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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원래의 근거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3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로 가장 정통적인 설로 요하문명설
둘째로 만주퉁구스 우랄알타이설
세째로 셈족설
다음은 세족설의 주장인데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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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중동에서 극동으로의 이동 정착설 근거들



1. 언어학적 증거
민족의 기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로 언어이다. 왜냐하면 민족(民族)이라는 것은 어족(語族)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알타이어에 속하고, 알타이어라고 하는 것은 터키 아라랏산 근처가 발원지이다. 또 현재 알타이어에 속하는 말은 터키어, 몽골어, 만주어, 그리고 우리 한국어 등이다.

알타이어의 발원지인 터키의 아라랏산
이러한 언어들에는 유사한 말이 대단히 많다. 한 예로 중앙아시아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등 '----스탄(stan)' 이라는 나라가 대단히 많다. 이 스탄이라는 뜻이 사전에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영어의 'Land' 곧 '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민족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땅이라는 글자를 'ㅅ당' 으로 표현을 해왔다. 발음대로 읽으면 '스땅' 이다. 그러다 이제 쌍 디귿으로 통일해서 '땅'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증거가 있다.

알타이어족 분포도
이러한 언어의 연구는 한국인의 조상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했고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시베리아와 몽골을 지나 만주 땅에 정착했으며, 그 후 한반도, 일본까지 뻗어갔다고 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2. 빗살무늬 토기의 분포
20세기 초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 암사동에서 우연히 빗물에 씻겨나간 빗살무늬토기(일명 즐문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우리나라의 예순 곳 넘는 데서 이런 종류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같은 시기에 북유럽의 핀란드와 스웨덴, 북부 독일, 폴란드 등지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토기가 발굴되어 핀란드의 고고학자 아일리오는 그것에 독일어 ‘캄케라믹’(kammkeramik: 빗살무늬토기)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 뒤 북방 유럽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동서쪽 광활한 지역에서도 그러한 토기가 속속 발굴됨으로써 ‘캄케라믹’은 빗살무늬토기 일반에 대한 학명으로 굳어졌다. 이 토기는 주로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위 55° 이북 지역에 하나의 문화대를 이루고 있어 일명 ‘환북극(環北極) 문화’라고도 한다.
빗살무늬토기는 대체로 기원전 4천년부터 1천년 사이에 주로 산림이 우거진 강하천 주변에서
수렵과 어업을 주된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 분포지를 살펴보면, 북유럽의 핀란드로부터 출발하여 서북 러시아의 오카-볼가강 상류 지방을 거쳐 우랄 산맥을 넘은 다음 중부 시베리아 오브강 하류의 지류인 라핀강 유역으로 뻗어나간다.
이 분포양상은 계속 동진하여 예니세이강 중류를 지나 바이칼호에 이른다. 거기서 동남쪽으로 꺾어 몽골초원이나 헤이룽(흑룡)강을 지나 한반도로 남하하였는데, 그 여파는 일본 규슈 지방까지 파급되었다. 이러한 분포도는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며 이동해 온 셈족이 강가에 정착하며 햇살을 상징하는 무늬를 그들의 토기에 그려넣었던 것임을 증명한다. 셈족의 이동경로를 따라 빗살무늬 토기가 분포하는데 이는 그들의 염원을 토기에 담아 이동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고인돌의 분포
고인돌[dolmen]은 고대인들의 무덤 혹은 제단(의견이 분분함)이다. 학문용어상 신석기 시대에서 시작되어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고,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일랜드, 영국, 서유럽, 팔레스타인, 카프카스, 중앙 아시아의 남부, 파키스탄, 인도, 동남 아시아, 중국의 산동 반도와 남만주, 한국, 일본의 규슈 등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북아프리카에도 있다고 한다.

고인돌의 분포도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에서 고인돌을 축조하는 풍습이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한국의 황해도 은율과 영국의 웨일즈에 형태가 비슷한 탁자형 고인돌들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와 서쪽 끝 섬에서 살던 고대인들이 동일한 풍습을 갖고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직 정설은 없고 자생설·전파설·주민 이주설 등 이론이 분분하다. 하지만, 자생설에는 문제가 있다. 우연의 일치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전파설에도 문제가 있다. 고대 사회에서 종족들의 장례 풍습은 당시의 법이었던 자신들의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강제성에 의하지 않고는 쉽게 전파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전파되었다고 보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던 지역들이 있고, 전파설로는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파되며 오랜 기간 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힘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이 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종족 이주설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선사 시대에 어느 한 지역에서 고인돌을 축조하는 풍습을 갖고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던 종족이 흩어져 세계로 이동하면서 이주지에 고인돌을 축조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에 있는 고인돌의 기원도 앞의 종족 이주설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시베리아 거석 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북방설로는 시베리아의 거석 문화보다 고인돌을 축조하는 풍습이 먼저 발생한 까닭을 설명할 수가 없다.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남방설로는 북쪽에 있는 고인돌일수록 일반적으로 축조된 시기가 오래된 까닭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자생설로는 한반도에 있는 고인돌들보다 훨씬 먼저 축조된 고인돌들이 있는 세계의 여러 지역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문제는 종족 이주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족이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고인돌을 만들기 시작했고, 왜 이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밝혀야 되고, 원주지와 이주지에서 그들의 역사적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야 한다.
고인돌의 형태는 받침돌이 높은 탁자 모양의 북방식, 받침돌이 낮은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으로 분류된다. 북쪽에 주로 분포된 북방식 고인돌들은 한국의 것이나 영국의 것이나 모양이 대체로 비슷하고, 축조된 시기가 이르다. 이것은 북방식 고인돌을 축조하는 풍습을 갖고 있었던 종족들이 이른 시기에 동서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4.흑요석의 분포
두 번째 한국인의 기원의 대단히 중요한 증거는 흑요석이라는 특수한 돌의 분포이다. 화살이나 칼 등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바로 이 흑요석이라는 시커먼 돌이다. 그것을 깨어서 파편을 이용해 도루코 칼처럼 사용하는데, 갈아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깨면 생선비늘처럼 납작하게 벗겨지듯 깨어진다. 그래서 지금도 하바드 대학같은 최고의 대학병원 외과의사들이 스텐레스로 된 수술셋트보다 흑요석 수술세트를 더 선호한다. 그러면 더 정확히 되고, 수술 후 회복에도 훨씬 더 요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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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 촉, 칼 등등이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중앙아시아, 몽골, 만주, 한반도 그리고 미국 인디언 주거지역까지 그대로 연결되어 흩어져 있다. 그러데 이 흑요석이라는 것이 전세계 어느 곳이나 생산된다면 이것은 어떤 민족의 기원을 찾아가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흑요석이라는 돌은 터키의 아라랏산 근처에서만 생산된다. 그렇게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었건,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 발견되었건 터키에서 돌을 가지고 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요즘 같으면 터키에서 흑요석을 수입해 가지고 한국에서 만들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수입, 수출이라는 형태가 아닌 까마득한 고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몽골, 만주, 한반도의 주민들이 흑요석을 썼다는 사실은 바로 과거 어느 때인가 아라랏산 근처에서부터 민족의 운명을 바꿀 중대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먼 여행을 떠나면서 흑요석을 잔뜩 등에 짊어지고 가면서 조금씩 사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갈지 않아도 옆으로 탁 치면 벗겨지듯 나오는 비늘 모양의 파편을 조심스럽게 쥐고 가죽같은 것들을 벗기면 도루코 칼 보다 더 요긴하다. 바로 아주 날카로운 연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5. 황토매장 문화
세 번째로 우리 민족이 장례 시에 시신을 묻었던 매장문화가 민족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고대 한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황토로 덮어서 매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황토를 구하기 힘들어 유족들이 관의 일부만 황토를 뿌리고 나머지는 주변에 있는 보통 흙으로 덮어버린다. 그러나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끝까지 황토로 덮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붉은 흙 곧 오클라(okla)로 사람을 매장하는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중앙아시아, 몽골, 만주, 한반도 등에 이르기까지 다 이러한 풍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부터 대륙을 건너서 인디언까지 아직도 이 붉은 흙을 오클라라고 부르고 있다.
한 예로 미국의 오클라호마 라고 하는 주 이름도 인디언 말로서 붉다 혹은 붉은 땅, 붉은 땅에 사는 사람 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오클라 라고 하는 흙의 사용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메리카까지 넘어갔고, 말까지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우리가 아직도 물감 중에 황토색을 오컬, 오클러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말이다.
위 그림은 죽은 사람을 오클라, 곧 황토로 매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우리나라 옛날 그림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매장 풍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와 같이 똑같은 매장문화가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지구라트와 장군총

고대 수메르(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지구라트 라고 부르는 피라미드를 닮은 건물을 많이 지었다. 이 건물들은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건 우르에 있다. 이 신전은 기원전 2100년경 진흙 벽돌로 만들어 졌으며 최근 부분적으로 다시 건설되었다. 
장군총의 능제(陵制)를 보면 이집트의 기자나 사카라에서나 본 것 같은 모양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저런 특이한 능을 설계했을까?
석재는 피라미드의 석회암보다 더 단단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장군총을 볼 때 꼭 마음으로 그려 넣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이 7층 돌계단 맨 꼭대기에 건물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꼭대기에서 기왓장과, 난간을 세우기 위한 구멍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장군총 뒤에 배총(陪冢)이 있는데 아래에는 장군총 축소판처럼 돌계단으로 되어 있고
위에는 고인돌처럼 되어 있다. 아마 그 위에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냈던 것 같다.
장군총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구라트 기능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낸다.
수메르인 등은 흙벽돌을 높이 쌓았는데, 그 가장 높은 곳을 사실 그 지방 수호신의 거처로 바쳤으며, 그러므로 범인은 접근 못하는 지성소였다.
그러나 지구라트 어디에 누굴 묻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거대한 흙벽돌 구조물 위에 건물이 있었다고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는 말하고 있어 모양새는 장군총과 흡사하다.
7. 새,깃털 숭배 문화
또 하나의 한국인의 기원을 알 수 있는 문화적 증거는 날개 혹은 새(鳥) 숭배문화이다. 고대 한국인들은 새와 날개를 매우 숭상했기 때문에 족장이 죽을 때는 깃털로 싸서 붉은 흙으로 매장을 했다. 또 우리 민족의 깃발도, 지금은 태극기이지만, 원래는 신성한 새 (봉황[鳳凰]새)를 그린 '봉도등(鳳圖騰)'을 사용했다고 한다. 또 우리 민족의 장관들, 관료들은 그 계급을 새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 깃털 숭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중앙아시아, 몽골, 만주 한반도를 거쳐 미국 인디언들까지도 관찰된다. 특히 미국 인디언들이 깃털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은 서부영화를 통해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섯 번째로 한민족의 기원을 따지는 중요한 문제가 우리 민족의 국화인 무궁화 숭배사상에서 나온다. 무궁화의 학명(學名)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이다. 여기서 보듯이 원산지가 우리나라가 아니고 메소포타미아 중동에 있는 시리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궁화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the Rose of Sharon' 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샤론의 꽃'인데 아가서에도 나오듯이 '샤론의 꽃', '샤론의 장미' 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상징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과거에 급제한 어사에게 씌워주는 어사화도 바로 무궁화이다. 그리고 화랑들이 쓰고 다니던 모자에 달려 있던 꽃 그것도 무궁화이다. 그러니까 무궁화가 실재로 활용되고 있던 것이 신라시대부터 이미 확실히 나와 있고, 단군의 이야기에 보면, 그 때 이미 무궁화의 한자식 표현인 목근화 씨를 가지고 왔다는 표현이 있다.
무궁화의 학명(學名)이 말하듯이 무궁화는 중동에 대 제국을 이루었던 시리아, 인류 최초의 문명인 에블라 문명의 발상지, 그 나라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흑해연안 곧 한민족이 이동해 왔을법한 이동경로를 따라 살펴보면 무궁화들이 끊임없이 피어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