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 수필가 [隨筆家] 작품 조명
따뜻한 눈길 착한 사람
評 김광한
등 돌린 부부
김 순 (수필가)
땅거미가 질 무렵, 공원 벤치에는 소주잔을 앞에 놓고 앉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남녀는 온몸으로 수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이기에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그토록 진지한 것일까? 그들의 눈빛은 사뭇 이글거렸다. 비록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지만, 그들은 한 마디의 언어를 나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농아 부부였다. 사랑이 담긴 그 눈빛, 서로 따뜻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그 몸놀림이 참으로 놀라웠다.
나는 10여 년 전 5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릿한 부부애도 보았다. 이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부부였다. 거리를 거닐 때면 귀를 가까이 기울여가며 대화를 나눴다. 옆에서 보기에 조금 안쓰럽기는 했지만, 미소 어린 얼굴엔 평화로움이 있었다. 이 시각장애인의 모습은 내가 여의도 성당 앞 공원을 거닐 때에 가끔 보았다. 그 날도 공원 앞을 더듬거리며 걸어가기에 우연히 이들의 대화를 엿 듣게 되었다. 키가 큰 남편은 눈을 꼭 감은 시각 장애인이다. 그 아내는 순박한 시골 아낙네의 모습으로 자주 눈을 깜박거렸다. 그 날도 그 아내는 앞에서 걸어가고, 뒤에는 남편이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어름어름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 아내의 낯은 사랑이 가득한 밝은 얼굴이었다. 그 날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여보, 이따가 내가 맛있는 다리 하나 뜯어먹게 해줄게”라고 말했다. 뒤를 따르던 남편은 굵직한 목소리로 “어, 알았어.”하고 화답했다. 그 무슨 다리를 뜯어먹게 해준다는 것인지. 나는 한참동안 궁금했지만 바로 그날이 삼복(三伏)날임을 알았다. 그녀의 손에 쥔 검은 비닐봉지엔 토종닭 한 마리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닭을 삶아 다리 하나를 남편의 손에 쥐어준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나는 다정히 걸어가는 이 농아부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왜 하느님은 사람을 디자인 할 때 말(言語)을 하게 해 주셨을까?” 하고 한참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신(神)이 사람에게 차라리 언어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고 간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배신이나 거짓도 없고 등 돌린 부부도 별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부부들의 결혼생활의 만족도 조사는 참으로 놀라웠다. 1000명 중 600명은 등을 돌린 채, 그렁저렁 살고 있단다. 나머지 300명은 이미 이혼을 했고, 100명만이 정상적인 부부로 살아간다고 했다. 아마도 그렁저렁 살아가는 부부 중에는 한 방에서 동침을 하지 않고, 남편은 거실에서, 아내는 건넌방에서, 따로따로 잠을 자는 부부가 많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가 30년을 함께 살아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남남”이란 말은 괜한 말이 아닌 듯싶다. 오히려 등 돌린 부부가 많다는 것은 다른 동물에 비해서 아이큐가 높아서일까? 아니면 자존심 때문일까? 아이큐가 높은 사람 중에는 나쁜 쪽으로 머리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이것 또한 놀랍다. 이런 사람(사기꾼)들의 아이큐는 보통이 넘는다고 한다. 사람의 아이큐가 두 자리라고 하면 그런 나쁜 생각은 하지 못 할 것이 아닌가. 차라리 언어를 주시지 않았다면 부부싸움을 해도 ‘소가 닭 보듯이’ 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별스럽지 않은 부부싸움으로 한 지붕 밑에서 등을 돌리고 생활하는 것이 그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부부가 남남처럼 산다는 것은 숨이 콱콱 막힐 일이다. 인간의 삶이란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 관계이다. 서로 밀어주고 도우며 사는 것이 부부의 삶이다. 대화로서 풀지 못할 게 그 어디 있겠는가? 등을 돌리고 산다는 것은 점점 마음에 벽이 두꺼워지고, 가슴에 화가 들어앉아 병이 생기게 되는 것이리라. 아내는 남편의 밥상이나 챙겨주고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남편은 그 밥이나 먹고 일어서는 삭막한 식탁. 남편은 거실에서 잠자고 아내는 건넌방에서 시린 가슴 아우르며 중년의 밤을 꼬박 새운다면, 그것은 이별을 앞에 둔 부부의 연극처럼 생각된다. 한 지붕 밑에서 그저 먹고 자고만 사는 장(場)이라면, 그 것은 피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봄에도 젊은 부부에 비해서 황혼이혼이 늘었다고 했다.” 참고 사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지만,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대화로서 풀지 못할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실수하면 용서하고, 잘못하면 고쳐가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의 모습이 아닐까? 황혼의 부부라면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등이라도 긁어 주면서 남은여생을 보내는 것이 아름다운 황혼의 모습일 성싶다.
작품평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눈길
김광한
(소설가 문학평론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글이라면, 과연 좋은 글이라면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좋은 생각을 전달하고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신선하고 맑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닐까. 글의 종류 역시 다양하고 다양한 글을 전달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여러가지 기능을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글을 통해서 삶의 지혜와 감동, 그리고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분야)에 대한 어떤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더 한층 윤택하게 하는 목적이 있어야한다. 김순 수필가의 모든 글에서는 삶속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내용들이 알곡처럼 들어있어서 우리의 눈을 다른데 돌릴 겨를을 결코 주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지나온 삶이 한치의 허트름이 없이 차분한 가운데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바깥을 향해 사랑의 팻말이 달린 손수건을 흔드는 것과 같은 자애로움과 애정이 가득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첫 인상에서 처럼 화를 내도 밉지 않을 만큼 고운 얼굴에 상대를 대하는 어질고 애절한 눈망울 속에 담긴 화두는 작가가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는지 금방이라도 알아 차릴수가 있다.그가 쓰는 글 역시 그렇다.
"땅거미가 질 무렵, 공원 벤치에는 소주잔을 앞에 놓고 앉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남녀는 온몸으로 수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이기에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그토록 진지한 것일까? 그들의 눈빛은 사뭇 이글거렸다. 비록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지만, 그들은 한 마디의 언어를 나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농아 부부였다. 사랑이 담긴 그 눈빛, 서로 따뜻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그 몸놀림이 참으로 놀라웠다."
<본문 가운데의 일절>
작가는 우선 농아(聾啞)인지 알기전부터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내고 있다. 땅거미가 질 무렵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남녀라면, 그것도 소주잔을 앞에 놓고 있는 남녀라면 사회적 신분상 그렇게 격이 높은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아하니 수화(手話)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서 농아란 것을 알게 됐고, 말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온몸으로, 생각을 표현하는데 작가는 깊은 관심을 담아보는 것이다.그 관심은 곧 애정으로 연결이 되고 성한 사람들과 다른 그들만의 깊은 사랑이 배어있다는데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작가는 그 모습에서 순간적으로 그들만의 범접치 못할 사랑의 언어를 발췌해낸 것이다.
육신이 건강한 부부라도 정신이 망가져서 분심(分心)을 갖고 있는 많은 부부들보다 비록 육신은 다소 미치지 못해도 정신, 애정과 사랑, 나눔, 그리고 협동적인 면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 작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애정이 결핍된 많은 부부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붓을 들었을 것이란 것을 알게될 것이다.
두번째는 맹인 부부이다. 맹인이란 상대를 확인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몸을 부딪치거나 언어로서 상대의 존재를 깨닫게 해야한다. 비록 부부이지만 눈이 멀어서 상대의 얼굴도 모른체 평생을 보내야하는 육신상의 괴로움과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 그리고 그로 인한 삶의 어려움 등등 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부부이지만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상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정직한 삶, 그리고 몸은 둘이지만 정신은 하나라는 깊은 애정과 관심, 동정 등이 없으면 그들의 삶이란 하잘 것없이 끝나는 포말과 같은 것이리라.
작가는 50대 맹인 부부가 아내가 앞장을 서고 남편이 두 손을 아내의 어깨위에 올려놓고 가는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음을 알리고 또 그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전달이다.비록 캄캄한 육신의 세상이지만 그 캄캄함과 답답함을 이어주는 것은 사랑의 강물이다. 강물은 흘러 흘러 돌고 돌아서 그들을 감싸고 마침내 하나가 되게 한 것이다.
수필가로서 할 수 있는, 마치 의무와 같은 전달을 함으로서 글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맹인 부부의 밝은 얼굴, 그리고 통닭 한마리를 갖고 가면서 나누는 대화,비록 물질의 질과 양과 가격은 보잘 것 없지만 그들이 갖고 잇는 사랑의 함량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를 부각시켜서 오늘의 각박하고 돈의 많고 적음에 행복의 양이 결정되는 이 시대의 삶의 허구(虛構)를 타일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부부, 즉 애정이 결핍이 되고 타성에 젖어 행복의 소중함을 망각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많은 부부들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등을 돌리고 잠을 자는 부부,
각방을 쓰고 곁에 오는 것 조차 귀찮아 하면서 오직 법률적으로 부부이고 아이들의 부모라는 연결 끈만 갖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작가는 오히려 절망을 하는 것이다. 등을 돌리고 잠을 자는 부부, 공간만 공유하는 것 이외에 생각을 달리하고 곁에 오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부부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통계로 보았을 때 우리들의 삶은 과연 건강한 것인가를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동상이몽(同牀異夢)이란 말이 있듯이 함께 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남남보다 못한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살아가는 많은 부부들, 그들의 가슴으로 흐르는 것은 차디찬, 추운 북극의 공기가 아닌가. 작가는 이들 부부보다 비록 육신의 허물은 있어도 마음으로부터 오가는 사랑의 기류가 얼마나 더 값진 것인가를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남편이란 사람은 돈이나 벌어다 주고 아내는 밥이나 해주고 아이나 낳아주고 하는 의무같은 삶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작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의 화두(話頭)를 던져보는 것이다. 짜임이 오밀조밀한 겹실같은 문체와 묵은 간장 맛이 나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발굴 같은 것이 글속에 짙게 배어 있어서 읽는 이의 머리를 끄덕이게 해주는 좋은 수필이 아닐 수 없다.
수필가: 김 순
약력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과 비평작가회 회원
한국육필문인협회 회원
동작문인협회 회원
저서: 수필집 <수평선 위에 뜬 별들, 동막골 아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