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이 밤에 드는 잠이 달콤한 꿀처럼 느껴지게 하소서.
타이완에 가면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초상집 잔치 분위기를 보면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초빙해서 많은 돈을 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하고 태우는 종이돈을 많이 사서 태우면서 좋은 곳으로 가도록 축수합니다. 또한 좋은 요리사를 초빙해서 아주 좋은 요리로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에게 많이 먹이고, 취하게 하고, 즐겁게 놀게 하고, 망자가 평생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되갚는데 모든 정성을 다합니다. 그들의 문화는 장례를 잔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평생을 벌어서 죽었을 때 사람들을 접대하는 장례비용으로 절반은 쓴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야 망자가 좋은 곳으로 간다고 굳게 믿는 것이죠.
나는 어려서 동네에서 어떤 어른이 임종하면 사람들이 집집으로 돌아다니며 “누가 돌아가셨으니 빨래하지 말고, 목간(沐間:목욕)하지 말고, 음주가무(飮酒歌舞)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같이 슬퍼하고, 함께 음식을 장만하고, 부조금을 주며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지금도 상가 집에서는 문상객을 받고 음식을 내고 연도를 하고, 한 쪽 귀퉁이에서는 상주를 위로한다고 고스톱도 치고, 술에 취해서 떠들기도 하는데 음식을 준비하고 접대하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아주 큰일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상가 문화가 많이 퇴색되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상가 집에는 고스톱도 치고 사람들이 많아서 떠들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상주가 외롭지 않도록 친구들은 밤을 새워가며 상가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얘기인데 남편이 술에 취하고 주사가 심해서 아주 고생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가난해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남편의 행패에도 불평 없이 아이를 키워 큰아이가 중학생이었을 때 그만 갑자기 찾아온 암으로 병원도 가보지 못하고 운명하였습니다. 상가에는 나이어린 중학생이 상주로 사람들을 맞고 있어서 문상 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는데,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숨져서 슬프기도 하였지만 평소와 같이 술에 취해서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망자 남편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윷을 놀고, 고스톱을 치면서 소란을 떨고 있었을 때 중학생인 아들이 소란스러운 아버지와 친구들을 보면서 치를 떨면서 절규하였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아저씨들 제발 우리 엄마를 어렵게 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나요?”하고 울먹이면서 땅을 치고 통곡하였습니다.
우리의 장례문화 중에서 좋은 것이 많지만 개선해야 할 점도 많습니다. 우리가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살아생전의 업적이나 일들을 기념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에 생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죽은 이를 기억하고 있나요? 우리는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삶은 어떻게 보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생을 잘 살았다면 죽은 다음에 많은 사람을 대접해서 신세진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는 대만 사람들의 감정이 슬픔에 가득 차 있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또한 죽은 사람을 기억하며, 죽은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도록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의 집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 사람들은 피리를 불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풍습도 지금과 다름없이 그렇게 소란을 피웠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사람들이 피리까지 불고 있는데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표현하시지요. 우리가 매일 밤잠을 자는 것은 죽는 것을 연습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저녁에 잠을 청할 때 만약 내일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면 불안해서 잠 못들 지 모릅니다. 반면에 잠자는 듯 평온하게 죽고 싶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은 듯이 잔다.’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매일 아침 다시 새롭게 부활합니다. 그것도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부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음과 부활을 체험케 하고자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잠들게 하고 새로운 아침을 주셔서 살아나게 하십니다.
심장병이 생겼을 때 매일 잠을 잘 수 없었는데 혹시 밤에 자다가 심장 발작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언제나 가득했습니다. 암 수술을 하고 그 통증으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수면제를 갈아서 목줄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한 두 시간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불안이 거의 없어졌고 심장 경련 증세나 통증은 사라졌지만 거의 매일 수면 보조제에 의존해서 잠에 들곤 하는데 불면증이 아주 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녀를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님은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탈리타쿰’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매일 아침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쿰’하고 일으켜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이 밤에 드는 잠이 달콤한 꿀처럼 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단잠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