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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첫 번째 변론(II) - < 인생의 고난>
욥기 4:12-5:7
암송구절 : 17절
12.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15. 그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16.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21. 장막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5:1-7
1.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 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7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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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 엘리바스의 첫번째 변론(4:12-5:6)
욥을 책망하고 인과응보의 틀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한 엘리바스는 자신이 본 이상과 음성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
시간적, 공간적으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보다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엘리바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이며, 하루살이처럼 쉽게 사라지는 존재입니다(19절). 누군가 장막줄을 뽑으면 무너지는 장막처럼 하나님께서 생명을 취하시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21절, 눅 12:20).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공격
엘리바스는 자신이 무고한데도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항변하는 욥에 대해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고난의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이제 위로나 권면보다는 책망과 공격에 가깝게 들립니다. 욥의 분노는 미련한 자를 죽게 하는 분노가 되고(2절), 욥이 부유했던 것은 미련한 자가 잠시 성공하는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됩니다(3절). 욥이 자식과 재산을 잃은 것도 저주와 연결됩니다(4-5절). 여기서 인과응보적인 엘리바스의 해석 틀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고난의 이유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5:6).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5:7)입니다. 즉 누구나 죄로 인해 고난을 받고, 욥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행위나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의 입장에서 엘리바스의 이러한 말은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묵상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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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진화론의 허구와 창조론의 우위성
인간과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들었다는 창조론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진화론입니다.
답은 이 둘 중에 하나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창조론을 지지합니다.
저는 창조론의 우위성을 진화론의 허구성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써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화론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창조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학설일 뿐입니다.
저는 먼저 한 가지 예화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여기 로렉스 시계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누가 이 로렉스 시계를 보면서
"참 잘 만들어져 졌다. 어떻게 이렇게 저절로 만들어질 수가 있을까?" 하면 모두가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계보다도 몇 백 배, 아니 몇 천 배 더 정밀한 인간에 대해서는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며 이것을 과학이라고 말합니다.
진화론이 바로 그렇습니다.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중 하나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입니다.
자연의 흐름은 무질서도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카드를 섞으면 섞을수록 카드는 골고루 섞이지,스페이드나 하트만 따로 모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엔트로피의 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함께 중요한 자연법칙 중 하나입니다.
결국 자연법칙의 흐름이란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자연스런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이 엔트로피의 법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자연법칙을 거슬러 고도의 질서를 향하여 스스로 진화해 나아가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인간이 만들어질 확률을 어느 날 바람이 불어 먼지가 휘날려 비행기가 만들어질 확률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인위적으로 부분적인 질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며(총 엔트로피는 증가),
장시간 그것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스런 과정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만약 진화론자들이 이 힘을 상정하여 저들이 이것을 생명력이라고 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거기서부터는 더이상 과학이 아니고 신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 진화론의 가장 중요한 맹점 중의 하나는 진화론의 가장 결정적 증거인 종에서 종으로의 진화 과정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완전한 개체종들이지, 종에서 종으로 진화해가는 과도기적 종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시조새를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해 가는 중간기 종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달리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시조새는 원래부터 그렇게 완전한 하나의 종이었다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그들은 진화론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발견된 화석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이론에 끼어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말은 작은 형태로부터 큰 형태로 진화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화석이 발견되면 그런 식으로 끼어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위배되는 예컨대 5억 년 전 고대 화석에 파리나 모기가 함께 발견되면 그것을 애써 외면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증들은 이미 '창조과학회'에서 과학적으로 조사한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진화론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고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서입니다.
진화론은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작년 미국 어느 주에서는 주법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을 학생들 과학 교과서에서 함께 다루도록 하였습니다.
진화론이 만일 과학적 사실이었다면 모든 과학자들은 창조론을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으며, 20세기의 천재라는 아인슈타인도 범신론으로, 그것이 기독교의 유일신은 아니어도 어쨌든 물질 이상의 세계를 인정하였던 것은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학설일 뿐임을 증거합니다.
2. 진화론은 인간에게 아무런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진화론에서 유일하게 주장할 수 있는 선은 약육강식과 자연선택일 뿐입니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 살아남은 자가 최고이며, 최선입니다.
그야말로 '일등'만이 선이지요.
인간이 서로 사랑해야 될 이유도 없고, 정의를 이루어야 될 이유도 없습니다.
굳이 우리가 사랑하고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유를 붙인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을 보존하고, 좀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런 것 가지고 인간에게 도덕적 강제력을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진화라는 이름으로 게르만 민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유태인을 학살해도 비판할 근거가 없으며, 비판한다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진화의 방향이라거나
전체 인류사회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행위였다는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약 창조론도 설이고 진화론도 설이라면, 제가 신앙인이 아니었다할지라도 저는 차라리 창조론을 택하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존재의 무의미성으로부터 구출해주며,내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도덕적 허무주의로부터 나를 구출해주며,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목숨을 걸고 정의를 사수해야 삶의 이유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3. 창조론에 대하여
창조론의 주된 골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성경의 창세기를 뒤지며 인류 역사가 6천년이니 어쩌니 하는 주장은 인간의 오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구 역사가 실제 45억 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인류의 탄생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창세기의 창조기사와의 조화입니다.
세세한 것은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지만 창세기를 읽을 때 이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주신 목적은 과학적 변증이나 세상을 만든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닌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창조기사를 주셨습니다.
1)세상은 내가 만들었으니 너는 나를 믿고, 해 달 별 바다와 같은 피조물이 아닌 바로 창조주인 나에게만 경배하라,
2) 나는 무질서에서 질서를, 어둠에서 빛으로, 공허에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다,
그러니 역사나 인생의 어둠과 무질서, 허무에 절망하지 말고 나를 믿고 희망을 가져라.이것이 바로 구원사적으로 창조기사를 읽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해서 창조기사를 주셨고, 그 방법에 대해선 당시의 세계관에 맞추어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이 이해하겠습니까?
또 해와 달과 별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지동설이 이해되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이 기록된 근본 의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성경을 마치 과학책처럼 생각하다면 우리는 또 한번 갈릴레이를 종교 재판대에 세우는 오류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의식수준에 맞추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것은 과학 지식 하나 알려주는 것보다도 우리의 구원이 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이런 점들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해서 창조론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언제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만들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는 생명의 탄생의 신비를 풀 수 없습니다.
물질세계에만 갇혀서는 더 이상 생명의 신비를 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과학자는 최소한 기독교적 하나님을 인정하진 않을지라도 신적인 신비를 인정하는 범신론으로 귀착합니다.
이는 도전과 탐구 정신의 포기, 문제의 유기가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밖으로부터의 누군가가 세워 줄 때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출처 :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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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까? 시편 8편을 통해 묵상해 보십시오.
2. 엘리바스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듯 하면서 욥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부유했던 과거와 모든 것을 잃은 현재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3-7절)
3. 성경의 전반적인 줄거리에 따르면 엘리바스는 분명히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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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 고난중에 감사하게 하소서!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
주님의 계획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역사하심을 잠잠히 느끼게 하소서.
고난을 통하여 믿음의 회복을
고난을 통하여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고난을 통하여 마음의 치유와 회복을
고난을 통하여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고난을 통하여 주님께서 뜻을 이루어 가심을
내 영혼이 바라보면서 주님의 계획하심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고난중에 내 영혼 위해 일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통해
주님이 뜻하시는 거듭남을 입은 영혼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뜻가운데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그릇이 되게 하소서.
내 영혼의 생각과 마음만으로
잠시 주님을 사랑하다가 말아버리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영혼이 되지 않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고난을 통해 내 영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찬양하게 하소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시는 주님!
위로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고난을 이기며
날마다 주님께 가까이 나가게 하소서.
격려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내 영혼 용기를 얻음으로
고난속에서도 고난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죄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거울삼아
겉사람을 버리고 속사람을 입으며 내 영혼 새롭게 하소서.
내 영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사오니
내 영혼 주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거듭남을 입은 영혼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