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간 증
1999.01.03. 윤영윤 선생
‘마음이 겸손한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회개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느니라.’
감사 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지요. 찬송이나 예레미야 애가의 말씀이나 다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들이기 때문에요. 다만 희망이 있다면 ‘입술을 땅에 대고 있을 지어다. 혹시 희망이 있으리로다.’ 하는 말씀,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해 주신다. 통회하는 마음을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참 하는 일마다 걸음걸음 마다 죄뿐이었고, 형제들 마음을 상하게 해준 것뿐인데 이렇게 살려 주신 것이 회개하라고 살려 주신 줄 알고 참 감사드리는 것뿐입니다. 학교 공부는 제일 많이 했지만 믿음 안에 사는 모습은 제일 잘못 살기 때문에 제일 잘못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어르신들과 공동체 앞에서 용서를 청할 것뿐입니다. 지난번 10월 달에 남원에 갔을 때 장로님께서 저에게 글을 한 토막 주셨어요. 어제도 장로님 말씀 하셨는데 그 글을 읽어 드릴까 합니다.
“마음에 완전한 평화를 얻기 위하여 하늘을 보고 지금 자문해 보라.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은 없었던가?’ 라고, 이 ‘누군가’란 나의 표상이다. 그러니 그에게 가서 겸손 히 용서를 청하라. 만일 그의 얼굴이 너를 붉게 하게 한다면 그 얼굴을 통해 네 얼굴을 바라보라.”
지난해가 가기 전에 가슴에 걸린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참 용기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해 준적은 없는가? 참 크게 상해 드렸지요. 또 말씀 읽다보니까 복음서에 너에게 원망 들을만한 마음에 원망을 가질 만한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쌓아두고 찾아가서 그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새해가 되기 전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가 먼저 되어야 되는데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잠언 서에 보면 원수라도 화목케 해주신다고 하나님 뜻에 맞게 살면 원수라도 화목케 해주신다는 말씀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과 화해가 될 때에 이웃들과 화해가 될 것이라는 그런 말씀을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너무 편안하게 살았고 고생 없이 살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속에든 게 없어요. 뿌리가 깊어야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샘이 깊어야 물이 마르지 않은데 고생한 기억이 없으니 배고파본 기억이 없으니 헐벗어본 기억이 없으니 나올게 하나도 없지요. 등 따숩고 편안하게 죄 중에 산 것밖에는 없습니다.
공동체 일원이 될 자격도 없고 참 밥 얻어먹고 옷 얻어 입고 잠 잘만한 그런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쫓겨나지 아니하고 쫒아내지 아니하고 또 제 발로 걸어 나가지도 아니하고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에스겔 33장 11절 말씀처럼 악인이 멸망 하는 것도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돌이켜 당신을 당신께 돌아오라고 시간을 주시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신비에 보면 고통을 달게 받는 것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지라고 하는 말씀을 이번에 처음 보게 되었어요.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고통을 달게 받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그 말씀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8장 15절 말씀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해 주신다. 이 말씀도 요새 보게 되었는데요. 서울에 교육이 있다고 그래서 신청은 했는데 제가 가고 싶어서 신청한 거 아니거든요. 수가 차면 못 간다고 하니까 미리 신청해 두고 다른 젊은 분들이 가신다고 신청을 했는데 등록금도 내버리고 해서 제가 할 수 없이 억지로 올라가게 되었지요. 올라가면서 ‘고통의 신비’를 담고 가다가 읽어 보니까 고통을 달게 받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고, 그 다음 주일날 은성교회 가서 예배드리는데 그때 이사야 55장을 보시더라고요. 뒤적거리다가 이 말씀이 제게 눈에 들어 왔어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앞으로 참 걸음마다 모두가 죄요, 모두가 은총이었다고 말씀하신 언니처럼 제 뒷걸음을 다 돌아볼 때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데 숨 쉬게 살려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이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이 큰 은총이다, 싶습니다. 제가 받은 사랑은 너무너무 크지요. 복희 어머니의 사랑하며 정 원장님 또 김 선생님 오 장로님 또 어머니들 한나 어머니 귀주 어머니 간난씨 어머니 연남씨 어머니 또 형제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사랑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는 거지요. 지난번에 이 현주 목사님께서 김 선생님을 초청하실 때 전화를 하셨어요. 이 현주 목사님 예천에 계시는데 당신 집에 오셔서 하루 밤 주무시고 서울 올라가시면 좋겠다고 선생님께서는 폐 안 끼치고 바로 서울 올라가실 생각이지요. 제가 바빠서 미리 전화를 못 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저녁에 내일 내려오시겠다고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서 그냥 여기서 올라가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때 전화상으로 그 당신 집에 하루 밤 주무시면 안 되느냐고 말씀 하시는 그 심정, 뜨거운 가슴이 전화로 울려오는데 굉장히 강하게 울려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생각 되는 게 인간관계 관계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봤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이 현주 목사님과 선생님은 멀리 떨어져 있고 함께 살지도 않는데 선생님을 그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너무 강해. 저는 늘 모시고 다니지만 그만큼 강하지 않거든요. 사람 관계가 사랑의 관계냐? 율법적인 관계냐? 법으로 맺어진 관계냐?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냐? 그걸 좀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야 변함이 없는 것이고, 그런 관계라야 오래도록 영원토록 지속 되는 건데, 법으로 맺어진 관계는 한 지붕아래 있고 한 솥밥을 먹더라도 몸만 같이 살지, 몸이 마음이 통하지 않고 영이 통하지를 않으니 그게 퍽 참 답답한 일이 아닌가? 공동체에 같이 산다면 참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 여야지, 법으로 맺어진 공동체라면 참 고단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자신을 반성해 봤습니다. 아까 어떤 분이 돈 가지고 나갔는데 사람보다 돈을 더 귀하게 생각했다고 그래서 굉장히 꾸중을 듣고 벌을 받았다고 하시는데, 법으로 맺어진 관계는 보이는 것에 물건이 손해나거나 돈이 없어지거나 그런데 관심을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지요.
사람 마음을 사랑해 주는 것보다도, 그러나 사랑의 관계라면 돈은 다시 생기는 것이고 물건은 다시 만들어 지는 것이고 사람이 더 귀하다로 사람을 더 귀하게 보는 그런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졌습니다. 참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없는 사람에게 시간을 주셔서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