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는 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겨 전시대를 통틀어 음악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짤츠부르크에서 태어나 빈에서 사망했다. 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겨 전시대를 통틀어 음악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87)의 아들이다. 그와 그의 누나인 마리아 아나(1751-1829)는 음악적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1762년 레오폴트는 그의 어린 아이들과 유럽 음악 여행을 시작하였다.
모차르트는 첫번째 음악 여행(1762-69)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이탈리아 여행(1769-74)에서 그는 처음으로 요제프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보았고 첫번째 이탈리안 오페라를 썼다. 1775-77년 그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첫번째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어머니가 1779에 죽자, 그는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고, 1781년 정가극 〈이도메네오 Idomeneo〉를 썼다. 1781년 그는 대주교와의 갈등으로 쫓겨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베버가로 옮기고, 비엔나에서 그의 독립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하였고, 〈The Abduction from the Seraglio〉(1782)와 많은 그의 위대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1780년대 후반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돈 조반니 Don Giovanni〉·〈코지 판 투테 Cosi fan tutte〉등의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35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작곡가이자 잘츠부르크 대주교 악단의 부악장이었으며 어머니 아나 마리아(결혼 전 성은 페르틀)는 장크트 길겐 출신인 공무원의 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1751년 7월 30일에 태어난 딸 마리아 아나(나네를로 알려졌음)와 볼프강만이 살아 남았다. 모차르트는 요아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라는 긴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지만 테오필루스가 독일어로는 Gottlieb, 라틴어로는 Amad였기 때문에, 후에 그는 자신의 편지나 작품에 W. A. Mozart, 혹은 Wolfgang Amad Mozart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볼프강과 누이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아버지로부터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레오폴트 모짜르트는 비록 바이올린 연주자나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볼프강이 태어나던 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처음 출판한 그의 이론서 〈기본 바이올린 교습법 시론 Versuch einer gründichen Violinschule〉은 그가 죽고 오래지 않아 세계 각국어로 출판되었다. 1778년 2월 16일에 레오폴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모차르트의 어린시절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린시절 너는 어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른스러웠으며 네가 클라비어에 앉아 있거나 음악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아무도 감히 너에게 농담조차 걸 수 없었다. 심지어 너무나 엄숙한 너의 연주와 일찍 개화한 너의 재능과 생각에 잠긴 진지한 네 작은 얼굴을 지켜보았던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네가 오래 살 수 있을지 걱정했다."
5세에 볼프강은 미누에트와 소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하게 되었다.
1770년대말경 점차 공개적인 바이올린 연주와 피아노 협연을 그만두었으며 그때 이미 정상급의 대가가 되어 있었다. 레오폴트는 시골 잘츠부르크에서보다 두 자녀의 재능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고 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볼프강과 나네를에게 여러 차례 유럽 여행을 하도록 해 따로 또는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마련했다.
빚에 대한 부담은 죽을 때까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볼프강과 콘스탄체는 1783년 8월과 9월 그리고 10월에 아버지와 누이 나네를을 방문했으나 그들의 방문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아버지와 누이 또한 콘스탄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1783년 8월 장크트페터 성당에서 미완성인 채 남아 있는 〈미사 C단조〉 K.427의 연민송(Kyrie)과 영광송(Gloria)을 연주했다.
비록 미완성이기는 했지만 미사곡은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일요 연주회에서 보여주었던 바흐와 헨델에 대한 모차르트의 연구가 결실을 맺은 숭고한 작품이다. 빈에 있는 국립도서관의 책임자였던 슈비텐 남작은 후에 하이든과 친교를 가졌으며 젊은 베토벤의 후원자가 되었다. 마지막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을 작곡할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이때에 작곡된 교향곡들은 모두 걸작이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세레나데를 개작한 교향곡 〈하프너 Haffner〉 K.385, 1783년 10월과 11월에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작곡한 〈린츠 Linz〉 K.425, 보헤미아의 수도를 위해 작곡한 〈프라하 Prague〉 K.504, 그리고 마지막 3곡의 교향곡(E♭장조 K.543, G단조 K.550, C장조 <주피터> K.551) 들이 이때 작곡되었다. 특히 마지막의 네 교향곡은 하이든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때까지 작곡된 그 어떤 작품도 따를 수 없는 18세기 교향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레오폴트는 1785년 2월 11일부터 1785년 4월 25일까지 아들 내외와 함께 있으면서 아들의 물질적·예술적 성공을 지켜보았다.
그때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헌정한 6곡의 현악 4중주(K.387·421·428·458·464·465)를 완성하는 중이었으며 그 가운데 마지막 3곡이 하이든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차르트의 집에서 연주되었다. 이때 하이든은 레오폴트에게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당신의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6곡의 현악 4중주에서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제외한 그 어떤 작곡가보다 이 형식을 다루는 데 있어 앞선 완숙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후속 작품 D장조 K.499와 〈프로이센〉에서도 실내악의 중심인 현악 4중주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의 현악 4중주는 모차르트의 현악 5중주(이 가운데 C장조 K.515와 C단조 K.516이 유명하지만 D장조 K.593도 훌륭한 작품임)를 제외하고는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이후 10년 동안 작곡한 대표적인 오페라로는 1786년 5월 1일 빈에서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 K.492,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에서 초연된 〈돈 조반니 Don Giovanni〉 K.527, 1790년 1월 26일 빈에서 초연된 <여자는 다 그런 것> K.588이 있는데 모두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에 의한 것이다.
〈여자는 다 그런 것〉은 앞서 두 작품과는 달리 초연에서 실패했는데 요제프 2세의 사망으로 야기된 빈의 혼란이 그 부분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쓴 〈황제 티투스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 K.621은 새로운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을 위해 보헤미아의 의회가 위촉한 작품이다. 시카네더에게 돈과 명성을 가져다 준 〈마술피리 Die Zauberflöte〉(에마누엘 시카네더의 대본) K.620은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으나 청중들은 곧 기계장치까지 동원된 희극적인 요소와 동화의 세계, 프리메이슨적 이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생명을 주는 모차르트의 환상적인 음악에 매혹되었다.
경제적 곤란을 겪는 아내를 구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서 모차르트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떠났다.
그는 제자이자 후원자인 카를 리흐노프스키 공작(뒤에 그는 베토벤의 확고한 후원자가 되었음)과 함께 1789년 4월 8일 빈을 떠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이곳에서 그는 J. S. 바흐의 필사본을 구했음)·베를린·프라하를 방문하고 1789년 6월 4일 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행의 결과로 얻은 재정적 수입은 프랑크푸르트로 떠났던 마지막 연주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형편없었다. 결국 그는 빚더미 속에 빠졌고 결국 그의 재정상태는 파산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791년 여름, 어떤 낯선 사람이 찾아와 〈진혼 미사곡 Requiem Mass〉 K.626을 의뢰하자 모차르트는 신비스런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실 그 사람의 배후에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려는 의도에서 이 일을 꾸민 아마추어 음악가인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 프란츠 하비어 쥐스마이어는 구술을 통한 지시와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하여 발제크에게 주었다.
1791년 늦가을 모차르트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그의 갑작스런 쇠약과 죽음은 곧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낳았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에 발표된 카를 베어의 의학적 연구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이미 어린시절 류마티즘열로 심장에 무리가 있었으며 1791년 12월 같은 병으로 인한 심장의 충격과 과다한 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1791년 12월 5일 빈에서 사망했으며 다음날 묘를 파는 인부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크트마르크 묘지에 묻혔다. 홀로 남은 콘스탄체는 엄청난 빚더미 속에서 절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받았다.
그녀는 후일 덴마크의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결혼했으며 1842년 잘츠부르크에서 죽었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지만 그의 경제사정은 안정적인 때가 결코 없었다.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기 직전에 모차르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장크트슈테판 성당 뒤쪽의 안락한 거처에서 살았다. 그러나 1785~91년에 점차 재정상태가 악화일로를 치달으면서 그는 친구들, 특히 프리메이슨 단원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돈을 빌려쓰게 되었다(모차르트는 열성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음). 모차르트가 가장 부담없이 돈을 빌렸던 사람은 동료 메이슨과 은행가였던 미하엘 푸흐베르크였다.
심 산
모짜르트 생가 ▼
짤츠부르크 게트라이데 거리 ▼
토마젤리 카페 ▼
모짜르트 초코렛 마켓 ▼
대성당과 호엔짤츠부르크 성채 ▼
대성당
대성당 성모마리아상 ▼
성모마리아상 ▼
호엔 짤츠부르크 성채 ▼
카피텔 광장 ▼
성모마리아 상 ▼
레지덴츠궁 광장의 종탑, 분수대 ▼
레지덴츠 광장의 분수대 ▼
모짜르트 동상 ▼
레지덴츠궁 ▼
모짜르트 초코렛 마켓 , 이곳에는 여기저기 많은 모짜르트 초코렛 가게에서 판촉을 한다. 모짜르트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음악가이기는 하지만 초코렛 판촉에 이요하는 것은 좀 씁쓸하다. ▼
모짜르트 생가 ▼
모짜르트 초코렛 ▼
짤츠부르크 신시가지▼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