아(나)'에 집착할수록 번뇌가 생기기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방편으로 '내가 없다'는 무아를 제시합니다.
모든 말은 자가당착에 빠진다 / 김성철, 《중관학 특강》 p. 280~281
말로 표현된 것은 모두 자가당착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궁지로 모는 것이 바로 중관논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고 있죠? 자가당착입니다. 그래서 끝이 안 납니다. 이 역시 "끝이 안 난다"고 하면서 끝을 내려고 합니다. ... 이 정도에서 그치겠습니다. (이 역시 그치겠다고 하면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중관논리를 이용해서 말과 생각에서 오류를 드러내지만, 중관논리 역시 말과 생각을 통해 구사되기에, 중관논리를 표현한 말과 생각이 소재가 될 경우 이 역시 다시 중관논리적인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중관학도 중관학으로 재비판이 가능하고, "마음은 있는가 없는가 - 연기와 중도의 이치"라는 글이 '중도를 설명하는 글이다, 아니다'를 분석하면 무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귀류의 칼날이 무뎌지는 것은 대중의 인식이 변화할 때입니다.
불교에 깊은 신심(信心)이 있는 사람은 반야심경의 깊은 이치를 다 알지 못해도 그 가르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적 전통 안에서 그렇게 배웠고, 대중은 극한의 논리를 세세히 분석하며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치적으로 반야심경이 옳다면, 중론은 그것이 왜 그러한지를 명백히 밝히는 논서(論書)이기에 논리적으로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과거에 화장실에서 배가 너무 아플 때 하느님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종교인도 아니고 하느님을 믿지도 않지만, 어릴 적부터 애국가를 통해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자연스럽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귀류중관학파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번뇌를 주지 않지만, 귀류중관학파의 가르침은 너무나 예리하여 대중이 오랜 세월 의지해 온 믿음의 근간까지 통째로 해체해 버립니다. 그렇기에 대중에게 도리어 거부감과 번뇌를 가져다줍니다. 이것이 바로 귀류중관이 대중적이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오해가 풀리고 이 가르침이 대중의 삶에 자비롭게 스며들 때, 그 매서웠던 귀류의 칼날 역시 실체가 없는 하나의 환영(幻影)이 될 것입니다.
첫댓글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래전에 마이클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티비로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샌델교수는 매 강의 마다 질의 응답을 하면서 결론 없이 끝나더군요,
마지막 강의에서 샌델 교수는 그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각을 흔들어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즈음 저는 중론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중론의 파사즉현정을 떠올렸었습니다.
귀류의 칼날이 예리하여 번뇌를 일으키니 대중적일 수 없다는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다만 그 때의 번뇌는 탐진치의 번뇌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한 단계로서의 맑은 번뇌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