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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 인생의 두 가지 해답지 (출17:8-16)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문제들에 봉착하는 때가 종종 있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왜 문제일까요?
사전에 보면 문제란 ‘해답을 요구하는 물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해답을 안다면 문제는 쉽습니다. 그러나 답을 모른다면 문제는 여전히 풀 수 없는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인생에서도 문제란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엔 우리가 극복하고 풀어야 할 것들이란 얘긴데, 개중엔 답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실력만 있으면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이건 진짜 문제다 문제.’라고 탄식하며 고민하게 되는 문제는 아무리 애를 쓰고 발버둥을 쳐봐도 도무지 해결할 답이 없고 헤쳐 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들을 만났을 때입니다.
이처럼 도무지 답이 없는 경우를 가리켜 수학에서는 ‘불능’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능력이 없거나 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겁니다.
인생 문제에서도 불능이나 불가능이란 결국 답이 없다는 얘긴데, 답이 없기에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통상 입학시험이나 자격시험 등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가 오지선다형 객관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어려운 문제인가 하면, 선택지의 5번 문항은 무조건 ‘답이 없다’이기 때문이랍니다.
1에서 4번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잘 몰라도 그럴듯하거나 들어본 듯한 것 하나라도 찍을 수가 있는데 선택지에 5번으로 ‘답이 없다’가 떡하니 들어가 있으면 1에서 4번까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답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이처럼 시험에서건 인생에서건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답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살면서 혹여라도 답이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시험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합격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되면 성공도 승리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인생이 평안하고 행복하려면 문제들이 닥쳤을 때 즉각 즉각 풀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인생의 어떤 문제는 아예 답이 없다면서요?
그렇다면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땐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문제 앞에서 학생들에겐 답이 없어도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에겐 답이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문제 앞에서 인생들에겐 답이 없을지라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답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제 더는 문제 앞에서 ‘나에겐 답이 없다’고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겐 답이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어야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 있는 겁니다.
설사 세상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불능’의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세상 것들 중에 해결 불능인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우리가 나에게 생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는 것이고, 우리에게 있어야 할 기도는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님이 풀어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과 기도’.
이 두 가지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인생의 문제를 푸는 해답’ 즉 ‘신앙의 해답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껜 답이 있음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이 답을 보여주시기를 요청하는 기도’라는 ‘신앙의 해답지’로 어려운 문제를 풀고 결국엔 승리한 사례를 기록해 놓은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앞선 사건으로 출애굽 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막길을 지나는 중에 갈증이라고 하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더러는 좌절하고 일부는 절망까지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와 마시게 함으로써 저들에게 닥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젠 좀 살겠다.’ 하는 참에 이번엔 또 다른 문제로, 광야 거민인 아말렉 족속이 대군을 몰고 쳐들어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엔 군대 조직이나 무기 비슷한 것 하나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리 중엔 온통 부녀자와 노약자들이 섞여 있는 형편인지라 도무지 전쟁할 형편이 되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쳐들어온 적군이 이런저런 사정을 봐줄 리도 만무하고요. 문제 중에서도 참으로 죽느냐 사느냐가 결부된 절체절명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결말이 어떤가요?
13절에서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고 한 것처럼, 도저히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진짜 결말이 아닙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결국 아말렉 전투의 결말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겼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말렉을 세상에서 없이 하셨다.’가 결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애초에 아말렉이 쳐들어온 게 문제였는데, 그 아말렉이 어느 순간 없어져 버렸으니, 그 순간 문제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물리쳤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아말렉이라는 문제를 제거해 주셨다는 게 본문의 진짜 결말입니다.
언뜻 듣기에는 비슷한 말 같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문제를 붙들고 ‘나는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끝내 불안과 근심의 벽에 부닥치고 말 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결말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을 위해 아말렉에게 하셨듯이 우리 앞에서도 문제 자체가 없어지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럼 됐지요. 문제가 없어졌는데 문제로 고민하고 뭘 할까로 근심할 이유도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에 기록된 아말렉 전투의 결말에서 배울 것은 문제로 인해 뭘 할지를 염려하기 전에 우린 우선 문제가 없어지게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해답지가 있으면 문제란 없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인생 행복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은 하나님은 ‘인생의 문제를 푸는 해답지’를 나에게도 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있는 걸 활용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해답지가 있음을 알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날라치면 즉시로 신앙 해답지 곧 ‘믿음과 기도’로 문제 자체가 아예 없던 것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서 똑같은 이유로 여러분 각자의 인생에서도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1.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능력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모세는 아말렉과의 싸움이 일어났을 때 자기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아니? 지도자라는 사람이 전쟁이 나면 전장으로 가든가 전투 지휘소로 가야지 왜 산꼭대기로 간 걸까요?
혹시라도 자신에게 전쟁의 불똥이 튀는 걸 막고자 해서 산꼭대기로 피신한 걸까요? 아니면 좋게 봐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전쟁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다 아닙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이유는 시편 121:1절로 2절 말씀처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전쟁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권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을 발동했던 것입니다.
오늘. 모세의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면 모든 것에 우선하여 가장 먼저 하나님의 능력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믿음을 발동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추적이다.’라는 신앙 권면의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능력권 안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공기 속에 살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살 듯이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나님의 능력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는 중에 세상을 미혹게 하는 사탄이 사람들 앞에 문제를 던져놓을라치면 하나님은 그때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권 안으로 들어가자.’라는 믿음을 상기하게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계속 추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방증입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부터 찾자!”
이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권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모세는 하나님을 찾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권이라 여기는 산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행적을 눈여겨 잘 보아두시기를 바랍니다.
아말렉의 침략이라는 문제 앞에서 모세는 문제를 향해 나가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뒤로 한 채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인데 꼭 집어 실망의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우린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하게 됩니다.
‘어?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데?’라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능력 주실 것도 믿을 수 있고, 그리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우리가 실망할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세요!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 ‘하나님부터 찾자!’
여기서부터 믿음과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는 아말렉과 전쟁할 때 산꼭대기에서 하늘 높이 두 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두 손을 들면 전쟁에서 이겼고, 두 손이 내려오면 전쟁에서 졌다고 했는데, 이 장면에서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기도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그랬기에 본문은 문제 앞에서 기도가 이어지면 이기고 기도가 끊어지면 지더라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 기도했으면 끝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언제까지 해야 한다고요?
“응답받을 때까지!”입니다.
둘째. 기도는 할지 말지를 내 맘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아이의 새끼손가락 끝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는데 담당 의사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부분 마취이고 간단한 수술이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취 중에 아이가 쇼크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후 장례식장에서 아이어머니는 통곡하면서 목사님에게 이렇게 회개합니다. “목사님! 나는 ‘요까짓 것’ 수술할 때는 기도 안 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특별한 기도 제목을 정하는 건 좋지만 살면서 굳이 기도 제목으로까지 내세울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는 ‘이까짓 것’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보세요. 모세를 ‘그까짓 것’ 정도로만 여겼던 아말렉 군대나 당대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는 기도하는 모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대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다니엘 정도는 ‘제까짓 게’라고 생각했지만, 기도하는 다니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게 기도의 힘입니다.
한때 티비 광고 멘트 중에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기에 한 단어를 덧붙여 여러분을 축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기도 부자’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누구라도 인생을 넉넉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려고 하면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돈부자, 실력 부자, 빽 부자 등을 내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우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믿음이 부자가 되고, 특히 기도를 많이 해서 기도 부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나만 잘되자고 기도하란 말은 아닙니다. 기도 부자가 되라는 말이 ‘기도 수전노’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에 관하여 하나만 더 말씀드리자면 기도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기도는 누구를 위해 하는 거냐고 물으실 텐데,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 우린 기도해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에서 역사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그렇게 기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응답으로 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뭐가 됐든 많이 그리고 자주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응답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만 놓고 본다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것처럼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더하여.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기도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해서 기도가 ‘나만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이웃들은 물론이고 나에게 원수 같은 사람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누구든 그들도 복 받기를 기도 많이 하시고 특히나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시기를 그들이 계속 원수인 채로 살다가 하나님께 책망받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라면 오늘 이후로는 그런 때를 만나면 얼른 나에겐 그런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신앙 해답지가 있음을 아시고 그 해답대로 인생의 문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매사에 ‘하나님껜 답이 있음을 믿는 믿음’을 잃지 마세요.
매 순간 ‘하나님이 답을 보여주시기를 요청하는 기도’를 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알려드릴 말씀은 사실 최근 들어 제가 여러분에게 ‘믿음과 기도’와 관련한 말씀을 반복해서 전해 드리고 있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올 한해를 우리가 ‘주가 행하시게 하자.’라는 소망을 붙들고 일 년을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주가 행해주시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모세가 아말렉을 이기듯, 목동인 다윗이 왕이 되듯 우리의 문제도 해결되고 상황이 호전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풍 병자가 낫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듯 우리에게도 강건함과 평안이 있게 되고 일용할 양식이 풍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니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 행해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린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과 기도라는 신앙의 해답지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대로, 또한 우리가 믿은 대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닥쳐온 모든 문제를 없게 하셔서 결국엔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닛시’의 은혜로운 결말이 있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