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라의 유학자, 언어학자이자 동국18현의 첫 현인. 시호(諡號)는 홍유후(弘儒侯).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 아버지는 원효대사 설서당(薛誓幢)이며 어머니는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이다. 자(字)는 총지(聰智)이며 경주 설씨 시조 호진(虎珍)의 후손으로, 설총은 경주 설씨의 중시조이다. 한글 이전 고대 한국어의 표기법인 이두(吏讀)를 집대성했으며 신라에 유교를 확립시킨 뛰어난 유학자로, 약간 앞 세대의 사람인 강수(強首), 후대의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삼현으로 추앙받았다.
아버지 원효대사가 승려 출신인 것은 여러모로 유명하지만 설총은 아버지와 달리 유학자였다. 단, 약간 앞 세대의 또 다른 대표적 유학자 강수는 불교가 세속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며 유교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것과 달리 설총은 아버지 원효의 영향을 받았다.
원효의 골품을 따라 설총 또한 6두품이다.
2. 범상치 않은 탄생
설총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고승 원효(본명 설서당)라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가 해골물을 먹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뒤에 노래를 지어 불법을 전했는데 갑자기 그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지을 텐데"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도 원효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던 중,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서는 "원효가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라는 거로구나"라고 하고선 원효를 자신의 과부된 딸인 요석공주와 맺어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관리를 보내 원효를 데려오게 했는데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던 원효가 일부러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버렸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가서 옷을 말리게 했는데,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요석궁에 있던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냈고 그래서 나온 아들이 바로 설총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설총은 무열왕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3. 통일 신라의 대학자
고승과 과부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출생 문제로 세상의 지탄을 받을수도 있었지만 설총은 이를 뛰어난 학문으로 극복한 듯하다. 원효가 승려가 되기 전의 신분이 6두품이었던 탓에 설총도 6두품이라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문장과 학식으로 세간의 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한다.
흔히 문자 이두를 만든 사람이 오랫동안 설총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쓰였던 문자 체계로 한자의 형태를 빌려서 썼다. 조선 초에 대체제인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민간의 사용빈도가 크게 줄었으나 관료층들 사이에서는 구한말까지 여전히 널리 사용되었다. 한글 전용이 보편화된 현대에는 그 존재감이 사라진 상태긴 하지만, 한민족이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기간을 따져 보면 한글보다 훨씬 오래 썼던 것이 이두고 이런 점에서 설총의 업적을 마냥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국문학자들의 연구로는 이미 설총 이전부터 우리 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이두나 향찰식의 표기가 있어왔다고 하며, 돌에 새긴 금석문을 통해 설총시대 이전에도 정통 중국식 한문이 아닌 이두식 문장을 쓴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설총이 방언(한국어)으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했다라고 쓰고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우리말로 화이의 방속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과 문학을 풀이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설총은 그 전부터 존재하던 이두와 향찰의 표기를 집대성한 공로가 있다고 볼 수 있고, 이 점에 있어서는 문자를 직접 만든 세종대왕 유형이 아니라 현대 국어학의 기초를 닦아놓은 주시경과 비슷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세계사에서 보편적으로 세종처럼 문자를 아예 새로 만들어내는 사례보다는, 이렇게 기존에 중구난방이던 걸 다듬고 정리하는 경우가 더 많고 이 또한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 중에는 설총이 우리말(한국어)로 유교 경전을 읽고 풀이하는 노력을 한 데에는 아버지 원효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원효가 난해한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서 일반 대중에게 설파한 것처럼 설총도 어려운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서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런 설총의 노력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남아있는 것은 없다.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대 명문장가로 꼽혔지만, 후삼국시대와 여요전쟁을 거치며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이미 고려 중엽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설총의 문장이나 저서의 대다수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고, 설총이 지은 비문은 고려 중기까지는 다수가 현존한 상태였지만, 이마저도 글씨가 훼손된게 대부분이라 제대로 읽을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신문왕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화왕계가 남아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
조각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는지 원효가 죽은 후에 원효의 유골을 모아서 거기에 흙을 붙여 원효회고상이란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의 시에 의하면 원효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뵈었다라고 하는 걸 보면 대단히 생생한 조각상이었던 모양.
고려시대 현종 때 홍유후로 추증되고 동시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비교적 문인의 성향이 강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관련 일화까지 조작된 것으로 보이는 최치원과는 달리, 설총의 경우는 유학자적 권위를 인정해서 배향에 큰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 보문동 423에 설총의 묘로 전해지는 '전 홍유후 설총묘'가 있다.
4. 기타
이두 표기를 확립했다는 점(나중에 이두를 만들었다고 와전되었지만) 때문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만드는 것 반대하던 신하들에게 격노하며 언급한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것은 거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ㅡ 세종 26년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출처
출신지가 경산시라 그런지 경산시 남산면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 설총로가 있다. 원효와 일연도 같은 경산 출신이라 경산시는 경산시를 이들을 3명의 성현, 삼성현의 고장이라 부르고 있다.
래원의 곡 <원효대사>에서도 '설총 사회적 파장 가져와'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