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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 연재를 시작하며
삶과 인물에서 영성의 ‘결정적 순간’을 발견한다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세상에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레츠 추기경
인물로 영성을 만나는 여정
올 한해 인물과 함께하는 영성 이야기를 연재하자는 제안에 응낙한 후에 저의 내면에서 명확하고 구체적인 주제가 형상화되어 나타나기를 주간 내내 기다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물’과 ‘영성’이라는 각별한 말들이 만나며 빚어내는 풍경은 선명하게 그려보기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성’중일따름입니다. 다만 이 연재의 여정이 끝나갈 즈음에는, 가능성의 조각에 불과하던 영감들이 장관을 이루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나리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이제 저는 독자분들을 한해 동안 ‘인물을 통해 영성을 만나는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식견과 내공이 부족한 제가 감히 안내자로 나섭니다만, 사실 저는 이제 비로소 스스로가 영성의 ‘별자리’를 더듬거리며 그리는 일을 시작하였고, 감히 그 미완의 작업현장을 보여주고 나누는 용기를 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성인전을 읽어가거나 영성사를 공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처음부터 일체의 흠잡을 곳 없는 영성의 모범답안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을 관통하고 간 영성의 빛나는 순간과 그것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만나는 것을 다름 아닌 ‘나의 인생’의 ‘각별한 순간’으로 삼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은 영성의 순간은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삶과 인격과 작품을 통해 드러난 한 인물을 만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성인이었든, 아니면 사목자였든, 신비가였든, 실천가였든, 예술가나 문필가였든, 아니면 세상 속에서 세속의 생업을 가진 사람이었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평화와 온유를 잃지 않았던 이들이든, 아니면 회의와 절망과 분노의 심연을 통과한 사람이든 다를 바 없습니다. 한 인물이 자신의 인생과 인격 안에서 영성의 빛나는 순간을 마주했다면 그를 통해 그 빛의 흔적은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다 하더라도 참된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많은 이들이 은은하게 빛낸, 혹은 폭죽처럼 터트렸던 영성의 별빛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제 나를 어두운 밤하늘로 놓아둡니다. 그리고 나를 사로잡은, ‘그들이’ 별빛처럼 빛나는 그 순간들로써 나 자신을 밝게 비추어 보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내 마음의 밤하늘에 놀라운 빛으로 거듭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상극일 것 같은 이들이 우리 앞에서 함께 서로의 광채를 더해주는 광경도 보게 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고립되어 상관없어 보였던 누군가의 빛나는 순간들이 어느 순간 소실점과도 같은 한 점으로 모여들어가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워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영성의 ‘빛나는 순간’이 시작되었다는 전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별같은 순간과 결정적 순간
글의 시작에 소개한 두 개의 인용구들은 ‘인물’과 ‘영성’에 대한 생각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 처음부터 저의 머릿속에 떠올라 영성의 ‘별자리’를 그려보도록 인도한 나침판과도 같은 문장들이었습니다.
‘별 같은 순간’이라는 말을 저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 ‘인간의 별 같은 순간(Sternstunde der Menschheit, 우리말로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번역)’의 머리말에서 따왔습니다. ‘별 같은 시간, 혹은 순간’이라는 절묘한 표현을 거의 새로이 창조하고 유명하게 한 사람이 바로 작가 자신입니다. 그는 어떤 예술가도 내내 예술가로 밀도 있게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이며 ‘아주 드물고도 짧은 영감의 순간’에 창조는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역시도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그에 의하면 역사상의, 그리고 아마도 각 개인에 있어서의 별 같은 순간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 들어가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뾰족한 꼭짓점 하나에 집약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앞으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될 중대한 결정이 어느 한 날짜 혹은 어느 한 시각으로 모아지는, 그토록 극적으로 응축된 운명적인 사건이란 개인의 삶에서도 드문 일이고 역사의 흐름에서도 드문 일이다. 여러 시대와 다양한 영역들에서 뽑아낸 몇 개의 별 같은 순간들을 -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그러한 순간들이 별처럼 빛나면서 지나가 버린 일들 위에서 변함없이 빛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 나는 여기서 기억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별들의 시간, 별과 같은 순간이 경이로운 것은 그것이 ‘결정적 순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정적 순간의 포착을 본질로 삼는 것이 사진예술이며, 그러한 사진의 본질을 가장 탁월하게 성취해낸 위대한 사진작가로 꼽히는 사람이 프랑스의 앙리 카르티에 - 브레송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진 에세이 모음인 ‘영혼의 시선’에 실린 ‘결정적 순간’이라는 글에서 “세상에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는 렛츠 추기경 말을 제사로 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저에게, 한 인물이 분투한 결과인 삶과 인격과 작품 안에서의 빛나는, 또는 작열하는 순간이 얼마나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지를 일깨워줬습니다. 영성이란 그처럼 결정적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무관심과 권태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깨어있게 하는 실존적인 주제를 발견하는 힘을 뜻할 것입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주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있다. 가장 사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세상만사에는 다 주제가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민감하고 우리가 느끼는 것에 솔직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요컨대 우리가 감지하는 것과의 관계 위에 자리잡기… 주제는 사실들을 모아 놓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실들 자체는 아무런 흥미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진짜 사실들을 그 깊이와 함께 포착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러 인물들을 관통한 영적인 순간들을 만나려 합니다. 그 만남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영성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일생일대의 ‘주제’를 발견하고 생생하게 형상화 시키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 에디트 슈타인
어두운 세상, ‘숨은 삶’에서도 잃지 않았던 주님의 빛
철학자 에디트 슈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순교자(1891~1942, 축일 8월 9일)는 지금은 폴란드에 속해있지만 당시는 독일이 지배하고 있었던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도시 브레슬라우(오늘날은 브로츠와프라고 불리움)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프로이센 시대 이래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그녀는 교양과 철학에 심취하면서 어느덧 자신의 민족의 신앙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신에 무관심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녀는 언제나 매우 관조적이며, 진리를 추구하는데 열정적인 성품과 성향을 가진 이였습니다.
내면의 빛을 찾고자 하는 그녀의 갈망은 그녀를 철학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실지로 그녀는 철학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많은 성취를 해냈지만 삶에서 만나는 실존적 문제들과 철학적 이성에서 해명되지 않는 영적 갈망들이 점점 자라나면서 그녀는 근원적인 회심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신비와 일치하는 영성적 삶으로 다가갑니다. 이렇게 시작된 영적 여정은 마침내 쾰른 가르멜 봉쇄 수녀원 입회로 결실을 맺고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할때까지 그녀는 가르멜 수녀로서 여덟 해 동안 봉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가 남겨놓은 철학자로서의 자취, 그녀의 회심의 계기들, 수도자로서 살던 시절의 영적이고 정신적 유산을 음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물과 영성’이 연재되는 가운데 몇 번 다시 에디트 슈타인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다만, 그녀의 삶의 마지막 날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주님 공현의 신비를 묵상하며 수도원 자매들과 나눈 묵상을 음미하고자 합니다. 대림에서 성탄, 그리고 주님 공현에 이르는 강생의 신비를 전례주년의 시간안에서 체험한 우리에게 에디트 슈타인의 묵상은 그러한 신비를 실제로 살아가고 주님 섭리에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마지막 날들
“1942년 8월 2일 오후 5시, 에히트 가르멜 수녀원의 수녀들이 성당에서 시편을 읊고 있을 때 두 명의 독일 장교가 원장을 면회실로 불러 베네딕타 수녀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들이 스위스 입국 비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원장은 베네딕타 수녀를 보냈다. 독일 장교는 5분 내로 수도원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베네딕타 수녀는 말했다.
“봉쇄규칙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장교가 대답했다.
“그런 것 따윈 집어치우고 나오시오.”
베네딕타 수녀는 조용한 어조로 “체포해야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교는 원장을 불렀다. 베네딕타 수녀는 가대로 돌아와 성체 앞에 엎드렸고, 원장은 장교와 협상했다. 장교는 말했다.
“슈타인 수녀는 스위스 비자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나 장교는 “그런 모든 것은 나중에 결말짓겠습니다. 담요 한 장과 3일간의 양식을 주시오”라고 했다.
로제 언니는 봉쇄 문 밖에 무릎을 꿇고 원장의 마지막 축복을 받았다. 베네딕타 수녀는 수방에서 내려와 수녀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장 드 파브레그, ‘성녀 에디트 슈타인’ - 가톨릭 출판사 - 중에서)
이렇게 에디트 슈타인은 자신이 혈연으로 속해 있었던 유대민족의 운명에 함께 참여하는 수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장 드 파브레그는 위의 책에서 에디트 슈타인이 체포된 후 원장에게 간신히 전한, 날짜가 적혀지지 않은 메모를 인용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녀가 자신의 고난의 길에 내적으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장수녀님의 배려에 맡겨드립니다. 저는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무게로 고통당하기 시작할 때만이 십자가의 학문(Scientia cruces)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이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흠숭하나이다, 십자가여 유일한 희망이시여(Ave Crux, SpesUnica!”).
숨은 삶과 주님 공현의 신비
일찍부터 에디트 슈타인의 인격과 운명이 인류와 교회에 갖는 의미를 주목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녀를 1998년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이로써 그녀가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의 시대에 자신의 삶과 생명을 다해 정신과 영적신비의 위대함을 증언한 사실이 다시금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세상의 지성과 영적 신비의 학문의 화해와 폭력에 희생당한 20세기 인류 구성원 모두를 위한 희생제물로 이해한 이들의 직관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교회는 공적으로 확인해 주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이 사랑하는 언니 로제와 함께 체포되고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독가스 실에서 숨질 때까지, 삶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그녀가 생각하고 체험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전해주는 글은 없습니다. 간간히 그녀의 의연하고 평화스런 모습을 증언하는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들려올 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치가 유대인 박해를 본격화하고, 쾰른 가르멜 수녀원 수녀로 있던 그녀가 생명의 위협 때문에 네덜란드 에히터의 가르멜 수녀원으로 1939년 피신해야 했을 때부터 그녀는 이러한 순간을 마음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의 공현 대축일을 위한 묵상은 우리의 마음을 더 깊이 파고듭니다.
당시 수녀원 원장은 중요한 축일에 수녀님들을 위해 영적 담화를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원장의 부탁으로 1940년에서 1942년 까지 세 번을 이어서 공현 대축일에 자신의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1940년, 그녀가 독일어로 쓴 묵상은 그녀가 수난을 예감하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작은 ‘나타남(공현)’이 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묵상은 처음 읽었던 순간부터 저를 사로잡았었습니다. 그 시작 부분을 함께 나누며 주님의 공현이 우리 각자가 세상이 어두울 때, 숨은 삶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꺼지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는 작은 ‘공현’의 촛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어둡고 차가운 12월의 날들에 대림초의 따스한 불이 켜지며 신비스러운 밤에 신비스러운 빛이 비치면, 위로하는 생각이 우리를 깨웁니다. 하느님의 빛,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비추시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그분께 불충하고 그분을 잊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당신의 창조에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세상의 어둠이 그분의 빛이, 자신에게 파고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그 빛이 시작될 수 있는 몇개의 자리를 어두운 세상 안에서도 발견하십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 존 헨리 뉴먼 추기경
“한 걸음만 지켜주소서” 고백했던 겸손의 영성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존 헨리 뉴먼의 재발견
영국의 복자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은 온전히 19세기에 자신의 삶을 보낸 인물이지만 오히려 20세기 이후 교회 학문과 신심에 있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정신적, 영적 유산은 현대교회의 삶과 신학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2010년 9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한 뉴먼 추기경 시복은 그의 교회와 신학에 대한 기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교의의 발전’ ‘양심’ ‘신앙의 인식’ 등 주요 신학적 주제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은 새로운 상황에 처한 교회가 전통과의 연속성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신학의 문을 열 수 있게 한 중요한 영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학자로서의 자의식을 앞세우기보다는 한 사람의 신앙인, 구도자, 목자로서의 진실하고 경건하며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충실했던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매우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으면서도 결코 주지주의나 현학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찍부터 초대 교회 교부들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저술을 깊이 연구할 뿐만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 배우고 닮으려고 했습니다. 사실 교부들에 대한 탐구는 옥스포드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5세에 성공회 사제로 서품되었던 그가 긴 영적 여정을 거쳐 1845년 10월 9일 45세의 나이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한 내적 동인이었습니다. 이후 가톨릭 사제이자 오라토리오 회의 책임자로서 빛나는 학문적 업적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삶과 인격으로서 감화를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비교될 정도로 영성적 깊이와 진실성을 담고 있는 그의 자서전 「나의 생애를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은 신앙과 삶의 모범이 되는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에 귀의한 후 성공회 측에서의 비난뿐 아니라 때로는 가톨릭 안에서도 개종의 진실성과 신학의 정통성에 대해 의심하는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인간적, 영적, 학문적 위대함은 1879년 교황 레오 13세가 추기경이라는 명예를 수여함으로써 교회내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뉴먼 추기경의 삶과 저술에 담긴 통찰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영적 지평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몇 번 더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다만 뉴먼이 젊은 시절에 쓴 너무나도 유명한 신앙시 하나를 음미하면서 그 시의 배경이 되었던 그의 젊은 시절 체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칠리아, 열병 그리고 ‘구름기둥’
존 헨리 뉴먼은 유년기와 청년기 동안 세 번에 걸쳐 생명에 위협을 받을 만큼 큰 열병을 겪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심각했던 육체적 병들을 그 당시에 자신에 처했던 ‘영적 위기’(spiritual crises)와 그런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각고의 투쟁, 그리고 마침내 체험하게 된 회심들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습니다. 먼저 열다섯 살 때 겪은 열병은 그가 당시 영국 사상계를 지배하였던 무신론으로 이끄는 회의주의나 과학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찾았던 체험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 때 만난 심각한 열병은 당시에 쏠리고 있던 과도한 주지주의와 지적인 야심에서 자유로워지는 회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번에 걸친 몸과 마음앓이 보다 훨씬 심각하게 생명을 잃을 고비를 겨우 넘겼던 체험이 1933년 젊은 성공회 신부로서 처음으로 영국 땅을 떠나 지중해 지역으로 여행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때 겪은 심각한 열병과 회복, 그리고 그런 과정 중에 얻은 깨달음들은 그가 평생의 ‘삶의 태도’를 형성하게 되는 중요한 영적 순간이었고 훨씬 후에 가톨릭 교회의 품에 안기게 되는 순간을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
1932년 친구 프루드와 그의 아버지와 동행, 지중해로 여행을 떠난 존 헨리 뉴먼은 로마를 포함하여 ‘실제’의 가톨릭 세계와 문화를 민낯 그대로 접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 이듬해 봄, 동행자들이 모두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지방으로 여행을 계속하기로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장티푸스 추정의 열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고비를 넘기고 계속해서 여행을 마친 후 팔레르모에서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배에 오릅니다. 팔레르모에서 마르세이유를 가던 중 보니파치오 해협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일주일 간 머물러 있을 때, 존 헨리 뉴먼은 자신이 시칠리아에서 겪은 내밀한 내적 체험을 비추어주는 세 개의 연으로 된 ‘구름기둥’(The Pillar of the Cloud)이라는 시를 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구름기둥’으로 제목을 삼은 이 시는 뉴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이끌어주소서’(Lead, kindly Light)라는 성가 가사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인도하소서, 온유한 빛이여”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의 구절 하나하나는 에이버리 덜리스 추기경이 뉴먼에 대한 자신의 명쾌한 해설서에서 적절히 지적했 듯 앞으로 펼쳐질 그의 삶의 여정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과도 같습니다.
“인도 하소서, 온유한 빛이시여, 저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저를 이끌어주소서!
밤은 어둡고 저는 집에서 멀리 떠나왔으니, 저를 이끄소서!
저의 발을 지켜주소서. 나는 먼 곳을 보기를 원하지 않나이다, 다만 한 걸음이면 족하나이다.
저는 전에는 그러하지 않았고, 당신께서 저를 이끄시기를 기도하지도 않았나이다.
저는 그저 나의 길을 바라보며 선택하는 것을 좋아했나이다. 그러나 이제 나를 인도하소서!
저는 화려한 날을 사랑했으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만심이 저를 지배했나이다. 이제 지난 세월들을 헤아리지 마소서.
그토록 오래 당신의 권능이 저를 축복하시었으니, 앞으로도 여전히 나를 이끄시리라 확신하나이다.
늪지와 진창을 지나, 암벽과 급류를 넘어, 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리고 아침이 밝아, 제가 오래전부터 사랑했으되 그 사이 잃어버리고 말았던 당신의 천사가 미소지으며 맞이하리다.”
그가 이 시를 쓰고나서 자신의 출판되는 원고에 7년이 지난 후에야 수록한 것을 보면 그에게 이 시에 암시되는 내적회심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내밀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먼 곳을 원하지 않고, 한 걸음이면 족하다는’ 그의 고백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뉴먼의 젊은 시절, 평생을 비출 영성의 빛나는 순간에 만난 이 깨달음을 우리도 새해에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길잡이로 삼았으면 합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 알프레드 델프 신부 (상)
나치 폭력 하에서 내면적 자유의 고귀함 지켜내
“자유는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알프레드 델프
감옥에서 피어난 자유의 영성
어둠이 깊은 시대에 놀랍게도 그 어둠의 야만과 폭력, 그리고 유혹으로부터 내면의 자유와 정신의 고귀함을 지켜내고 그 인격의 진면목을 보여준 빛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대하며, 비로소 스스로 설정해놓은 정신적 삶에 있어서의 안이한 한계를, 세상의 불의와 위협과 타협하고 외면했던 마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내적 자유와 정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정신적, 영적 힘을 하느님과의 영혼 깊은 곳에서의 만남을 통해 길어낸 신앙인들, 증거자들의 글과 행적을 대하면서 시대와 대면하는 살아있는 영성이란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히틀러와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양심과 자유와 신앙을 지키려 하다가 체포되어, 비밀경찰의 가혹한 심문과 거짓된 재판 끝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죽어간 독일의 예수회원 알프레드 델프(1907~1945) 신부 역시 그러한 신앙인이자 증거자였으며 자유의 참의미를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왜 정신적 존재인가를 삶으로, 글로써 보여주었습니다. 1944년 7월 28일 체포되어, 이듬해인 1945년 2월 2일 처형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그가 남긴 옥중 수기는 그의 깊은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옥중 수기’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In Angesichtdes Todes)란 책으로 1947년 출간되어 세대를 거듭하여 오랫동안 특히 독일어권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감명과 영향을 주었으며 1988년에 간행된 그의 전집에는 ‘IV권: 감옥에서’라는 이름으로 실려있습니다. 2007년에는 같은 내용이지만 ‘묶인 손으로’(Mit gefesselten Handen)라는 제목으로 당시 독일 주교회의 의장 칼 레만 추기경의 서문과 함께 출판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제목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프레드 델프가 평소 좋아했고 자신의 방에 그 사진을 붙여놓았던 르네상스 시대 독일의 유명한 조각가 리멘 슈나이더의 작품인 ‘사슬에 묶여진 손’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감옥에서 그가 처했던 상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번호 부터 세 번에 걸쳐 알프레드 델프 신부가 옥중에서 남긴 일기와 묵상 중 특히 생애의 마지막 공현 대축일을 보내며 적은 묵상과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하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묵상을 중심으로 그의 영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술에 담긴 깊은 영성과 통찰력 있는 시대진단은 지나간 어두운 시대에 대한 역사적 증언을 넘어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우리들에게도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묶인 손으로’ 그해 겨울, 대림에서 주님 봉헌 축일(2.2)의 시간 사이에 그가 남긴 신앙과 영성의 귀한 유산을 접하며 이번 겨울에 우리 스스로의 내면과 실천을 돌아보며 용기와 위로를 얻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 겨울
원래 개신교적 종교적 배경에서 자라났던 알프레드 델프는 청소년기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습니다. 1926년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1936년에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한 후 다시 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했지만 나치 정권의 등장 후 본격화된 가톨릭 교회, 특히 예수회에 대한 정부의 적대감과 압박 때문에 원래 계획한 뮌헨 대학에서의 계속적인 철학 연구를 포기하고 예수회가 발간하던 시대 비판적인 잡지 ‘시대의 소리’(Stimmen der Zeit)에서 소임을 하게 되며, 1939년부터는 편집장을 맡기도 합니다. 한편 1941년에 나치 정권은 아예 이 잡지의 출판을 금지시킵니다. 1939년부터 1944년 7월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그는 뮌헨 근교 보겐하우젠의 성혈 성당에서 본당 신부로 봉직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여러 번 유대인들이 스위스로 망명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글을 통해 그 시대의 ‘하느님을 알아본 능력을 잃은’ 사람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오는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인본주의를 추구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모색은 그가 관구장 제의에 의해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 백작을 주축으로 하는 크라이스아우어 모임에 함께하면서 심화됩니다. 그들은 히틀러 이후 새로운 정신적 질서의 건설을 위해 매우 심도 있게 견해를 나누었는데, 델프 신부는 새로운 사회 안에서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에 기초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크라이스아우어 모임과의 공동작업은 결국 알프레드 델프 신부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건 모험이 되었습니다.
1944년 1월 몰트케 백작을 포함한 여러 크라이스아우어 모임 일원들이 체포되면서 델프 신부의 신변도 위협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944년 7월 20일 독일군 장교였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 등이 중심이 되어 ‘작전명 발퀴레’란 이름으로 히틀러 암살이 시도되지만 실패하고, 바로 그 다음날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주요 관련자들이 베를린에서 총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밀경찰은 크라이스아우어 모임을 나치 정권 전복을 위한 광범위한 시도 중 하나로 옭아매려 했고, 결국 7월 28일 델프 신부는 보겐하우젠 성당에서의 미사 후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포함한 가혹한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원했던 암살 사건과의 관련은 입증하지 못했지만, 비밀경찰은 그와 크라이스아우어 모임의 동지들을 나치 이후 국가의 질서를 논의한 것 자체를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하고 사형으로 몰고 갑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깊은 신앙을 가진 가톨릭과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무신론적이고 반인간적인 나치정권과 다른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 사실이 그들을 더욱 자극하였습니다.
예수회 사제였던 델프 신부에게 정권과 재판관들이 보여준 적대감은 이러한 정치적 재판이 사실상 비인간적 정권과 그리스도교 정신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충돌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악명높은 재판관 프라이슬러가 이끈 선동과 거짓증언, 교활함으로 가득 찬 재판이 진행되었고, 그는 마침내 1945년 1월 11일 사형판결을 받습니다. 몰트케 백작 등이 1월 23일 처형된 것과는 달리, 델프 신부에 대한 사형집행은 한동안 유예되었고 동료에 대한 걱정과 애도, 감형에 대한 희망과 처형에 대한 각오 등이 그의 마음을 채웠던 그 마지막 날들이 얼마나 극단적인 인내와 용기를 요구했던 시험의 시간이었는지는 그가 가명을 써서 협조자들 도움으로 비밀리에 외부로 전한 쪽지들에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침내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그는 베를린 플뢰첸제에 있는 감옥의 교수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수형생활과 임종을 돌본 페터 부흐홀츠 신부는 그의 평온하고 의연한 마지막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델프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순간에, “이제 반 시간 후면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이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델프 신부는 이미 자신의 수고에, “우리가 죽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언젠가 보다 더 잘 살수 있어야 한다. 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라고 적어두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처형 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베를린 외곽에 뿌려졌습니다. 무덤 대신에 기념비가 그가 봉직한 본당 주변에 세워져 그를 기억하게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24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5) 알프레드 델프 신부 (중)
처형 앞두고 광야 체험… 희망과 자유 깨달아
옥중에서의 최종 서원
1944년 7월 28일 체포된 후 알프레드 델프 신부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게슈타포에 의한 여러 차례의 잔인한 구타를 동반한 가혹한 취조나, 재판이 진행되고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베를린 테겔 형무소에서 체험한 극심한 고립감, 대부분의 시간을 손이 묶인 채로 있어야 했던 고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했고, 마침내 8월 15일로 결정된 최종서원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염려가 그를 초조하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서원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상황들이 그의 마음을 매우 어둡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고뇌를 힘겹게 견디며 그는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을 맞이하는 9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그는 성모님의 전구로 주님께서 위로와 자비의 징표를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축일 전날, 선의의 협조자들이 세탁물에 숨겨 전해준 편지를 통해, 최종서원을 감옥의 면회실에서 비밀리에 예외적으로 실행키로 장상들이 허락했습니다. 그 날짜는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려 공교롭게도 12월 8일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월 8일, 마침내 일반 면회로 주어진 시간에 감옥의 면회실에서 극적으로 소망하던 최종서원을 발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모습을 그 자리에 함께했던 타텐바흐 신부는 몇 년이 지난 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델프 신부가 8일 아침에 너무나 감격한 결과, 서원을 발하는 동안 거의 자기의 몸을 가누지 못한 것이 놀랄 일이겠는가? 그것은 또한 실로 진기한 의식이었다! 책상에 감독하는 관리가 앉아있고, 그 우측에 델프 신부가 수갑을 푼 상태로 회색빛 민간인 복을 입고 서 있고, 책상의 좁은 측면에 내가 있었다. 대화는 제삼자가 배석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방해를 받았는데, 먼저 가족들과 예수회원들의 동정에 대해 얘기가 오갔다. 이 모든 소식들이 이미 델프 신부를 깊이 감동시켰다. 그리하고 나서 변호사 선임에 관한 사무적인 이야기를 마쳤다. 대화가 서원 문서에 서명하는 일에 이르자 델프 신부는 완전히 입을 다물더니 자기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서명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자 비로소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서원문장을 혼자 읽은 다음 펜을 쥐고는 빠르고 힘있게, 또렷하고 강한 필체로 서명했다. 델프 신부는 남의 눈에 띌 정도로 애를 써 자신의 감정을 자제해 가면서 원문을 큰소리로 겨우 낭독할 수 있었다.(마리안네하피히 편저, 알프레드델프, 김용해 옮김, 시와 진실, 2011)”
이렇게 그날의 절절한 광경을 증언하면서 타텐바흐 신부는 또한 델프 신부가 그날 자신의 감회를 직접 적어놓은 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8일이 되기 전 여러 날을 나는 계속해서 자비의 소식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 결과 나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나는 최종적으로 나의 생명을 바치겠노라 약속했다. 이제 모든 외적인 사슬들은 나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님이 나를 사랑의 사슬로 영광스럽게 하셨기에.”
주님공현대축일 묵상
최종서원 이후 델프 신부가 감옥에서 보낸 대림과 성탄, 공현을 지나 마침내 그가 처형당하는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에 이르는 전례적 시간은 그에게는 고통 속에 죽음을 시시각각 대면하고 준비해야 하면서도 깊은 신앙의 희망을 발견하는 진정한 의미의, ‘광야’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련과 정화의 시간에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체험한 자유와 하느님과의 만남을 네 번의 대림절 주일 묵상과 성탄 밤의 묵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제 함께 음미하고자 하는 주님공현대축일 묵상에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사형 판결이 예상되는 재판을 이틀 앞두고 맞이한 공현대축일에 오직 주님 외에는 의지할 곳도 믿을 곳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이렇게 마음의 다짐을 적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밝히실 것이며 나에게 나 자신으로부터 나와 당신께로의, ‘절대적 도약’을 요구하신다. 나에게도 건너야 할 광야가 나타난 것이며, 한 가공할 폭군이 손에 칼을 들고 위협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과 인격과 신앙을 하나로 모아들이는 진실되고 열정 어린 내면에서 오는, ‘말’을 간절하게 소망하고 추구하고 기도합니다. 그는 오직 그러한 말로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벗들에게 증언하고 주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내적 열망이, ‘자유의 법’에 대한 갈망임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진 이번 주간을 보내며 나는 만일 한 인간이 자신 내면의 큰 공간과 내면의 자유를 지닐 능력이 없다면,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관계와 폭력의 법칙에 굴복하게 되는 일이 거듭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불가침적이고 건드려질 수 없는 자유의 공기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다면, 그는 모든 안녕과 주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처분 가능한 대상, 숫자, 통계치에 불과하다.”
그는 광야의 시련과 시험을 이겨낸 동방에서 온 세 사람을 기억하는 축제가 전하는 복음이 바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자유의 법’이라는 것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인간 자유가 탄생하는 ‘순간’은 다름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 순간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님이신 하느님과의 자유롭고 조건 없는 만남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얻게 된다. 모든 다른 것들은 보잘것없는 진흙 위에 세워진 오두막에 불과하고 어느 날 무너져 폐허가 돼버린다. 왕좌를 보며 두려워하지 말고 구유에 경배하라.”
이제 그는 자유를 묵상하며 비로소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두 가지 근원어, ‘경배하나이다’(adoro)와 ‘받으옵소서’(suscipe)에 도달합니다. 그는 이 두 개의 말이야말로 인간 자유의 두 가지 근원어라는 것을, 동방박사들이 경배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와 선물을 봉헌하고 빈손을 내어놓는 행위는 자유로운 인간의 근원적 행위라는 것을 깊이 묵상합니다. 이제 그는, 자유의 법이라는 약속은 은총의 법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절대자에게 내어놓은, 반드시 인간에게 성취되리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광야는 결코 인간의 최종적 운명이 아니다. 광야는 이 위대한 자유를 위한 단련의 시간이다. 우리는 반드시 광야를 건너게 될 것이다. 나는 안다. 나는 홀로가 아님을. 은총의 법이 작용하고 있음을… 나는 안다. 별이 광야 위에 뜰 것임을.”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3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6) 알프레드 델프 신부 (하)
참된 자유는 주님께 모든 것 맡길 때 얻게 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알프레드 델프 신부가 옥중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에 남긴 감동적인 묵상글들은 모두 그가 오랫동안 삶과 사유를 통하여 고민한 주제인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모아집니다. 그는 자유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사람다움의 참뜻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자유를 얻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데에 있다는 것을 힘있게 주장합니다. 자유는 몰아적 헌신과 은총의 체험 속에서 그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며,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타인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만남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배할 줄 아는 휴머니즘’, ‘하느님의 섭리와 이끄심을 신뢰하는 휴머니즘(Theonomer Humanismus)’의 길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옥중에서 남긴, 깊은 영성적 직관과 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묵상은 그의 이러한 확신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묵상은 나치의 패망 이후 그가 봉직하던 예수회 잡지 ‘시대의 소리’의 복간 첫 호(1946년 10월호)에 실리면서 비로소 처음 공개되었고, 그가 옥중에서 남긴 다른 글들과 함께 델프 신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주님의 기도’ 묵상 중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대목을 통해 그가 말하는 참된 사람됨의 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원천으로서, 이끄심으로서, 자비로움으로서 깨닫고 부르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모든 격랑과 시련 안에서 인간으로서 성장하게 하는 내적인 힘이다… 모든 시련과 출구 없는 막막함과 버려짐 속에서도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아버지다움, 자비로움, 역경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 고요하지만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무리 버림받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로 가는 길을 내신다. 세상의 모든 다른 것들은 오직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에 도움이 될 때만이 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우리(의)
“… 그럼에도 예전부터 알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이 홀로 있음은 좋지 않다. 바로 이러한 (고난의) 시간에, 더욱! 인간은 그래서 다른 사람이 매달려 있는, 사다리의 다음 계단을 향해 외쳐보고자 시도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의 목소리로 소리를 내기엔 너무 높은 곳이다. 인간의 말은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이 기도의 말 속에서) 갑자기 그 단절이 극복된다. 하느님께로 가는길, 하느님을 통해 가는 길은 언제나, 그리고 이미 인간에게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진리가 분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경배하고 믿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고 일치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사람들 모두의 중심인,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며 말씀을 거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비로소 서로에게 인간이게 하시며 공동체를 공동체이게 하신다.”
하늘에 계신
“오직 초월과 피안의 영역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처신과 창조력을 주는 세상과의 거리감, 진심 어린 경외심과 열려있는 순명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근본 구조를 이룬다. 오직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곳을 향한 시선과 결심만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지 못하기에 오늘날 사람들은 이처럼 대중과 대상으로만 취급되며, 삶에 있어 무력하고, 인간의 근본질서와 근본인식에 있어 그토록 무능한 것이다… 사람은 분명 개인적 자아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러나 그 자아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대화 없이 홀로만 있다면, 어느새 얼음같이 차갑고 죽음과도 같은 고립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열고 실재에 다가가게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절대자와의 대화이다.
단지 피안과 초월의 이상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인격적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참된 살아있는 삶의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대화 속에서 인간은 경배, 경외심, 사랑, 신뢰라는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근본 가치들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절대자와의 대화가 결여된 모든 열성과 진지함과 투신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결국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하늘이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가장 큰 행복과 충만함을 감지하게 된다. 이 하늘은 결코 일차적으로 어떤 공간이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시며, 하느님과의 만남을 뜻한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이는 하늘에 사는 이이다.”
하느님의 섭리와 이끄심에 마지막까지 자신을 맡기며
이처럼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 타인을 향한 헌신 속에서 자유와 생명력과 참된 인간다움이 있음을 감옥에서도, 처형 당하는 순간까지도 깨닫고 증언했던 알프레드 델프 신부의 깊은 영성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섭리와 이끄심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자라났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그가 사형판결을 받은 날 적은 그의 작별의 글에서도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 유언과도 같은 이 글을 읽으며 우리 역시 올 한해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자유는 주님의 손길에 대한 의탁에서 시작된다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희망해 봅니다.
“이제 나는 아직 생명이 붙어있는 한, 그동안 이 묶여진 손으로 자주 해왔던 ‘축복’을 더 기꺼이 더 많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낼 것입니다. 이처럼 위기와 고통을 겪는 이 나라와 이 민족에 축복을. 교회에 축복을. 부디 그 안에 다시금 순수하고 투명한 샘물이 흐르기를. 수도회에 축복을. 주어진 본연의 사명에 몰아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올곧고 의연하며 자유로이 본연의 자기 자신에 머물 수 있기를. 나를 믿어주었고 신뢰해 줬던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가 옳지 못하게 대했던 이들에게도 축복을. 나에게 그토록 자주, 또 과분하게 좋은 사람이었던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나의 연로하신 부모님이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시도록 도와주시고, 여러 가지로 돌봐주세요. 모든 것은 주님이신 하느님의 자애로운 보호 안에 있겠지요. 아무튼 나는 이곳에서 주님이신 하느님의 섭리와 이끄심을 진실되이 기다리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그분이 데려가실 때까지 그분을 신뢰하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이 운명이 결코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도록 힘껏 애쓸 것입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7) 헨리 나웬 신부 ①
“행복은 성공의 사다리를 ‘내려오는’ 길에 있다”
영성
헨리 나웬(Henri M. Nouwen, 1932~1996) 신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계를 넘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위로와 깨우침을 주는 대표적인 영성가입니다. 이미 고전이 되었다 할 「상처입은 치유자」나 「탕자의 귀환」을 포함한 그가 남긴 40여 권에 이르는 영성 저작들은 묵상의 깊이와 심리학적 이해, 섬세한 감성, 사려 깊은 표현들과 함께 저자 자신의 삶의 고민과 흔들림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진솔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저서들은, 1996년 그가 심장마비로 타계한 지 20년이 된 지금도 낡은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 여기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같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외적인 풍요와 쾌락, 화려함의 뒤편에서 현대인들이 겪는 불행감과 불만족,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움, 성공과 권력에만 매달리는 마음의 병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가 현대인들의 ‘깨어진 마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바라보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이러한 깨어진 마음, 흔들리는 감정, 올라가기 위해 버둥대는 삶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많은 인정과 성공, 정서적 친밀감에 매달릴 때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함과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오직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생 여정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내려오는’ 길에 있으며 그것이 또한 예수님 십자가의 길이 보여주는 신비이자 모범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이러한 진리를 머리로서만 알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면서 공허감, 실패, 집착, 분노와 건강하지 못한 자기연민 등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민하게 대면한 사람이었고, 각고의 시간 끝에 한발씩 치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삶의 여정을 거쳐 몸과 마음으로 이러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저서에서 잘 보게 됩니다. 책들은 그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과 결단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이 점이 우리에게 그의 글들이 그토록 깊은 감동과 귀중한 영적 도움을 주는 이유일 것입니다.
삶의 여정과 죽음, 그리고 마지막 여행
헨리 나웬은 1932년 네덜란드 네이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는 것을 꿈꿨고, 마침내 1957년 25세 젊은 나이에 네덜란드 유트레흐트 교구의 알프링크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됐습니다. 서품 후 네덜란드 네이메헨 가톨릭 대학에서 심리학 공부를 마친 후, 미국에서 심리학 연구를 심화하고 사목신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킨 자신의 식견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심리학 영역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인식들을 신학과 사목, 신앙 안에서 사려 깊게 또 유익하게 활용하는 길을 모색하고 시험하며 현대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자신의 영성 토대를 튼튼히 했습니다.
그의 저술과 강의와 강연, 세미나는 많은 관심과 높은 평판을 얻게 되었고 이제 그는 학자이자 저술가로서 경력의 가파른, ‘올라가는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는 40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한 외국인 사제이자 심리학자로서 이미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험을 거쳐, 예일대학 교수가 되었고 저서는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함 속에서 그는 자신 안에 상처와 공허가 깊어가고 있음을 점점 감지하게 됩니다. 일찍이 자신의 교구를 떠나 외국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부터 뿌리가 단절된 근원적 외로움이라는 짐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자주 대학이라는 보호받는 공간 안에서 “학적 언어로 영성과 사목신학을 펼치는 것이 일종의 자기모순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더욱이 자신의 강의와 강연, 저서에 쏟아지는 찬사와 인정에서 행복을 찾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느끼는 상실감, 또한 찬사를 얻지 못할까 보이지 않게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불안감, 순간의 찬사가 지나간 후 홀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고독감과 공허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갈망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가의 범위를 벗어나, 스페인어를 배운 후 당시 독재정권의 억압 하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던 남미로 떠납니다. 나웬 신부는 남미의 한 슬럼가에서 머물며 가난한 사람들과 실제로 함께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현지 가톨릭 신자들이 예언자적 용기와 소명으로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데 연대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며 수많은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기는 그에게 사회적 영성에 눈뜨게 한 소중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론 그가 많은 상처를 얻고 육체적, 영적 소진을 겪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시 하버드대학의 초대를 받고 다시금 대학으로 돌아옵니다만, 하버드대학 교수로서의 삶은 그에게 최종 해답이 될 수 없었고, 저술가로서의 세계적 명성도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1985년 그는 50대 나이에 대학 세계를 떠나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봉사하며 사는 작은 공동체인,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리치몬트 힐 소재 ‘새벽공동체’에 들어가는 일생일대의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역시 현대의 매우 중요한 영성가이자 라르쉬 공동체(L’Arche Community)의 창시자인 쟝 바니에와 만나고 라르쉬 공동체를 체험하면서 이르게 된 결단이었습니다. 당시 동료 교수들은 놀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그는 라르쉬에서 ‘약함의 힘’과 ‘내려가는 길’이라는 평생의 깨달음을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가 라르쉬에서 보낸 시간이 물론 고민과 고뇌, 좌절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끝까지 이 공동체에 충실하였고 그 안에서 진정한 성찬의 삶을 깨닫고 체험하였습니다.
1995년 가을 헨리 나웬 신부는 라르쉬 공동체의 배려로 안식년을 얻어 가족들과 친구들을 방문하고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매일매일 묵상했습니다. 또한 라르쉬에서의 실천적 삶을 다시금 새로운 차원에서 내면에 자리한 깊은 관조에 대한 열망과 조화시키는 길을 모색하는 소중한 한 해를 보냅니다. 안식년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탕자의 귀환」과 그 책이 쓰여지도록 영감을 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렘브란트 그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자는, 한 네덜란드 방송국 제안에 따라 러시아로 떠나기로 합니다. 그 중간에 잠시 네덜란드에 머물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타계합니다.
이른 죽음이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가 안식년 기간 동안 매일 남긴 묵상일기는 그의 평생의 영적 여정과 모색을 잘 담고 있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제 앞으로 3주간에 걸쳐 그의 안식년 동안의 마지막 일기를 살펴보면서 그가 삶에서 길어낸 영성을 만나고 우리 각자 사순시기에 걷게 되는 회심과 치유의 여정에 길벗으로 삼고자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2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8) 헨리 나웬 신부 ②
아버지 쏙 빼닮은 자신에게서 아버지를 보다
‘안식의 여정’을 시작하다
헨리 나웬 신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은 「안식의 여정」(Sabbatical Journey)입니다. 이 책은 후에 보다 넓은 독자층을 위해서 축약본으로 출판돼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에 걸쳐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영성을 음미하려 합니다. 이 책은 그와 마찬가지로 라르쉬 새벽 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그가 자신의 사후 저작 관리를 생전에 맡길 만큼 신뢰했던 수 모스텔라 수녀에 의해 편집 출간됐습니다. 내용은 그가 안식년 기간 동안 남긴 일기입니다. 물론 그 안식년 기간이 자신이 지상의 삶과 이별을 준비하는 시기가 되리라고 예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심 그는 장수하는 집안 내력을 감안하건데, 아직 긴 날들이 자신에게 남았다고 생각하였고, 그러기에 그는 예순을 넘어 맞이한 이 안식년이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가고 자신이 투신하는 소명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은 안식년 첫날의 일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1995년 9월 2일 토요일, 온타리오 주 오크빌: 오늘은 안식년 첫날이다. 흥분되면서도 불안하고, 기대에 부풀면서도 두렵고, 피곤하지만 오만 가지 일을 하려는 의욕이 생긴다. 다가올 한 해가 꽃들이 가득하고 잡초가 무성한 길고 넓은 들판마냥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저 들판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마침내 저 건너편에 도착할 때쯤 나는 무엇을 터득할 것인가?… 자유로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통절하게 느껴 보고, 일찍이 해보지 못했던 기도도 해보는 거다. 지난 아홉 해 동안 마음과 정신 속에 쌓아둔 수많은 체험을 자유로이 글로 써보는 거다. 자유로이 우정을 다지고 사랑하는 참신한 길을 모색하는 거다. 무엇보다 자유로이 하느님의 천사와 드잡이해 보고 새로운 축복을 청하는 거다.”(헨리 나웬, 마지막 일기, 성찬성 옮김, 바오로딸, 2009).
그러나 이 안식일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그동안 삶의 여러 단계에서 겪은 체험들과 시기별 주요 저작들의 주된 주제들이 안식일에 겪은 체험과 사유들 속에서 잘 종합되고 열매 맺으며 깊은 차원의 화해와 조화를 맺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는 그가 평소에도 죽음과 이별이라는 문제를 늘 대면하며 살려고 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왔지만 신비롭게도 마지막 일기는 가장 완전한 죽음의 준비이자, 그의 벗들과 독자들에게 더없이 사려 깊고 우정에 찬 마지막 이별의 선물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아버지가 되어가기
헨리 나웬 신부의 안식년 일기 중, 그가 아흔세 번째 생신을 맞는 아버지와 함께하기 위해 유럽에 체류했던 12월 말에서 1월 말까지 한 달간 쓰인 내용은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하기도 하고 또한 스스로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12월 21일의 일기에서 나웬은 “아버지는 아버지다”라고 씁니다. 나웬 신부에게 육친의 아버지는 존경스럽지만 버겁기도 하며, 고뇌를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깊은 영적 성숙으로 이끈 도전이 되었던 존재였습니다. 마이클 오래플린은 통찰력과 애정이 가득한 그의 나웬 신부에 대한 영적 전기에서 나웬 신부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했던 아버지 로렌트 나웬은 아들의 감수성을 억압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아들에게 수치심을 주입시켰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헨리에게 감탄하거나 그를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변호사이자 법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건설적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좌절과 분노를 심어주었습니다. 1984년에 헨리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실패자’로 간주한 사람들을 일체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약자는 늘 당신의 관심권 밖이었습니다.” 자신을 그런 실패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헨리는 결코 아버지의 눈에 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이클 오래플린, 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 서한규 옮김, 분도출판사, 2008).
나웬 신부는 아버지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풍요한 영적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명저 「탕자의 귀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아버지를 쏙 빼닮은 생김새에 깜짝 놀랐습니다. 내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불현듯 스물일곱 살 때 보았던 한 남자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비판하면서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이였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내 자신을 찾는데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습니다. 현재의 정체성과 미래의 자아상을 묻는 질문 가운데 상당수는 그의 아들이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태껏 다른 점이 참으로 많은 줄 알고 살았는데 닮은 점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통감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바로 상속자요 후계자였습니다.”(헨리 나웬, 탕자의 귀환, 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아버지와의 내면적 화해와 받아들임은 나웬 신부에게는 죽을 때까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점점 그러한 목적지에 가까이 가고 있었으며, 이는 그 스스로가 영적 의미에서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그의 안식일 일기 중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확인합니다.
“1월 6일: 아버지의 아흔세 번째 생신에 독일에서 함께 지낸 시간은 언제까지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번이 우리가 그동안 함께해 온 시간 가운데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이런 일은 필경 아버지는 아흔세 살이 되고 나는 예순네 살이 되어야 가능했으리라… 내가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를 깊이 존경하면서도 상당히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버지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늙어가고 방어하는 마음이 한결 줄어들면서, 나는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알게 되었다. 요즈음 거울을 보면 예순네 살때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내 특이한 성격과 성급함, 사물을 통제하려는 경향, 이야기 방식을 곰곰이 따져 보면 우리 두 사람의 주된 차이는 성품이 아니라 나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어른이 된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드물다. 이번 안식년 동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부여된 특별한 은총이다… 내가 서른두 살이고 아버지가 예순한 살 때, 우리는 세대가 달랐고 그래서 사이가 아주 멀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같은 세대에 속하게 되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서 서로 더욱 가까워진 듯싶다. 나는 아버지를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올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든 나는 우리가 이처럼 다시 없는 시간을 함께했다는 사실에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의 이런 개인적 소회를 읽으며 그가 「탕자의 귀환」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매개로 묵상의 차원에서 탁월하게 전해주는 영적 지향이, 실제 그의 삶과 인격에도 깊이 뿌리내렸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다음 주에는 「탕자의 귀환」에 나타난 묵상이 마지막 일기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28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9) 헨리 나웬 신부 ③
렘브란트 작품을 보며 강렬한 영적 체험
나웬과 반 고흐 그리고 렘브란트
헨리 나웬 신부가 미술 작품들 안에서 깊은 영성의 샘을 찾곤 했다는 것은 그의 저작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자 열렬하게 하느님을 추구한 구도자였던 빈센트 반 고흐에 일찍부터 매료되었습니다. 반 고흐가 뜨겁고 타협 없이 하느님께 가는 길을 추구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진정한 연민과 일체감을 느꼈던 것을 깊이 존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예술 안에 일체의 허위와 위선과 교만에서 자유로운 영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는 비록 고흐에 대한 독립된 책을 생전에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강연이나 강의에서 고흐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그의 작품들과 편지들을 영적 묵상으로 다가가는 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헨리 나웬 신부가 삶의 마지막 시기에 다가서면서 역시 네덜란드 출신의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웬 신부는 렘브란트의 강렬한 미술 작품을 통해,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황하며, 속함을 갈구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영성을 길어내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통절하게 바라보는 영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만이 아니라 이 화가의 삶의 여정이나, 성정들 모두가 나웬 신부에게는 매우 강렬한 영적 자극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렘브란트가 보여준 위대함만이 아니라 분노, 허영, 욕망 등의 수많은 약점과 과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렘브란트는 삶의 단계마다 남긴 수많은 자화상이 말해주듯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여하간에 대면하고 미화하지 않고 드러내려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고, 이 점이 나웬 신부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렘브란트의 작품만이 아니라 그의 전기들을 깊이 연구하면서 나웬 신부는 렘브란트의 어둡고 추한 모습들에 당혹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습들이 자신 안에도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에겐 자신의 영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그의 영성을 성숙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체험의 중심에 렘브란트가 인생의 영락을 겪고 모든 세속적 영화를 잃은 만년에 더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그린 ‘탕자의 귀환’이 있습니다.
‘탕자의 귀환’에서 발견한 영성의 문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은 헨리 나웬 신부가 영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성 저자이자 강연자라는 명예와, 중남미의 독재와 폭력, 가난의 현장에 참여하고 그 체험을 미국 전역을 다니며 강연하는 양심적 참여자로서의 활동들로 그의 삶은 빛났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집을 나간 아들과도 같은 소진과 외로움이 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즈음인 1983년, 그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트로슬리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지인을 만나러 들어간 한 사무실에서 문에 붙여진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복제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무릎을 꿇은 청년의 어깨에 놓여진 노인의 두 손에 ‘일찍이 느낀 적이 없었던’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트로슬리를 떠난 후에도 이 그림은 나웬 신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에게 새로운 영적 지향과 삶의 변화로 이끌어갔습니다. 2년 뒤 하버드대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나웬 신부는 다시금 트로슬리를 방문해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삶이 자신의 소명인지를 식별하기 위해 한 해를 보내게 되었고, 마침내 토론토의 라르쉬 공동체인 ‘새벽’에 속한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에 그는 생각지도 않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이 그림의 원본을 만나고 며칠간 깊이 묵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그의 가장 아름다운, 또한 잘 알려진 책이라 할 「탕자의 귀향」(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2009)이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이 자신의 영적인 삶에 갖는 의미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환’ 일부를 처음 본 순간, 나의 영적인 여정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이 책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무리 지어야 하는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멀고도 긴 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나웬 신부는 고향 없이 방황하고, 세상이 주는 허상에서 잠시 지속되는 위안과 행복을 찾다가 점점 우울함과 절망에 빠지는 둘째 아들의 입장, 숨겨진 분노와 완고함으로, 회심의 기회조차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큰아들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성찰합니다. 그러나 결국 나웬 신부가 이 그림을 통해 눈을 뜨고, 삶으로 살아내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영적 깨달음은, 우리 모두가 아버지가 되어가고 아버지를 닮아가는 귀중한 소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웬 신부는 사람이 그 소명을 기쁘게 책임을 가지고 수락할 때 행복할 수 있으나, 수많은 이들이 자기자신을 교묘하게 속이면서 그러한 일생의 가장 중요한 부르심을 외면하고 있다고 「탕자의 귀향」에서 말합니다.
“정말 아버지를 닮고 싶기는 한 걸까요? 진정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용납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는 한 걸까요? 집으로 돌아와 환영받을 뿐 아니라 돌아온 이를 환영하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걸까요? 불쌍히 여김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되기를 참으로 소망하는 걸까요?
의존적인 어린 아이 상태로 남아 있으라는 교묘한 압력이 교회와 사회 양쪽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아버지가 되는 두려운 과업을 회피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지는 않았나요?”
나웬 신부는 자신의 새로운 영적인 길은, 바로 그분의 사랑 받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닮고, 그분처럼 되기 위한 일상을 사는 것임을 깨닫고 다짐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를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더 이상 아들의 신분을 이용해 아버지가 되기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지위를 충분히 만끽했다면, 이제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눈앞에 있는 저 노인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진리를 주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책을 맺습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나웬 신부의 안식년의 일기 중 5월 30일자를 보면 그가 흔쾌히 이 그림과 자신의 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자는 한 네덜란드 방송국 제안을 받아들여 9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겠다고 적어놓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해 9월, 그는 방송 작업을 위해 네덜란드에 갔다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운명합니다. 그러니 이처럼 나웬 신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그림인 ‘탕자의 귀환’은 결국 그의 삶의 마지막도 동반한 셈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6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0) 헨리 나웬 신부 ④ · 끝
죽음은 진정한 만남을 위한 마지막 선물
헨리 나웬 신부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존재 깊이 체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기는 라르쉬 공동체에서의 체험이었습니다. 나웬 신부 저서 「탕자의 귀향」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 루카 복음 15장의 ‘잃었던 아들’에 대한 렘브란트 그림 앞에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소명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지체장애우들과 함께하는 라르쉬에서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신지체를 가진 이들의 공동체를 방문했다가 렘브란트의 그림과 대면하면서 구원의 신비에 깊이 뿌리내린 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은총과 가난한 이들이 베풀어준 축복 사이를 연결 지을 수 있게 된겁니다… 라르쉬가 준 가장 큰 선물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아버지가 되라는 도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과 그 도우미들의 공동체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작은아들과 큰 아들이 씨름했던 문제들과 투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오는 아버지는 온갖 고통을 통해 텅 빈 상태에 이른 아버지입니다. 아픔과 괴로움을 안겨주었던 수많은 ‘죽음들’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주고받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앞으로 내민 노인의 두 손은 구걸하거나, 무언가를 붙들거나, 요구하거나, 경고하거나, 심판하거나,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은총을 베푸는, 가진 것을 다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손입니다… 4년 전,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만 해도 본 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경외감을 품은 채, 거장이 이끄는 자리에 서 있었을 따름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라르쉬에서의 삶도, 렘브란트의 그림과의 만남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웬 신부가 사제로서의 소명을 시작하고, 사목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영적인 저서를 쓰기 시작한 젊은 시절에 이미 그의 마음에 뿌려지고 자라나기 시작한 영성이 이러한 결정적 시간을 필연적으로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일찍이 뿌려진 영성의 씨앗이 고뇌와 회의, 스스로의 약점과 불완전함, 세상의 고통과 함께 성숙되고 정화되고 화해를 이루며 이제 나웬 신부가 「마지막 일기」에서 ‘약함의 영성’(spirituality of weakness)이라 부른 열매로 드러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웬 신부는 자신의 영성의 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이미 젊은 시절에, 자신을 유명하게 한 명저 「상처받은 치유자」(이봉우 옮김, 분도출판사, 2001)에서 이미 예견한 듯싶습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의 영적 삶에게 가장 큰 위험은 자신들에게 ‘두려움이나 고독, 혼란이나 회의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전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온전함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깨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된 봉사와 섬김의 사목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로서의 삶이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그의 영성의 기본방향은, 그가 이제 사회 생활을 힘차게 시작하는 스무 살 난 조카를 위해 쓴 편지 형식의 영적 권고인 「내 인생의 의미?마르코에게 보내는 편지」(이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8)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영성과도 근원적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나웬 신부는 이처럼 섬세하고 예리한 자신의 직관을 통해 발견한 영성의 길이 관념이 아닌 실재임을 확인하는 여정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실제로 걷고, 살아내고, 결단하고, 그러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두움, 확신과 불안한 회의 등을 남김없이 겪으며 자신 안에 ‘약함의 영성’을 체화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길을 걷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라르쉬에서 만나고 우정을 나눈 아담 에르네트(Adam Ernett)였습니다. 그는 심각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나웬 신부는 아담이 순수한 ‘약함의 영성’으로 그를 이끌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 아담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축복이었으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탁월하게 증언했는지를 알리고 싶어 했고, 그의 바람과 노력은 「아담」(김명희 옮김, IVP, 1998)이라는 작은 책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아담, 그리고 이별
나웬 신부는 안식년 중 2월 12일에 라르쉬 공동체의 봉사자들을 통해 아담이 곧 선종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급히 달려와 병상의 아담을 바라보고 그의 부모들과 슬픔을 나눕니다. 그날 밤, 숙소에서 나웬 신부는 아담이 주님 품에 안겼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아담이 주님께로 간 날부터, 아담의 장례미사 때까지, 그리고 그 한 주 후인 2월 21일 ‘재의 수요일’까지 나웬 신부 일기들은 아담의 삶과 죽음이 가진 의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즈음 그의 묵상은 「마지막 일기」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아름답고 마음을 움직이는 대목일 것입니다. 나웬 신부는 이미 자신이 생사의 기로를 넘겼을 때,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죽음에 대해 깊은 묵상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아담의 죽음을 보면서도 그는 다시금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위한, 마지막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신앙 안에서 발견하고 확신합니다. 그는 아담이 주님께로 간 날 이렇게 일기에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죽었고 그의 삶은 끝났다. 그의 얼굴은 평온하다. 나는 크나큰 슬픔과 감사의 정을 느꼈다. 나는 동반자 한 사람을 잃었지만 남은 생에 후견인 하나를 얻었다. 아무쪼록 모든 천사가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고 고향에 따뜻이 맞아들여 그가 사랑하는 하느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담을 눈여겨보며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다. 여기 한 젊은이가 평화로이 누워 있다. 이제 길고 긴 고통은 끝났다. 그의 아름다운 영혼은 더 이상 스스로를 표출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 육신 속에 갇혀 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 서른네 해의 포로 생활이 갖는 심원한 의미에 대해 자문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믿고 기다려야 한다.”
몇 개월 후, 많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시점에, 아마도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때에 나웬 신부는 지상의 벗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벗들에게,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아담의 죽음이 그러하듯 그의 죽음 역시 가장 깊은 의미에서 하느님과의 화해를 증언하는 선물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삶과 글을 통해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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