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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5
기도하는 사람들 / 이규왕 목사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오로지 우리는 그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또한 믿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개인이나, 교회나 민족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를 만나게 될 때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약한가가 문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에 대한 확신의 유무가 더 중요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를 짓누르는 어떤 염려나 근심은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 마음에 큰 평화가 임하게 된다면 그 대표적인 말씀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애송하는 시편 23편의 말씀입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민족적인 현실이나 교회적인 일들이나 개인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앞에 놓고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교회와, 민족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느 때, 누구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시 91: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를 당하거나 무슨 큰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실 뿐 아니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그와 같은 축복을 체험한 대표적인 인물을 찾는다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 느헤미야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지나간 역사 속에 인물이나 사건을 기록하여 놓으셔서 오늘 우리가 읽고 듣게 하심은 오늘 우리가 그대로 본받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응답하시며, 함께 하시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1. 필요와 기도
오늘 말씀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으로서 하가랴의 아들로 그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라는 뜻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유대인이었으나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절대 신임을 받아 왕에게 진상하는 모든 술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맡은 술 관원이었습니다.
(느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같이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느헤미야는 다수의 동족들처럼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염려나 고통과 죽음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과 상관이 없이 풍요를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그러한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구할 것이 남았다면 그것은 왕이 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쉬운 것이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위치에서 어떤 필요를 놓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와 같은 특권을 오래도록 누리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 외에는 더 이상 기도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물론 우리 기독교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나름대로 기도를 강조하고 있으며, 외형적인 형식을 가지고 논한다면 이방 종교도의 기도가 기독교인들의 기도보다 더 절실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위기를 만나거나 절실한 필요를 느끼게 될 때 본능적으로 절대자에게 그 필요를 구하게 되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움과 필요를 구하는 사람의 기도와 풍요 속에서 부족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의 기도 생활을 비교해 보면 물론 도움과 필요가 많은 사람이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알몸과 빈손으로 울면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동반되어집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해야 하며, 더 많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시 116: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사람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으며, 무엇보다 큰 차이는 일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역사 속에서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들은 남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더 위대한 일들을 한 사람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느헤미야도 바로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던 느헤미야의 최대의 관심사는 자신의 조국이었습니다.
느헤미야와 똑같은 유대인이면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포로에서 자유할 수 없고, 멸망의 자리에서 재기가 불가능한 다수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그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오늘 우리 민족과 교회와 내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56: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2. 느헤미야의 기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도 회개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유일한 희망은 자유와 해방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의 느헤미야 시대는 이미 유대인들이 70 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레스 왕의 특별 사면령을 받아 주전 537년과 458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한지 십수 년이 흘렀을 때입니다.
느헤미야는 대제국의 왕궁에서 호의호식을 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멸망당한 조국과 고통당하는 동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느헤미야에게 그의 형제 하나니가 예루살렘을 돌아보고 와서 들려준 소식은 부정적이고 매우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 않고 유대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고생은 생존에 위협을 당할 정도로 극심했으며,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은 다 불타서 성벽을 재건하고 국권을 회복하기가 심히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조국과 동포들에 비하면 특권층의 풍요와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감사하면서 자족하는 삶을 살기 쉬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로 동포들의 고난을 마음 아파하면서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2)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서 그처럼 고고하게 믿음을 지켜오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동족의 죄를 자기 죄로 끌어안고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느 1: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3) 느헤미야의 기도는 자기 필요를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신 언약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말씀 중심의 기도였습니다.
(느 1: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 1: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가 왕궁에서 풍요를 누리면서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동족을 소유나 지위의 때문에 차별하지 않고 동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동일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자라난 모세가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고난당하는 동족을 구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아니라 자신과 고난당하는 민족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늘 나라의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과 똑같아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강조할 때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더 많은 축복을 받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일수록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마치 철야를 하고 새벽 기도를 하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것인 줄로 알고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의 느헤미야나 모세나 다니엘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동일시 원리를 생각한다면 지금이 바로 민족과 국가의 문제, 교회의 대사가 바로 나의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며, 남다른 축복에 대한 감사에 인색하거나 기도에 무관심해서는 안 됨을 깨닫고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를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3. 기도의 동지들
느헤미야가 어느 누구보다 평안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통당하는 동족과 위기에 처한 민족을 위한 기도는 너무나 간절하고 절실한 몸부림의 기도였습니다. 울며,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수 일 만이 아니라 수개월 동안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였기 때문에 왕이 볼 때에도 그의 얼굴이 수척할 정도였습니다.
(느 2: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과연 느헤미야가 어떻게 그러한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만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느헤미야 더불어 뜻을 같이 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느헤미야만이 아니라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사양하고, 사자 굴을 두려워 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중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아니라 용광로에 던져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는 기도의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빼어 놓아서는 안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소원을 가진 우리와 응답해주시는 하나님과의 중보자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과 더불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필요가 아니라 연약한 제자들이 시험을 앞에 두고서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가르치신 가운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기도의 동지들이 합심하는 기도의 위력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비록 인간은 연약하며, 문제가 많지만 두 세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지상에 최초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여 성령 충만한 교회, 이상적인 교회가 세워지게 된 원동력이 무엇이었다고 생각됩니까? 바로 합심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렇게 성령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도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 외부적인 핍박과 내부적인 갈등이 계속되었으며, 교회의 대들보와 같은 지도자인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는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중단하지 않고 계속한 일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와 같은 합심의 기도는 마침내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내일이면 끌어내어 죽이려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교회는 여전히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기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인 일 같이 보일지 모르나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며, 천사를 동원하는 능동적이고 성도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토레이(Torrey)는 "일에 분주한 것 때문에 기도를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 일이 많을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여라. 네가 기도하므로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우리의 시간을 가장 아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교우들은 기도 동지들이 되어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합심하여 기도하므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는 현장이 되게 해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느헤미야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풍요롭게 사는 사람이었으나 이처럼 멸망당한 조국과 고난 당하는 동포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느헤미야와 같이 기도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호흡을 하지 않고서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없이는 한시도 신앙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상적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는 기도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기도가 생활화되거나 거룩한 습관이 되지 못하고 일시적인 행사성의 기도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기도를 생활화하고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가며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심을 체험하며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음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실행에 옮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 56: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가 자신 만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고난당하는 조국과 동족을 위해 기도의 현장으로 나아간 것처럼 오늘 우리도 민족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더불어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와 같은 느헤미야와 그 친구들의 합심 기도가 무너진 고국을 재건하는 힘이 된 것처럼 오늘 우리도 느헤미야와 그 친구들처럼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반드시 우리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지는 분명하고 확실한 응답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응답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고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 55:16)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시 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시 55:18)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시 55:19)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셀라) 변치 아니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