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 / 이남옥
코로나 시대를 생각하면 비대면으로 수업하던 일이 색다르게 떠오를 것이다. 2020년 2월, 우리나라에도 코로나 감염증 환자가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질병의 성격이나 원인을 알 수 없어 어느 지역 이름을 따서 우한 바이러스라 했다. 그러다 특정한 것에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코로나19’로 부르게 되었다. 전염이 잘 되어 모였다 하면 급속도로 번지는 바람에 일상적인 생활이 멈춰 버리고 모든 시스템이 코로나 예방에 맞춰 돌아갔다. 그러느라 학교생활도 많이 달라졌다. 3월 개학은 4월 중순 무렵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동안 학교는 학생들 없이 운영되었다.
선지자들은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다만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했다. 누가 방아쇠를 당겨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 밖은 물론이고 지방과 지방 사이를 오가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긴급 돌봄이 필요한 몇몇을 제외하면 교정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사라질 때까지 학생을 볼 수가 없었다. 대신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것을 구축하는 일로 숨이 가쁘게 돌아갔다. 아이들의 전자 기기를 조사해서 집으로 교과서와 태블릿피시를 배달하고 줌에 가입하고 이용하는 법, 비대면 수업 방법 등을 연구했다. 일주일이 지나서 드디어 줌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날 수업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었다. 잠옷이나 내복을 입고 이불을 뒤집어쓴 아이도 있고, 장난감을 앞에 두고 수시로 흔들어 대거나 화면에 콧구멍을 갖다 대며 장난을 치고, 공부 시간 중에 간식을 먹는 아이도 있었다. 모두가 처음이라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다음 날은 규칙을 정했다. 효율적인 인터넷 사용 방법을 익히고 나서 등교할 때처럼 옷을 단정히 입고 공부 시간에 예절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새로운 시스템에 불안하고 두려웠던 마음이 사라졌다. 정해진 일과에 익숙해지고 별다른 변화 없이 평화롭게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생활지도를 하지 않으니 신경 쓸 일도 별로 없고 업무도 거의 할 게 없었다. 학부모는 물론 외부인 출입 금지가 되다 보니 민원도 사라져서 오히려 우리 학교는 코로나 덕에 그야말로 요순시대가 되었다. 사실 이전에는 학교 규모는 제일 작은데 학교에서 들어 줄 수 없는 요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교실 시시티브이(CCTV)를 다는 것부터, 학교운영위원회 운영까지 자꾸자꾸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판이었는데 학교로서는 야누스의 뒷머리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간섭을 받지 않은 채 교육을 하는 일은 소신에 날개를 다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은 더없이 즐거웠다. 각자 집에서 반찬을 준비해 와서 나눠 먹었는데 매일 생일날 같았다. 두 사람씩 당번을 정해 밥과 국을 준비했고 설거지까지 했다. 가지고 온 반찬을 탁자에 줄줄이 늘어놓으면 각자 접시에 덜어 먹었다. 메뉴가 겹치지 않은 게 신기했다. 생전 처음 장떡을 맛보았고 새우장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시어머니께서 매운 고춧가루를 잘못 쓴 바람에 먹지 못하고 묵혀 두었던 배추김치도 잘 나갔다. 평생 맛보지 못할 동료 교사들의 가정 음식이 보물처럼 입가에 닿았다. 하루 내내 숨죽이듯 고요한 교실에 있다가 점심때는 얼굴에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마주 볼 수 있었다. 서로 만날 수 없어 그리운 마음을 발코니에서 아리아로 부르던 이탈리아 서민의 정서가 이런 것이었을까. 몇 개의 공간에서 삼삼오오 나뉘어서 식사했지만 배부른 만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이 충만하게 만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운동장을 걸었다. 학생들이 있었다면 잡무 처리하느라 누리지 못했을 여유였다. 연하디연한 새잎이 돋아나고 작디작은 들꽃이 피어나는 것을 들여다보며 벚꽃이 휘날리는 교정에서 황사나 미세먼지 없이 맑고 화창한 봄날을 만끽할 수 있었다. 교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맛보는 한낮의 고요한 운동장과 쏟아지는 햇살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 그 자체였다. 사람 모이는 곳엔 가지 말라는 교육청의 엄명도 있었지만 텅 빈 극장에서 두서너 명 앉아 영화를 보는 맛은 더욱 쏠쏠했다. <작은 아씨들>, <조조 래빗> 등은 늘 그것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그해 봄, 코로나로 누군가는 괴롭고 힘든 처지에 갇히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다시 누리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첫댓글 비대면 수업도 힘이 드셨겠지만 꿈같은 안식년(?)을 보내셨군요.
그 기간을 그렇게 알차게 보내다니. 우리는 각자 따로 교실에서 주민 눈치보느라 더 힘들었는데요.
우리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아름다워서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기분입니다.
글이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