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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품의 조형성 연구
오 춘 란**
[한글 요약]
인간은 철학이나 과학으로 정신과 물질의 세계에 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해왔던 그 이상으로 예술로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자기세계의 통일을 구하고자 노력해왔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서 공간 예술의 본질을 규명하는 근거로 삼고자 했다.
현대 물리학이 밝히는 우주와 자연의 통일성과 간결성 그리고 역동성이라는 본질적 자연성이 인체의
생리와 심리에 관통되어 인간의 조형 행위에 미치고 있음을 圓形이라는 시각적 표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로서 우주와 자연의 존재들 사이의 관계들에서 조형 질서의 필연성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개적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감성작용에서부터 미적 예술적 보편적 가치로 승화하여 미술의 역사가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우주의 전일성과 공명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회화 예술의 정상에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그 전형의 기준을
찾아서 현대 작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조형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각적 분석의 결과는 [plate1∼27]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모든 시각대상인 형태들은 사각형의 평면에
서는 수평선, 수직선, 대각선, 원형의 線上으로 귀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기하학적인 선들은 결국은 기준인 것이지 그 선이 절대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 기준에서 어떻게
비약 할 것인가는 그 작가의 역량인 것이다.
이상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예술은 별개의 인간활동으로 끝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며 곧 자연이다.
둘째, 조형예술의 본질은 모든 시각요소들의 통일과 간결한 구조, 역동적인 생명감의 표현에 있다.
셋째, 좋은 상태에 있는 회화 예술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 촉지 할 수 있는 물질의 매체를
통해서 실제 하는 새로운 예술적 공간으로 탄생되어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게 한다.
이때 작가 개개인의 변화 무쌍한 특성은 우주 전체의 통일성이 존재하는 것 같이 이러한 기하학적 패턴이
시각적 공간인 예술세계를 통일시켜주는 원리원칙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조형예술의 본질을 확인한다는 것은 예술을 창조하거나 예술을 감상하는데도 그 기준을 제공해
줌으로서 상호 상통하는 조형언어로서의 본분을 다 할 수 있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첫째, 현대 조형예술이 아무리 비 자연적이라 할지라도 본질적 원천은 바로 그 원초적인 자연에 있으
므로 철학적인 사고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오늘의 작가들이 이룩한 미술의 양상이 예술의 전부가 아니고 어느 방향의 일부분임을 거시적
안목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동서양이 하나로 지향해 가는 즈음에 우리는 동양의 자연철학과 동시에 서양의 자연관을 동시에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예술의 방향을 모색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결국은 진정한 예술가는 과학자와 똑같이 자연의 또 다른 면모를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하고 그러한 자연관에서 작가의 예술관이 정립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선구적인 작품이 창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1. 서 언
일반적으로 예술은 인간 자신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은 외계에 대해서 시각적으로 지각된 현상의 반응이라고 말
한다.
그 반응이 공간이나 시간이라는 패턴 위에서 매체를 통하여 어떤 형식을 취할 때 우리는 공간예술, 시간
예술이라고 부른다. 또한 인간신체의 감각기관에 따라서 시각예술 또는 청각예술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술의 기반이 되는 공간이나 시간이라는 개념을 인식하는 방법이 동양인과 서양인이
다르며 각 시대에 따라서 그 개념이 변천되어 왔고 따라서 공간예술의 양식이 변모되어 왔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사고 체계 위에서 수만년, 수천년, 그리고 천년 또는 수백년, 근세에 와서는 백년 또는
오십년 주기로 변천하던 것이 마침내는 거의 동시 발생적으로 개별적인 주장이 강하게 대두됨으로서
오늘날에는 마치 예술이라는 것이 일방적 개개인의 감정을 토로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 같은 혼돈된
세계가 현대 예술현상이 아닌가 한다.
예술이 자유 분방한 자신의 감정의 표출이라 할지라도 일단 물질적 매체를 통해 공간상에서 시각적으로
어떠한 이미지를 감지할 수 있게 되기에는 그 공간 자체 내부에서 시각 요소들 간의 관계가 복잡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조형공간상의 가장 기본적 원리들에 대한 사고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러한 객관성과 주관성이
어떻게 통합되어 예술화되고 있는가를 시각적으로 분석하여 제시 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에 상응하는 첫째 문제로서 공간의 개념인데 우주 공간의 통일된 질서와 조형질서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고
두 번째 문제는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삶의 질서가 인체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심리적 감성적 작용에
미치는 영향의 결과로서 표출되는 image에 대한 논의이며
세 번째는 이러한 우주의 질서, 자연의 질서, 인간 삶의 질서 그리고 조형질서의 全一性을 논증하여 조형
원리의 그 필연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넷째로 회화 예술의 전형을 확립한 Leonardo da Vinci, Michelangelo, Raffaello의 작품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어떠한 방법으로 시각화하고 있는지 그 유형을 찾아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현대에 이르는 많은 작가들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다섯째, 시각예술의 양식사에서 획기적으로 예술의 차원을 轉向시킨 작품을 임의로 선택하여 변모하는
요인과 또 작품을 예술로서 존재케 하는 요인 다시 말해서 회화를 예술로서 존재케 하는 본질이 무엇인
가를 밝혀 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을 향하는 길은 필연적으로 두 개의 방향을 동시에 보아야 하는 것이다.
2. 조형원리의 물리학적 측면
과학과 종교가 공간과 시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술 또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패턴 위에서
시작되고 있다.
공간예술이라 하면 회화, 조각, 건축을 말하고 시간예술이라고 하면 음악, 문학을 그리고 공간과 시간을
종합한데서 만들어진 예술을 연극, 영화라고 분류해 왔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는 4차원, 5차원의 예술의 장르genre도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에서 공간과 시간이 통합된 개념으로 종합예술이 생긴 것은 1905년 Albert Einstein(1879-1955)이
특수상대성 원리를 발표한때와 같으며 Edwin, S. Porter가 영화 <대열차강도>를 피츠버그에 있는 영화
관에서 세계최초로 상영했던 때인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Henry Matiss(1869-1954)를 위시한 야수파Fauvism화가들이 현실에서 우리가 일상적
으로 지각하고 있는 형태를 가능한 단순화시키고 자신의 직관을 통한 개별적 감성으로 지각한 색채로
채색함으로서 새로운 조형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1908년에는 Henri Ford(1863-1947)가 'model T'라는 자동차를 개발하고 Pablo Picasso(1881-1974)
와 George Braque(1882-1963)는 큐비즘Cubism을 창안해 내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의 물체를 한 시점에서 보고 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면
큐비즘은 하나의 물체를 多視点에서 보고 한 화면에 조립하는 동시성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과학적 패턴과 함께 예술이 공간과 시간의 통합된 개념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과학과 새로운 예술이 서구에서 동시에 나타났다는 기록일 뿐이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
치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현상에 급격한 변화가 있게된 중요한 원인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물리학이 極大 極微한
세계를 다루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 고전 물리학의 기본적인 입장이 순수한 객관주의로서 관찰의 대상체는
주관과는 관계없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파악했던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존재의 불변적 특성은 수량적 諸속성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게 됨으로서 관찰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주관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주관적인 감각에 속하는 색이나 음의 본질도 객관적인 파장이나 진동의 수로 대체되고 감각작용은
사진기, 진동막, 한란계 등으로 대체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고전물리학의 기본개념들, 절대공간, 절대시간, 因果律, 질량적 물질 등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파기되었다.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은 Einstein에 의해서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하여
상대성이론을 수립하므로서 공간이 시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상대적일 뿐 아니라 시간의 全 구조가 우주 안에서의 물질의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 고전물리학의 철칙으로 생각했던 因果律은 Werner Karl Heisenberg(1901-1976)가 不確正性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역학을 수립하게 됨으로서 원자의 세계에서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
이다.
다시 말해서 고전물리학에서 생각했던 질량적 물질은 양자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원시인간이나 미개한 부족에게 보여졌던 자연의 신비가 현대 물리학자들에 의해 되찾게 되었
다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라는 것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시간이란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고 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曲率에 의하여 歪曲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트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양자물리학은 여기서 더욱 주관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서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素立子를 관찰하였는데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나 비존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에너지(氣)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場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과학인 새로운 양자 물리학에서는 자연에 있는 존재를 관찰함에 있어서 그 관찰의 대상이
일관성 있는 존재가 아니며 또한 그 존재의 記述로서 양자 물리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과학자가
그 대상을 관찰하면서 그 경험을 정리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서 성립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자는 자신이 시도하고자하는 방식에 따라서 관찰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됨으로서 여기에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작용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질의 궁극적 본질에 관한 실험은 가장 정교한 기술에 의해서 물리학자들이 자연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궁극적인 구성체building blocks를 찾아 마침내는 핵의 구성물인 양자와 중성자 및 기타
수많은 亞原子 粒子들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는 환경으로부터 자연의 영역인 미시적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그
결과는 우리가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탐구된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다.
원자의 내부를 조사하고 그 구조를 살핀다는 것은 과학이 우리가 가진 감각적 심상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과학이 논리와 상식으로 그 절대적 확실성을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현대 물리학자들은 동양의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비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
었고 또한 신비가들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서게 됨으로서 현대물리학의 모형과 이미
지가 동양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현대 조형예술의 세계에서도 전 세기말에 인상파가 색채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했던 것
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강력한 주관적 표현으로 나아가서 시각적 혁명이라 하고 있으며 또 인상파에
이어서 Gauguin은 한 視點에서 보이는 일정한 공간의 원근법적 방법에서 과거의 기억과 현재, 미래의
공상을 종합하고자 하는 지극히 사변적인 공간을 창출해 내었고 큐비즘에서는 지금까지 일시점에서
사물이 보이는 면만을 그리던 방법에서 다시점에서 관찰한 것을 한 화면에서 조립하는 同時同存 방법을
창안해(1917)냄으로서 현상과 可視的 세계의 배후에 있는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서 全體表象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실체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다시점에서 보는 이러한 방법은 눈으로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인식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시각적인 리얼리즘Realism에서 지성적 리얼리즘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1910년 Italy 미래파Futurism들은 이러한 분석적 큐비즘의 방법을 채택하면서 기억의 세계와 미래에
있을 공상의 세계, 그리고 현실의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의 따블로tableau에 몽따쥬montage기법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시간과 장소가 상이한 것을 조립하는 방법에서 화면을 중복시키면서 다이나믹한 역동적인
선으로 형체의 推移를 부각하였는데 이것을 면의 '상호침투'라 하고 물리적 초월주의라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의 통합된 時空의 개념은 새로운 물리학으로서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제기된 이후
과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라고 하는 만큼 예술 상에서도 거의 같은 시각상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피카소에 의해서 창안된 '동시성'과 '동존성'의 표현방법이 현대 추상미술의 길을 열어 주었고 추상미술
안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추상작가들의 의도는 역시 가시적인 세계 그 裏面에 있는 참의 세계, 보다 본질
적인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추상작가들 가운데서는 동양의 칼리그래피calligraphy적인 것 또는 禪의 세계에 접근되고 있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동양사상이 현대 물리학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어서 책과 지식으로 그리고 실험실 안에서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세계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현대에 와서 우주와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예술적 영감이 같은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부터 자연에 대한 인식의 방법은 동서가 달리 해 왔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그 자연성이
동양과 서양인의 체험에서부터 어떻게 표현되어지는가를 비교해보면 일반적으로 서양예술의 특징이
動的인데 비해서 동양의 것은 靜的인 것으로 간주 해 왔다.
서양인의 시각예술에 있어서 그 대표적인 표현이 인물화로서 인간의 정서를 유발하는데 힘써왔고 동양
인들은 산수화로서 인간의 감정을 침잠 시키는데 주력해왔다.
인물화에 있어서 자연은 그 인물을 위하여 배경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산수화는 자연이 주제이고 인물은
자연 속에 있는 하나의 부분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왔다.
詩에 있어서도 서양인들은 자연을 노래할 때에도 감상적이 아니면 드라마틱하고 웅장한 세계를 묘사하고
있고 동양인의 詩의 주된 표현은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입장에서의 표현이 더 강하다.
특히 生氣躍動을 표현하면서 無와 無念의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하는 書道와 같은 것은 서양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동적 미의 추구와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동서양의 양극적 기질의 대조는 예술문화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 어학, 사회생활의 전반
에서 그 특징을 보여왔으나 오늘날 현대 문명사회에 하나의 세계를 지향해 가는 입장에서 본다면 동· 서의
음양이 상보적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단지 이러한 상보적 관계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만물의 통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계를 개별적 사물들과 사건들로 나누는 데만 골몰하기 때문에 물론
이 분할이 우리의 일상적 환경을 다루는 데에는 유용하고 필요하나 그것이 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 상보적 개념은 현대 물리학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고 방식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는데 사실 이
개념은 2천5백년 전에 고대 중국 사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으며 원형적인 양극(즉 太極)이 대립
자의 상보성을 표상해 왔다.
또 모든 자연 현상과 모든 인간 생활의 본질이란 그것들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왔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이 상대론적 모델과 이론들을 탐구 해 나가면서 그 모두가 동양적 세계관의 두 가지
기본요소 즉 우주의 근본적인 全一性과 그것의 본래적 역동적 특성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설명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亞原子 물리학이 다양한 모델들을 연구해 감에 따라 그것들이 물질의 구성요소들과 그에 관련된 근본
적인 현상들이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고립된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단지 전체의 완전한 부분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동일한 견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素粒子들은 낱낱이 떨어진 물체의 알갱이들이 아니라 불가분해의 우주적인 망 속의 확률 모형이며
상호 연결임을 밝혔던 것이다.
이 물질의 활동성이 곧 그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아원자 입자들은 주위를 매우 빠르게 맴돌고 있는 활동이며 작용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물체의 존재와 그 활동은 분리 될 수가 없고 공간과 시간의 상호 관통, 그리고 물질과 공간은 단일한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인 면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다시 한 번 거시적인 단계에서도 물질적 대상은 뚜렷한 실체가 아니라 그 주위 환경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성질은 세계의 모든 나머지 것과의 상호 작용의 견지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Ernst Mach의 원리에 의하면 이러한 상호 작용은 멀리 떨어진 항성들과 은하계
들까지 우주 전체에 미친다고 했다.
그래서 微視的 세계뿐만 아니라 巨視的 세계에서도 우주의 근본적인 통일성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실은
현대 천체 물리학과 우주론에서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천문학자 Fred Hoyle도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대규모적인
현상과 매우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으므로 그 둘을 분리 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했다.
과학자가 이렇게 자연의 물체를 분석적으로 연구해 가는 반면에 예술가는 이러한 모든 시각 대상을 통찰
하여 주관적, 내면적 경험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공간이라는 패턴에서 시각적인 요소를 매체로 하여 내면적 경험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조형공간을 예술의 세계로, 다시 말하면 또 하나의 새로운 소우주로서 창조하고자 한다면 이상에서 기술 해 온 우주의 근본
적인 본성에 역시 통합되어지는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연성이고 작가와 감상자를 상통하게 하는 보편성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보편성안에는 두 개의 성향이 들어 있는데 동양과 서양의 양극 기질이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에게서도 양극기질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체 자체가 물질과 정신으로 구조되어 있고 두뇌의 구조에서 좌우의 기능이 다른 것이고 때문에 심리
적인 양면성까지도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자신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예술양식의 흐름도 그 범주 안에서 이행되고 있음을 미술의 역사가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예술을 하던 과학을 하던 그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인간 두뇌 사용에 따른 결과의 특징인
것이다.
3. 조형원리의 심리학적 측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감각기관을 중심으로 예술을 시각예술 청각예술로, 표현하는 패턴에 따라서
공간예술 시간예술로 분류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하는 방법의 유형에 따라 Apollo적 예술과 Muse
적 예술 또는 Dionysos적 예술로 나누기도 한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이지적인 표현과 서정
적인 표현의 예술을 구분할 때 쓰이는데 이것은 시대적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각 개인에게서도 이
양면성은 나타난다.
이러한 성향은 인간 두뇌의 구조와 관계되는데 추론적이고 이성적이며 지적인 좌측 두뇌와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며 열정적인 우측 두뇌가 서로 상보하면서 또한 表裏의 관계로서 창의성을 유발하게 되는 것
으로 보인다.
때문에 하나는 다른 하나의 성향을 결코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기능으로서 서로를 보완하는 것
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동물에게 있어서도 감정의 표현이나 감성 작용의 원초적인 형태에 관한 설명이 가능한데 이를테면 작은
미물인 짐승에게도 집을 짓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인간에게만 유독히 감성적 표현이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플라톤의 <法>에서 神들이 슬픔을 안고 살아가도록 태어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그들이 고통으로부터 잠시 쉴 수 있도록 추수 감사 축제를 제정하고 그들에게 마스터master들의 우두
머리인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보내 그들과 친구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다른 동물들은 질서와 무질서를 구별할 수 없는 반면에 유독히 인간 세계만은 그 신들이
리듬과 하모니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리듬과 하모니의 인식에는 즐거움이 따르게 된다는 것과 미적 욕구는 인간에게 있어 眞과 善에
대한 본능적 욕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향하는 理想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대 원시인들에게서의 동굴 벽화나 암각화는 끊임없는 우주적 불안과 자연이나 적에 대한
공포에서의 생존의 목적으로 주술적인 행위나 종교적인 의식에 따라서 표현된 것이라고 하나 단순한
실용적인 목적에서만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순수한 美的 충동 내지는 어떠한 대상으로부터 자극에 의한 감동에 의해서 미적인 표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그 합리성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원시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주의 생활이 일단 해결 한 후의 감정의 표출은 창의적 행위로 진전될 수 있었
을 것이다.
환경의 변화나 인간 자신의 모습의 변화, 그리고 삶의 여러 가지 변화 가운데서 보고 느끼는 것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끄적거리고 싶은 충동, 억제할 수 없는 감동의 표현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생활 방법의 되풀이는 보다 더 나은 내일의 향상을 염원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정신 활동
으로 변천되어질 수도 있고 미적인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순한 생리적인 본능이 공간에 대한 공포의식을 제거하는 행위와 관련되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원시인 또는 미개인들이 하나의 나무나 돌에 이르기까지 괴기한 장식으로 메웠다고 하는 것은 공간이
라고 하는 생소재가 주는 어떤類의 공포감에서 친밀감이 결여된 미지의 공간에 무의식중에 손을 가함
으로서 스스로 생리적인 안정을 保持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원시인 또는 미개인들의 자연물에 대한 점유행위가 그들 신변의 장식성과 일치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이 인간이 갖는 공간에 대한 공포는 기계문명시대에 고도로 공간이 분화된 사회에 사는 현대인
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층심리에 깊이 잠재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단지 이것은 적극적인 의식과 소극적인 무의식과의 차이 일 뿐으로 인간의 심리적 움직임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현대인의 심리적 움직임의 안팎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무의식의
심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 例로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스스로도 경험이 있지만 흰 벽이나 유리에 거리낌없이
낙서하는 어린이, 침실 벽면에도 남김없이 장식을 하는 사람이나 쾌적한 환경에 건물을 세우고도 측면의
빈 공간에까지 그로테스크grotesque한 디자인을 배치하는 건축가, 이들은 모두 넓은 공간이 주는 자극,
무의식적 공포에 당면해서 충격적으로 그렇게 행하는 심리적인 특징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만드는 마음은 표현하는 마음이고 표현이나 認知에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경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창조력의 근원으로 해서 이루어진 고대의 토착민들의 미술에서 유출한 기본적인 디자인과
선구성은, 아동의 스크리블scribble 에서도 그리고 종교적인 의식의 측면에서도 그 기본적인 구조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미술이 기원전 3∼1만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보다도 더욱 중요
한 것은 노출된 바위나 동굴 속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이나 선 구성이 오늘날의 추상화나 아동화 초기의
회화적 모티브motive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사가 Kuhn이나 Giedion은 인류의 종교, 신화, 문화 또는 습관들을 고대회화에서 찾아내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제공하고 있는 모티브는 오늘날 아동들이 평소에 즐겨 그리고 있는 원형 그 자체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미술에서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시키고 있는 관념이나 감정에 대하여 공포와 경악을
표현하고 있지만 R.Kellogg 자신은 오늘날 수많은 아동화에서도 역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또 '미술제작이란 인간의 활동으로서 자연적인 것이니 만큼 당연히 그 원형적 혹은 세계 공통적인 면을
갖는다고 하는 H. Read의 사고방식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도1]은 2∼5세의 유아가 초기에는 근육운동이 통제되지 않은 미분화 상태에서
선의 형태가 불규칙하게 휘적거리는 손의 동작의 흔적으로서 연결이 되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다가 중기에 가면 선이 차츰 이어지고 숙달되면서 말기에는 좌우로 움직여 연결선이 초보적인
회전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5∼7세가 되면서 팔의 운동이 반복되면서 불안전하고 무질서했던 선의 감각이 차츰 또렷한 원의 형태로
접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나타난 원이 다시 인간의 형태로 상징되고 수직으로 뻗은 선이 다리로 보여지고 수평의 선은 팔
이나 손을 나타내는 원시적 人間畵가 표현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동화에 나타나는 이러한 형은 아동 스스로가 스크리블을 지각하고 있는 認知에서부터 발생한다고 한
다면 역시 아동의 경험 속에서나 주위의 환경에서 원형이나 장방형을 인식하기도 하며 또 인간의 얼굴,
나무, 구름, 사각형의 건축 등의 형태가 비치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동화에 있어서 형의 전반적인
진보는 이런 아동의 관찰 경험과는 전혀 고립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동화에 나타나는 형태는 사물의 본질적인 특성이며 실제에 있어서 구체적인 인지의 패턴이
아닌 것이다.
사실 아동은 올바른 위치에 있어서의 사물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사물을 보지 않고 사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형의 표현에 있어서 '둥금' 그 자체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성격 즉 똑같은 紙面으로부터 구별되어지는 固定物의 응집된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된 원의 표현과 함께 아동의 스크리블 가운데서 동심원이나 동심 정방형이 나타나고 있는데
아동이 스크리블로서 다이아그램을 형성하기 전부터 만다라mandara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만다라로부터 태양으로 그리고 인간으로 전진해 가고 있다는 것은 아동화가 하나의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서 아동은 이전에 자발적으로 그린 각종의 자료를 새로운 그림 속에 포함시켜 나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아동발달의 시각적인 논리적 체계가 아동이 최초로 그린 '人間畵'의 형태 전반에 대한 설명이
되어지는데 이 만다라 풍의 人間畵[도2]야말로 아동화의 발달 순서로서 중요할 뿐 아니라 아동미술과
성인들의 예술 사이에 중요한 架矯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교로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모든 인간의 회화 속에 만다라가 비치고 있는 것이다.
원이나 정방형이 한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십자형으로 구절 되어진 형[도3]과 [도4]는 어른과 아동의
어느 회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회화의 題材 그 자체는 어른과 아이의 회화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만다라는 그 자체가 원을 의미하고 있고 특히 동양의 종교에서도 각종의 선구성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同心圖形 구조를 가진 기하학적 디자인에 해당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명상을 상징하는 얀트라Yantra[도5]의 주제로서 원과 더불어 삼각형, 역삼각형이 서로
겹쳐지고 있는 디자인이 보편적이다.
서로 겹쳐지는 삼각형 도형의 상징은 만다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형태는 서로 상반되는 남성신Shiva과 여성신Shakti의 합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각형 속의 원> [도6]은 서로 상반되는 것의 합일, 전체성과 對極의 합일, 원 속의 남자와 여자가
이를 상징한다.
원은 정신의 상징이며 (플라톤도 정신을 구형으로 기술했다) 정사각형 (때로는 직사각형)은 세속의 물질,
육체와 현실의 상징이다.
또한 원과 정사각형은 실존의 본질로서 완전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원형 만다라는 禪畵에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나 그의 聖徒의 後光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후광은 흔히 4등분된 것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서 받은 고난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나타내며 동시에 최고의 善으로서의 神格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성당의 색유리staindgrass에서 인간은 우주 속에 뿌리를 내린 자아를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만다라는 우주와 신의 권능에 대한 교섭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종교학자 John.A.Hardon은 <세계의 종교 Religions of the world, 1963>에서 고대의 碑文이나
언어적 방법을 통하여 연구해 보면 특히 고대 근동의 경우에는 외계에 대한 이성적인 통찰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기록을 남기지 않은 원시 민족 중에도 抽象化와 철학적 행적의
통찰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외계에 대한 현상을 분류하고자하는 욕구는 원시인간에 있어서 인간 현상 또는 현상 우주
전체에 대한 全景적 시야를 추구하고자 하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피차에 어떤 관계에 두어 그 현상을 배치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을 짓누르는 반복적 공포와 畏敬을 정복 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주현상과 직면하는 이와 같은 불안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인간 정신을 자극하여 현상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찾게되며 현상을 고정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기 이전에 사물을 분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이전의 全景圖로서 <우주와 천사군>[도7]에서 천사들에 의해서 보호되어 있는 우주, 일련의
天球層을 그린 것이다.
세계역사를 돌에 투영시킨 <아즈덱인의 曆法>은 중앙에는 태양이 위치하고 있고 현재, 과거의 여러 세계
에 대한 파멸의 상징으로 원형에 둘러싸여 있다.
미개발 사회나 고대에 있어서도 현재, 과거에 대한 시간적 관념에 대한 표현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직선적 경과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주기로 부단히 회귀하는
圓環의 중복이며 그 자체가 영원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힌두교는 시간을 '마야Maya'라 하여 착각, 환영이라는 초자연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역사까
지도 輪廻로 보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탄생, 죽음, 보답, 환생의 과정은 영원히 되풀이되고 따라서 영혼은 언제나 해탈할 수 없는 윤회에 얽매어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또 지구, 달, 태양뿐 아니라 전체 혹성을 포함하는 거대한 星辰운동의 통합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거대한
우주적 年月속에 조화되어 완전한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기원전 3000년 말 바빌로니아인의 천문학적 발견에 의하여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들에게
보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발견에서 명백히 태양년 주기에 지배되고 있는 지상 식물이 해마다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순환에
대응하여 우주적 연월 주기의 시간주기에 입각하여 만물의 삶과 죽음의 순환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추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착상에 매혹된 인간 정신은 우주의 주기성의 패턴을 그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에
투영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동, 서를 막론하고 우주형성의 원리가 순환적인 본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과 인간에 있어서
윤회의 테마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시각적인 형태를 창조케 했다.
그 예로서 <우주의 諸 영역을 여행하여 인간에게 불을 在來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도8], <인생의
무용>, <운명의 수레바퀴> 등 많은 그림이 있다.
그것은 시각 상으로 원의 형태로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왔던 것이다.
현대작가들에서도 吉原治良[도9], Joan Miro[도10], Adolph Gottlieb, Kenneth Noland [plate24]
Kandinsky등 많은 추상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원 또는 만다라가 모든 인간, 즉 성인도 아동도 함께 극히 본래적인 애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까닭
은 역시 발란스balance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예술작품의 경우 모든 요소는 균형상태에 있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과 또
어째서 그것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발란스는 힘의 균형이고 종국적으로는 힘의 안정을 얻는 것을 기대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어떤 형을 좋아하고 상기하면서 너무 복잡하거나 까다로운 형에 대해서는 무시
하거나 무관심해 버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아동화는 그 자체가 발란스가 잡혀져 있어 교육을 받지 않은 아동에 있어서도 刺戟源이 자기 조정되어
자연스럽게 발란스가 취해지는 것은 인간은 발란스가 깨뜨려지면 위험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 생리적
본능이 시각적 표현으로 연장되어 지는 것이라고 보아진다.
아동화에서 만다라가 갖는 또 하나의 중요성은 성인들이 아동화에 대한 편견 즉 신체적, 정신적으로
능력이 열등하다는 이유 때문에 아동화에 나타나는 線 구성이 갖는 호소력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쓸모
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리고 마는 사고방식을 파기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만다라를 인식하는 것은 용이하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쾌적한 것이므로 아동화 속의 만다라를 보게
됨으로서 어른들은 아동의 미적 센스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성숙한 어린이에게서 볼 수 있는 유치한 행동 즉 어린이다운 형태가 성인의 회화에서도 때때로
볼 수가 있고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어른의 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만다라야말로 추상화로부터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를 구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인과 아동의 회화 사이에 또 하나의 공통된 이미지는 '태양화'인데 [도11]은 어린이의 태양화이고
[도12]는 현대 추상작가 Robert Delaunay의 <해와 달, 원형>이란 회화 작품이다.
[도13]은 19세기 아메리카 인디언이 짐승 가죽에 그린 태양화이다.
아동화에 있어서 태양화로 보이는 것은 만다라가 그려진 위에 원에 교차하는 짧은 선에서부터 점점 정리
되어진 '태양화'로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사실 태양화의 역사는 선사시대 회화까지 포함되어지는데 선사시대 인류가 그려놓은 동굴벽화나 암각화
에 보이는 선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스페인, 오스트랄리아[도14] 그리고 고대 이집트,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와 일본의 고분벽화에
서도 日 月 星辰圖는 흔히 볼 수 있다.
H. Read는 오늘날 이러한 아동화의 모티브를 인용하고 있는 현대 작가들에 대해서 "이들 현대 작가
모두가 미술의 영원한 근원으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아동화는 어느 문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고 또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동화는 '생물적'인 것이고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本源的인 원에 대하여 아른하임은 ''단순한 원형에 대한 지각적 우선이 발생적으로는 아동화
에서 원의 우선으로 나타나고 아동이 휘갈겨 그린 것 속에 잘 정리(통일)된 형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자연계의 기적의 하나를 관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원과 정방형과의 관계에서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에 관한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다.
[도15]에서는 십자형 한 가운데에 원이나 정방형의 윤곽이 전혀 그려있지 않은데도 흰 원이나 정방형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게스탈트Gestalt 심리학에서 말하는 시각의 기본원칙에 의하여 설명되어지고 있다.
즉 지각 형태는 망막자극의 상태와 뇌수의 역학적인 간결 구조의 경향이 결합한 것이라고 했으며 지각의
결과는 자극구조가 뇌수의 최대 간결화 경향과 서로 작용함으로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방형은 똑같은 4변과 똑같은 4각으로 된 단순함이 불가사의해서 일련의 흥미 있는 형태를 낳고 있다.
그것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직사각형의 一群 즉 '황금분할'이며, 또한 생명이 있는 많은 형태의 유기적인
성장 속에서 발견되는 對數過線[도16]에는 직사각형 중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그 둘레에 순차적으로
배치된 일련의 '황금비'로서 그 기본은 정사각형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상의 많은 가능성이 각 시대의 건축가와 미술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작품 속에 확고한
뼈대를 부여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또한 지상의 모든 인류가 어떠한 시대를 막론하고 양식에서나 모든 구조적 요소로서 뿐만 아니라 특수한
장식모티브의 기초와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상징이라고 하는 Parthenon, Romanesque style의 대표적인 건축인 Pisa, Renais
sance기에 로마에 세워진 Pallazzo Farnese 그리고 현대 건축물로서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의 정방형
나선상으로 된 박물관에서 그 proportion을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으로서 많은 교회의 디자인 가운데 반원통형 돔dome 아래에 있는 정방형의
공간은 설계 가능한 가장 합리적인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진의 정방형 형태가 낭비나 곡면을 최소한으로 둥근 렌즈에 맞도록 한 것과 같다.
이렇게 지극히 간단한 요소로서 복잡한 형태를 구성할 수 있다는 예로서 알 수 있는 것은 '간결'이란 절대
적인 의미는 소수의 구조 특성으로 성립되는 것이며 상대적인 의미로는 복잡한 재료(소재)를 될 수 있는
한 소수의 구조 특성으로 조립한 것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표현에 있어서 구성하고 있는 소재 또는 요소는 간결화 되더라도 풍부한 의미를 잃지 않는
다는 것이다.
정신적 내용의 복잡함은 반드시 복잡한 재료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는 간결한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편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의미의 단순성은 도리어 복잡한 재료를 통해서 나타나는 수가 있다.
게스탈트 학파들은 간결화의 원리를 단순히 認知의 場에 있어서 원리로서만이 아니라 기억의 과정에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한 도형의 변화에 간결화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규칙의 도형이 규칙적인 도형이나
보기 쉬운 도형으로 再生되는 것과 같은 경우인데 再生像의 변화가 원칙적으로 간결화의 방향으로 추구
해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즉 간결화의 방향에 記憶像이 기울어지는 것은 그와 같은 기억이 인간에게 있어서 용이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구조화가 나아가는 것이 쾌적함을 유발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간결화는 인지에 있어서 질서의 원리인 동시에 쾌적함을 낳는 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간결화의 원리는 게스탈트gestalt 심리학에서 말하는 두 개의 원리중의 하나인 것이다.
4. 조형상의 자율적 질서
예술작품은 Rene Huygh에 의하면 신비한 조직을 만들어내는 무수히 뒤엉킨 실(絲)이라 했는데 여기서
신비한 조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각적인 요소들을 여하히 통일되게 하고 흥미로운 변화를 줌으로서 공간
을 여하히 측정하고 가치롭게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2차원 또는 3차원 공간일수도 있는데 2차원 공간은 사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의 지각에서 보다 훨씬 다양하고 내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공기 원근법, 선 원근법에 의해서 실제의 공간처럼 현실로 착각시킬 수가 있는가 하면 입체화시
켜서 깊이 있는 공간의 환영으로 이미지를 주기도 하고 또한 Mondrian의 회화[plate4] 같이 전혀 캔버스
canvas 그대로 평평한 하나의 패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같이 2차원의 물리적인 조건에서의 공간의 문제는 실제작품 그 자체를 존재하게 한다는 이유뿐 아니라
회화가 존재하면서부터 이 공간에 대한 개념은 끊임없이 변천해 왔고 그 시대의 과학적인 패턴과 함께
지금까지도 그 양상은 변모하고 있다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미술의 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새로운 작가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 창조적인 작가로서 미술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방법은 기존하는 회화의 구성방법을 가장 최선으로 활용하는데서 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에 대해 르네위그는 '이것을 모르는 예술가는 모두 비극적인 실패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단지 이런 이유에서 뿐 아니라 인간은 공간에 대해서 왜 관심을 갖게 되는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물리적,
심리적 측면에서 고찰해 왔다.
진정한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그 공간상에서 하나의 존재형식, 그리고 존재로서의
필연성을 갖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어떤 종류의 기교나 예술관을 적용하기 위해서거나 또 미적, 조형
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한 번 완성되면 하나의 소우주를 나타낸다는 의미
에서 '창조'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창조적인 작품 속에는 정신적 질서와 구조적인 질서가 통합되어 있어서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자율적인 하나의 현실로서 존재를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현실의 존재로서의 '場' 즉 일정한 평면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 질서를 통했을 때 비로소 정신
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구조적 질서라고 하는 것은 'form'을 의미하고 'form'은 또한 선, 면, 색채, 마티에르matier, 텍스
츄어texture 등 시각적, 구조적 요소들을 서로 통합하고 흥미를 주는 조형원리에 의해서 비로소 전달하
고자 하는 회화의 주제로서 기능을 만족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각적이고 요소적인 면이 表象的이고 연상적인 주제의 의미로서 지각할 수 있게 된 때는
이미 구조적인 감각이 주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유기적인 구도에 의해서 통합된 질서를 이룩함으로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유기적인 구도에 의해서 회화는 통일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구조적인 질서'라든가 '유기적인 구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서 작가가 의도
하는 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적 의미가 생명감을 얻기까지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게 되고 사실상 이
부분이 중요한 핵심으로서 이 논제의 목적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서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언급했지만 고전물리학에서 현대물리학으로 진전되면서 현대 물리학의 거장
들이 겪었던 사상적 충격만큼 예술 상에서도 시각적 혁명이라고 일컫는 변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조형 공간에서도 물리학에서 말하는 重力, 動力場), 電磁力場이 있는 것처럼 조형공간에서도 각
시각요소들의 통합에 의해서 조형적으로 심리적 역감이 흐르면 知覺場이 성립하는 것이다.
형태 심리학에서는 사람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기본영역을 지각장perceptual field 라고 일컫고 어떤
지각장이던 간에 그 주요 특징은 조직화이며 이것은 도형figure 과 배경ground 의 면에서 구조화되는
자연적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좋은 도형은 완전해서 대칭, 균형, 조화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예로 원은 완전성의 면에서
하나의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조직화의 특징은 완결closure 이라 하고 이러한 시각적 표현은
양끝이 접촉되지 않은 하나의 곡선도 완결의 강력한 경향 때문에 하나의 원으로서 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았을 때 그것은 그 밖의 어떤 사물과 또 그 주변의 환경과 관련을 갖고 있는
사물로서 우리에게 인지된다.
사물에는 형, 색, 재질이라는 속성이 있어서 이들이 인지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실마리로서 사물의 형태를 구성할 때 사물은 추상적 존재가 되고 현실의 인지는 이것으로부터
일보 전진한 어떤 사물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 외관 즉 게스탈트Gestalt 라고 부르는 이러한 형태는 현실존재의 물리적인 형태가 아니라
인간에게 보여지는 모습perceived apparent 이며 인지하는 사람의 마음의 원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
이다.
이 때문에 외관은 주관적이고 독특한 것일 뿐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도 공공성을 갖고 공통의 실마리를
주는 형이 되는 것이다.
사실 게스탈트 학파 이전에는 인지의 장에 있어서 자극의 강도는 항상 절대적이고 자극과 감각의 대응이
항상 일대일이라 생각해 왔으나 그들이 인지의 장에서 역학을 주장함으로서 그 자극의 강도에 대해서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 한 예로서 강한 색으로 액센트accent를 주어 주의를 끌고 싶을 때 그 색 자체가 갖는 강도라기 보다는
그 장에 있어서의 다른 색과의 자극효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색이 갖는 단독의 자극효과도 마찬가지로 화면전체에서의 다른 자극과의 관계에서 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 구조로서 설명할 수 있다.
전체의 성격은 그 부분의 하나 하나가 지각적이든 아니든 간에 결정되어지기도 하며 그것은 특성이 된다.
일련의 선에 세 개의 점을 加하면 하나는 중간부분으로 다른 둘은 끝으로 인식된다.
즉 특성은 상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고립된 요소로 존재치 않는다.
부분-전체의 결정의 이론은 한 부분이 그 전체의 종속된 특성이며 이와 같이 '부분'과 '요소'사이에 기본
적인 구별을 짖는 것이다.
이것은 게스탈트 심리학파가 내세운 두 개의 개설(원리) 중의 다른 하나인 것이다.
즉 전체는 부분에 우선하고 부분은 전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조는 간결화의 방향으로 기운다는 것인데 이것은 앞의 심리적인 측면에서 모든 인간의 표현에서
원이란 형태가 왜 우선으로 나타나는가에서 설명했다.
구조의 간결화는 인지의 장에서 근본적인 원리인데 주체 측의 행동의 실마리로서 構造認知와 記號認知
라는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
구조인지는 인지의 장을 구조로서 파악하는 것이고 이때 중점적, 특징적 파악은 좋은 기억을 낳는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구조인지에서 간결화의 의미는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첫째는 자극의 단순성으로서 사물의 형이나 색이 단순한 것이고,
둘째는 의미의 단순성이다.
구조의 단순함은 속성의 구조를 제약하는 것이며 사물의 특징을 잃지 않는 한에 있어서 가능한대로 생략
하는 것이 좋은 형을 나타내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의미의 단순함도 역시 구조를 이루는 요소의 양 문제와는 혼돈해서는 안된다.
그 예로서 삼각형과 정방형의 비교에서 삼각형이 더 복잡해 보이고 이유는 각 변과 각도가 통일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표현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나 요소가 단순하다고 해서 풍부한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며 정신적 내용의
복잡함이 반드시 복잡한 재료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 효과는 오히려 단순하면 할수록 호소
력은 더 강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의 기호인지는 Rubin의 <배盃>[도17]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면적인 도형에서 형태figure와 배경
ground의 경계에 윤곽선이 만들어지는데 이 때 윤곽선의 내부는 선과 일체화하여 하나의 형을 낳게 되
는데 그 형에 인간은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여 서로 의사교환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사교환에 쓰이고 있는 형은 기호라고 할 수 있고 기호화는 가능한 간결한 것이 좋으며 기억
하기도 좋고 이해하기도 쉽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도형을 보게 되는데 보통의 경우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을 두어
기억하고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애매한 도형인 때에는 자기 본위로 도형의 의미를 바꾸어 버리던지 전혀
무관심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심리학에서는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어느 부분을 생략하여 받아들이던가 강조하여
받아들이던가 하는 이러한 수평화leveling와 첨예화sharpenning가 현실의 인지 현상에서도 항상 나타
나고 있다.
또 조형현상에서도 인체 해부도나 식물 도감과 같은 현실을 정확하게 충실히 그려내는 것이 필요한때
외에는 오히려 현실에 있는 그대로 충실히 그리는 만큼 호소하는 의미가 희박해지는 것이다.
현실에 기초를 둔 것이라도 자신과 상대에 있어서 의미를 간결하게 그려내는 것이 단순화와 的確함이라
는 점에서 의미전달에는 필요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평화와 첨예화에 의하여 간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인지의 장에서도 그러하지만 조형
현상에서도 중요한 원리가 된다.
회화사적인 의미에서도 '사실'에 대하여 '표현적'이라는 것은 의미를 정확히 나타내는데 있다고 한다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추상적으로 간결하게 나타내는 데에 20세기 표현주의 예술의 특징이 있었던 것
이다.
이러한 원리들이 실제로 창조적인 예술가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작품에서 인공적 질서를 창조해 왔다.
이러한 조형적 현상이 창조적이고 美적일 때 그것에 타당한 미학적 통일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기본원리가 질서이며 그 자체가 유기적 통일체이며 인간은 그것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기적 통일은 평면공간에서 창조라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선, 형태, 색채, 명암 등
회화를 구성하는 시각적인 諸 요소들이 명확한 구조형태로서 통일된 형식을 이룸으로서 그 자체의 존재를
확립하게 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자율적인 현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그 기조가 되는 공간과 각 요소간의 공간과의 면적대비에서 구도를 고안해 내는 방법도 있지만 이
비례proportion 만으로는 어떠한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에 지각적 심리
에 있어서 형태와 배경, 통합과 강조, 또는 量感, 動感, 力感 등을 관련시켜 통합과 강조는 결국 동질과
이질, 동류화와 대립화라는 카테고리kategorie 에 집약시킬 수가 있다.
이러한 분석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 속하는 시각적인 특성에 관한 문제에서부터 구성요소들의 속성이
서로 결부되어 부분과 전체를 구별하기 어려운 연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구조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리
structural principles 라고 하는 원칙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 속에 내재하는 심리적 문제가 바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적용될 수가 있으므로 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성 원리에는 통일unity의 원리와 변화variation의 원리가 있는데 통일은 원리인 동시에 규율의 반복
이고, 명료의 원리인 동시에 규율의 강조이며, 변화는 원리인 동시에 흥미를 유발하며, 규율의 원리를
성숙시키는 방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실현할 때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 또는 어떤 요소를 여하히 대립시켜 어떠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훈련된 구성감각structural sense 이 필요하게 된다.
이 구성감각은 일정한 공간 내에서 시각적 요소들 간의 몇 가지 문제에 관여하여 직관적 판단이 필요
하게 된다.
이때의 직관적 판단이 창의성을 유발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적인 감각 또는 작가의 사상에 관계되는 것
이다.
5. 명작품의 구조 원리와 응용
'사물을 잘 본다'는 것은 시각 예술의 중요한 기본 자세이며 그 보는 방법은 그 시대 인간의 생활 방법,
생산하는 방법에서 가져온다는 것은 미술의 역사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물을 잘 보려고 하는 의지가 중요하지만 단순히 눈에 '사물이 보인다' 는 것도 사실
생각하기보다는 훨씬 복잡한 일이다.
외계가 눈에 보이는 것은 그 像이 눈에 비추이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닌 것이다.
사물이 동일성을 보유하여 언제나 그것을 그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평소에 그것을
그처럼 보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시각계는 정보를 직접 受像하여 기록 할 따름인 카메라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눈과 뇌가 하나로
뭉쳐 외계로부터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와 자료를 순간적으로 분석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또한 눈과 뇌는 받아들인 정보를 끊임없이 분석하여 그것을 과거의 경험과 비교한다.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 매개의 자극이 불충분하고 애매하더라도 많이 합쳐지면 그 상호작용으로 바른
판단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종합 과정은 '의미추구'를 낳고 이것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고도로
발달된 뇌의 작용으로서 자기가 살고 있는 우주에서 안정되고 뜻깊은 시각 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시각은 예술을 창조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각각의
보는 방법에 따라서 그 특성을 갖는 양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술의 표현방법은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오늘날에 와서 전혀 버려진 것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미술의 양식은 미술의 양식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미술의 역사 그 자체가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는 원천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해 가면서 기필코 표현해야하는 욕구나 의지 그리고 목적이 분명하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인간에게서도 실용적인 면, 즉 주술적 행위의 목적과 또는 종교적인 의식에 따라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실용성과는 다른 순수한 미적 감정에 의해서도 미술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시인간이 만든 동굴벽화나 암각화 그리고 부조에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각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배치된 색채와 직선, 곡선, 평행선, 사선 등 선의 장식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물리적인 현상과 함께, 인간의 신체적인 구조도 그러하지만 인간의 정신 역시 최선의 방향 곧 眞과
善에 대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미적인 상태를 추구해 가는 방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원시인간이 처음에는 주변 자연환경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을, 처음에는 환조로 후에는 부조나 회화의
수단으로 재현하려고 했고 점차 서투르기는 해도 인체와 식물을 표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발전 단계는 문명사회에서 아동의 발육과정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는 것을 심리적 측면에서
기술한바 있지만 아동은 대조, 색채, 선의 구성 등의 차례로 흥미를 가지며 처음으로 사물을 보고 그릴
때에는 자기 자신보다는 동물의 모습을 그리기를 좋아하며 사람의 모습이나 식물은 제법 성장한 뒤에
그리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뿐만 아니라 원시인간의 근본적인 의식의 발전단계를 인류사회의 발달과정에서도 그대로 찾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동물숭배에서, 다음에는 그리스Greece人의 인간적 우상숭배를 그리고 순전히 정신적
개념으로서의 神의 숭배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때를 같이하여 생긴 예술과 종교는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으며 이 양자의 불가분의 관계
는 지금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Classic기에서 신화의 題材를 이상화하여 내면적이며 엄숙한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때의 훌륭한 '사실'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형체를 다만 사생한다는 의미의 사실이
아니라 아테네 인이 모든 그리스인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그 '완전한 인간상'의 이상을 典型화한 사실
이었다.
'典型' 은 또한 '類型' 과는 달라서 있을 수 있는 완전한 표현의 '原型' 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는 인간은 神과 같이 되기 위하여 어떤 동물의 특성을 빌려야 했지만 클라식기에 와서는 동물을
인간으로 승화시키기 에 이르렀다.
그리스 신화의 半人半馬의 괴물, 삼림의 神 등은 모두 지적인 면을 갖춘 인간화된 동물형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합리적인 정신자세는 우주를 3차원으로, 또 인체구조의 원리를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았고, 따라서 그리스 미술은 초기의 직관적인 자연주의가 클래식기에 와서는 합리적으로
계획된 사실주의로 되어갔다.
모든 형태를 만드는데 있어서 비례, 측정, 구성, 리듬을 數의 법칙에 따라 정의하고 미를 구성하는 비밀
스런 질서를 예술 속에 반영시켰던 것이다.
이같은 정신을 가진 인간이 만든 그리스 문명이 지금까지도 '古典'으로서 우리에게 살아 있는 것은 그
보편적인 타당성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15세기 후반의 이태리 플로렌스 사람들에게서 다시 일어나 자연과학에 매우 심취하게
하였고 회화에 있어서도 역시 과학적인 정확성과 기법적인 능력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연마하게 하여
인체의 객관적 묘사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는 16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여 완성을 보게 되는데 그 완성이라 함은 일단은
최초에 르네상스가 목적한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정상의 고전주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조형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독창적인 구도 방법을 창안하였다.
Leonardo da Vinci는 수평 수직 구도와 삼각 구도, Michelangelo는 대각선 구도, Raffaello는 원형구도
인데 이것은 현대의 작가에게서도 조형의 기본원칙을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의 작품분석은 근대와 현대 작가들 모두가 그 기본원칙을 어떻게 활용하여 차원이 다른 새로운
예술세계를 창안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전 작품상에서 검은선으로 표시되는 기하학적 패텬은 조형질서의 윈칙
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우주와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현상에 관련되어 보편적 질서로서 조형활동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음을 확신할 수가 있다.
그리고 흰선으로 나타낸 부분은 이 기본원칙을 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하학적 패턴 ― 수평선, 수직선, 대각선, 원형 ― 의 방향들은 서로 복합적으로 응용되어 무수한
새로운 패턴을 창안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1) 수평, 수직 구도
⸁ Leonardo da Vinci, <수태고지 The Annunciation>, 1472-75(1), 104×217㎝, [plate1].
레오날드 다 빈치의 초기작품으로서 고딕양식의 여운과 종교적인 주제에서도 명확한 데생과 명료한
구도의 조형성으로 엄숙하고 간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과 書臺는 선 원근법으로, 遠景의 중앙은
공기 원근법으로 그리고 수목들은 생동성이 없이 硬質적 물질만이 실존하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즉 인간과 물질을 동질성으로 취급한 것은 냉혹한 지성적 사고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수평과 수직의 견고한 구도 위에 원근법이 교차하고 천사의 동작과 마리아의 동작에서 옷주름의 율동이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정적인 건물과 나무들에 대비되어 고전미를 살려내고 있다.
미국의 전위예술가의 한사람인 Robert Rauschenberg가 이 작품에서 성모와 나무 바위가 똑같은 중요
성을 지니고 있는 것에 착안하여 collage와 object, 繪具들을 등질적으로 동존시킨 Combine painting을
창안했다.
⸂ Jacques Louis David,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면서 급속히 변하기 시작한 것은 미술가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
⸃ Andre Masson, < 미로 The Labyrith>, 1930, [plate3].
마숑은 자기자신의 작업에 관해 '물질적으로는 종이 몇 장과 약간의 잉크만 있으면 된다.
⸄ Piet Mondrian,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 Woogie>, 1942-43, 127×127cm, [plate4].
몬드리안의 회화에서 표현된 것은 자연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니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으로서 수직
⸅ David Hockney, <니콜스 캐년 Nicholas Canyon> 1980, [plate5].
호크니의 회화, 판화, 데생 등에는 최근 사 반세기에 인간이 가졌던 꿈들, 햇살이 가득하고 나른한 캘리
2) 대각선 구도와 그 변형
⸁ Michelangelo Buonarroti, <아담의 창조 La Creazione de Adamo>, 1508-12, 280×570cm, [plate6].
'창세기' 2장 7절. 神이 천상의 모든 것에 싸여서 흙으로 만든 최초의 인간에게 물질의 존재에서 영적인
⸂ Delacroix, <사르다나팔의 최후 The Death of Sardanapalus>, 1827, [plate7].
바이런의 시극에서 착안, BC.7세기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이 酒池 肉林에 빠져 있을 때 반란군이 몰려
⸃ Pablo Picasso,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plate 8].
이 그림의 처음 습작은 한 水夫가 5명의 아비뇽거리의 여인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장면이었는데 여러
⸄ Kazimir Malevitch, <여덟 개의 빨간 직사각형 Eight red rectangles>, 1915, 57.8×48.5cm, [plate 9].
순수 조형 이외의 모든 것 종교적인 요인, 국가와 귀족적인 요인, 부와 기념비적인 탐익, 사물의 허상에
⸅ Joan Miro, <모성 Mother Hood>, 1924, [plate 10].
두 개의 직선이 중앙에서 X자로 교차하여 만나는 지점이 중심 역할을 하도록 균형을 취하고 있는데
⸆ Hieronymus Bosch <축복 받은 자의 상승 Ascent of The Blessed> 1500-04, 56.5×39.5cm,
선택된 인간의 영혼이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되어 천상계의 인력에 끌려 천사의 부축으로 상승하고 있는
⸇ Paul Gauguin, <우리들은 어디서 왔나, 우리들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어디로 가나 Where Are We
경제적 곤궁에서 병과 고독으로 싸우고 있을 때 딸의 죽음에 대한 비통으로 자살을 결심하면서 유언적
3) 삼각형 구도와 그 변형
⸁ Leonardo da Vinci , <성 안나와 성 모자Ⅱ Sant'Anna, La Madonna, Il Bambino Con I'Agnello>,
典雅한 성 안나의 머리와 그녀의 왼발을 축으로 하여 원추형으로 구도 되어 있어 군상이 고전적이면서
⸂ Rembrandt van Rijn, <야경 The Night Watch>, 1642, [plate14].
렘브란트는 자라온 환경에서 숙명적으로 빛과 그늘에 대한 형태의 미묘한 조화를 체험하면서 빛에 의한
⸃ Paul Cézanne, <대수욕 The Large Bathers>, 1898-1905, [plate 15].
세잔느는 고전주의이래 많은 거작들을 깊이 연구하여 모든 사물의 기본적 형태를 구명하고자 했다.
⸄ Pablo Picasso, <게르니카 Guernica>, 1937, [plate16].
1936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란으로 일개의 촌락인 게르니카의 촌민 2000명이 불과 3시간만에 살육
⸅ 小 山 田 二 郞, <피에타 Pieta>, 1955, [plate17].
십자가에서 숨진 그리스도를 안고 비통해 하는 성모를 표현한 것이다.
4) 원형구도와 渦線形 구도
⸁ Raffaello, <요정 갈라데아의 승리 Il Trionfo di Galatea>, 1511, 295×225cm, [plate18].
이 작품은 로마 시인 오뷔디우스Ovidus가 각색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갈라데아가 조개 껍질을 타고
이에 앞서 16세기초에 네덜란드에서 Bosch가 반고전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표현하는데 이러한 구도
⸂ Hieronimus Bosch,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fragment)>, 1504-10, 60×114cm, [plate19].
보쉬의 공상세계는 중세시대 지옥의 공포를 살려내는 화법을 계승하였는데 부루겔과 더불어 플랑드르
⸃ Peiter Brueghel, <반역 천사의 추락 Fall of the Rebel Angels>, 1562, 117×62cm, [plate20].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양식에 정반대되는 양식으로 비합리적이며 반 미학적이다.
⸄ El Greco <성안나와 어린 요한이 있는 성가족 Santa Famila con Santa ana Y San Juan Bautista>
성 마리아와 성 안나 그리고 요셉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아기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연속된
⸅ Vincent Van Gogh,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 Crows over the Wheat Field>, 1890, 51×103.5cm,
1890년7월 27일 고호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며칠 전에 그는 창공 아래 광막한 보리밭에서 극도에 이른
⸆ Wassily Kandinsky, <추상 수채화 The First Abstract Water colour>, 1910, 49.5×64.8cm,
원래 추상 표현은 주술적 종교적 장식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창작의 목적이나 근거가 다양
⸇ Kennesth Noland <화면 속에서 울리는 따뜻한 음향 A Warm Sound in a Gray Field> 1961,
Noland의 개성적인 화풍은 1950년대 Morrice Louis와 그의 동료들과도 비교되고 특히 당시의 드 쿠닝
6. 결 언
이상의 작품구도의 분석에서 알 수 있는 시각적인 결과는
결과적으로 이러한 질서에 대해 무시하거나 전연 無知한 경우 화면 그 자체가 혼란되어 그야말로 예술의
이러한 논증들의 이해는 예술 작품을 감상 할 때 심리적 공감을 일으켜 주며 작가로서 예술 창조적 행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