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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굿의 주인 수영산 물애기씨
부여지방의 굿에는 수부굿이 있다.
무당은 마당에 수부상을 차려놓고 평복을 하고, 맨머리에, 징을 엎어 놓고 앉아서 육자백이조로 무가를
부른다.
육지에 군웅굿이 있다면 바다에 수부굿이 있다.
군웅굿은 육상전투를 하다가 전사한 육군을 위하여 행하는 굿이고, 수부굿은 해상전투를 하다가 전사한
수군을 위하여 행하는 굿이다.
군웅굿에서는 군신軍神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이 굿을 주관하는 최고 군웅이 되고,
수부굿에서는 맥국貊國의 우두머리인 소시머리를 토벌한 바 있는 황애장수할미가 최고 수부가 된다.
육군은 평시에는 농부였고, 수군은 평시에는 어부였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이들은 모두 도깨비(군대)가 되었다.
이들이 죽으면 상청上廳 중청中廳 하청下廳으로 위계가 나뉜다.
이들은 안에 있고 밖에도 있고 길에도 있다.
물에 빠져죽을 뿐만 아니라 물에 빠져죽지 않았어도 죽어서 수부에 편성되는 자들도 있다.
旗 들고 旗를 들던 수부님네
................
임진년 왜란시여 목도 말라가고 배도 고파 가고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졸다 죽고 자다 죽고
태장 맞고 활도 맞고 총도 맞고
성 안에서 죽은 귀신 성 밖에서 죽은 귀신
오다가다 객사하고
(扶餘지방 <수부굿>)
이들을 위하여 굿을 할 때는 수양산에서 물애기씨 서낭을 모셔다 도당에 모시고 굿을 한다.
물애기씨 서낭을 깃발에 모신다. 깃발에 모시는 이유는 그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수부이기 때문이다.
유남영이 자기가 해 온 풍물굿의 역사를 밝히면서 물애기씨의 본색이 수영산水營山임을 밝혔다.
해주 수영산이 물애기씨의 본향산임이 밝힌 것이다.
(<아산국가공단 고고민속조사보고서> 박물관 총서 13집)
“해주 뒤에 수영산, 고리해서(거기를 거쳐서) 내가 수영산을 넘어서 신재령 남원으로까지 간 사람이여.
참 아니 헐 말로 내가 인제는 73살인데, 73살 먹으면서 껌불만(껍데기만) 돌아다니지 볼 장 다 본 사람
이여.”
(우도 풍물굿의 산 증인 유남영, 전광석 조사)
수영산은 동래학춤의 본고장인 동래에도 있었다.
원불교신도인 종성이라는 분이 쓴 글에.
“본부本部(원불교 본부인 듯) 동래면 석사리 도작곡 소림굴에서 일숙一宿하고, 익일 평명平明에 동창
東窓을 열고 홀로 앉아 수영산을 바라보니 마침 정상에 일편흑운一片黑雲이 일어나서 일광日光을 음폐
蔭蔽하야 가려佳麗한 산수의 미美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수영산은 본시 수려한 산으로 아침 날의 빛난 태도에 더욱 선명하야, 보는 사람의 정신으로 하여금
장쾌(壯快)한 기미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종성도 이 장쾌한 정신으로 선명한 경개를 사랑하야, 앉아 있는 것을 잊어 바리고 산만 바라보다가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저같이 가려佳麗한 산색山色도 일편흑운으로 인하야 암흑의 미경이 되고, 저같이 명랑한 일광도 일편암
흑계一片暗黑界를 일우니 우리 마음은 무엇을 인하야 광명을 나투지 못하는고?’하며 무엇이나 깨달은 듯
머리를 기울고 생각든 차에, ‘오! 세욕世慾’하는 두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시대에 동래에 수영산이 있었음을 위 글이 말해주고 있다.
동래에 조선수군의 사령부인 수영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수영산으로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곳 당산굿에도 수영산 물애기씨가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수영산이라는 산 이름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통영은 가무가 흥했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굿도 많이 하였다.
지금도 정초에는 <남해안별신굿> 24거리를 사흘 동안 한다.
황해도굿 <산거리>에서 물애기씨가 무슨 일을 하는 분인가를 알 수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부군당의 문을 열어주는 일을 한다.
수위사(수영산水營山의 오기誤記) 물할머니 물애기씨
부군문府君門을 열어줘요
(황해도굿 <산거리>)
물할머니는 마고를 뜻하고, 물애기씨는 물할머니의 딸로 궁희와 소희를 뜻한다.
물애기씨는 단군왕검의 부인인 하백녀를 뜻하고, 물할머니는 하백녀의 어머니를 뜻한다.
이들이 천수를 치고 부정을 씻어내야 부군당의 문이 열림을 보여준다.
하늘에서 하늘 문을 여는 분을 천왕이라고 한다. 부군당의 문을 여는 분은 물애기씨이다.
그러므로 도당제를 지낼 때 물애기씨를 깃발에 모셔다 목욕재계하고 부군당의 문을 열어온 것이다.
물애기씨가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열지 못한다. 그러나 물애기씨 혼자서 여는 것이 아니다.
.三都堂에 하회(和解의 오기)받아
물애기씨를 모셔다 도당굿을 하려면, 삼도당에서 화해를 받아와야 한다고 한다.
삼도당은 해주의 수영산, 한양의 아기씨산, 서울의 수도국산-국사당이 있는 산이다.
수도국산首都國山 물애기씨
황해도 무가 철무리굿의 제석굿에선 무당이 사해용왕四海龍王님, 옥황玉皇님, 물애기씨를 상징하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물동이에 삼색과일과 밥 세 숟갈, 밤, 대추, 돈을 넣고 한 발을 먼저 물동이 위를 딛고 어르다가 올라가
서서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맴돈다.
(김금화 저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78,79 쪽)
무당은 삼용왕을 상징하는 남색옷을 입고, 삼색과일, 밥 세 숟갈, 밤`대추`돈 3가지를 함께 물동이에
넣는다.
굿상에 바치는 물동이는 검은 동이이다.
검은 동이는 한자로 쓰면, 검지동이儉之東夷가 된다.
검지동이는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동이국, 즉 조선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3색과일. 밥 3숟갈, 반`대추`돈 3가지를 넣는다.
이들이 모두 3이라는 수로 만들어내는 부작이다.
이 부작은 원동력을 생산해 내는 재료나 원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무당이 이 원료를 넣은 동이 위에 올라가서 한 바퀴 맴도는 것이 역시 태극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산도의 제승당이나 통영의 충렬사에서 수부굿을 한다면 물애기씨를 모셔 와서 굿을 해야 할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한산도 두억리에 제승당을 지었을 때 이 일을 하였다고 본다.
삼도당의 화해를 받아야 했으므로 해주와 한양에 무당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 통영에선 세병관 주변을 성역화 하는 작업에 착수하려 하고 있다.
성역화가 완성되었을 때 도당굿을 한다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물애기씨와 물동이
물애기씨를 주신으로 모신 애기씨당에 가면 제단 위에 놓인 검은 물동이를 볼 수 있다.
신들을 모신 신당들이 유기로 만든 옥수그릇이든 사기로 만든 옥수그릇이든 옥수그릇은 올리지만
옥수그릇으로 물동이는 올리지 않는다.
유독 애기씨당만이 검은 물동이를 신단위에 올려 놓는다.
애기씨당이 다른 신당과 다른 점은 바로 이점이다.
다른 신당은 특징이 없어서 당주가 주신을 어떤 신을 모셨는지 알 수 없는데, 애기씨당만은 검은 물동이
를 신체로 모셨기 때문에 당주가 모시는 주신이 어떤 신인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물애기씨와 물동이는 물이라는 문자를 함께 쓴다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물애기씨와 물동이는 띠어서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물동이 해석
단군조선시대의 국도(서울)를 험독險瀆(해자垓子로 둘러싸인 국도國都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험독의 독瀆에는 물동이라는 의미가 있다.
험險은 읍邑+첨僉으로 구성된 문자이다. 읍은 국도를 의미하고, 僉은 우리 말 처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험은 처음 생긴 국도라는 의미로 풀린다.
<강희자전康熙字典> [양자방언楊子方言]에 僉을 自山而東五國郊曰僉이라고 하였다.
“자산(太白山의 오기일 것이다. 단군조선 국도의 진산을 太白山이라고 하였다. 태백산이 있는 천평
天坪을 서울西菀로 불렀다.)과 동쪽 오국五國(단군조선을 세운 우가牛加·마가馬加·양가羊加·저가猪加·
구가狗加로 구성된 五加의 나라로 본다)의 국경을 첨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백산과 동오국의 국경 안에 단군조선의 국도인 험독이 있었으므로, 단군조선의 국도를 지칭하는 僉과
險이라는 두 문자가 나왔다고 본다.
첨은 처음이라는 뜻으로, 험은 처음 생긴 국도라는 뜻으로 썼을 것이다.
그곳이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험독이라고 하였다.
물동이의 동이는 동이東夷와 동국이東國夷의 둘로 볼 수 있다.
동국이에서 동국은 [양자방언]에서 동국교라고 하였고, 이를 첨이라고 하였다.
첨에 해자를 둘러 險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이에는 험이라는 의미가 있고, 이 험은 험독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동이는 험독을 상징한다. 이외에 동이라는 뜻도 있다.
동이는 조선을 세운 동이족이다. 물동이는 동이족의 나라 조선을 상징한다.
후에 일어난 한漢은 중국 대륙에서 상고시대에 일어난 단군조선의 역사적 산물인 동이라는 말을 싫어
하여 예맥濊貊으로 불렀다.
또 [양자방언]에서 타곡구打穀具를 첨僉이라고도 하였다.
처음 나온 탈곡구-도리깨라는 뜻일 것이다.
[廣韻][集韻][正韻][韻會]에서 僉은 개皆·함咸(모두)이라고 하였다.
당시에 손으로 만든 모든 것들이 새로웠으므로, 이러한 말도 생겼을 것으로 본다.
물애기씨
물동이를 단군조선의 국도인 험독과 단군조선을 세운 동이족으로 본다면 이에 대응하는 물애기씨의
위상도 이와 걸맞게 보아야 할 것이다.
애기씨에 왕녀王女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당시의 왕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단군왕검의 두 번째
부인 하백녀를 들 수 있다.
하백녀는 비서갑菲西岬(한국을 새운 한인천제桓因天帝의 61대 직계후손 부소갑扶蘇岬, 비서갑은
지금의 하얼빈이다)의 따님이다.
물애기씨는 한자로 번역하면 하백녀河伯女(하백의 딸이라는 뜻)라는 뜻이다.
그가 무진원년(BC2333)에 단군왕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신후神后로 호칭되었다.
물동이와 물애기씨 하백녀
물동이가 동이족이 세운 조선을 상징하므로, 애기씨당 신단에 놓인 검은 물동이는 조선을 상징하는
물동이로 볼 수 있다.
물동이의 검은색은 검지색儉之色,즉 단군왕검의 색을 나타낸다.
단군왕검의 색을 검은 색이라고 한 것은 검은 색이 북방과 물을 의미하므로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다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검은 색은 북방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위치를 나타낸다.
단군왕검이 水精임도 나타낸다.
수정은 우주 북극에 있는 물의 정기를 의미한다.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가 이 물의 정기 이어받아 수정자水精子라고 하였다.
노자老子는 수정이 있는 곳을 현지우현玄之又玄(<도덕경>제1장)이라고 하였다.
가물가물한 북쪽이라는 뜻이다.
또 노자는 그곳을 젊은 여자들이 모여 있는 기묘한 문과 같은 신비스러운 곳(중묘지문衆妙之門 -
<도덕경> 제1장)이라고 하였다.
노자는 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고 하였다.(<도덕경> 14장)
이를 玄之又玄과 유사한 의미로 섰다고 본다.
夷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색깔이 없음, 허무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이족은 백색을 선호하였다.
단군왕검은 하백녀로 하여금 백성을 시켜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게 하였다.
이리하여 단군조선에서 여자들이 길쌈을 시작하였다.
물애기씨를 찾아오는 애기씨당 신도들은 물애기씨에게 옷감과 옷과 화장품을 올린다.
물애기씨가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기 대문이다.
여기에 물애기씨가 단군왕검의 부인 하백녀였음을 추억할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다고 본다.
여와의 우주창조신화 인식의 오류
신화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인류창조신화 해석에서 인용하는 ‘여와와 복희의 우주창조신화’로 알려진
‘보천補天신화’에 대하여, 이제는 지금까지 이 신화를 보아온 중국인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동이족의
관점에서 달리 보고, 새롭게 우리 해석을 해야 할 때라고 본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잘못 보고 잘못 해석해 온 오류가 이 신화 해석에서도 그대로 답습이 되고 있다.
요즈음 신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단군신화 해석의 오류를 신랄하게 지적하기 시작하였고, 단군신화
해석을 업그레이드함으로써, 단군신화가 인류 최고最古의 신화임을 입증하려 하고자 한다.
상당한 성과가 인터넷의 카페·블로그·홈페이지 상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보천신화’에서도 단군신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 조상이 현재의 중국대륙에서 역사를 시작하였고, 그 역사가 무려 12000년 이상이나 되기 때문에,
신화재해석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여성신화>(집문당 2003.9.26.간행)에는 ‘동아시아고대 학회 편’으로 ‘여와신화’ 35쪽
분량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 ‘2. 여와 그 우주의 아르케 1) 왜 보천신화인가 서두에서 ‘여와보천신화’를 인용한다.
“아주 오랜 옛날 우주의 사극(四極)이 무너지고, 온 천하의 별들이 갈라져서, 하늘은 대지를 제대로 덮을
수가 없었고, 땅 또한 만물을 두루 안아서 실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은 활활 타는 불길이 치솟아 꺼지지 않았으며, 질펀하게 넘치는 강물과 홍수는 그칠 줄 몰랐다.
맹수들은 선량한 백성들을 잡아먹었으며, 사나운 새들은 늙고 연약한 것들을 낚아채갔다.
이에 여와는 다섯 빛깔의 아름다운 돌을 다듬고 구워서 하늘의 터진 틈을 깁고, 커다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무너진 우주의 사방에 기둥을 세워 하늘을 떠받쳤다.
흑룡(黑龍)을 잡아 죽임으로써 천하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갈대를 태워 그 재를 지상에 쌓음으로써 넘치는
홍수를 그치게 하였다.
마침내 푸른 하늘은 기워졌고, 우주의 사극도 바르게 되었으며, 홍수도 마르고, 천하도 평안해졌다.
흉악한 맹수들은 죽었으며, 착한 백성들은 살아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대지를 등에 대고, 하늘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
往古之時 四極廢 九州裂 天下兼覆 地不周載 火爁焱而不滅 水浩洋而不息 猛獸食顓民 鷙鳥攫老弱
於是女媧鍊五色石以補蒼天 斷鼇足以立四極 殺黑龍以濟冀州 積蘆灰止淫水 蒼天補 四極正 淫水凅
冀州平 狡蟲死 顓民生 背方州 抱圓天
위에 인용한 글은 역사를 신화로 바꾸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이지 신화가 아니다. 약간의 신화성을 가미하여 신화로 보이게 했을 뿐이다.
이 글을 왜 역사로 보아야 하는가?
상고시대에 우리 조상이 주로 활동했던 역사무대가 그대로 본문에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지명과 인명과 전쟁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위 글을 신화로 볼 수 없게 하는 단서 몇 가지를 간추려 보기로 한다.
이 글에는 중요한 지명 기주冀州가 나온다. 기주는 지금도 중국에 있는 지명이다.
이 곳에 탁록涿鹿이 있고,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 청구靑丘의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헌원軒轅의
황제黃帝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곳이다.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우리 쪽의 기록은 불분명하고, 황제 쪽의 기록은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패하여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구주九州는 9900년 전에 한인천제桓因天帝가 한국桓國을 세우고 한국을 九州로 분할하여 통치하였고
(<부소보서扶蘇譜序>), 이후로 역대 나라들이 구주체제를 변경하지 않아서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다.
탁록이 있는 그곳을 달리 귀주鬼州라고도 하였다.
다음은 인명이다.
본문에서 전민顓民이라고 하였는데, 전민은 전욱고양諯頊高陽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전욱고양이 제위帝位에 있었으므로 백성을 전민이라고 하였다.
전욱고양 이후에 백성을 여민黎民이라고 하였는데, 여민은 전욱고양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도록
내정되어 있었던 중여곤衆艅鯀의 백성을 의미하였다.
맹수가 전민을 잡아먹었다고 했는데, 맹수는 전민의 적대세력인 황제黃帝를 의미한다.
황제의 군대가 전욱고양의 백성을 공격하여 무차별로 죽였음을 표현한 말이다.
또한 지조鷙鳥가 노약자를 잡았다고 했는데, 지조鷙鳥(매)는 전욱고양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제곡고신帝嚳高辛의 아들 지摯를 의미한다.
여와女媧는 배달나라 초기의 사람이다.
그는 복희伏羲의 누이로서 복희의 부인이 된 사람이다.
여와가 오색의 돌을 갈았다고 한 것은 다섯 방위, 다시 말해서 동서남북중앙에 퍼져 있었던 오가五加를
상징한다. 여와의 후예가 그들을 모아서 멸망해가는 배달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음을 나타낸 것이다.
여와가 기주로 건너가 흑룡을 죽였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여와는 배달나라 초기 때 사람이고, 흑룡으로 표현된 사람은 여와보다 8대나 후대의 사람 치우천왕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놓고 여와가 치우천왕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치우천왕시대에 기주로 건너가서 흑룡(치우천왕)을 죽인 사람은 여와가 아니라 황제이다.
황제는 치우천왕(흑룡)을 죽이고 나서 스스로 황룡黃龍이라고 하였다.
치우천왕과 황제는 모두 풍이족 출신이다.
교충狡蟲을 죽이니 전민이 살아났다고 했는데, 교충은 간교한 풍이족風夷族이라는 뜻이다.
풍이족이 뱀(살모사)을 인종의 아이콘으로 쓰고 있었다.
같은 풍이족 출신으로서 치우천왕 쪽을 비하하여 교충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어느 쪽이 교충인가를 알 수 있다.
사극을 폐지하여 구주가 갈라졌다고 한 것은 황제黃帝-소호금천少昊金天-제곡고신帝嚳高辛-지摯로
이어지는 황제와 황제의 후예들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우주구성원리를 건국建國의 기초로 삼은
배달나라로부터 이탈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형이정이라는 우주구성원리를 건국의 기초로 한 사람이 한웅천왕이었고, 그는 원형이정을 기초로
하여 재세이화在世理化라는 국가이념을 확립하였다.
재세이화는 화백和白·치덕治德·책화責禍를 내용으로 한다.
황제가 배달나라체제에 반기를 들고 이탈하였으므로, 사극이 폐지되고 구주가 갈라졌다.
사극四極은 배달나라에 속한 유백국楡伯國(유망의 나라), 헌원국軒轅國(황제의 나라), 청구국靑丘國
(치우천왕의 나라)체제를 의미한다.
사극은 방위方位의 개념인데, 동쪽을 창룡, 서쪽을 백호, 남쪽을 주작, 북쪽을 현무라고 하였다.
치우천왕을 흑룡이라고 했는데, 흑룡은 현무방위에 있다.
치우천왕이 다스리는 풍이족을 나타낸 그림이 고구려벽화 사신현무도四神玄武圖이다.
이상의 역사 자료를 가지고 본문을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온다.
“아주 오랜 옛날에 전쟁이 일어나 배달나라를 지탱해 온 나라의 기둥들이 다 무너지고, 구주九州의 체제
또한 분열하여 나뉘어졌다.
나라가 망하니, 땅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아 꺼지지 않았으며, 물이 넘쳐 바다를 이루기를 그치지 않았다.
황제의 후손인 제곡고신의 군대가 유망으로부터 유백국의 적통을 계승한 전욱고양의 백성을 학살했다.
제곡고신의 아들 지가 늙고 약한 백성을 납치해갔다.
이에 배달나라시대에 여와국을 창설한 여와의 후예들이 나타나 흩어진 오가의 백성들을 끌어 모아 다시
배달나라를 보수하여 일으켜 세우고, 남방의 별국鼈國의 백성들을 데려다가 다시금 원형이정 재세이화의
사극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황제가 기주로 건너가 치우천왕을 살해하여 그 이후로 전국에 물이 넘치는 홍수가 끊이지 않았으나,
갈대를 모아 태워 그 재를 비방으로 써서 홍수를 잠재우고, 나라의 형상을 다시 보완하니, 나라의 원형
이정이 바로 섰고, 홍수가 말랐으며, 홍수에 시달리던 기주가 편안해졌다.
또한 풍이족의 상징인 뱀을 잡아 제사지내니 전란에 시달리던 백성이 생기를 되찾았다.
이로써 방주-방형의 땅의 배후에 둥근 하늘을 껴안을 수 있었다.”
이상으로 여와의 후손이 망한 배달나라의 후손들을 끌어 모아 보천, 즉 나라를 보수하였듯이, 왜곡된
신화를 여와의 후손이 보천 하듯 바로잡아 보았다.
이로써 여와의 보천신화는 배달나라 말기에 생성된 구려족의 역사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여와보천신화에서 드러나는 여와와 드러나지 않는 하백녀 물애기씨의 역할
‘여와보천신화’이 외에 같은 신화지만 또 다른 신화가 있다.
그 신화가 당나라 때 사마정이 쓴 <보사기補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이다.
‘여와보천신화’와 비교하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신화이다.
동이족의 역사를 신화에서 말살하기 위하여 조작한 신화라고 볼 수밖에 없는 신화가 ‘보사기’이다.
“여와 그 말년에 제후 중에 공공共工씨가 있었는데, 지모와 형법을 잘 써서 세력이 강해져서 패자가
되었으나, 왕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자신의 수덕水德으로서 여와의 목덕木德을 계승하고자 하여, 마침내 화덕火德인 축융祝融에게
도전을 하였는데, 싸움에 이기지 못하자 분노하여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아 무너뜨렸다.
그래서 하늘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부러지고, 땅을 엮고 있던 밧줄이 끊어졌다.
이에 여와가 오색의 돌을 다듬어 하늘을 보수하였다 ...... 마침내 땅은 평평해졌고, 하늘도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當其末年也 諸侯有共工氏 任智刑以强 覇而不王 水以乘木 乃與祝融戰 不勝而怒 乃頭觸不周山崩 天柱折
地維缺 女媧乃鍊五色石以補天......於是地平天成
이 글을 <여와신화>와 맞추어 보면 <여와신화>를 축소시키고 왜곡시킨 부분이 나온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당대말년’은 여와시대의 말년, 즉 배달나라시대의 말년을 의미한다.
당대말년이 지나가면 풍이족의 변형인 구려족九黎族은 동이족東夷族과 화하족華夏族으로 나뉜다.
당대는 여와女媧가 남성들을 통제하던 모계시대였다.
그래서 여와에는 음신陰神, 여신女神이라는 뜻이 있다.
신관神官 여와의 후예로 신관 하백녀가 있다. 여와와 하백녀를 달리 말하면 물애기씨가 된다.
본문은 기주冀州를 빼어버림으로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황제黃帝의 격전지를 알 수 없게 하였다.
기주싸움은 탁록대전으로 기록되었다.
황제가 치우천왕을 이김으로써 치우천왕을 주축으로 한 구려족의 화백체제가 무너지고 화하족
(화하족은 동이족에 대응하여 생긴 말이다. 동이족의 夷가 춘분의 기氣이므로 하화족의 夏는 하지夏至
의 기가 된다.)이 역사의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게기가 되었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황제를 황룡黃龍(중원中原의 용이라는 뜻이다)으로 받들고 있지만, 황제가 흑룡
黑龍(북방의 용이라는 뜻, 귀주鬼州, 즉 구주九州의 용을 의미한다.) 치우천왕을 죽이고 황룡이 되었
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여와가 가지고 있는 신성神性을 목덕木德이라고 하였다.
여와의 목덕은 물애기씨 당 앞에 서있는 서낭목(城隍木)으로 볼 수 있다.
물애기씨당의 서낭목은 도당제에서 서낭을 모시는 당나무(신목)이다.
서낭은 물애기씨를 호위하는 신장을 말한다.
경기도에 있는 각 도당에서는 조선시대에 수풀당에서 물애기씨의 사자使者로 서낭을 모셔다 도당제를
올렸다.
여와의 시대에 제후 중에 공공씨가 있었다. 공공은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제후 중에서 공공을 임명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여와보천신화’와 맞추어 보면, 공공씨가 전욱고양에게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킨 제곡고신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제후로서 또 공공으로서 인사(任)와 관리(智)와 형벌(刑)을 잘 다스려 막강한 실력을 쌓아 전욱
고양의 다음 자리를 굳혔다.
전욱고양을 제위에서 끌어내린다면 그가 제위에 앉을 수 있을 만큼 막강해졌다.
그가 패권을 잡기는 했지만 제위를 상징하는 천부삼인을 전임자로부터 인수하지 못해 왕이 될 수
없었다.
무당인 여와가 천부삼인을 물려주어야만 그가 제위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차기왕의 자리에 중여곤이 앉아 있었다. 중여곤이 다음의 제왕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화덕火德의 자리에는 전욱고양이 있었고, 그를 축융이라고 불렀다.
축융은 불을 관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국을 세운 한(한인의 桓은 불이 환하다는 뜻이다)인천제로부터 한(한웅의 한도 불이 환하다는 뜻이다)
웅천왕·복희·신농·유망을 거쳐 전욱고양에게 축융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제곡고신은 수덕으로서 화덕인 전욱고양에게 도전하였다.
水와 火의 싸움이므로 수극화水剋火(수(물)가 화(불)를 이긴다는 뜻)가 될 것인 즉, 이기리라고 자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와가 목덕을 가지고 있어서 목으로 전욱고양의 화를 돕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목이 수를 빨아들여 물을 마르게 하므로 화를 돕는 2:1의 싸움이 되어 화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가 여와의 후예가 다스리는 모계사회였으므로 여와의 후예는 다시 흩어진 백성을 모아
무너진 체제를 정비하여 나라가 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신화를 우주창조의 신화로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
우주창조신화가 아니라 무너진 배달나라를 재건하는 이야기이다.
이 글에서는 ‘여와보천신화’에서 밝힌 전민顓民-전욱고양의 백성을 축융祝融으로 대체하였다.
그러므로 전욱고양의 시호가 한국의 한인천제로부터 전수된 축융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지조鷙鳥를 빼어버림으로써 전욱고양에게 반기를 들었던 제곡고신의 아들 지摯의 반역자로서의
만행을 삭제하였다.
당시에 제곡고신이 제위를 전욱고양의 아들 중여곤에게 물려주도록 되어 있었지만, 제곡고신은
중여곤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그의 아들 지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전욱고양에게 도전하였다.
다음에 제위를 차지할 만한 정통성을 갖지 못했던 황제의 후예 제곡고신帝嚳高辛이 전욱고양에게서
제위를 빼앗기 위해서는 명분 없는 싸움을 건 것이다.
황제가 치우천왕의 화백체제에 도전한 후에 두 번째 도전이었다.
이번 도전의 상대는 치우천왕이 사망함으로써 자동으로 유망에게 승계된 화백체제를 물려받은
유망의 손자 전욱고양이었다. 싸움의 격전지가 된 곳이 부주산이다.
부주산의 전쟁은 제곡고신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그는 제위를 전욱고양의 아들 중여곤에게 넘겨주지 않고 그의 아들 지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이 당시가 모계사회이므로 모계를 승계해 온 여와의 후예들은 주의 깊게 이 싸움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가 이기든 훼손당한 신시화백체제를 재건하고 보수하는 일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본문은 교충狡蟲이라는 말을 버려, 전욱고양과 제곡고신이 풍이족출신임을 은폐하였다.
충蟲의 충虫은 작은 뱀으로 살모사를 의미한다.
풍이족의 인종 아이콘이다.
충蟲자는 치우천왕의 청구인靑丘人, 유망의 강수인姜水人, 황제의 희수인姬水人(軒轅人)을 의미한다.
단오족斷鼇足이라는 말도 버려, 단오족이 남쪽에 사는 발족發足-發人-동이족(管子가 한 말임)의
조상임을 알 수 없게 하였다.
남쪽에 하는 인종을 풍이족이라고 하였고, 풍이족을 다스린 한인천제를 적제赤帝 축융祝融이라고
하였다.
오족鼇足은 한인천제가 다스리던 풍이족을 의미한다.
여와가 풍이족을 데려다가 인구를 보충하여 전욱고양의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본문을 가지고 역사를 추론하다 보면, 전욱고양의 후예로서 중여곤이 나오고, 이어서 단군왕검이
나오므로 이 점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수호양水浩洋은 황하를 넘치게 하여 발해의 수위를 상승시키는 황하의 홍수를 뜻한다.
황하를 관장하는 임금을 하백河伯이라고 하였다.
하백의 역할이 적로회음수積蘆灰止淫水라는 문장에 나타나있다.
황하에서 하백이 갈대를 쌓아놓고 태워 지우제止雨祭를 올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제관이 여자였다.
하백의 딸을 하백녀河伯女(물애기씨)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하백은 풍이족 출신으로 한인천제의 61대
손인 부소갑扶蘇岬-비서갑菲西岬이었다.
하백녀가 여신의 지위에 있는 여와의 명을 받아 지우제를 지냈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이 단국檀國의 홍제洪帝로부터 단국을 인수하고 배달나라(조선을 선포한 것은 10년 후이다)를
선포했던 무진년에 단군왕검의 비妃가 되었다.
창천보蒼天補라는 말에서 창蒼은 동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천은 동족 하늘이다.
보補는 동쪽 하늘을 보수하였음을 나타낸다. 동쪽 하늘이 무너졌으므로 오족鼇足(남쪽에 살던 풍이족)
을 데려다 보수하였으므로, 본문이 앞으로 오족을 주축으로 한 동이족東夷族이 태어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조선朝鮮이라는 문자는 해와 달이 뜨는 곳에 살고 있는 인종 아이콘 어족魚族과 인종 아이콘 양족
羊族을 의미한다.
물에 사는 어족은 물에 사는 오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의 어족은 전신이 오족이다.
양족은 유망을 계승한 전욱고양의 인종 아이콘이다.
조선이라는 문자에서 이렇게 여와가 다리를 잘라 하늘을 보수(아직 뿌리가 남아 있는 풍이족을 데려
다가 구려족의 나라를 재건)한 오족鼇足이 나오는 것이다.
어족의 여자제관이 한인천제계열의 하백녀이다. 하백녀는 물애기씨가 된다.
우리에게 물애기씨가 있음은 달리 말해서 여와와 하백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중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