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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부르실 때
아모스서 7장 10-17절, 사도행전 12장 18-25절
한 문 덕 목사
[지난 주 성암교회 강연 이야기]
지난 주일 오후에 저는 “다종교 시대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주제로 성암교회에 가서 특강을 하였습니다. 성암교회는 일 년에 몇 차례 외부 강사를 모시고 특강을 듣는 순서를 마련하고 있고, 지난 주일은 청년주일이어서 청년들이 주최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그리스도교를 비롯해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유대교, 유교 등 인류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신념과 체제, 역사를 지닌 종교전통들을 지녀왔고, 지금도 전 세계 인구의 84%인 62억 명이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종교마다 저마다의 교리와 역사, 의례와 종교적 체험들이 있고, 때로 이 종교전통과 신앙들이 정치와 민족의 특성들과 연결되면서 분쟁을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실제로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종교의 다른 신념 때문에 크게는 민족과 국가가 서로 전쟁을 벌여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서로 종교가 달라 적잖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스 큉이라는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없이는 세계 평화가 없다.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없다. 서로들 사이의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막스 뮐러라는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동양학 연구의 대가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두 학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아름다운 이 녹색별에서 인류가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종교인들끼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배울 때에 오히려 자기의 종교에 대해서도 더욱 깊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자신의 종교전통을 더 깊이 이해하고 상호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자기 전통을 깊이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또 불교에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깨달음, 즉 모든 것은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깨달음과 유교 전통에서 배울 수 있는 몸의 훈련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한편 종교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태와 신념의 체계를 분석해 보면 그리스도교적 특성은 4분의 1이 되지 않고, 오히려 무교적 특성과 유교적 특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2000년이 넘는 그리스도교 내의 다른 전통에 대해서 깊이 배울 필요가 있음도 말하였습니다.
특강을 마치고 나자 성암교회 청년 하나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다른 종교인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진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강사라면 이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이 보여주는 평등정신이요!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어떤 이유로든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시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이것을 배웠고, 그래서 계층적인 신분질서로 운영되는 당시 사회는 예수님 때문에 흔들렸고, 인류는 그 예수님의 정신을 민주주의라는 제도로 2000년 동안 계속 만들어 왔습니다.”
[헤롯 아그립바의 죽음]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런 사실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평등정신을 외치기 때문에 첫 교회들이 복음을 전파했을 때, 당시의 모든 권력자들은 이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는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어려서부터 로마에 유학했던 인물로, 로마의 황실 자제들과 함께 생활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로마 황제인 칼리귤라가 살해되자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제4대 황제의 권좌에 오르도록 하는데 1등 공신이 되어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게 됩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로마황제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까지 넘겨받아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영토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고, 금의환향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감사의 예물을 듬뿍 바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헤롯 아그립바의 외가 쪽으로 유다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면에서 왕으로 인정할 수 있었고, 아그립바는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새로운 정책을 썼는데, 바로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단으로 여겨지던 그리스도교를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의 박해 속에서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순교했고, 베드로까지 감옥에 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베드로가 탈출에 성공하였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찾지 못한 헤롯 아그립바는 경비병들을 사형에 처한 후, 해안 도시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한동안 거기에서 지냅니다. 가이사랴에는 일찌기 헤롯 대왕이 지은 호화 궁전이 있었고, 헤롯 아그립바는 거기에 와서 로마제국에 경의를 표하는 여러 행사를 거행하는가 하면, 각종 경기를 벌였습니다(유대고대사 19.8.2 § 343).
또 당시에 헤롯은 가이사랴 위쪽에 있는 해변 도시인 두로와 시돈과 더불어 일종의 무역 전쟁을 벌였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향유하는 도시였지만, 유일하게 쌀을 수입하는 곳이었으며 당시 유대로부터 식량을 구입했습니다(왕상 5:11, 에스겔 27:17 참조). 그런데 무슨 일인지 헤롯과 틀어졌고, 헤롯은 쌀 수출을 중단해 버립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왕의 시종이었던 블라스도를 통해 화해를 도모하고 다시 서로 무역을 하고자 시도했습니다.
헤롯은 이들을 로마 황제 즉위 20주년 행사 날짜에 맞추어 만나기로 하고, 행사 둘째날에 은실로 엮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아침 일찍 행사장에 나타납니다. 이 때 헤롯의 옷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고, 그를 바라보던 이들은 두려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힙니다. 어릴 때부터 로마의 문학과 연설을 익혔던 헤롯은 우렁찬 음성과 논리 정연한 연설로 백성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라고 외칩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람을 마치 신처럼 여기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10장에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났을 때 신에게 하듯 베드로에게 절을 하는데, 그 때 베드로는 “나도 역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고, 14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전도를 하러 가서 지체장애인을 고쳐 주자, 그 곳 사람들이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 왔다.”라고 하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여기자 바울이 펄쩍 뛰면서 군중을 말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매우 많은 신들이 있었고, 전쟁 영웅들을 마치 신처럼 여겼고, 황제숭배를 통해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전통은 하나님만이 왕이시기에 실제 왕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왕으로 여겨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헤롯 아그립바는 사람들이 “신의 소리다.”라고 외쳤을 때, 거절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당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군중들이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잘 처분해 주소서. 우리가 지금까지 당신을 인간으로 두려워했다면 이제부터는 당신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인정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의 다른 사본에는 두로 사람들과 헤롯이 화해했을 때 이렇게 외친 것으로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았던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에 벌레에게 먹혀서 죽고 말았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벌레에 먹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이거나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자들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겼던 권력자가 심판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오늘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샤 VS 아모스]
이렇게 유대-그리스도교 정신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며, 제각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평등정신이 유대 사회에서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델의 아마샤 제사장과 아모스 예언자가 서로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여로보암은 칼에 찔려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그 살던 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언이 아마샤 제사장에게는 왕에 대한 반란을 꾀하는 선동의 말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을 치는 설교를 하지 말고, 이삭의 집을 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도리어 아마샤가 예언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아마샤는 이방 땅에서 치욕스런 죽음을 당할 뿐만 아니라 가정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실제로 아모스의 예언대로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아모스가 이렇게 예언한 이유를 알려면 당시의 상황을 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여로보암 2세를 말합니다. 기원전 8세기 전반에는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이었던 주변 국가들인 앗시리아 제국과 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되었기에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평온하고 안정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선왕 요아스가 남유다 왕국의 힘도 꺾어 놓았기에 당시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로부터 간섭이나 괴로움을 당하지 않았고, 그래서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이나 왕권을 누리며 북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주전 786-746).
한편 국제교역을 활발하게 발전시켜 북쪽으로는 다윗 임금 때의 영토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왕하 14:26의 하맛어귀, 암 6:13의 로드발/카르나임) 즉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태평성대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모스는 여로보암이 칼에 맞고 이스라엘이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것일까요?
문제는 빈부격차에 있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지자 지배계층 사람들은 겨울 별장과 여름 별장을 짓고 상아로 집을 장식하고 호의호식하며 상아로 장식된 침상에서 온갖 사치와 호사를 즐기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셨습니다(3;15; 6:4 이하 등)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삶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류계층의 처지는 너무도 처참하였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여 종으로 전락하였고, 불과 신발 한 켤레 정도의 값에 종으로 팔려가는 등, 그들의 권리는 완전히 짓밟혔습니다(2:6; 8:6). 레위기 25장 39-43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은 그 누구도 동포를 종으로 사고 팔 수 없었습니다. 또 가난하게 된 자를 돕는 것은 율법에서 정한 일이었습니다(신 15:7-11). 출애굽기 23장 6절에서는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살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과 약한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잠언 14:31, 17:5). 이렇게 나라가 부강해졌지만 실제로는 빈부격차가 심화되었고, 사회는 가진 자들의 불의와 부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부패해서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이 강조하는 평등정신도 사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도 잃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오늘 이 말을 살펴보면 당시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그저 밥벌이로 예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 타락이 일상화 되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이런 말에 대응하여 아모스는 자기는 예언자도 아니요.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통해서 예언자를 키워내는 정식 과정이 있었고, 거기에서 예언자 수업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밥벌이를 위한 삯군 목자로 전락했으니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 상태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계속 말합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오.” 즉 아모스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기에 밥벌이를 위해 예언을 하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양을 잘 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예언하라고 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지금 베델의 제사장으로서 “여기는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라면서 아모스를 내쫓습니다. 즉 왕의 권력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샤는 왕실의 입장에 서서 권력을 편들고 있지만, 아모스는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고통당하는 일반 백성들의 편에 서서 불평등을 조장하는 권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하라고 아모스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주목해야할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언제 불러내실까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여러분들이 하실 일들은 무엇인가요? 대학이나 대학원에 가셔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어도 여러분이 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아모스처럼 달려 나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들을 해야 합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세상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풍요로움은 점점 한쪽으로, 더 적은 사람에게 기울고 있습니다. 2017년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 큰 부자(슈퍼리치) 42명이 가진 재산이 전 세계 소득 하위 50%의 재산을 다 합친 것과 같습니다. 2009년에는 380명이었던 것이 8년 만에 42명으로 줄었습니다. 한국도 점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과연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지난 3월 7일 캐나다 퀘벡 주에서는 그 지역 의사와 레지던트, 의대생 740명이 자신들의 급여를 인상하는 것을 취소하라고 주정부에 요구하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이 지역 의사들은 간호사와 병원 사무직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여 있는데도 의사의 임금만 오르는 현실을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히면서 최근 몇 년간 간호사와 사무직의 급격한 임금 삭감 때문에 환자들이 필수적 서비스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간호사 에밀리 리처드는 “지난밤 나는 내가 맡은 층에 있는 환자 70명을 돌봐야 하는 유일한 간호사였다. 스트레스가 너무 커 경련이 일었고 불면증도 생겼다.”는 글을 소셜 미디어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의 연봉만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의사 자신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의료 시스템 자원의 재분배를 통해 시민들의 건강을 증진하고, 노동자를 밀어내지 않으며, 환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했습니다.
오늘날 과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에서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할까요?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들, 가난으로 인해 하루하루의 삶이 고단하고, 이 세상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치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요? 가부장적 사회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남성들에게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한 여성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가난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홀로 빈방을 지키거나 아무도 없는 놀이터와 공터를 오가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노인들에 대한 사회의 냉대가 점점 심해지는 현실 속에서 외로움에 지쳐 있는 어르신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존재여야 하나요? 여전히 돈이 전부이고 돈이 행복이라고 믿으며 경쟁의 정글 속에서 눈을 부라리며 투쟁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상생과 섬김의 도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스티븐 호킹 박사는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별을 올려다보라!”고 말했다는데, 연애 포기, 결혼 포기, 집 포기, 인간 관계 포기, 꿈 마저 포기하려는 청년들에게 우리는 어떤 희망과 소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견디며 다른 방식의 삶을 꾸려 갈 수 있을까요?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세상이 이럴 때, 주님께서는 더욱 자기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아모스는 양을 키우는 평범한 이였지만, 그는 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농부였지만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 어떤 제사장보다, 그 어떤 예언자보다 충실한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아모스 같은 사람이 됩시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예” 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용기도 주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순종하게 하소서. 세상 헛된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주님의 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 시대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시고, 이 지역사회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들을 당신의 존귀한 보좌 앞으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들 각자가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하여 주소서. 열린 문과 넓은 창문이 있는 교회, 세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 세상을 위해 일하고 고난당하며 심지어 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부족한 면들을 용서해 주시고, 너그럽게 판단하고 담대하게 헌신하고, 민감하게 경청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사랑이 없는 곳에 우리가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오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 마음과 물질을 드립니다. 삶과 생각을 드립니다. 우리의 정성을 받아 주소서. 이 예물이 세상을 치유하고 교회를 변혁하는데 쓰이게 하소서. 우리가 물질을 드림으로써 물질로부터 자유하고, 물질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이 물질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선교활동을 할 때에 주님 영광 받으시고, 온 세상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모든 것이 당신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님이 부르실 때 과감히 나가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기회를 꽉 붙드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십시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주님께서 부르실 때 아멘으로 응답하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