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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 살아온 날들
88학번 백진주
대학 3년 시절, 우리과에 다니는 경원이가 부전공이라는 것이 있는데, 부전공으로 한가지쯤은 더 공부를 해야 취직도 잘되고, 사회에 나가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였다. 경원이는 컴퓨터, 나는 얼떨결에 일본어를 부전공으로 수강신청을 하고 말았다. 그당시 나의 일본어 실력은 고작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간단한 글을 읽을 정도의 수준이였다. 일문과 허석교수님의 첫수업, 온통 일본어만 나와있는 전공서적이었는데, 읽고 해석을 해오라는 숙제를 주셨다. 너무막막했다. 일문과 학생들은 실력이 좋을텐데, 무작정선택해서 이를 어쩌나.... 10시간을 꼬박해서 읽고 해석하는데 고작 겨우 5페이지였다. 나는 어떡하나... 일본어 부전공을 선택한 것을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그렇지만 이미 수강신청 정정기간이 끝나서 어쩔도리가 없었다.
그 당시 일어일문과 학생들은 2학년, 나는 3학년이었다. 일문과에 다니니까 역시 다 잘해왔겠지, 불안한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갔는데, 글쎄 나보다 더 많이 해석해온 학생들은 2-3명에 불과하였다. ‘일문과에 다니면 다 잘 하는줄 알았는데, 내가 몇몇 친구들보다는 더 잘하기도 하는구나’, 그래서 자신감이 생겼다.
일본고전문학이란 과목을 수강하면서, 겐지모노가다리라는 이야기와 고전 시에 강한 흥미와 함께 일본문학에 재미를 느끼게 했다. 일본 고전문법 등 상당히 어려웠지만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일문과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기숙사 도서관 터줏대감이란 별명을 얻으면서 일본문학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일본 고전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을 꿈꾸었으면, 4학년이 되어 대학원 준비로 외대 일문학과를 선택했다.
여름방학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무작정 외대 일문과 조교실을 향했다. 다행히 조교선생님께서 멀리 목포에서 왔다고 친절하게 시험에 관련된 정보를 주셨고, 방학이라 교수님은 나오지 않으셨다면서 시험보기 전에 교수님을 소개시켜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연락처를 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 대학원 진학이라는 목표가 있자, 가슴 뿌듯한 설레임으로 미래의 내모습을 상상하며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일본어능력시험 1급에 일문과 학생들보다도 맨먼저 당당히 합격했다. 학점이수도 청강까지 해서 일문과 과목을 38학점이나 이수했다. 아무튼 수업으로 빡빡한 대학 4년 시절을 보냈다. 대학원 진학상담으로 허석 교수님을 찾아갔다. 대학원을 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 교수를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만 자네는 일문과를 나오지 않았고, 부전공을 했기 때문에 어려운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편입을 하든지 아님 원예 전공을 살려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다. 꿈이 무너져 가면서 여러 가지로 많은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관광가이드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래서 내년 3월에 일본에 어학연수를 가려고 준비를 했다. 초등학교 졸업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하여 모교인 동운초등학교에 들러 서류를 준비하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여기서 내 운명은 바뀌게 한 예쁜 꽃집을 발견했다. 드라이플라워와 잘 정돈된 화원을 보면서 꽃의 아름다움이 처음으로 나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솔직히 원예육종학과를 다니면서도 일본어에만 오직 관심이 있어서 전공을 등한시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꽃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와! 이렇게 매일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꽃집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너무나도 예쁜 꽃집에 주인은, 바로 우리과 1년 선배인 87학번 김소희 선배님이 아닌가? 소희언니가 나를 알아보고 들어와서 차 한잔을 주시면서 꽃꽂이와 꽃집경영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에게 바로 이것이야 말로 내가 가야할 길, 운명인 것 같은 느낌으로 가슴벅차오르는 목표가 생겼다. 일본 어학연수수속을 받고 있었던 터라 일본에 가서 플라워디자인을 공부해야겠다고. 일본 가기전에 조금이라도 꽃을 알아야 할 것 같아 당장에 꽃꽂이 수업을 하기로 했다.
이런 나의 생각을 큰언니에게 이야기했다. 언니는 우리나라 꽃꽂이의 기본도 모르면서 일본에서 꽃을 공부한다면 경제적으로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좋지 못하다고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보는 것이 어떻냐는 것이다. 그래서 광주 충장로에서 꽃꽂이 연구실을 경영하시는 김형지 회장님을 소개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꽃꽂이를 어느 정도 습득한 후에 일본에 가도 늦지 않는다고, 연구실에 나와서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또한 꽃꽂이를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대학원을 권유하셨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꽃꽂이 박사가 되라고... 선생님을 따라 호텔장식, 가끔 날을 새어가면서 부케도 만들고, 꽃바구니 배달도 다녔다. 처음에는 꽃 배달 다니고, 호텔 장식후 꽃 쓰레기 치우는 것이 약간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마음을 달리먹기로 했다. 프로가 되기 위해선 가장 밑바닥부터, 기본이 잘 되있어야 한다고, 호텔 장식후 꽃 쓰레기 치우고 뒷정리하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과연 사회에 나가 더 한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마음을 먹자 부끄러운 것도 없고, 내일의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느낌으로 내일에 최선을 다하는 내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면서, 배우면서 꽃꽂이 사범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지금은 고려대에 계시는 박천호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하여 92학번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박천호 교수님 대학원 1호 제자가 된 것이였다. 교수님께서는 정말 성심성의껏 지도 해주셨고, 여러 가지 많은 좋은 말씀, 세심한 배려와 많은 사랑을 주셨다.
지금도 가끔씩 좋은 자료도 보내주시는데, 너무 감사드리고,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기회가 쉽지 않아서 항상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꽃꽂이 관련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과 함께 박사과정을 진학하고 싶었지만, 교수님께서는 결혼 후에 진학하기를 권하셨다. 아마 시집못가고 공부만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셨는가 보다.
졸업후 공예관련 문화센터에서 강사모집 광고를 보고, 서류를 제출했는데, 운 좋게 내가 된 것이다. 전문 강사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였다. 너무 기뻤다. 꽃꽂이, 드라이플라워, 조화 수업을 맡았다. 그리고 우리과에서 화훼장식학이란 과목이 설강이 되어 대학이란 교단에 서게 되었다. 첫날 모교 강단에 후배들 앞에 서게된 기쁨과 많은 학생들 앞에서 긴장한 가슴떨림은 지금도 생생하다. 학생들과 눈 마주치기도 얼마나 쑥쑤러웠던지.....
우리과 후배이자 대학원동기, 과 조교였던 장신해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면서 전남대 정문근처에 플라워샵을 오픈했다. 항상 꿈꿔오던 예쁜 가게, 핑크와 연두로 인테리어를 하고, 생화, 드라이플라워, 조화장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매출은 어느정도 괜찮았지만, 혼자서 한다는 것이 쉬운일만은 아니였다. 그러면서 IMF가 오고, 첫아이를 갖게 되어 안타깝지만 플라워샵을 그만두게 되었다.
꽃꽂이로 학위도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배웠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고 하여 강의자리 얻기가 쉽지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만큼 되지 않았다. 얼른 서른살이 넘어야지 어디가서 꽃꽂이 한다고 명함이라도 내밀텐데,...... 하면서,
얼마 살지 않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이때가 내인생에서는 가장 어려운때가 아니였나 싶다.
어떻하면 내 전공을 살려볼 기회가 생길려는지,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련지, 등등 갈등도 많이 하던 시절이였다. 대학원시절 졸업논문에 많은 도움을 주시고, 내가 꽃꽂이 활동하는데 좋은 조언을 해 주셨던 허북구 선생님께서 압화를 소개해 주셨다. 압화는 대구지역에서 많이 활성화 되어 있었는데, 마침 대구지역에서활동하시는 선생님께서 광주로 이사오셨다고 선생님을 소개해주셔서 압화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학원시절에 책속에 넣어 잎이나 꽃을 말려서 액자로 만들어 교수님들께 선물도 드렸었는데, 전문적으로 배울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수업을 받으면서 너무나 흥미롭고 꽃의 아름다움에 또다시 감탄했다. 꽃꽂이는 하는 사람은 너무 많아서 내가 빨리 자리 잡기에는 어려울 것 같고, 압화야 말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시작하지 않았을 때가 바로 기회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주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담당자가 화훼원예를 전공했다면서 그린인테리어, 생활원예 강의를 의뢰하셨다. 무작정 다 할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3강좌를 맡게 되고 백화점 전임강사로 채용이 되었다. 너무 기뻤지만 걱정이 앞섰다. 담당자에게는 화훼원예전공 석사라 그정도는 기본이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실상 강의를 해본적이 없어서 생활원예나 그린인테리어 강좌는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서울의 백화점에 유사 강좌를 찾아내어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강의 내용이나 강의 방식등 내가 수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압화는 그 당시 일본에서 건너오게 되어 압화관련 자재가 대부분이 일본 제품을 사용했고, 심지어는 압화꽃까지도 일본에서 수입을 해왔다. 그러므로 너무나 재료비가 비싸 배우기에도, 수업을 진행하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충분히 우리나라에서도 구할수 있는 것을 수입해서 쓰고, 가격도 비싸고, 이러한 부분을 개선해 보고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우리나라것으로 대처할수 있는 제품을 찾아냈다. 1999년 인터넷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할때 남편이 홈페이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압화 홈페이지를 선보인 것이다. 압화를 배우기 시작한분들이 압화에 대한 궁금한 점 등 전화가 한통, 두통 걸려오다보니 전국적으로 압화하시는 분들과 정보교환을 할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압화관련 재료나 꽃, 완제품을 취급하는 쇼핑몰을 오픈하게 되었다. 틈새시장을 공략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시작하고, 시대적인 흐름에 맞게 인터넷쇼핑몰을 오픈한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성공이란 단어는 아직은 걸맞지 않지만, 나름대로 자리는 잡은 것 같다. 항상 사업은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항상 새로운 생각, 노력하는 자세, 끊임없는 자기 개발이야 말로 어려운 경제속에 헤쳐나갈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압화 서적이 대부분이 일본서적이여서 학창시절에 배웠던 일본어도 큰도움이 되고 있고, 꽃꽂이 역시 압화디자인의 기본인 동시에 생활원예강좌, 그린인테리어, 실내조경 등에 많이 응용이 되고 있다. 배웠던 것들이 쓸모없는 것이 아닌 긴요하게 활용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시작한다고 하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고 하고 싶다. 지금 바로 어떻게 사용될수 없다하더라도 언제가는 꼭 삶에 크게, 작게라도 도움이 된다고....
나는 물흐르 듯 살고 싶다. 내가 가진 그릇의 크기 만큼 깨끗한 물로 채울수 있을만큼..... 대학시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난 항상 그때 그때 나름대로의 목표를 세우고, 꿈을 갖는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요행을 부리지 않고 ‘나는 할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사고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사고가 내인생에서 밑거름이 된 것 같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안주해 있었더라면, 나도 평범한 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난 항상 목표와 꿈이 있기에 내일을 향한 기대감으로 행복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기에 또 한번 행복하다.
88학번 박 미
가끔 아이들에게 제철음식 이야기를 하곤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엄마 저 귤 사 주세요”
“귤은 겨울이 제철이야 비싸고 제철도 아닌 걸 왜 먹으려고 하니?
수박, 참외 좋잖아? ”
하지만 입맛은 확실히 왕슈퍼(?)에 가면 속이 상한다.
겨울에 딸기를 보면 군침이 도는데, 딸기철이 되면 딸기가 먹기 싫어진다.
2월에 봄나물을 보면 군침이 도는 것도 마찬가지다.
제철보다 조금쯤 앞선 채소나 과일은 제철보다 값을 후하게 받는다.
농부들이 비료를 팍팍 써가며 철보다 이른 채소와 과일을 생산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제철 채소와 과일은 값이 너무 싸서 농부입장에서는 무척 속상했을 것이다.
백화점 같은 곳도 항상 계절을 선호한다.
요즘, 사람들 대부분이 철 이른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를 키울 때도 철 이른 것을 좋아하나 보다.
또래 보다 키가 크고 발달이 빠르면 부모들은 괜히 으쓱한 마음이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그런 것 같다.
둘째가 20개월 쯤에 병원에 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이 아이는 도대체 몇 개월인데 아직도 기저귀를 찬대? 우리손녀는 19개월에 기저귀 땠는데...” 하셨다.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옆구리를 꾹 찌르며 “우리 애도 외출할땐 기저귀 채웠어요..”하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옆집아이가 조금만 더 빨리 말하고, 더 빨리 걷고 더 글을 빨리 익혀도 엄마들은 무지무지 걱정을 한다.
말로는 에디슨과 아인슈타인의 어릴 적이 어쨌다는 둥 하면서도 이왕이면 남의 아이보다 빠르기를 바라게 된다. 그런데 나는 지금보다 옛날에 살아서 그런지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초등학교 시절에 1등 하던 녀석이 고등학교 때 까지 줄곧 1등 하는걸 보지 못했다.
철 이르게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채소는 제철에 나온 채소보다 여리다.
사람들의 입맛은 돋우지만 사람을 더욱 간사하게 만든다.
엽록소나 영양소가 부족하고 지나치게 많은 양의 거름과 농약에 시달렸기 때문에 맺힌 마음이 많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내가 아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양의 거름과 물을 줄까봐 경계한다.
나는 겨울에 팔아먹을 봄나물을 재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다.
들판에 피어난 꽃들은 일찍 꽃피웠다고 자랑하지도 않고 늦게 피웠다고 속상해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꽃이 아니라서 일찍 이루어야 인정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꽃보다도 아름답다고 사람들 자신이 말한다. 그러니까 일찍 이루든 늦게 이루든 아예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든 그게 다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말 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 다르듯 아이마다 꽃 피는 때가 다 달라야 우리는 사철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소중히 여기는 건 왜 이리 티가 나는지 무수한 갈등 속에 결국은 아이 이야기를 써 버린 어쩔수 없는 줌마양.
그러게 그렇게 뉴스 좀 보라 그랬지...
뉴스를 안 볼 거면 신문이라도 보라고 했지....
신문도 안 볼 거면 야후 시작할 때 사건 클릭이라도 하라 그랬지 쿵쿵!!
영상처럼 어렴풋이 지나가는 얼굴들 모두 반갑고 그립습니다.
20대엔 빨리 벗어나고 늙어서 잔잔한 호수가 되고 싶었는데 이젠 호수 아닌 척 하려 애 씁니다.(생뚱맞게) 누군가 오랫동안 소중히 여겼나 봅니다.
우리가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글쓰기 전부터 글 쓰고 난 한창까지 오랫동안 행복했답니다.
마 음 은 2 0 대
88학번 박수영
대학 학창시절 생각하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버려 까마득한 사실에 깜짝 놀랐다.
몸은 계란 한판이 훨씬 넘은 나이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20대 초반의 여대생이고픈 아줌마니까... 하지만 이젠 점점 이 “아줌마”란 호칭도 익숙해져서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기까지 하는 그런 날 보면 어쩔땐 웃음이 나온다.
생각해 보면 대학생활은 늘 호기심과 풋풋한 젊음으로 공부보단 놀고 먹는쪽으로 관심도 많았고 시간도 많이 할애해서 “오늘 하루도 재밌게 놀아야지”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점심식사는 교내식당 식권이 500원이고 우동 ,자장이 200원,250원이었는데 200원짜리 우동먹고 커피숍에서 1,500원~2,000원 하는 커피를 낭만으로 생각하며 음악에 심취하고 분위기에 파묻혀 즐겼으니 지금 아줌마의 사고로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바보같은 일이었던거 같다.
또 허허벌판인 캠퍼스 뒤로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멋진 승달산!!
승달산은 학교생활 중간중간 활력소를 줄 수 있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행을 할수있는 소풍터 같은 곳이었으며 동아리 선배들에게 부름을 받아(?) 동기들의 단합을 빌미로 이리둥굴 저리 둥굴거리며 얼차례를 받으며 산을 가까이에서 느낄수 있었으며 그때 바라본 하늘은 어찌나 맑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던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삼척동자도 알아주는 청계의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출석해서 학과사무실 라디에이터주변 조교 선생님의 휴식처인거 같은 곳에 옹기종기 묘여 앉아 명화(일면 화투라고함)감상에 무지한 친구들에게 점당 10원에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졸업논문 실험을 구실로 매일 실험실에 출근해서 실험보단 배불리 먹으면서 우리들만의 놀이(?)에 열중해 교수님 오시는 것도 모르고 들켜서 참 민망한적도 있었는데 그땐 교수님도 참 한심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그래도 실험을 잘 끝내고 논문을 잘 마쳐 통과해서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참 대견하다.
열심히 놀기도 했지만 공부를 소홀히 한것만도 아니어서 그다지 너무 많은 후회가 되지는 않지만 좀더 학업에 열중하고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투자했더라면 하는 바램이 없지 않아 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가버린 지금 그때 같이 웃고 부댜끼던 동기들과 선배, 후배들은 어찌 지내는지.... 만나는 친구는 몇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다른 이들의 소식을 접하기가 쉽지만은 않아서 늘 궁금하다.
현재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또 여우같은 마누라로서 역할에 열중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행복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이글을 쓰며 지나온 10여년 전의 잊고 지내왔던 생활을 다시 기억할 수 있고 정리하며 웃음 짓게 만든다.
꽃처럼 향기롭게...
89학번 박혜성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반가운 교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움보다는 죄송함이 먼저 앞섰다. 벌써 20주년이 됐다니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감회가 새로웠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게 되어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전공 분야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선배들이나 후배들을 보면 부러울 뿐 이였다. 1년 전,사랑하는 아이들과 캐나다 여행을 하면서 빅토리아 섬에 있는 “Butchart Garden"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세계의 정원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꽃과 나무로 꾸며진 환상적인 정원이었다. 거의 백년이 된 역사와함께 연중 내내 아름다움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정원을 보며 부러움과 함께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꽃에 관심이 있고 사랑하고 있었는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아이들도 초등학생이 되다보니 내가 관심이 있었던 플라워 디자인 분야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마침 후배인 최경화(마이스터 하우스)를 만나게 되어 플로리스트 예비반에서 매주 아름다운 꽃과 함께 들뜬 기분으로 수업을 받고 있다. 꽃은 우리의 마음이자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이다. 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생활의 윤기와 함께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다. 나는 꽃을 가꾸고 사랑하는 마음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한결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꽃을 예술로 승화시켜서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즐거움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전공
자들의 몫이 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훌륭한 교수님들의 가르침으로 많은 후배들이 발전과 발전이 거듭나기를 바란다. 나도 뒤늦게 플라워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며 언젠가는 노력이 결실을 맺을 날이 있을 것을 믿으며 꾸준히 배워 나갈 것이다.
88학번 차원준
1988년...
역사적인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그해 1988년
나는 목포대학교 신입생으로서 팔팔하다는 선배님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입학의 기쁨을 맛보았다.
노란 개나리가 개화를 서두르며 나의 대학생활의 서두를 함께 축복해주는 듯하였다,
공부로는 안되겠다 싶어 익히 선배들한테 과대표를 하면 C급 장학금 정도는 지급 받는 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허원영 지도 교수님과 새내기들과의 반미팅이 이루어지면서 조형철 85학번 복학 선배가 회의를 진행하면서 과대표를 선출하게 되었다.
나는 일방적인 단독출마로 당선되어 그토록 꿈꾸던 장학생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주변의 나를 향한 축제 분위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학과 학내 문제등으로 인한 대학 신입생으로서의 1년은 순탄치 못하고 투쟁만을 일삼아야 하는 나날의 연속 이었다.
매일처럼 전공 교양수업을 전폐하고 동기들을 선동하여 집회장에 나가야 했고 할머니집의 구수한 막걸리 대신리 최루 가스를 마시며 계란말이 대신에 눈과 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내용물들을 안주 삼아야 했다.
그럭저럭 흘러가버린 1학기!
이건 캠퍼스 잔디위에 그려가며 꿈꿔왔던 상상과는 너무 판이하게 대학생활이 전개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대로는 물러설수 없다는 나의 강한 집념과 철두 철미한 의지가 나의 마음을 요동치며 나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의 1학년 2학기는 새로운 부활을 예고하며 예상했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었다.
의류학과/전산통계와의 단체 미팅, 개별미팅 과대표로서 우리 1학년 동기들만 목포 MBC앞에 있는 다이애나 나이트크럽을 통째로 빌려 실시한 단합대회 영암군 삼호면의 무화과 축제 견학 등등 이루샐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만이 존재하며 내일이 기대되는 흥분된 나날의 연속 이었다.
공부만을 강요하는 학구파 동기들에게 1학년 과대표인 나는 표적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전공 교양수업을 불문하고 놀고 마시기위해 수업 빼먹기를 밥먹듯이 했던 나의 행동은 가히 교수님들과 학구파 동기들에게는 곱게 보일리 없었다.
88년 그화려했던 1년이 어떻게 흘러간지도 모르게 흘려보내 버렸지만 벌써 나의 당구 실력은 200을 치닷고 있었고 소주 두잔에 붉어지던 나의 얼굴은 소주 두병을 마셔도 동기 여학생들이 걱정해주고 같이 고민해주던 그시절!
의류학과 새내기 학생이 나의 순진 난만한 여자친구로 함께 해주던 그시절!
국화도 길러보고 밤새 목청껏 노래부르며 동기들과 함께 했던 청계골의 그때 그시절!
군대 가기전까지 정말 후회없는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1992년 군대생활을 남들보다 1년은 짧게 마치고 복학한 3학년 남들이 말하는 소위 지역 방위 출신 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1년이라는 세월이 나에게는 정말 소중했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역사의 한페이지 였던 것 같다.
3학년에 복학하여 그렇게 내집 문턱 여기듯 드나 들던 도림 / 큐닉스 도서관(소위 당구장)을 뒤로 한 채 이제 눈 앞에 펼쳐질 나의 삶을 위한 새로운 준비단계의 2년을 대학 3 4년의 시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일단 통학은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청계골에서 자취를 시작하여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내자신의 개발을 위해 몰두하기 시작하였고 주위 교수님들을 비롯한 동기 선배들은 나의 이런 변화된 모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 이었지만 나는 변해야 했고 나는 내삶을 개척해야 했으며 나는 내 방식대로의 완성된 삶을 설계해야 했다.
자취방 도서관 강의실로 이어지는 나의 생활은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항상 자신에 차있었고 공부를 하면서하루 하루 변화하며 세상에 도전장을 내미는 나의 용기는 내자신에게도 새로운 발견이었으며 뭐든지 해낼수 있다는 자신감과 꼭 해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잘 혼합되여 항상 긴장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도서관에서의 생활이 이제는 어색하지않게 여겨시던 시절 나는 한여학생을 알게 되었다. 같은과 90학번이었는데 같은 3학년을 다니게 되었다. 전공수업을 들으면서 서로를 알게 된것보다는 도서관에서의 트러짐없는 모습과 3학년이지만 티내지 않게 생활한것같은 자세가 나의 마음에 먼저 와닿은 것 같았다.
그 후배는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자기관리가 완벽했으며 교제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나의 전공과목에 대한 개인교사가 되 주었다. 내가 배고프면 나의 어머니가 되주었고 내가 괴로워하면 나의 술친구가 되어주었으며 그녀가 기뻐하면 나는 그녀의 친구 애인 동생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말로만 들었던 과커플이 되었고 묘하게도 우리 커플이 이루어진 뒤로 계속해서 몇커플이 탄생했었다.
그커플들역시 훗날 전부 결혼한걸로 안다.
그런데 역시 이성교제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지못했다. 그래서 나는 4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그녀와의 짧은 이별을 선언하고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한달 24만원에 숙식이 해결되어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거기서 진짜 나의 참오습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역시 공부로 세상살이를 승부할 놈들은 따로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적성을 최대한 살려 이 사회에 한몸던지기를 각오하고 숨막히는 서울 생활 1개월만에 나는 다시 귀향을 결심하게되었다.
그 후로 12년 오늘
나는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역리에서 10년째 고려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 졸업후 3년동안 학습지회사에 근무 한 경험을 밑바탕으로 1996년 학원사업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을 관리하고 영업도 해야하며 학부모와 상담을 통해 아이들의 실력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학원사업의 최대 목표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인데 난 아직도 88학번 대학신입생의 마음인 것 같고 20대 청춘인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주변 경쟁 학원들과의 경쟁에서도 충분히 이겨낼만한 자신감이 있다. 이것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로보며 하면 된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을 밑바탕으로 꾸준히 정진해 나가면 되리라 생각한다.
88학번의 새내기가 어느덧 40을 바라보고 있다.
나의 꿈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 꿈이 실현되는 그날까지 항상 밝은 미래를 그려보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시한번 해본다.
나의 직업 Florist
91학번 문현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졸업 후에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나한테는 어떤 직업이라는게주어질까..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대학 4학년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 나는 남들과 같이 어떤 하나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하나의 직업을 갖고 난 후 또 다른 세계가 나의 말문을 막히게 하면서 그때부터 나의 직업세계는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 것 같다.
누군가가 나의 직업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저의 직업은 Florist 입니다. Florist라는 직업은 여러가지 식물을 이용하여 실내.외 공간을 미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 이 직업을 남들앞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말하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이 호칭이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한지는 얼마 안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거라고 생각이 든다.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에 대해서 일반사람들이 알기 시작한게 최근들어서이다.
남들은 내가 어릴적부터 플로리스트가 되기 위해서 원예학과를 진학했다고 언급들을 하지만 사실 내가 플로리스트가 되고자 한 것은 원예학과를 진학하고 난 후이다.
처음에 적응하지 못했던 학과생활에 기숙사에서 같이 지냈던 과선배언니의 권유로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1학년때부터 일주일에 한번 또는 2번 학원을 다니는게 일주일의 낙이 되어가면서 과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동기들과 친해지기도 쉬워졌고 과선배님들과 알게 되었다.
과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모든 원예과사람들이 나한테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가끔식 이렇게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대학 때 농장에서 종강파티, 개강파티, 동아리전시회, 원육인의 밤 등 이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즐거웠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주변에는 우리가 수업시간에 재배했던 채소들이며, 과수들….곳곳에 피어있는 꽃들…..
자연이라는 존재속에서 내면적으로 식물의 소중함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의 직업을 갖게 된 것 같다.
처음 내가 꽃을 배우기 시작할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소개를 하면서 "저는 Florist입니다 " 라고 말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리고 바로 질문을 한다." Florist는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라고..질문을 받고 나면 우리는 "Florist는........ 합니다" 라고 설명을 해 준다. 답변을 듣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꽃집에서 일하시는 분이시군요" 라고 한 마디로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그걸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을 하십니까" 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런 말을 몇 번 듣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직업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게 된다. 마음속으로는 " 단순히 꽃만 파는 것은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있게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꽃만 파는 직업같지는 않은데 내가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며 우리 선생님한테 배우는 내용만 보더라도 단순히 꽃만 팔기만을 위한 것은 아닌데, 그걸 느끼면서도 내가 왜 남한테 말을 하지 못했는지….왜 내 직업에 대해서 떳떳하지 못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으면서도 내가 초기에 갖었던 생각들에 대해서 나한테 상담을 하러 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지냈던 것처럼 나도 그랬으니까. 이 일을 처음 시작하면서 누군가가 나한테 직업에 대한 질문을 물어보면 사실 창피해서 말하고 싶지가 않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내 직업이 대단한 직업임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랐고, 방법도 모르고 그냥 하루하루 새로운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가며 마음속으로는 항상 불안하게 순간순간 보냈던 기억들…..
내가 만드는 작품들은 너무나 멋있고 내가 만든 작품들을 여러 사람들한테 선물할때마다 항상 너무나 색다르고 특이하다는 말을 들어가며 칭찬을 받아오기는 했는데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항상 허전함과 불안함이 자리잡고 있었다.한 번 은 그런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대학원까지 다니시면서 왜 꽃집에서 일하세요? " 라는 .
" 원예학과 나와서 할게 없는가봐…." 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아마도 짐작할거라고 생각한다."꽃집에서 일하면 그냥 꽃만 꽂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뭐 배울게 있나요 ?" 라는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학원에서 꽃을 배우는 학생조차도 내가 왜 이런 것을 배워야 하며 이런 것을 어디에 사용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정확한 해답도 모르는채 수업을 받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우리나라 사람들은 꽃집하면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단순한 취미생활, 나이 드신 분들이 하는 일 등등.....아직도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직업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한 번은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왜 내가 나의 직업에 대해서 그렇게 자신없어하는지에 대해서…
왜 남들앞에서 그렇게 떳떳하지 못했던 것일까?
우선은 나 자신한테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 때 일을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
대학때 꽃을 배우기 시작한 시기에 난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그리고 사실 난 내 직업에 대한 의미조차로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게다가 정말로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누군가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사람들이 약을 살려면 약국을 간다. 꽃을 살려면 꽃집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유명한 약국이라 할지라도 꽃은 팔지 않는다."
이 말이 어쩌면 나 자신한테 자심감과 내 직업에 대한 확신을 주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난 지금은 우리 학생들한테 이 말을 해 주고는 한다. 지금 현재 Florist과정을 배우는 학생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들의 직업을 올바르게 알리는 일이 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꽃꽂이를 배우러 다닌다고 하면 " 너 그렇게 할 일이 없니? " 아니면 " 너 벌써 신부 수업 받으러 다니니?" 라는 말을 한다. 내가 내 직업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이 일을 시작한지 딱 9년째 되던 해였다. 9년이라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기다리냐..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9년이라는 기간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다. 이 시간은 내 자신을 키워나가는 시간인 것이다. 정확히는 2000년 6월 24일부터… 이날은 내가 독일 Floristmeister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은 날이다. 내 생애 있어서 너무나 영광스럽고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난 나 혼자만의 힘으로 독일 Floristmeister시험에 합격했다.
내가 마이스터 자격증을 취득한 부분에 대해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셨다.
물론 마이스터자격증은 나한테는 너무나 값진 자격증이었다.
한 번은 마이스터 시험을 일주일 남겨두고 나의 선생님께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사실 너무 힘들어서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모든 이론시험과 구두시험에 통과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만약 실기시험만 통과하면 난 독일Floristmeisterin 이 되는 것이었다.그래서 전화를 했었다. 선생님도 나의 생각을 아셨는지 바로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힘들면 말하라고, 하시면서 독일로 오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거였다. 근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못하고 그냥 전화를 끊었다. 이 시험을 합격하든 떨어지든 나 혼자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난 지금까지 선생님이 안계시면 작품을 하는데 항상 두려움부터 가졌었다. 이번만큼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난 해냈다.이 Floristmeister자격증은 나한테 나의 직업을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는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한테도 난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항상 한다." 무슨 일이든지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가 없다. "꽃을 배우는 사람의 자세도 중요하다.
자주 주변에서 듣는 말들이 있다. 사람은 사람을 속여도 식물과 동물은 사람을 속이지 못한다는…..
식물은 어떻게 보면 사람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듯이 식물을 대하면 식물은 사람한테 항상 받은 것만큼 갚아줍니다.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은 식물과 같은 마음속에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직업니다.학생들은 항상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을 남들한테 보이고 싶어한다." 저는 꼭 호텔에 취직하고 싶어요"
" 저는 백화점에 매니져로 일하고 싶어요"
" 저 빨리 모든 과정을 마치고 싶어요"
라는 말을 학생들이 많다.이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은 결코 화려한 직업은 아니다.또한 남들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직업만도 아니다.어느 위치에 서서 누군가한테 뭔가를 줄 수 있는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남들한테 아름다움을 선사할 수는 있다.기쁨을 선사할 수 있고, 희망을 선사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은 확실하다."난 이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무슨 일이든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갖든다면 그 직업이 어떤 직업이든지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갖지 못했던 나의 직업에 대한 자신감은 그동안 그림자처럼 지내던 나의 생활을 표면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나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기까지는 10 여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우리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은 학벌이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며, 겉의 화려함이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며, 돈이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플로리스트 라는 직업은 내가 투자한 노력과 시간 그리고 끈기…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나의 자신감이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나의 표현
"내 직업은 Florist 입니다.
월출산을 다녀와서
애들 고모네가 산에간다는 말에 모처럼 큰 맘 먹고 따라 나섰다.
애들 다 떼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서서인지 웬지 설레기도 하고 조금은 긴장도 되었다.
도착지는 월출산!
생각해 보니 월출산은 대학1학년 동아리 MT때 와 보고 처음이다.
월출산 자락 끝 어딘가에서선배님들과 뒹굴며 같이 MT도 받고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도란도란 얘기하는 가운데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난 다음날의 산행은 선,후배들과 더 하나된 모습이랄까….
그때 산행을 하면서 애들 아빠와 사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추억을 더듬으며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도 상쾌하고 다시금 그 옛날도 돌아간 듯한 느낌도 좋았다. 하지만 그 좋은 느낌도 잠시.
아주 조금 올라왔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고, 다리도 아프고, 땀은 비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산에 오르는 건 남들 하는 것 만큼 한다고 나름대로 자신 했었건만조금씩 올라갈수록 내 운동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들다는 생각 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오로지 길만 따라 오르기만 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간간히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살것 같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의 "수고하십니다" 라는 말에 다시 힘을 얻어 한발 한발 박차를 가하고,
드디어 정상!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도 잠깐, 구름이 많이 끼어 정상에서 바라본 그 멋진 경관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 한걸음 한걸음 산을 내려갔다.
내리막 길은 좀 쉬운 길을 선택해서 일까 산을 오르는 다른 일행들한테도 시선이 돌려지기도 하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안녕하십니까?" 하고 서로 말을 주고 받으니 기분까지 좋아졌다.
누군가가 산행을 우리네 인생과 비슷하다고 비유했듯이 나 또한 그 말에 동감 한다.
보통 수명을 70까지 본다고 해도 난 아직 반도 못살고 이런 얘기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한없이 올라가다가도 내려가기도 하고 또 평지가 나오기도 해서 다리가 편하기도 하듯이 사는 게 한없이 힘들다가도 일이 잘 풀릴때가 있고 정상에 오르기까지 너무 힘들고 지치기까지 하지만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듯이 사는 게 더없이 힘들고 지칠 때 누군가의 격려에 또 다시 힘을 얻고 힘들게 정상에 섰을 때 그 뿌듯함…
그리고 다시 돌아서 내려올땐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이 남고 힘들고 멀게만 느껴지던 길이 내려갈 땐 가깝게 느껴진다. 또한 오로지 정상만 생각하고 올라가지만 내려갈 땐 조금씩 여유가 생겨 주변의 경관도한번 보게 되고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도 귀 기울이게 되듯이 항상 앞만 보고 살다가 나이가들면 주변도 돌아보게 되고자기 자신도 한번 바라보게되는 것 같다.
내 인생의 정상은 어디쯤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산을 다 내려왔을 때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한 기분을 내 인생 마지막쯤에 느껴보리라.
한발 한발 내딛는 산행처럼 항상 내 삶에 충실하리라.
응용생명과학부 원예과학전공 20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91학번 김 창 미
“응용생명과학부 원예과학전공” 나에겐 참 생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대학을 다니는 시절에는 자연과학대학 원예육종학과였다.
왠지 ‘응용생명과학부 원예과학전공’이라는 말이 낯설기 그지없다. 후배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지만 이하 ‘응용생명과학부 원예과학전공’을 원예육종학과라 칭하겠다.
벌써 내가 원예육종학과를 졸업한지도 10년이나 되었다.
부산과 목포를 오가며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던 것 같다. 특히 이맘때 쯤에 열렸던 대학 축제 대동제를 비롯하여 국화연구회의 국화 전시회 및 학교 뒤 농장에서 펼쳐졌던 다양한 행사들.
지금도 입안에서 군침이 맴돈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벌써 내 나이도 서른 중반이니 기억이 가물가물...)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남자선배님들이 바베큐를 돌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맛있었던 돼지 바베큐를 먹어본 적이 없다. 또 그때는 젊은 혈기 때문이었을까? 체질상 술은 잘 못하지만 그래도 소주 1병은 마셨던 것 같다. 아마 객기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1잔이면 경상도 말로 ‘디비 잔다’.
지금도 그런 행사들이 있으면 달려가고 싶지만 직장에 매여있는 나로서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거실 책장 한쪽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전공서적을 볼 때마다 내가 학교를 다니긴 한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출판 관련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의 전공 서적은 남편의 것이 되어버렸다. 조경학과를 나온 남편은 필드에서 직접 뛰는 일을 하고 있어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수목원이나 공원을 갈라치면 항상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
“엄마. 이것은 무슨 꽃이예요? 이건 무슨 나무인데?”, “어? 뭐라고? 음. 뭐드라..”
그러면 남편은 강의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열심히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현실이 그렇다. “쯧쯧, 너 원예육종학과 나온 거 맞아?”
그러면 난 마지못해 핑계를 댄다. “당신은 대학 때 공부를 잘했을지 모르지만 난 못했다.”
어느 누구든 나와 같은 마음을 갖겠지만 만약 지금 다시 대학생활을 하라면 훨씬 더 재미있고 보람있는 대학생활을 보낼 자신이 있을텐데 하면서 말이다.
사실 4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길지 않다.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낸 시간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그래서 후회스러운 시간들도 많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나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 신입생 때 정해놓은 목표를 아마도 실현시켰을지도 모르겠다.(박용서 교수님께서 참 많이 사랑해 주셨는데....) 졸업 후 한번도 연락을 드리지 못했던 교수님들께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아마도 교수님들의 사랑과 정열이 없었더라면 원예육종학과 20번째 생일을 맞이할 수 없었을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학과 홈페이를 들어갔다가 교수님들의 사진을 보니 마음 한켠이 아립니다. 교수님들 항상 건강하시구요.
또한 원예육종학과를 사랑하는 선배님들과 동기들, 그리고 후배님들께 작지만 이렇게 글로 인사드립니다.
부산에서 91학번 김창미 드림..스무살의 설레임
스무살 서른살
92학번 차 수 영
가을 볕이 그 빛깔을 더해 갈 즈음 학교에서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청계땅을 떠난 지 십여년이 다 되어 가는데 학과 창설 20주년 기념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맘때 내 스무살을 보냈던 그 곳에선 국화꽃향기가 더욱 진해져가고 학교축제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어느새 30대에 접어들고서야 잠시 주춤거리며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마음은 그때의 스무살과 하나도 다른게 없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느새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이제막 청계땅을 밟고 선 나에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것 같다.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과 그에 대한 책임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과 상처들을 보듬어 안은 채 4년의 세월을 보냈다. 한 해 한 해가 더해갈 수록 최선을 다해 생활했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움과 후회로 가득하기만한 시절인 것 같다. 그래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벅찬 설레임은 숨길 수가 없다.
스무살이 되어 부모님의 품을 떠나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면서 조금씩 성장하게 되는 나를 보게 되었다. 가슴아픈 첫사랑도 경험하게 되고 선후배들의 사랑도 받게 되면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만큼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었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엔 어느새 아련한 그리움으로 내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다.그시절의 경험들이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지금의 내모습이 있듯이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면 어느덧 부쩍 커버린 내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시절의 설레임들을 함께 공유했던 친구나 선후배들도 모두들 자신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가다가 이렇게 국화꽃이 그향기를 한껏 머금고 승달산의 단풍이 조금씩 그 옷을 갈아입을 때즈음엔 한번쯤 뒤를 돌아보며 잔잔한 미소 그 때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 학과는 여느 학과와 다르게 농장실습이 있는날엔 작업복차림에 수확의 기쁨도 맛보게 되고 작지만 소중한 경험들을 해가며 흙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느끼기도 했다.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며 선후배들과 노래도 하고 세상고민도 얘기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92학번 친구들에게는 가슴아픈 일이지만 우리들의 벗인 한 학우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일도 겪게 되었다. 아직도 그 때 사진첩엔 그친구가 고운 미소로 자리하고 있음은 우리모두가 한때 한마음으로 보냈을 그 시절이 아직도 작은 멍울이 되어 남아있은 것이 아닌지!
이제는 마음 한켠에 그 시절을 묻어두고 열심히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들의 남겨진 몫이 아닌가 싶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우리들의 남은 내일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또 다시 그 푸르른 스무살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순 없지만 그 시절의 추억과 설레임이 있기에 지금의 생활을 잘 버텨내는 것이 아닐까. 모두들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 우리의 내일을 그리 어둡지마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고 우리들의 모습을 닮은 아이들이 또 스무살의 우리을 닮아가듯 이세상은 그렇게 채워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0년동안 우리학과의 큰 버팀목이 되어주신 교수님들과 함께 생활했던 많은 선후배들 그리고 새로이 식구가 될 미래의 후배님들이 앞으로도 끈끈한 애정과 사랑으로 함께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 이글을 맺어 본다. 아자! 아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