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53) - 음각치
명창 음각치 수제자로 나선 앳된 처녀
최 참봉 셋째 아들에 약점 잡히는데…
소리꾼 음각치의 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들어본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음각치 소리를 ‘소리 아편’이라 말한다.
한번 들어본 사람은 온몸이 파도치는 떨림을 잊을 수가 없어 백리 길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와
음각치 소리를 다시 듣고는 까무러친다.
적벽가를 부를 때면 하늘이 휘감기고 땅이 갈라지며 심청가를 부르면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
호사가들은 음각치가 제 손으로 성대에 결절을 만들어 득음했다고 제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하고 다닌다.
음각치는 안개에 싸여 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녀 전북 순창에 사는 꼽추 고수(鼓手)와 가끔씩 연락이 될 뿐이다.
음각치가 어둠살이 내리는 지리산 자락 전남 구례에 와 섬진강 나루터 주막에 들어가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삽짝에 붙어 있는 방(榜)에 눈길이 꽂힌 것이다.
판소리 한마당
장소 : 섬진강 백사장
때 : 정월 대보름 일경
입장료 : 십전
소리꾼 : 명창 이화(梨花) - 음각치 수제자
음각치는 이날 이때껏 제자를 키워본 적이 없는데 수제자라니 기가 막혔다.
주막에 들어가 객방을 잡고 국밥에 탁배기 한잔을 마시는데 주막 뒤 작은 객방에서 판소리 가락이 흘러나왔다.
주모에게 물었더니
“보름날 밤에 백사장에서 소리를 할 음각치 수제자라고요, 글쎄. 그날 밤에는 쇤네도 갈 것이지라”고 말하며 흥분했다.
그때 챙 넓은 갓에 비단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젊은 남자가 뒷방으로 들어갔다.
목소리가 커지자 주모가 들어가고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남자가 ‘쾅’ 문을 발로 차고 나와
“각오들 해뿌려”라고 씩씩거리며 주막에서 사라졌다. 뒤따라 늙은 고수와 주모가 나왔다.
주모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쌓인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음각치는 자신의 수제자라 사기 친 소리꾼이 늙은 퇴기겠지 생각했는데 열아홉 처녀라는 데 깜짝 놀랐다.
겁박하고 나간 젊은이는 천석꾼 부자 최 참봉의 개차반 셋째 아들로 처녀 소리꾼의 약점을 잡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약점이란 음각치의 수제자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 약점을 빌미로 초야권(初夜權)을 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룻밤 동침을 하지 않으면 동네방네 음각치의 제자가 아니란 걸 폭로하겠다는 것이다.
음각치가 주모를 시켜 처녀를 안마당 평상으로 불러냈다.
눈물을 닦고 나오는 처녀 소리꾼은 음각치 수제자라고 사기 칠 그런 얼굴이 아니다.
순진하고 부끄럼을 타는 앳된 얼굴이다.
일찍이 어미를 잃은 하동산골 처녀는 어릴 적부터 친척 소리꾼 할매로부터 소리를 배워 한을 풀었는데
아비가 삼년째 병석에 누워 있자 주제넘게 소리로 돈을 모으겠다고 나섰다.
이번에 구례 현지에서 영감 고수를 구했는데 그 고수가 우겨서 ‘음각치 수제자’라 방에 덧붙였다며
소리꾼 처녀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음각치가 무릎을 탁 치고 주모를 시켜 처녀 방에서 북을 가져오게 했다. 채를 잡고 북장단을 넣으며 말했다.
“처녀가 심청가 연습 허는 소리를 들었소. 헌디, 두둥둥둥 범띠중류 떠나간다∼ 하는 대목에서는
세자침(혀를 굴려 내는 소리)을 넣어서 이렇게 떠어∼나간다∼ 통성을 피 토하듯이….”
처녀 소리꾼이 입을 벌린 채 눈이 왕방울만 해져 음각치를 바라봤다.
처녀 소리꾼이 “떠어∼나간다” 따라 하자 음각치가 “그렇지, 그렇지” 무릎을 쳤다.
처녀 소리꾼이 무릎을 꿇고 “어르신 존함을 좀…” 하자 음각치가 “무명씨요. 옛날에 창을 쬐끔 했지라우”라고 답했다.
이튿날 벽마다 기둥마다 나무마다 삽짝마다 붙어 있는 소리 한마당 방 옆에
‘음각치 수제자는 사기다’라는 방이 나란히 붙었다.
아침에 나루터 주막으로 들어온 고수 영감이 그 방을 뜯어서 들고 와 울상이 됐다.
처녀 소리꾼은 아침부터 눈물이다. 음각치가 빙긋이 웃으며
“걱정 마시고 소리 연습이나 하시오” 달래고 몇대목을 가르쳤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라 섬진강 강물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소리판 마당엔 처녀 소리꾼과 고수 영감,
그리고 음각치만 당그라니 섰고 객석은 텅 비었다.
최 참봉의 셋째 아들과 그 떼거리가 객석에 서서 야유를 보냈다.
이튿날 최 참봉 셋째 아들이 오백냥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피고소인으로 잡혀와 동헌 마당에 섰다.
처녀 소리꾼이 원고였다. 최 참봉 셋째 아들이 사또를 보고 말했다.
“명창 음각치는 제자를 키운 적이 없는데 저 사기꾼 소리꾼이….”
그때 음각치가 나타났다.
“소인이 음각치요. 이 처녀 소리꾼이 소인의 수제자요.” 사또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고 고을 사람들도
“와∼” 놀라고 최 참봉 셋째 아들은 털썩 주저앉았다.
최 참봉 셋째 아들은 곤장 열두대를 맞고 최 참봉은 거금 오백냥을 싸들고 달려왔다.
그날 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섬진강 백사장은 음각치와 그 수제자(?)의 자선공연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처녀 소리꾼이 심청가를 부르고 음각치가 적벽가를 부를 때는 백사장이 뒤집어졌다.
매화가 암향(暗香)을 뿜었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첫댓글 재미있는 이야기가 참 많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