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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지산의 지맥과 지명 고찰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전)
가) 우리 조상들의 산경수경 개념
오늘날의 땅을 평야-산지 개념으로만 보면 김포평야에 산줄기가 지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산경수경(山徑水經) 개념을 바탕으로 땅을 이해 왔다.
선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줄기를 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와 같은 고지도를 보면 이를 엄격히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디.
아무리 널빤지와 같은 평평한 평지일지라도 분명히 그 땅에는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면 분기되는 지점이 꼭 있다는 것이고, 그 지점을 이어 나간 것이 바로 '산줄기'라는 이야기다.
산줄기라는 것은 산들이 주욱 이어져서, 있는 그 모양 자체를 말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평평한 땅에도 반드시 물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을 이어나가 한 줄기의 선(線) 형태로 나타나면 이것이 바로 '산맥(지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 개념은 우리의 전통 지리 개점에서 철저히 지켜져 왔고, 신경준의 <산경표>에도 이것이 잘 반영되어 있다.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한 예로, <대동여지도>에 김포평야 한가운데에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긴 산줄기가 그어져 있다. 백두대간에서 말하는 한남정맥의 마지막 부분이 김포평야를 지나는데, 그 끝자락에 문수산(文殊山)이 위치해 있다. 말하자면 문수산은 한남정맥의 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본다면 오늘 이야기하는 둔지산도 반드시 어느 산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 중의 산이고, 그 줄기는 백두대간의 한 정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즉, 둔지산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의 한 지맥에 속한 산으로 보는 것이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시작, 김화의 오갑산과 대성산, 포천의 운악산, 양주의 홍복산, 도봉산, 삼각산, 노고산을 거쳐 고양의 견달산, 교하의 장명산에 이르는 서남으로 뻗은 산줄기이다.
도시나 마을을 사방에서 감싸 주는 조산 중 뚜렷한 네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 하는데, 큰 분지형 형태인 서울의 경우, 북쪽 북한산(北漢山), 남쪽 관악산(冠岳山), 동쪽 용마산(龍馬山), 서쪽 덕양산(德陽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내사산을 잇는 경계선 내부의 면적은 약 627 제곱킬로미터로, 지금 서울시 사대문 안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였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친 13 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경표(山經表)』에 근거를 둔 이들 산줄기의 특징은 모두 강을 기준으로 한 분수산맥이다.
따라서, 그 이름도 대부분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면 금강 남뽁의 줄기이면 금남정맥((錦南正脈)) 식으로.
이 산줄기는 동쪽으로 회양·화천·가평·남양주, 서쪽으로 평강·철원·포천·양주 등의 경계를 이루는데, 자연히 동쪽은 한강 유역이고 서쪽은 임진강 유역이 된다.
한북정맥은 우리 나라 중부 지방의 내륙에 위치하여 비교적 높은 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정맥에는 추가령, 백암산(白巖山), 양쌍령(兩雙嶺), 적근산(赤根山), 대성산, 수피령(水皮嶺), 광덕산(廣德山), 백운산, 국망봉(國望峰), 강씨봉(姜氏峰), 청계산(淸溪山), 현등산(懸燈山), 죽엽산(竹葉山), 도봉산, 노고산, 현달산(峴達山), 고봉산, 장명산 등이 있다.
『산경표』와 같은 시대의 『대동여지도』와 비교해 보면 하구 쪽 파주시 교하면의 곡릉천(曲陵川) 유역을 『산경표』는 임진강 유역으로, 『대동여지도』는 한강 유역으로 대별한 것이 서로 다르다.
나) 남산과 둔지산의 연결 지맥
넓게 생각하면 우리 나라의 모든 산들은 모두 백두산을 뿌리로 한다, 즉, 백두대간의 여러 정맥에서 다시 지맥이 갈라지고, 그 지맥의 산들이 다 백두산을 뿌리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용산의 둔지산(屯芝山)도 어느 산줄기엔가 속해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그 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도를 보면 우선 북서쪽의 찬바람재 고개를 거쳐 남산에 닿게 됨을 알 수가 있다.
찬바람재. 한풍현*寒風峴). 서울 삼각지쪽에서 국방부 앞을 거쳐 용산구청쪽으로 가는 길목의 고개. 그 언저리에 녹사평역이 있다.
남산은 서울 내사산의 하나이니 북악산과 연결된 것이 확실하고, 이 북악산은 다시 탕춘대
의 산줄기를 거쳐 북한산과 이어져 있다.
탕춘대(蕩春臺). 서울 종로구 신영동 136번지에 있던 돈대로서, 연산군 11년(1505) 이곳에 탕춘대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북한산이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에 속하니 둔지산이 지맥상으로는 백두산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둔지산부터 백두산까지 물을 한 군데도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다) 일제 군 기지와 둔지미 일대 훼손
둔지미가 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둔지미 일대가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이 이 둔지미에 주둔하면서 이 일대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일본군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와 용산의 효창공원(효창원), 만리창과 둔지미 일대에 주둔하고, 청나라군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조선이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다음해 한성부로 개칭한 뒤 서울에 중·동·남·서·북부 등 오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관원으로는 각 부마다 종6품의 주부 1인과 종9품의 참봉 2인을 두었는데, 오부 체재는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즉, 지금의 구(區)와 비슷한 것이다..
강점 첫해인 1910년에는 서울의 행정구역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이 당시 일제가 그린 지도에도 서울의 오부(五部)
가 색깔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후로 훼손이 본격화되는데, 특히 서울에서도 용산 지역, 용산 하고도 둔지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심했다. 일제의 군 기지가 들어서면서부터 훼손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라) 둔지미 일대의 옛 마을들
<세종실록지리지>에 ‘둔지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지리지는 1454년 완성된 것인데, ‘경도 한성지’편에 이 둔지산에 노인성단, 원단, 영성단, 풍운뢰우단이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에 있다고 적혀 있다.
老人星壇、圖壇、靈星壇、風雲雷雨壇、【皆在崇禮門外屯地山。】 南方土龍壇、
통상 ‘풍운뢰우단’이나 ‘남단’으로 불렸던 이들 제단은 주로 가뭄 때 기우제를 지냈고, 더러는 기설제(祈雪祭)를 지내기도 했다. 남단은 종묘-사직과 함께 매우 중요한 국가 제사 장소였다.
‘둔지방’은 조선의 한 행정구역이었다. 18세기부터 서울 각 부(部) 밑으로 방(坊)
을 두었다.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五府: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 52방(坊)으로 했다.
이 때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 일대가 둔지방에 포함됐다.
둔지방(屯芝坊)(城外):전생내계(典牲內契)의 전생동(典牲洞). 갈어리계(葛於里契)의 갈어리동(葛於里洞), 와서계(瓦署契)의 와서동(瓦署洞). 이태원계(梨太院契)의 이태원동(梨太院洞). 둔지미계(屯芝味契)의 둔지미동(屯芝味洞). 서빙일계(西氷一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서빙이계(西氷二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조선시대 남부 둔지방에 있던 계로서, 계 이름은 용산구 한강로3가 651번지 용산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조선시대 관청에서 소용되는 기와와 벽돌을 구워내는 업무를 관장하는 관아인 와서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영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있었고, 갑오개혁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남서 둔지방(성외)으로 바뀌었고, 계 안에는 와서동이 있었다
옛날 둔지방 안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나타난다. 갑오개혁 이전의 서울 둔지방 안의 각 마을 행정명칭은 다음과 같다.
-전생내계(典牲內契)의 전생동(典牲洞). 현 후암동
-갈어리계(葛於里契)의 갈어리동(葛於里洞), 현 후암동-동자동 일부
-와서계(瓦署契)
의 와서동(瓦署洞) 현 한강로3가
-이태원계(梨太院契)의 이태원동(梨太院洞). 현 이태원
-둔지미계(屯芝味契)의 둔지미동(屯芝味洞). 현 미군기지 안
-서빙일계(西氷一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서빙이계(西氷二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둔지미계에는 큰말(대촌.大村)과 제단안말(단내촌), 정자골(亭子洞), 새말(신촌.新村) 등의 마을이 있었다. 이들 4개 마을에는 대략 가구 수가 300~400호 정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촌(새말)은 현재의 미군의 드래곤힐호텔 자리에, 정자동은 국방부 남쪽에 있었다. 내촌(제단안말)은 현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대촌(큰말)은 박물관 바로 위 둔지산 아래에 있었다.
일제 때는 ‘둔지미’란 이름을 거의 쓰지 않고 주로 ‘용산’으로 사용해 왔다.
1906년 둔지미는 공식적으로 ‘용산’으로 바뀌었다. 당시 일본군이 둔지미 일대를 그린 지도의 이름은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였다. 이 지도엔 둔지산이 적혀 있고, 일본군도 이 일대의 지명이 둔지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지도의 제목을 ‘용산’이라 붙였다. 일제강점기 용산 기지는 대체로 ‘용산 병영’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한겨레신문 김규원 기자)
이래서 450년 이상 사용한 지명 ‘둔지미’가 우리 입에서 멀어져 갔다.
마) 둔-둠-덤의 어원 고찰
‘둔지산’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배경을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둔전(屯田)’과 연결을 짓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방향을 돌려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둔(둠)’ 지명과 관련하여 ‘도막(돔악)’, ‘뜸’, ‘둥지’, ‘덩이(덩어리)’, ‘더미(덤+이)’, ‘덩치’, ‘둥글다’, ‘덩그렇다’ 등의 말들과 연관짓는다. 이 말들을 서로 비교하고 그 뜻을 새겨 보면 서로 통하는 점이 발견된다.
토박이 땅이름들을 살펴보면 이와 연관되었음 직한 것이 많다.
돌로 쌓은 울타리를 ‘담’이라 하는데, ‘돔’, ‘둠’과 같은 말과 연관지어 볼 만하다.
‘둠’, ‘듬’은 또 ‘뜸’이 되어 ‘사이’의 뜻을 지니게 갖게 한 듯도 하다.
- ‘이 이십리 히 이시니(離)’ <박통사신역언해>(一,13)
- ‘각(閣)애서 이 언메나 머뇨.(離閣有多少近遠)’ <노걸대언해>(上,43)
한라산을 ‘두무악(頭無岳)’ 또는 ‘원산(圓山)’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산봉우리가 둥글어 나온 이름이란 주장이 있다. 제주도의 옛이름 ‘탐라’도 섬이 둥글어 나온 이름인 ‘담나(둠나)’가 변한 이름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둠’, ‘듬’은 ‘뜸’이 되어 마을에서 위치 개념의 집무리를 뜻하기도 해서 ‘위뜸’, ‘아래뜸’ 같은 말이 나오기도 했다.두멍, 둠벙, 둥구럭(圓籠) 등의 말도 ‘둥금(圓)’의 뜻인 ‘둠’이 그 바탕일 것이다.
‘둠’은 ‘두르다’의 명사형 ‘두름’이 줄어 된 말이기도 해서 둘레, 두름(물고기 엮음), 들러리, 돌리다, 구르다(두르다), 도로(反.復), 도리어(反하여) 등의 말들과도 서로 먼 친족 관계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둠’(담)은 일본으로도 건너가 다마(タマ.玉.珠), 아다마(アタマ.頭), 다무로(タムロ.屯), 쓰부라(ツブラ.圓) 등의 말을 이루게도 했다.
-두무덕(斗武德) 함남 북청 가회면
-두무산(斗霧山) 경남 거창-산청-합천 사이
-두무산(杜武山) 황해도 곡산
-두모산(頭毛山) 함남 안변
-두미산(頭尾山) 평북 안주
경남 거창의 흰대미산(흰독더미산.白磊山)과 마금대미(막은데미산), 경북 칠곡의 숲데미산(石積山), 경남 거창-전북 무주과 경북 경산-영천의 대마산(大馬山), 경주-포항의 ‘두마니’ 등도 모두 ‘둠’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둠’ 계통 지명은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에 많다. 둠나골(冬音奈忽)(강화 일부), 돔골(冬忽)(황주), 둠골(冬音忽)’(연백), 두물골(德勿縣)(개풍 일부), 두밋골(冬比忽)(개성) 등을 들 수 있다.
‘둠’ 계열의 땅이름을 한자로 음차하는 경우, ‘둔(屯), ’두무(斗霧,杜武), 두모(頭毛), 두미(頭尾)가 있고, ‘동음(冬音)으로 음차하기도 했다. ‘동(東)’을 넣기도 했는데, 이는 ‘둠’과 ‘동’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이다. 산지에 많은 ‘동막(東幕)’은 ‘둠막(돔막)’이 발음 변화를 일으킨 말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산’을 뜻하는 ‘둠’과 ‘마을’을 뜻하는 ‘막’이 합쳐진 말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동막’은 산 속의 마을이거나 산 아래 마을, 즉 ‘산촌(山村)’과 같다고 본다. 전국에 ‘동막’은 많지만 이의 상대적 지명인 ‘서막(西幕)’, ‘남막(南幕)’ 등의 이름은 별로 없다.
'둔지미'라는 토박이 땅이름은 서울 용산구의 이곳을 비롯해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둔지미 : 대전시 서구 둔산동, 대구시 동구 둔산동, 경기도 이천군 신둔면 고척리,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하오안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충남 천안시 삼룡동, 예산군 덕산면 둔리, 경북 문경시 호계면 부곡리, 전남 영광군 군서면 보라리 등
둔지미는 ‘둔지산’의 원래 지명일 것이다. ‘둔(둠)“계 지명으로 보는데, 대개 산이 외따로 떨어져 있거나 평지쪽에 오똑 솟은 언덕이나 산에 이런 이름이 많이 붙어 있다.
‘둔지미’란 이름이 과연 ‘둔지산(屯芝山)’이란 한자에서 나왔을까? ‘둔지산’이란 한자 지명이 ‘둔지미’로 되었다고 보기보다는 도리어 ‘둔지미’가 ‘둔지산’이란 한자 지명으로 옯겨갔을 가능성이 크다.
지명을 해석할 때 현재의 발음이나 한자의 뜻을 기준으로 지명을 해석하면 본래의 지명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뜻이 나오게 되고 만다.
의역(意譯)이기보다는 음역(音譯)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둔지산’은 한자로 屯地山, 屯芝山, 屯之山, 屯知山 등 여러 글자로 표기되어 왔는데, 음역 과정에서의 차음(借音)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둔(屯)’자를 한자 뜻으로 풀어 ‘둔전(屯田)이 있어서’라는 의견과는 뚜렷이 그 해석이 다르다. 둔전의 설치 기록이 자세히 보이지 않고 한자 ‘둔지산’의 ‘지(地,芝,之, 知)’의 개입도 의문시된다. 둔지산 일대의 지형을 볼 때도 둔전을 둘 만한 땅도 보이지 않는다. 또, 둔전 이전에 이름이 없었을 리도 없다. ‘둔지’는 ‘둠지’의 변음일 수 있고, ‘미’는 ‘산(山)’을 뜻하니 이를 음의역해 ‘둔지산’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산이나 높은 곳은 말(마루), 몰, 달(돌), 뫼(메,미), 술(수리), 부리(비로), 둠(둔) 등으로 불렀다.
둔지산이 토박이 땅이름이라면 ‘둔지’는 과연 어떤 뜻일까? ‘둔-둠-덤-담’ 계열의 땅이름으로 본다면 이는 단순히 ‘산(山)’과 연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계열의 지명은 산지 일대에 많이 분포한다. ‘둔지(둠지)’라는 이름은 모나지 않은(둥그스럼한) 산이거나 따로 떨어져 있는 산에 많다.
이와 연관하여 전북의 대둔산(大屯山)과 전남의 두륜산(頭輪山)의 예를 들어 보자.
대둔산은 '한둠산(한둔산)'인데, 이는 ‘따로 떨어져 있는 큰 산’의 뜻으로 보인다. ‘한둠산’에서 ‘한’은 ‘대(大)’, ‘둠’은 ‘둔(屯)’으로 음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두륜산은 대둔사(大芚寺)의 이름을 따서 ‘대둔산’이라 칭하다가 대둔사가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자 ‘대흥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두륜산의 원이름 대둔산의 명칭은 ‘크다’는 뜻의 ‘한’과 ‘산’이란 뜻의 ‘듬(둠)’이 붙어 ‘한듬’이었고, 이것이 ‘대둔(大屯)’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두륜(頭輪)’의 뜻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솟은 ‘둥근머리산’의 의미였을 것이다. 한듬산’을 한자화한 것이 대둔산이어서 '듬'의 뜻이 들어 있지 않고 다만 '듬'과 비슷한 한자를 음화한 것이 '둔'이므로 그 한자의 뜻과는 관계가 없다.
‘둔지산’과 거의 같은 이름인, 전국에 많은 ‘둔산(屯山)’
은 주로 산지에 분포해 있는데, ‘둔전(屯田)’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구시 동구, 대전시 서구, 충남 서산시 인지면 둔당리, 전북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전북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경남 창녕군 이방면 석리, 경남 밀양시 청도면 인산리 등에 이 이름이 있다.///
바) 둔지산 근처의 마을들
<서빙고동>
● 둔지미(屯芝洞) 【마을】 팔군 골프장에 있던 옛 마을.
● 새말 【마을】 서빙고초교 자리. 이전에 새로 생긴 마을.
● 서빙고고개 【고개】 서빙고 뒷 고개.
● 칠적재 【고개】 옛날 서울로 향한 큰 길목.
● 건너말 【마을】 동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마을.
● 새동네 【마을】 → 웃보광이(보광동)
<용산동>
● 용산동고개 【고개】 용산동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해방촌 【마을】 해방과 더불어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과 월남 동포에 의해서 발달된 동. 1946년 5월 8일 용산동으로 개칭.
<이태원동>
● 간뎃굴 【마을】 뒷골 마을인데, 가운데에 낀 마을.
● 뒷골 【마을】 이 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
● 새텃말 【마을】 두 마을 사이 마루터기에 새로 생긴 마을.
● 외인주택(外人住宅) 【마을】 현 136번지 일대의 외국인 주택지.
● 찬바람재 【고개】 찬 바람이 몹시 센 고개. 한풍재(한풍현.寒風峴)
● 반고개 【고개】 이태원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던 작은 고개.
<한강로3가>
● 새남터(사남기. 沙南基 [새나무터, 서부이촌동] 【마을】 ‘새나무터’의 준말.
● 새푸리나루터 【나루】 한강로3가 새푸리 앞 나루터.
● 와서터(瓦署址) 【터】 조선시대 궁궐에서 쓰는 기와와 벽돌을 구어 내던 곳.
● 왜새 【마을】 현 한강로3가 65번지 일대. 조선 때 기와를 굽던 곳.
● 왜새안말 【마을】 왜새 동쪽 안 마을. 옛날 기왓굴 물주들이 살던 마을.
● 중부이촌동(中部二村洞) [새푸리] 【마을】 철도공원 【터】 `한강로3가 현 철
<한남동>
● 가운뎃말 【마을】 큰마을의 가운데 마을.
● 개건너 [작은말] 【마을】 앞내 건너 마을. 작은 한강리란 뜻.
● 부어터고개 【고개】 성동구 약수동의 ‘버티고개’
● 빈역말 【마을】 큰말 중의 하나. 용단 아랫 마을로 강변 마을.
● 옥수동고개 【고개】 한남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장수말(長壽) 【마을】 큰말 중의 하나. 현재의 동리 앞 마을.
<후암동>
● 전생서 [정성세] 【마을】 조선시대 제향에 쓰던 희생물(가축)을 바치던 곳.
● 도락다리 [석학동] 【마을】 돌이 많다 한다.
● 두텁바우 【마을】 두텁바우가 있던 마을.
● 두텁바우고개 【고개】 두텁바우 근처의 고개.
● 번말 【마을】 버덩 옆의 마을.
● 석학동(石壑洞) 【마을】 도락다리.
● 양지말 【마을】 남향으로 양지쪽 마을.
● 효현재 [쇠경재] 【고개】 옛날 이 근처에서 효자가 났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