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겨울밤에/이명철
소설을 지나 대설에 접어든 오락가락하는 날씨, 12월 초순이다. 우리 장손이 논산훈련소로 훈련을 받으러 갔다. 논산훈련소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어제 오후에 온 아들과 며느리는 밤에 있었던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에 관하여 상식 이하의 행태를 탄식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윤 대통령의 행위에 분노를 넘어 허탈해 하는 것 같았다.
장손이 가는 것을 배웅하는 허허로운 가슴은. 흉내만 내는 참선(參禪)일망정, 구름 위에서 지혜의 완성에 한 발 올려놓으려다 헛디딘 심정이다.
낙엽 구르는 소리 들린다.
작은손자 희찬이는 이미 훈련을 마치고 부대배치 되어 근무하고 있다. 아들 둘 다 군에 보낸 아들과 며느리의 속마음을 불안한 정국에 비교하며 헤아려 본다.
방송을 들으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통령의 미친 행보가 군에 간 손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염려스럽다.
햇볕이 바람에 밀려 산그늘 속으로 사라질 무렵 아들에게 전화해 보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면서, “3주 후면 돌아온다는 안도감에서인지 이번에는 어미가 울지 않았어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빈터의 잡초처럼 비집고 떠오르는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나의 뇌리를 점령하곤 한다.
‘최녀’나 ‘민비’가 신봉했던 무속이나 ‘진령군(眞靈君)’의 망령들 위에 그들을 섬긴 박 무녀(巫女)나 민비가 겹쳐서 선량한 백성들을 짓밟는 형상이 떠오른다.
그 형상은 정치인들을 체포하여 과천 어디에 수용할 계획까지 세워놓았다는 형상과도 겹친다. 형상이 아니라 체포자의 명단에 포한된 국민의 당 대표가 한 말이다.
최녀가 무속 정부의 비선실세로 지목받고, 그들의 비리가 하나하나 들통 나 영어의 몸이 된지 이미 오래된 진행형이다. 진령군의 최후가 비참했듯 김녀를 보호할수록 각가지 의혹과 횡포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기 직전인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스스로도 무덤을 판 것은 물론 세계만방에 조롱꺼리로 만들어버리고 희대의 비극을 연출하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미물들도 다 아는 계절(季節)의 흐름을 윤석열은 영원히 자기의 왕궁에 붙잡으려 했을까? 그들은 진정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옛 말을 잊고 권력과 물적 시간적 계절만 자기들 곁에 있을 줄 알았을까?
<천궁>을 신봉(?)하여 푸른 집 마다하고 천문학적 돈을 들여 대통령 실에 살면서 ‘하는 일마다 거부 거부해대더니’ 결국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여름이 가면 반드시 겨울은 오게 되어있다. 진령군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과 비단 등을 공양할 때는 봄날 이었지만, 나랏돈은 탕진되고 민비는 낭인들의 칼에 죽어 불살라져서 뼈도 못 찾았을 때는 홑옷만 걸친 겨울이었다.
임금은 죽고 조선은 망하였다. 그들의 봄날은 어느덧 지났고, 도도히 흐르는 국민의 강은 박녀도 이 아무개도 용서하지 않았다.
봄날일 때는 긴 여름 해도 오히려 짧았는데, 괴로움의 장막 안에선 겨울의 낮 시간도 하루가 여삼추(如三秋)란 것을 윤석열의 손으로 만들었던 일들이니 누구보다 잘 알고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란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제의 햇볕은 몰려오는 시간에 식어버린다는 철칙, 빛이 회색으로 변하면 창가엔 어둠이 깃든다. 유리창은 어둠과 빛의 통로다. 마음의 벽은 창조를 삼킨 추억의 도배로 다시 두꺼워졌다. 감당을 떠나 분별조차 하지 못하는 참담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망각천(忘却川)의 물을 마신다 해도 불에 달군 모래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남일 같지 않은 나의 일이다. 아니, 우리 국민 모두의 일이다. 이성(理性)을 가다듬어 본다.
다정한 사람과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을 갖고 싶다.
옷깃 세우는 이 계절에 한 잔의 차로 울분을 가라앉혀 보고 싶다는 얘기다.
내 마음 어느 구석에 가로 놓였을 줄도 모르는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의 장애를 불사르고 한모금의 차로 그 울분을 씻어 내려야 한다.
머지않아 나무들은 매서운 삭풍에 가지를 흔들며 메마른 모습으로 겨울을 견뎌야 할 것이다. 매서운 삭풍에 삭은 가지는 떨어져 나가지만, 숲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 심란한 마음에서 생각을 일으켜 숲속에 머물러야 한다.
묵은 업(業)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달라붙을 업도 없다. 서원(誓願)을 막을 윤회(輪廻)도 없는 것이다. 비록 한 맛의 본질이 처절한 변화의 길목에서 몸부림칠지라도, 해를 가린 저 어두움은 결국 찬란한 아침이 오면 방향 설정을 다시 할 것이다.
다시 돌고 돌아올 무한의 초겨울, 삶의 연속은 떨어지는 낙엽의 속도만큼이나 빠르다. 그 속에서도 바람이 잎을 털어낸다. 나무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사 열어가는 바람은 봄여름 가을겨울을 가리지 않는다. 때론 침묵이었다가 때론 태풍이며, 때론 길을 내어 묵언(默言)을 풀어 가르침을 내릴 때도 있다.
그들의 잘못은 이번 한 번으로 그치고 영원히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게 함도 모두의 몫이다.
남의 삶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나이가 아니기에 때로 심심하면, 겨울 산이 침묵하는 이치나 알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