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경천사지 십층석탑 반환
日이 140조각 내 강탈한 석탑… 두 외국인 보도로 돌려받아
경천사지 십층석탑 반환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입력 2023.11.09. 03:00 조선일보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VANK)’는 일본인이 약탈했던 국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반환에 힘쓴 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와 어니스트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을 기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약탈 문화유산 반환을 위한 캠페인을 추진한다고 7일 밝혔어요.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어떤 탑이고, 헐버트와 베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140조각으로 잘려 일본으로 실려간 석탑
“지금 뭘 하는 거요, 불탑을 자르다니? 그만두시오!” “저리 비키지 못해?” 1907년 2월, 개성 인근 경천사 절터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높이가 13.5m나 되는 큰 석탑 앞으로 일본인들이 몰려들더니, 석탑을 무려 140점으로 조각조각 잘라 달구지 10여 대에 실어 나른 겁니다. 터무니없는 문화재 훼손과 반출이 버젓이 이뤄진 셈이죠. 이들은 말리려고 달려온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문화재청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긴 했어도, 아직은 주권을 가진 대한제국이 존재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1907년 1월 대한제국 황태자(훗날 순종)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황태자의 첫 번째 아내였던 민태호의 딸(훗날 순명효황후로 추존)이 1904년 세상을 떠난 뒤 윤택영의 딸(훗날 순정효황후)을 아내로 맞았던 것이죠.
이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서 특사로 온 귀족 중에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1843~1939)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천사라는 곳에 대단한 명품 석탑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엉뚱하게도 ‘그 탑을 일본으로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고종 황제를 만나 선물로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나카는 무장한 일본인들을 경천사 터로 보내 무단으로 석탑을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하는 약탈 행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외교 사절이 이런 짓을 한 것도 모자라 “조선과 일본의 우의 친선을 위해 황제로부터 기증을 허락받았다”는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고려 후기에 만든 화려한 대리석 석탑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도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재입니다. 우리나라 석탑은 보통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탑은 특이하게도 대리석 재질입니다. 고려 후기인 1348년(충목왕 4년) 권문세족(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이 지은 이 탑은 원나라 양식을 일부 도입해 우리나라 석탑 양식과 결합했습니다. 곳곳에 부처와 보살, 동물과 꽃, ‘서유기’의 손오공과 삼장법사 등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은 이 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 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 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재 탑골공원에 있는)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베델 “한국 인민이 만행에 항거할 것”
하루아침에 대한제국 영토에 있던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일본인에게 해체되고 반출되는 상황에서, 이를 세상에 알리고 “석탑을 빨리 반환하라”고 요구한 이들은 두 명의 외국인이었습니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였죠.
베델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신문 데일리메일 특파원으로 우리나라 땅을 밟았습니다. 그해 7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우리나라에서 언론 활동을 했죠. 다음 해 신문을 통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고, 고종의 친서를 영국 신문에 게재하는 등 국제적으로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는 항일 활동을 펼쳤습니다.
베델이 발행인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는 경천사지 십층석탑 반출 사건 한 달 뒤인 1907년 3월 7일 이 사실을 특종 보도했습니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 탑을 해체한 뒤 실어나갔다고 한다” “한국 인민은 결단코 그 만행(야만스러운 행위)과 모욕에 항거할 것이다.”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거짓”(4월 13일), “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6월 5일) 등 후속 보도를 이어나갔습니다.
올해 국가보훈부(당시 국가보훈처)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어니스트 베델(왼쪽)과 호머 헐버트의 흑백사진을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색채 사진으로 복원한 모습. /국가보훈부
헐버트, 경천사 터 현장 취재 뒤 해외 전파
석탑 반출 사건을 해외에 알린 또 한 명의 외국인이 호머 헐버트였습니다. 선교사이자 교육자로서 1886년 조선 최초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깨닫고 미국 언론을 통해 홍보하는 일도 했습니다. ‘아리랑’을 서양 음계로 처음 채보(곡조를 듣고 악보로 만듦)하기도 했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특사로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밀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습니다.
헐버트는 석탑 반출 소식을 듣고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경천사 터로 달려가 현장을 촬영하고 주민을 인터뷰한 뒤 자신이 경영하던 월간지 ‘코리아 리뷰’와 일본 영자지 재팬 크로니클, 미국 뉴욕포스트 등을 통해 이 약탈 사실을 알렸습니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헤이그에 가서도 폭로를 멈추지 않았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 모습 찾아
이들의 노력 덕분에 세계 언론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1907년 6월 9일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이 사실을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할 정도였으니까요. 일부 일본 신문조차 다나카를 비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여론의 질타를 받은 다나카는 가져간 탑의 포장조차 뜯지 못했고, 결국 1918년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반환했습니다. 오래도록 경복궁에 있던 이 탑은 1995년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재연구원)로 옮겨져 다시 해체돼 대대적인 보존 처리 작업을 거쳤고, 2005년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로비로 옮겨져 그 온전한 자태를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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