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들이 죽음으로 지켜낸 조국, 통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작년 겨울 선배님의 부음을 들었다. 역전의 용사도 세월의 부름 앞엔 어쩔 수가 없나보다.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수도 없이 생사를 넘나들며 포항 전투에선 ‘곰’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1.4 후퇴로 이어지는 퇴각 길에선 큰 전공을 세우셨다. 한 소속에서 동료 기관사로 근무하면서 전쟁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같이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던 시절이 그립다.
오늘 그 분을 만나기 위하여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는 길이었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는 청계천을 건너 을지로 4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 건물 입구에 걸려있는 빨간 글씨의 ‘6.25 참전 해병대 유공자 모임’ 간판이 눈길을 잡는다.
포성이 울인지 60년이 되는 해니 빨간 휘장에 각이진 모자를 쓴 그 분들도 백발이 성성한 팔십 노병이 됐으리라. 어느 여고생의 시 귀가 떨림으로 다가온다. ‘그대 있으매 우리 여기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휴전 반세기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서해에선 도발이 상존하고, 입만 열었다 하면 본거지 박살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아도 이웃나라 얘기처럼 들리고 강 건너 불처럼 보이니 문제다.
작년 8월 우연찮게 TV 채널을 조작하다가 일본방송을 보게 됐다. 나가사키 평화 공원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피폭 기념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웃지못할 일은 하나같이 시민들의 표정이 굳다 못해 비장감마저 보이는 모습이었다. 정작 피해자들은 우리를 비롯하여 동남아 국가들인데도 말이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피해자인양 거창하게 행사를 하는 그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총성만 멎었지 우리의 현실은 휴전상태다. 참전 용사들은 한 많은 응어리를 가슴에 간직한 채 한분 두 분 이승을 하직 하신다. 그 분들마저 떠나시면 처절했던 그 날의 이야기를 누가 들려주겠는가.
기념관에서 박 선배는 만나지 못했으나 뜻밖에도 말로만 들어왔던 김 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낡은 사진 한 장과 회중시계 그리고 순직 경위가 전시되어있었다.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조총 대신에 조적(弔笛)을 불곤 했던 곳, 경부선 철길 세천고개에 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가 왜 거기에 서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50년 7월 괴뢰군에게 대전이 함락되었고, 미24사단장 딘 소장은 최후까지 남아 기관총을 잡고 대전사수의 독전을 하다 끝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김 기관사는 딘 소장 구출작전에 지원했다. 기관차에 33명의 특공대를 태우고 대전으로 북상하다 고개 마루에서 괴뢰군의 공격을 받았다. 특공대원 32명과 산화했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박 선배는 하늘이 도왔다고 말했다. 학도병으로 출정하여 포항전투에서 포로에 들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북진하여 50년 10월 26일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단다. 초산읍을 돌파한 국군은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태극기를 꽂아 세웠다. 오후 2시 15분.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어와 숨어있던 삼십만의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국군과 연합군의 퇴각 길, 4만이 넘는 병력의 흥남과 함흥 부두 철수 작전은 포위망을 좁혀오는 중공군만큼이나 몰아치는 눈보라와 혹한과 싸워야 했단다.
그 혼란 속에 정거장에 서있던 불 꺼진 증기기관차 하나, 그 차를 살릴 수만 있다면 수천 명의 병력을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을 텐데, 사령관의 다급한 소리, 후미에서 손을 번쩍 든 어린 학도병, 박 선배였다.
우선 기관차에 물을 보충해야 했다. 일렬로 늘어선 병사들은 전투모를 벗어 물을 한 투구 씩 나르기 시작했다. 보일러에 불을 지폈다. 압력이 오르기 시작했다. 공기압축기의 기동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습득한 이론과 실습으로 익힌 운전기술로 무사히 부두까지 병력을 실은 기관차를 몰고 올수 있었단다.
선배는 지난 12월 중순 한파가 몰아치고 있을 때 영면에 들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살아질 뿐이라는 말처럼 삶과 죽음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후회 없이 싸워서 나라를 지켜냈고 경제대국의 주추돌을 놓으셨던 그 분들이 아닌가. 이제 우리의 몫은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통일의 한을 푸는 것이다. 그 길만이 그 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끝.
첫댓글 6.25 60주년이라 더 공감이 가는 글 입니다.
6.25가 터지자 남한 곳곳에 잠복했던 빨갱이들이 들고 일어났다는데, 문제는 남한에 있는 적이 더 큰 문제 입니다.
그때의 용사들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그분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때의 참전용사들 이야기를 글로 많이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장여사님, 원선배님 반갑습니다. 6월 모임에 뵙겠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