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라이딩은 사전에 예고도 없이 번개 모임으로 결정되었다. 겨울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기에 미리 일정을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라이딩 당일에도 눈과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강설량과 강우량이 많지 않다는 소식에 과감히 출발을 결정하였다. 무엇보다 쉐도우수는 눈 내리는 날에도 서해안 종주를 완주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이번 코스는 역곡역에서 출발해 안양역에서 마침표를 찍는 여정이다. 코스는 역곡천, 목감천, 칠리저수지, 물왕저수지, 고송정, 화정천, 화랑저수지, 수암저수지, 연암사, 안양역에 이르는 약 55km이다.
지하철 1호선 역곡역에는 쉐도우수, 아스트라 전, 스머프 차 3명이 모였다. 홍토마는 고열과 심한 기침으로 아쉽게 불참했다. 오전 9시 30분,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았다. 다행히 10시가 지나면서 눈이 그쳤고 회색 하늘 사이로 겨울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역곡천 자전거길은 공사로 막혀있었다. 차단막 사이를 어렵게 통과했지만 곳곳에 장애물이 이어져 결국 우회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겨울 라이딩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지만 작은 난관마져 모험처럼 느껴졌다. 목감천을 따라 달리다 만난 칠리저수지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강태공들의 좌대는 호수 위에 있었지만 얼음은 누구에게도 낚시를 허럭하지 않았다. 휴식하면서 마신 커피 한 잔은 겨울바람 속 최고의 선물이었다. 차갑게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마음에도 온기가 스며들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도리재를 넘으니 넓은 물왕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축구장 스무 개를 합쳐 놓은 듯한 호수는 겨울의 적막을 품고 있었다. 이곳에는 골오리, 깨골, 호천골 등 옛 지명이 남아있는데 산과 골짜기가 많은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물왕저수지 인근 산현동에는 성종의 열 번째 딸인 정숙옹주(1493-1573) 묘가 자리하고 있다.
왕실의 영화보다 후손을 잇지 못한 안타까운 삶이 더 오래 기억되는 곳이다. 라이딩은 단순히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는 여행임을 다시 느꼈다. 이어 도착한 오정각(五旌閣)은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장소였다. 충의공 김문기를 비롯해 그의 후손들의 충성과 효를 기리는 다섯 개의 정문이 세워져 있었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뜻을 되새겨 보았다. 오정각에서 조금 더 오르니 오늘의 답사 핵심인 고송정(枯松亭)이 모습을 드러냈다. 탄옹공 김충주는 단종을 향한 그리움을 품고 이곳에서 숯을 구우며 평생을 살았다.
매일 망월암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에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전설이 고송정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수백 년 세월을 견딘 느티나무와 향나무는 그 슬픈 역사의 산증인처럼 정자를 지키고 있었다. 매말라 버린 연못조차 겨울 풍경과 어우러져 묘한 쓸쓸함을 더했다. 고송정을 내려와 화정천으로 들어서니 우연히 만난 여든일곱 살 어르신이 인상 깊었다. 팔십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리자 웃으시며 "나이 많아 보이면 기분이 안좋으니 물어보면 그렇다고 하지요"하고 농담을 건네셨다. 그 유쾌한 미소에서 건강한 삶의 비결을 보는 듯했다.
화정천 상류의 인공폭포를 지나 먹자골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콩밭식당에서 순두부와 모듬두부를 나누어 먹으며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따뜻한 두부 한 그릇과 벗들의 덕담은 겨울 라이딩의 또 다른 행복이었다.화정천 하류의 화랑저수지는 갈대가 호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갈대 너머로 경기미술관과 안산 와스타디움이 어우러진 풍경은 겨울 들녘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안산천과 화정천이 만나는 합수부에서 잠시 쉬며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았다. 안산천을 거슬러 수암저수지에 이르렀다.
수리산 수암봉에서 흘러내린 물을 품은 저수지는 안산천의 발원지와도 같은 곳이다.쉐도우수는 하천 라이딩을 할 때마다 반드시 발원지를 찾는다. 강의 시작을 찾아가는 일은 물길의 생명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수암저수지에서 가까운 연암사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천왕문을 지나니 범종각과 12층 석탑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기자기한 석조상과 정갈한 마당은 작은 공원처럼 평화로웠다. 겨울 산사의 고요함은 마음까지 맑게 씻어 주었다. 오수 4시 30분, 안양역을 향해 마지막 페달을 밟았다. 해가 기울자 가로등과 아파트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겨울 저녁을 밝혔다.
오후 5시 50분 안양역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철 가장 늦은 시간까지 달린 라이딩을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번 라이딩의 목적은 고송정의 충절을 배우고, 연암사의 고요함을 만나며, 화정천과 안산천의 발원지를 찾아가는 역사 문화 답사에 있었다. 겨울 추위 속에서도 아랑곳 하지않고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페달을 밟았다. 라이딩은 힘들지만 언제나 건강이라는 가장 큰 보상을 안겨준다. 정상에 오른 등산객이 느끼는 희열처럼 긴 여정을 마친 뒤의 상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눈발이 흩날리던 겨울날, 벗들과 함께 달린 55km의 길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소확행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