鷄林東亭
전녹생(田祿生, 1318~1375)은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 담양(潭陽). 자: 맹경(孟耕). 호: 야은(壄隱·野隱) 주요 관직: 좌상시·감찰대부·대사헌·정당문학·문하평리
저서: 《야은일고壄隱逸稿》 또는 《야은집》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제주사록·전교교감을 지냈고, 원나라 정동성의 향시에도 합격했다. 1347년 정치도감의 관리로서 권세가 기삼만의 죄를 엄하게 다스렸다가 투옥되기도 했으며, 공민왕 때에는 이색·이보림·정추 등과 함께 염철별감의 폐단을 비판했다. 전라도 안찰사로 나가서는 왜구 방어를 구실로 백성들을 괴롭히던 수비대의 폐단을 지적하고, 불필요한 진영을 줄이며 봉수와 척후를 강화하자고 건의했다. 1361년 홍건적 침입 때 공민왕의 남행을 호종하여 2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정당문학·문하평리를 역임했고, 1371년에는 이색과 함께 과거를 주관했다. 그러나 1375년 이첨·전백영 등이 권신 이인임과 지윤을 처벌하라고 주장한 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은 뒤 유배 도중 세상을 떠났다.
終日昏昏簿領閒 偶因迎客出郊關
종일혼혼부령간 우인영객출교관
俯看逝水歎流景 坐對靑山多厚顔
부간서수탄류경 좌대청산다후안
半月城空江月白 孤雲仙去野雲閑
반월성공강월백 고운선거야운한
更尋陶令歸來賦 千載高風未易攀
갱심도령귀래부 천재고풍미이반
종일토록 어지러이 공문서 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우연히 손님을 맞으러 성 밖 관문을 나섰네.
흘러가는 물을 굽어보며 가는 세월을 탄식하고
푸른 산을 마주하니 부끄러운 마음 더욱 깊어진다.
반월성은 텅 비고 강 위의 달빛은 희며
고운 최치원은 떠나고 들구름만 한가롭구나.
다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찾아 읽어 보아도
천 년 전 그 높은 풍모는 쉽게 따를 수 없구나.
鷄林(계림): 경주의 옛 이름. 본래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숲 이름이었으나, 뒤에는 신라와 경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굳어짐.
簿領(부령): 관청에서 처리하는 장부·문서·행정 사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
郊關(교관): 도성이나 고을의 바깥 관문. 逝水(서수): 흘러가는 물
流景(유경): 흐르는 빛. 햇빛이나 저물어 가는 해, 흘러가는 세월·광음.
厚顔(후안): 낯이 두껍다. 자연을 마주하면서 세속에 매인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는 자책.
半月城(반월성): 경주 월성月城. 孤雲(고운): 崔致遠의 호
陶令(도령): 도연명陶淵明. 팽택현령을 지냈으므로 ‘도령’이라 불렀음.
歸來賦(귀래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高風(고풍): 고상한 인품과 절개, 세속을 초월한 삶의 태도
攀(반): 붙잡고 오르다, 우러러 따르다. 未易攀(미이반): 쉽게 따라갈 수 없다.
전녹생의 「계림동정」은 2024년에 감상했었는데 경상도 편을 읽는 중이라 자료를 보충하여 다시 올린다. 경주의 옛 정자에 올라 지은 작품으로 관료 생활에 대한 자책과 은거에 대한 동경을 담은 칠언율시다.
전반부에서는 공문서에 파묻혀 지내는 현실과 청산·유수의 자유로운 자연이 대비된다. 특히 “푸른 산을 대하니 낯이 두껍다”는 말에는 자연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도덕적 거울로 삼는 선비의 태도가 나타난다.
후반부에서는 시선이 개인의 현실에서 역사의 시간으로 확대된다. 신라의 왕궁이었던 반월성은 텅 비었고, 최치원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강 위의 달과 들녘의 구름은 여전히 맑고 한가롭다. 인간의 권세와 왕조는 사라지지만 자연은 변함없이 남는다는 흥망성쇠의 감회가 짙다. 마지막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떠올린다. 전녹생 자신도 세속을 떠나고 싶지만 현실적 책임과 관직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핵심 정서는 단순한 은일 찬미가 아니라, 떠나고 싶으나 떠나지 못하는 관리의 자기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녹생이 실제로 권세가의 횡포와 행정의 폐단을 비판하다가 끝내 정치적 희생을 당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지막의 “그 높은 풍모를 쉽게 따를 수 없다”는 탄식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경주의 동정(東亭)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정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東亭 在府東南五里’ (동정은 경주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따라서 동정은 당시 경주 관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5리 떨어진 곳에 있던 정자였다. 다만 현재 그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며 정확한 터도 확정하기 어렵지만 경주 지역 문헌 연구에서는 동정을 경주 남천, 곧 문천汶川 일대에 있었던 정자로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