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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을 위한 헌사(獻詞)
―이원형 시집 지금 이별하는 중입니다의 시세계
황치복
1, 언어에 대한 감각과 자의식
이원형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이 땅에서 이름 없이 살다간 서민들, 혹은 풀과 나무들을 위한 위로와 애도의 마음이 넘치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평범해서, 돌올하지 못해서 주목받지 못하고, 온전히 자신의 가능성도 꽃피워 보지 못하고 신산한 삶을 살아간 민초들, 혹은 생명들에 대한 애틋한 시선으로 위로와 위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원형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이 땅의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 혹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을 위한 하나의 헌사(獻詞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원형 시인의 시집이 향하고 있는 본령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인의 언어에 대한 관심과 시에 대한 메타적인 관심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에 대한 관심, 시에 대한 메타적 관심은 시인의 시에 대한 자의식과 시의식, 그리고 시라는 예술적 영역에 대한 시인의 관념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다양한 시편에서 우리말에 대한 관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오묘한 활용과 접목에 대해서 예리한 감각을 뽐내고 있다. 언어의 기표적 놀이와 유희에 가까운 이러한 관심은 시인의 덕목으로서 언어적 자의식을 드러내는 국면이라고 할 만하다. 먼저 시 한편을 읽어보자.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 기르는 새가 있었다
신의 정원에서 새를 돌보던 동자는
무슨 까닭으로
신이 외출한 사이 새장을 열어 새들을 날려보내고
시침 뚝 뗐다
울화가 치민 신은 동자를 시간속에 가둬버렸다
분침이 한 발 뗄 때 마다
너는 육십 번씩 뛰어라
시간이 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느새와 눈깜짝할새가 날아온 후
사람들은 시간의 노예로 살았다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어느새와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쫓아버릴 수도 없는 새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
―「어느새 눈깜짝할새」, 전문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 기르는 새”란 물론 시간을 의미하는 ‘사이’, 혹은 ‘순간’이나 “찰나”를 의미한다. 하지만 “신이 외출한 사이 새장을 열어 새들을 날려보내고/ 시침 뚝 뗐다”라는 표현을 보면 그것은 분명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이 만들어낸 “어느새”와 “눈깜짝할새”라는 새는 사람들을 “시간의 노예”로 만든다는 점에서 다시금 시간적 강박관념을 의미하는 찰나와 순간의 의미를 지닌 ‘짧은 시간의 지속’을 환기한다. 그런데 다시금 시의 마지막에서 “쫓아버릴 수도 없는 새/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라는 구절을 보면, 그것은 하늘을 나는 자유와 비상의 상징으로서의 새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라는 의미와 짧은 시간의 지속을 의미하는 순간과 찰나라는 새의 의미가 중의적인 의미로 포개져 있는 “새”라는 어휘는 묘하게 서로를 비추는 의미자장을 형성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란 자유롭지만,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며, 그것의 비행 궤적이나 흔적이 좀처럼 명증하게 잡히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시간이라는 것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며, 그것의 궤적과 흔적을 감각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새나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사후적으로 그것이 잠깐 명멸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어느새’이고 ‘눈깜짝할새’이기도 한 셈이다. 시인의 절묘한 언어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원형 시인은 이 외에도 「오십견 길들이기」에서는 “오십줄에/ 견갑골의 통증을 감수하며 개를 키운다”라고 하면서 ‘오십견’이라는 회전근개파열증을 어깨 속에 들어온 ‘개’라고 해석하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벗고 먹는 집」이라는 시편에서는 “벚꽃가든”이라는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간판의 글자가 떨어져서 밤에 불빛이 들어오면 “벚꼬가든”이 된다는 것, 그래서 그 식당은 “웃도리도 벗어놓고 배 두드리며 먹을” 수 있는 “벗고 먹는 집”이 된다는 해학을 늘어놓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만」이라는 작품에서는 “고분에서 출토된 고분고분한 여자”라고 하면서 언어유희를 시도하고 있고, 「고분고분」에서는 “반지하 방은 미처 발굴되지 못한 고분 같았다”라고 규정하고 “푸른 곰팡이가 벽화를 그리는 고분에서 고분고분/ 청춘의 반을 보냈다”라고 하면서 역시 언어유희를 시도하면서도 심각한 메시지를 함축해 놓고 있기도 하다. 한편, 「까스 활명수」라는 시에서는 “꽃 좋아하는 여자/ 마흔의 경계를 넘어선 그녀가/ 가슴에 달고 사는 / 부화와 울화를 아시는지”라고 하면서 노엽거나 분한 마음과 마음속에서 답답하여 일어나는 화를 지칭하는 ‘부화’와 ‘울화’를 꽃으로 지칭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딱지를 꽃핀처럼 달고 사는 민자씨의/ 일회용 소화기/ 부채표 까스활명수를 쏟아붓는다/ 꽃을 죽여 꽃을 살리는 일/ 꽃 좋아하는 그녀도 질색하는/ 울화꽃 부화꽃 치밀어 오르며 핀다”라고 하면서 가슴 먹먹한 울림과 감동을 전해주기도 한다. 다음 작품 또한 시인의 언어감각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아니 꼬거나 비꼬면 안 돼요
하늘에 핀 목화 잘 여문 구름을
비비 꽈 봐요
울울창창 비가 된다는군요
천상의 목화밭이 궁금하다구요?
팽팽한 빗줄기를 잡고 거슬러 오르면
목화언덕
악공의 집에 닿을 수 있어요
수 만 가닥 현을 조율하는 틈을 타
슬쩍 악보를 가져오죠 뭐
비의 현을 켜 볼까요
저요저요
음표들이 통통 튀어오르겠죠
모데라토 알레그로 안단테
저만의 속도로 한 뼘씩 자라는 푸른 악보들
비오는 날엔 비올라를 켜봐요
비올라만큼 비의 리듬을 잘 타는 악기는 없죠
비나리 비나리
비의 화음에 젖어 좌우로 건들건들
음악 좀 아는 나무들은
비올라 연주를 들으며 커요
나도 그래요
―「비올라」, 전문
물론 “비올라”란 서양 현악기의 하나로서 바이올린보다 조금 크고 네 줄로 되어 있으며, 바이올린의 바로 아래 음역을 맡는데 대체로 어둡고 둔한 느낌의 소리는 내는 악기이다. “비오는 날엔 비올라를 켜봐요/ 비올라만큼 비의 리듬을 잘 타는 악기는 없죠”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 비올라는 바이올린과의 악기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팽팽한 빗줄기를 잡고 거슬러 오르면/ 목화언덕/ 악공의 집에 닿을 수 있어요”라는 표현이나 “수 만 가닥 현을 조율하는 틈을 타/ 슬쩍 악보를 가져오죠 뭐/ 비의 현을 켜 볼까요”라는 대목을 보면 ‘비올라’라는 악기는 자연의 현상으로서 강우(降雨) 현상이 일으키는 천상의 연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비올라의 연주는 비가 오면서 내는 소리의 화음으로서 자연의 소리가 만들어내는 천상의 음악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데라토 알레그로 안단테/ 저만의 속도로 한 뼘씩 자라는 푸른 악보들/ 비오는 날엔 비올라를 켜봐요”라는 대목을 보면, ‘비올라의 연주’란 초목의 성장을 촉진하는 비의 연주로서 비를 맞고 자신에게 특유한 개성으로 자라는 식물의 성장 속도가 연출하는 어떤 화음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올라’라는 악기의 연주는 비오는 날에 어울리는 약간 어둡고 둔한 느낌의 현악기의 연주이기도 하지만, 비가 오면서 내는 소리의 화음, 혹은 초목들이 비를 맞고서 자라는 그 성장의 움직임이 그려내는 어떤 질서와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 것이다. ‘비올라’라는 어휘를 가지고 이 만큼 풍부한 이미지와 의미 자장을 산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언어감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 시(詩)에 대한 메타적 관심
시의식의 시적 관심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시인이 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시에 대한 생각은 그 곳에 담길 시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시인이 시로 쓴 시론은 시인의 생각하는 시로 접근하는 가장 정확하고 빠른 지름길이 되는 셈이다. 시에 대한 메타적 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인이 시로 쓴 시론에 대해서 접근해 보자.
정부는거리를두라엄포를놓지만
작금의시와시인은그래서는아니된다
시라면모름지기온기를잃지말아야지
띄어쓰기라니거리두기도부질없는것
오밀조밀어깨를맞댄문장들의친밀이
시의맛과멋을드높이는최선아니겠는가
재잘재잘조잘조잘바짝붙어침튀기는
저들좀봐비탈의산벚나무를섬진의매화를
산수유를저들이언제등돌리고앉아있든
띄엄띄엄떨어져앉든저만치거리를두든
모쪼록문장의밀접접촉자가되어야한다
떨어져앉지도거리를두지도말아라시야
할말은하는꽃처럼팡팡내지르라침튀겨라
미열같은잔기침같은시를퍼뜨리며살아라
제몫의분홍을백일만에다써버리는
배롱나무같은시인아꽃받으러가자.
―「할말 있어요」, 전문
전대미문의 코로라 팬데믹 사태를 맞아서 정부는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서 거리두기와 모임금지를 강조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보건 위생적 효과를 위한 현실적인 조치에 항의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온기”를 강조한다. “시라면모름지기온기를잃지말아야지”라고 하면서 인간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온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온기를 얻기 위해서 더욱 오밀조밀하게 어깨를 맞댈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밀접 접촉자가 될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가깝고 바짝 붙어 앉아서 살아야 할 이유를 자연의 질서에서 발견하여 제시하는데, “저들좀봐비탈의산벚나무를섬진의매화를/ 산수유를저들이언제등돌리고앉아있든”이라는 구절 속에 응축해 놓고 있다. 시인은 사람들이 거리두기와 띄어 앉기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의 형식에 담아내고 있기도 한데, 띄어쓰기 없이 촘촘하게 서술되어 있는 시행의 형식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인간들 사이의 연대와 공감,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시가 포착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다음 작품 역시 시인의 시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해바라기는 해를
나팔꽃은 나팔을
며느리밥풀꽃은 며느리 밥풀을
버젓이 가져다 쓴다
우산나물은 우산을 베끼고
개망초는 삶은 계란을
흙먼지 뒤집어 쓴 배추마져
장미를 따라하느라 애쓴다
겹겹의 꽃치례를 베꼈는데
그럴싸하다
둘러보면 표절 아닌게 어딨나
감쪽같이 속이기도 하고
알면서 넘어가 주는 거다
아버지를 표절한 나는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
투구꽃이 투구를
개불알꽃이 개불알을
맨드라미가 닭벼슬을 제 것인 양
가져다 쓰는 뻔뻔한 시국이다
손 놓고 있던 나야말로
세상에 지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
너도바람꽃이 바람을 표절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시 한 줄
데려와 슬쩍 끼워넣었다
감쪽같다
앞뒤로 아귀가 맞는 것이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는 듯이
―「베껴쓴 시」, 전문
“해바라기는 해를/ 나팔꽃은 나팔을/ 며느리밥풀꽃은 며느리 밥풀을/ 버젓이 가져다 쓴다”라고 하면서 그처럼 가져다 쓰는 것을 시인은 “베껴쓴다”고 하기도 하고, “표절”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적 맥락을 잘 살펴보면 그것은 베껴쓰거나 표절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공감(共感)과 교감(交感)이라고 할 수 있다. 우산나물을 우산을 마주보고 있고, 개망초는 삶은 계란을, 그리고 흙먼지 뒤집어 쓴 배추는 장미와 서로 마주보고서 닮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서로 닮으려고 애쓰거나 베껴 쓰는 것은 둘만의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마주보면서 교감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한 셈이다. 시인은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어수선한 틈을 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시 한 줄/ 데려와 슬쩍 끼워넣었다”고 고백한다. 시인이 시 한 줄을 데려와 끼워놓은 곳은 바로 사물들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고 교감하고 있는 장면 속이며, 그러한 교감과 공감을 베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물들이 교감하는 순간을 시가 거울로 비추듯이 베껴쓰는 것인데, 그처럼 베껴쓰는 행위 역시 사물들의 교감과 교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란 자연 사물들이 교감하는 장면을 포착하여 그것을 그리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자연과 교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 그리고 자연적 사물들과의 교감이 이원형 시인의 시적 자산이며 질료임을 알 수 있는데, 시인의 시적 관심이 공동체적 연대와 자연과의 교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도시락」이라는 시에서 최첨단의 4차 산업 혁명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 대해서 “핸드폰을 돌도끼처럼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십일세기 네안데르탈 "”이라고 하면서 “도끼의 숫자판을 두드리면 산 너머 남자나 강 건너 여자를 호출하거나/ 낭만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간혹 시부럴시부럴 시 같은 말들을 부려놓곤 하는데/ 이거 괜찮다, 싶으면 시인은 미끼를 던진다”라고 하면서 최점단의 도시 문명이 중요한 시적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의 체온과 온기를 중시하는 시인의 관심은 아무래도 그러한 최첨단의 문명에서 뒤쳐져 힘겹게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의 신산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점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이 시적인 것의 가치를 대변해준다.
3. 시적인 것, 혹은 시적 감동의 출처
바깥쪽을 갉아먹은 신발 뒷축이 과적차량처럼 삐닥하여 운행중에
넘어질뻔 했노라고 굽은길을 도는 트럭처럼 말하는 너는
한 쪽으로만 닳는 이유가 편식 때문만일까
삐닥한 자세를 바로잡을 생각 없는 지구별
몸을 부리는 마음이 삐닥한 탓이라고 마음을 탓해선 안된다
될 성 싶지 않은 아이도 제 밥값하는 반듯한 날이 온다
왈칵, 향기를 쏟는 목련
삐닥함을 절묘한 균형미로 되살리는 동백의 세련이 이목을 끈다
지구별 담벼락에 꽃무늬를 그려넣는 봄은 당분간 무휴
노곤한 봄의 잠도 삐닥하겠다
삐닥한 지구를 딛고 섰으려니 삐닥해질 수밖에
삐닥한 것들이 인간적이다
삐닥해서 인간이다 참 이상도 하지
피사의 사탑이 한쪽으로 슬몃 기우는 까닭은 몰라도 그만이다
삐닥한 것들이 만드는 풍경
초등의 손글씨처럼
꽃을 탐문하는 나비 좀 보아
너를 찾아가는 나를 좀 보아
―「삐딱해서」, 전문
“삐딱하다”는 것은 물론 물체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거나, 마음이나 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조금 비뚤어져 있는 것을 치징한다. 의미 자체로 보면 바람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시인은 삐딱한 것이야말로 인간적이며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왜 그러한가? 시적 논리에 의하면 지구는 “삐딱한 자세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데, 그러한 자세가 온갖 변화와 생성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될 성 싶지 않은 아이”가 바로 삐딱한 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기존의 질서와 관습에 불만을 가지고 있기에 나중에는 “제 밥값하는 반듯한 날”을 기약한다. 무엇보다 삐딱한 것은 “초등의 손글씨처럼” 불안하고 불완전하지만 순수함을 대변하고, “꽃을 탐문하는 나비 좀 보아/ 너를 찾아가는 나를 좀 보아”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가치와 의미를 생성하는 일탈을 표상하기도 한다. 삐딱하다는 것은 그러니까 어떤 원칙과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 본다는 것, 불완전하고 허술하기에 고고하게 홀로 독립하지 않고 타자를 향해 관심과 공감을 발산하는 기제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시인에게 “삐딱하다”는 것이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시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체현하고 있는 대상은 이 세상의 어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속수무책일 때/ 비처럼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이 있다/ 등을 구부려 비를 등지고 나를 숨긴다/ 날갯죽지 아래 어린것은 등이 따뜻하고/ 어미의 등에는 무수한 화살이 꽃힌다”(「엄마의 등」)라는 표현을 보면 고슴도치처럼 무수한 비의 화살을 등에 꽂은 채 어린 것을 보호하는 어미의 모성을 볼 수 있는데, 시인이 시적인 것으로서 좋아할 만한 풍경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돌아보면 이별 아닌 게 없다/ 하늘을 등진 새/ 산다는 건 하루하루 멀어지는 일/ 눈이 흐릿해진다/ 헤어지려는 것들의 뒷걸음질 때문이다”(「이별하는 중입니다」)라는 표현에는 유한안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 상황과 그것을 대하는 애틋한 정동이 함축되어 있는데, 이러한 인간적인 연민과 동정을 야기하는 풍경이야말로 시인이 가장 시적인 것으로 주목하고 포착하는 시적 대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여리고 아름다운 것, 불완전하고 유한하지만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 시인이 숭상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 작품도 그러한 시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때문에 술술 풀리지
모든 대화의 실타래 같은 그리고
한강 철교와 영도다리 같은 그리고
엄마와 아빠 사이 실낱 같은 희망
나는 그리고야 나 아니면 무엇으로
부부 사이 다리를 놓았겠어
찔레꽃 같은 누나와 윗말 산적 같은 형의 순정에 끼어든 나는
그들의 그리고였지
나 없이 그들의 더딘 연애가 가능했겠어
전화기도 없던 시절 나는 그들의 이동통신
물앵두꽃 핀 봄입니다라고 말문을 연 산적의 쪽지는 나 하기에 달렸지
눈깔사탕에 홀려 넘나든 연애의 국경은 달달하였지
그리고 대신 그래서나 그리하여를 써도 되지만 맛이 떨어져
그러나가 어깃장을 놓을 때 손 잡아준 그리고
모든 연애의 출렁다리 그리고
그리고를 건너는 짜릿함
성춘향과 이몽룡의 연애에 징검돌을 놓던
향단이 '그리고’
―「그리고의 쓸모」, 전문
시인이 예찬하는 “그리고”란 미디어(media), 중계, 중매, 영매(靈媒)라는 말로 대체해도 될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이어준다는 것, 두 사람 사이에서 소통의 매개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리고’는 “한강 철교와 영도다리 같은” 것으로서 “엄마와 아빠 사이”를 이어주는 ‘실낱’ 같은 것이며, “찔레꽃 같은 누나와 윗말 산적 같은 형의 순정”을 이어주는 메신저 (messenger)이기도 하다. 물론 ‘그리고’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연애에 징검돌을 놓던/ 향단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은 왜 엄마와 아빠, 누나와 형, 성춘향과 이몽룡에 주목하지 않고 실낱과 메신저와 향단이에 주목하는 것일까? “그리고의 쓸모”라는 제목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가 그토록 의미가 있고 가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받고 배척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꽃가루가 운반되어 수분(受粉)이 이루어지는 충매(蟲媒)의 담당자인 온갖 곤충과 벌, 나비 등이 생명의 메신저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과 역할이 부각되지 않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리고’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조연들, 영웅이 아닌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이름일 수 있으며, 그들이 세상을 연결하고 생명을 잉태하는 생산적인 노동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시인이 주목하는 시적인 것의 궁극적인 대상은 바로 이 땅을 떠받치는 이름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삶인 셈이다.
4. 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를 위한 헌사(獻詞)
만성이가 누구냐구요?
어머니 둘째 오빠 복환씨의 셋째 아들인데요
대기만성 하라고 붙여준 이름인데요
아버지가 빚어준 그릇을 채우느라 아직도 쩔쩔매지요
공장 기름때를 로션처럼 바르고 묵은 먼지를 분가루인양 뒤집어 쓰고
받은 삯으로 조강지처 부라자 빤스 사 나르고
아들놈 대학등록금 쏟아붓고 딸년 데이트비용에 뜯기곤 했지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고 남은 화투판 개평 같은 돈으로
고단함 달래줄 막걸리를 전쟁터 전리품처럼 들쳐메고
낮은 추녀밑으로 허리숙여 스며드는 일벌, 만성이는요
내가 꽈리고추 같은 자지로 새로 시침한 이불에 오대양 육대주를 그려넣던 시절의 만행과
볕 좋은 담벼락의 황토를 긁어먹어 기어코 바람구멍을 내놓던 기행을
낱낱이 지켜본 산 증인인데요 쥐방울 같은 눈에도 큰 그릇 같았지요
시시콜콜 다 받아주고 덜어주고 감춰주곤 했더랬지요
커서 뭐라도 될성 싶었지요 되도 크게 되겠구나 싶었지요
심사가 뒤틀린 어느 날 만성이의 팔둑에 이빨자국을 새겨넣기도 했지만요
술 심부름은 눈칫밥으로 잔뼈가 굵어가던 어린것의 부화를 달래기에 안성마춤이었지요
홀짝홀짝 몇 순배 오간 막걸리 탓만은 아닐텐데요
길도 취기가 도는지 갈지 자를 그렸지요 황톳빛으로 익어가던 쌍방울,
친형제 못잖은 혈육이었지요 꿀단지는 못 되고 만성이의 애물단지였던 나는
만성이와 한 살 터울 한 배는 아니지만 한 배를 탄 동지였지요
도비산처럼 듬직하던 만성이는 여전히 대기만성 중이지요
뭐라도 됐으면 싶은데요 되더라도 큰 그릇 됐으면 하는데요
―「만성이」, 전문
“대기만성 하라고 붙여준 이름”인 만성이는 전혀 큰 그릇이 안 되고 작은 그릇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공장 기름때를 로션처럼 바르고 묵은 먼지를 분가루인양 뒤집어 쓰고/ 받은 삯으로 조강지처 부라자 빤스 사 나르고/ 아들놈 대학등록금 쏟아붓고 딸년 데이트비용에 뜯기곤”하는 만성이는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땀 흘려 일하며 작은 행복을 꿈꾸는 성실한 서민일 뿐이다. 시적 화자는 “커서 뭐라도 될성 싶었지요 되도 크게 되겠구나 싶었지요”라고 하지만 만성이는 “여전히 대기만성 중”인 사람, 즉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그러한 사람에 불과하다. 시적 화자는 여전히 “뭐라도 됐으면 싶은데요 되더라도 큰 그릇 됐으면 하는데요”라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고단함 달래줄 막걸리를 전쟁터 전리품처럼 들쳐메고/ 낮은 추녀밑으로 허리숙여 스며드는 일벌, 만성이는” 이미 우리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큰 그릇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세상사의 온갖 간난신고를 “시시콜콜 다 받아주고 덜어주고 감춰주곤” 하던 만성이가 큰 그릇이 아니면 누가 큰 그릇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그리고’와 같은 존재가 이 시집에서 만성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꽃게의 가위질을 전수받은 아가씨”로 시집도 못간 채 “갈빗집 흥성한 홀을” 누비며 갈빗살을 자르는 “꽃게아가씨”(「꽃게 아가씨」)가 그러하고, 밧줄 하나에 목숨을 의지하며, “기댈 데라곤 허공밖에 없어/ 굴비 엮듯 엮어 허공의 아가리에 나를 던져주며/ 수심을 재듯 허공의 깊이를 재며/ 유리창을 닦는 스파이더맨”(「유리창을 닦는 스파이더맨」)이 또한 그러하다. 밧줄이 확 풀리기라도 하면, “외마디 비명을 떠안은 바닥에선/ 명자꽃 보다 낭자한 꽃이 필”(「유리창을 닦는 스파이더맨」) 운명을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이름 없는 민초들이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 작품의 용접사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잇고 봉하고 땜하는 재간이 있어서
끊긴 건 잇고 떨어진 건 붙이고 뚫린 것 메꾸느라 애쓴다
더러는 막힌 걸 뚫기도 한다
데면데면한 쇠와 쇠 사이 다리를 놓는 일은 불꽃 튀는 연애 보다 뜨겁다
꽃피는 일이 화농이요 화염이다 철 따라 피는 꽃 본 적 있는가
그가 철 따라 일렬로 부려놓는 꽃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뜨겁고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불 없이도 뜨거운 여름, 봉제선 따라 지글지글 피는 불꽃은 생계여서
꽃에 데인 손등 타는 듯해도 징글맞게 폈으면 좋겠다 말하고
갓파치 아파치는 있는데 쇠부치는 없어서 마음 데인 듯하고
쇠붙이는 잘 붙여도 정은 못 붙이는지 집에서 멀다
붙임성 좋은 그도 채 해결 못 한 일 있어 용접봉에 불을 붙여 쇠를 꿰맨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너나 나나 활짝 폈으면 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 같은 여자 하나 붙여줬으면 하는데
잘 되면 쌀이 서 말이다 지용아
―「쇠붙이-용접사 친구를 위한 노래」, 전문
이 땅의 ‘그리고’와 같은 존재가 용접 일을 하는 용접사 “지용”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일은 “끊긴 건 잇고 떨어진 건 붙이고 뚫린 것 메꾸느라 애쓴다/ 더러는 막힌 걸 뚫기도 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야말로 둘 사이를 연결하는 ‘그리고’와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데면데면한 쇠와 쇠 사이 다리를 놓는 일”이 바로 그가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는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가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서 “불 없이도 뜨거운 여름, 봉제선 따라 지글지글 피는 불꽃은 생계여서/ 꽃에 데인 손등 타는 듯해도 징글맞게 폈으면 좋겠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불꽃을 다루면서 그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붙이는 것이 적성이고 붙임성 좋은 것이 그의 재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을 못 붙여 혼자 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그를 위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 같은 여자 하나 붙여줬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그리고’가 ‘그리고’를 부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처럼 무수한 ‘그리고’가 ‘그리고’를 부르며 세상은 굴러갈 것이다.
이원형 시인의 시집을 조감해 보았다. 시인은 어딘지 어눌하고 부족하며, 불완전하고 유한한 현상에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며, 그러한 틈과 허점을 통해서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름 없이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며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그리고’의 존재들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들이야말로 연대와 공감, 교감과 화음을 형성하는 가치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원형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이 땅의 이름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간난신고를 위로하고 그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굴하는 아름다운 헌사(獻辭)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