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일정을 제주도립미술관으로 잡았다. 아들이 꼭 관람하고 싶은 대단한 그림이란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내내 어떤 형태로 그려진 그림일까 몹시 궁금했다. 한국의 작가나 외국 작가의 초대전이라 미리 짐작했다.
미술관 입구 현수막에는 ‘고국의 품에 안긴 변월룡’이란 이름이 걸려있다. 이름이 너무나 생소하고 낯설다. 큰 호기심에 바람 한 줄기 불어주지 않는 쨍쨍한 날씨에 정수리에 쏟아붓는 햇볕도 따가운 줄 몰랐다.
전시실로 들어섰다. 그림은 큰 붓을 사용하여 강한 필치로 이루어졌다. 묘사는 생생하다. 적절하게 덧칠한 그만의 색감이 독특하다. 붓질은 속박을 모른다. 자유롭다. 이런 그림을 그린 작가가 있었던가 싶다. 어떤 화가인지 알아야만 그림 감상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나이가 지긋한 미술관 큐레이터에게 그에 대해 물었다. 변월룡은 구소련에서 활동한 천재 화가라고 했다. 설명하는 큐레이터는 이런 화가가 이 나라의 출신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보였다. 나 역시 생소한 화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영상에는 그의 지나온 평생을 담고 있다. 결코, 조국에 편입되지 못하고 유랑민으로 살았던 흔적과 삶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역사의 단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분단과 냉전, 이념의 대립이라는 현실로 인해 고국에서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지도 못했다. 우리나라 미술 역사 어디에도 그의 자취는 없었다. 다행히 한국과 러시아 수교 2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변월룡이란 작가의 실체를 알리는 전시회가 마련된 것이다.
그는 한인 최초로 구소련에서 미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국 방문 기회도 주어졌다. 북한에선 평양미술대학 학장이란 직책을 주었다. 그가 일 년 삼 개월을 머무는 동안 북한 미술 체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놓았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변하는 사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지만 귀화를 거부하고 주체사상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다시는 고국인 북한 땅을 밟지 못하는 마지막 길이었다. 소련과 교류가 없었던 시절 남한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알지를 못했다. 러시아에서 미술의 거장으로 존경과 인정을 받았지만 정작 너무나 사랑했던 조국 북한이나 남한에서는 소외되어 있었다.
화가는 북에서 본 풍경과 인연들을 잊지 못했다. 월북 문인이나 예술가들, 주민들의 생활과 명승지까지 아름다운 색채로 기록하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전쟁의 아픔까지 시대의 비련을 증거물로 화폭에 담아 놓았다. 변월룡의 예술 세계를 늦게나마 알게 된 것도 천재적인 재질과 탄탄한 데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발길을 옮긴다. 전설적인 월북 무용가 최승희 초상화 앞이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까지 그림으로 남겼다. 실물을 보는 듯 춤사위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북한 지역 무용을 발전시키며 승승장구하던 그녀도 숙청되어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망설이 있기도 하다. 생전에 그녀의 활동을 볼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림으로 최승희를 만나는 영광을 안았다.
문학과 그림, 또한 미술사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근원 김용준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멋을 아는 예술가로 보인다. 검은 코트에 진한 베이지색 목도리가 퍽 인상적이다. 그 시대 모습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멋지고 세련된 패션에 놀랐다. 월북 이전에 김용준은 가난한 화가 김환기에게 신혼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단다. 그 마음만 미루어 보아도 두 사람의 우정이 어느 정도였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김환기의 유명한 점화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속 수많은 점, 한 중심에 김용준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점 하나로 찍었으리라. 이제는 해금되어 《근원수필집》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잘생긴 그의 초상화가 살아 있는 듯하다.
반월룡에게 어머니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노년기에 화가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자애롭고 후덕한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렸다. 흰 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자화상과 닮아 보인다. 인물화는 주로 흰옷을 입고 있다. 그만큼 백의민족이란 걸 강조하고 싶었을 게다. 나는 아직껏 흰 물감을 이렇게 환상적으로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그림을 보는 건 처음인 듯하다. 희디흰 물감으로 눈이 시리게 그의 한(恨)을 나타내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은 안다. 마음 언저리에는 언제나 아련함으로 고향을 그리워한다. 갈 수 없는 조국이라면 더더욱 그랬으리라. 그가 그린 ‘바람’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느낄 수 있다. 러시아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바람 같은 자신의 심경이 표현되어있다. 거칠게 불어대는 바람을 견뎌내는 나무가 뿌리를 지탱하며 순응하는 그림은 바로 화가 자신이라는 느낌이 든다. 비록 소련 땅에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그림에 한글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건 고국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안타까움은 조국에 대한 기억들은 좀처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북한의 화가들이나 예술인들을 영혼의 붓질로 화폭에 담았던 작품들은 오로지 ‘민족의 뿌리’였다. 그가 대한민국에 거주했더라면 그 시대 화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와 함께 구상작가 변월룡이란 근현대미술계의 자랑스러운 천재 화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았으리라.
그림을 관람하는 동안 시간을 되돌려 그 시대에 내가 있는 느낌이다. 잘 그려진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명치끝이 찔린 것처럼 마음에 끝없이 아픔이 인다. 변월룡 화가가 평생 고국을 가슴에 품고 지낸 삶의 기억들이 캔버스에 붓질로 남아 있다. 바람이 불어야 뿌리 깊은 나무를 알 수 있듯, 세차게 흔들어도 결국 뽑히지 않았던 그는 러시아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려인으로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일생을 마감한 거장 화가 변월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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