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문 9월호 월평
체험의 가치화, 교시성의 내재화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모든 수필은 가치성과 교시성을 추구해야 한다.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노출은 수필의 재료가 될 수 없다. 체험 고백에 흥미를 갖고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견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필이 문학 장르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는 기쁨을 주는 높은 차원의 교시성을 가져야 한다. 이번에는 ‘한국산문’ 8월호에 실린 수필 중 가치 있는 체험이 수필의 기반이 되고, 교시성이 잘 드러나 있는 몇 편을 골라 보았다.
소지연의 <때로는 말없음표가 좋다>는 자기 생활의 참모습이 드러나 있어 독자 곁으로 쉽게 다가오는 글이다. 침묵의 언어는 한국적 특성이다. 이 수필은 패자는 말이 없다는 정서의 어필을 통해 한국적인 인간미나 특성의 향기로움을 전해준다. 작가는 생활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그 말과 대화하면서 생의 의미 찾기를 즐긴다. 수필이 문학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예지와 성찰에 있다. ‘사랑 없인 어떤 것도 기지개를 켜지 못하지만, 정성스럽게 이루어진 것들은 모두 ‘말없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라고 한 마무리 멘트가 삶의 지혜를 품으면서 이 수필의 메시지로써 문학적 향기를 풍긴다.
작가는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쉬워질 때마다, 한 인도 여인의 자족하던 눈빛과 ‘골데’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와의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소지연은 “아마도 이런 내겐 그들의 ‘말없음표’가 좀 더 친숙한 사랑 방식인지 모른다.”라고 말한다. ‘말없음표’에 대한 가치에 방점을 찍기 위해 선택한 뮤지컬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과 결혼 초년생 시절, 아버지와 자신의 모습이 말없음으로 통했다는 고백, 그리고 짧았으나 그때 본 아버지의 눈시울을 지금까지도 가슴 한편에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랑’이라고 한 표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말없음에 대한 가치를 적절한 예화의 삽입을 통해 극대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신극주의 <오방주머니> 역시 가치 있는 체험이 문학화되고, 또 교시성의 형상화도 잘 된 작품이다. 현장감과 생동감이 존재해서 무엇보다도 접근성이 강하다. 특수한 작중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다양한 삶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을 그 본연의 임무로 한다. 작가는 ‘오방주머니’라는 제재의 내적 응집을 통해 재구성된 삶의 의미를 추적하고, 자신의 체험 고백에 흥미를 갖고 다가오도록 이야기의 배열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주제의식에 기쁨을 주는 높은 차원의 교시성을 부여하고 있어 감동을 획득하고 있다. 부자의 비정한 일면을 비판하면서 인간성의 숭고함을 강조한 예화가 공감을 자아낸다.
부자의 삶은 처신이 중요하다. 유한적 존재인 인간이 물질을 모으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은 현명한 대처가 아니다. 작가는 냉혹한 수전노, 도척으로 소문난 오방주머니식당의 건물주 ㅎ가의 비인간적인 작태를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인지를 제시한다. 건물주의 비정함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들의 용서하는 자세는 더욱 가슴을 헤집게 한다.“웬만한 사람이면 멱살잡이로 내동댕이치거나 발길질이라도 했으련만, 워낙 바탕이 용(庸)한 아들들이라 말 몇 마디로 울분을 눌렀다.”는 표현에 인간성 회복을 이룩하려는 건강함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어 한껏 감명을 준다. 예스런 표현이 다소 거슬리지만, 누구나 죄 짓고는 못산다는 평범한 진리를 특이한 인물을 내세워 주제의식으로 잘 형상화한 좋은 수필이라 하겠다.
이문봉의 <아버지의 산>은 동양적 삶의 질서와 순종의 미학이 담겨 있다. 작가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질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칠남매의 장남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작가에게 대학의 꿈을 접게 하고, 나중에 운명하면서 작가의 아버지는 그 일 때문에 고이 눈을 감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비운의 가정사를 그려내면서, 작가는 그런 아버지를 용서한다. 그의 글에서 유난히 촉촉한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주체자의 의지만에 의해서 주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은 우리들의 기대와 희망과는 무관하게 전개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은 시작된다. 작가는 그 상처의 고통은 용기 있는 사과와 용서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와 자신의 예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아픔의 크기를 삽화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그의 작가적 저력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준다. 사과와 용서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어떤 아픔도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이 솔직한 예화를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이 글은 공감을 얻는다. 용서와 사과라는 공존의 역학 관계를 잘 풀어내었다.
이외에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교에 걸려 치유되지 않는 아픔을 겪고 살아간다는 이순례의 <이명>,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염습사 선배의 천직賤職을 천직天職으로 승화시킨 사례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는 박래순의 <마지막 배웅>, 사은 행사에 경비 아저씨 오씨가 초대된 이유를 통해 직업의식이 어떤 것인지 말해준 맹광호의 <오씨 아저씨>도 눈여겨 볼 만한 작품이다. 남자의 자존심을 수탉에 비유한 이천호의 <수탉을 찾아서>, 자신을 기억해주는 이성 친구의 관심어린 호의로 인해 마음에 봄바람이 분다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건형의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는 재미가 곁들여져 맛있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