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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깊이와 성스러움 / 이은봉
1. 시의 깊이와 높이, 넓이
2005년에 초판을 출간하고 2015년에 증보판을 출간한 졸저 '화두 또는 호기심 (작가, 2015)'에 실려있는 글 <좋은 시: 성과 속을 잇는 외줄타기>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삶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진실을 껴안고 있는 좋은 시는 고통으로 지쳐있는 사람의 눈으로만, 마침내 너무도 담담해진 사람의 눈으로만 들어온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욕의 가난만이, 그러한 사람의 눈만이 진실이라는 보석이 박혀 있는 시를 나날의 삶에서 캐낼 수 있다. 세속의 일상과 함께 허우적대면서도 끊임없이 성스 러운 진리의 세계를 꿈꾸는 자만이 좋은 시를 얻을 수 있다. 좋은 시는 항상 성과 속의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러한 얘기로 논의를 시작하는 까닭은 그동안 필자가 시의 깊이와 높이, 넓이, 나아가 성스러움 등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시의 성스러움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 우선은 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에 대한 논의부터 먼저 해보자. 그렇다. 많 은 샤람들이 시에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러한가. 정말 시에 깊이와 높이와 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물론 시의 표면에 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가시적으로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것같지는 않다. 따라서 시를 읽으며 모든 사람들이 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곧바로 쉽계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쉽게 눈에 보이지않는 것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명확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많다. 도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오감에 의해 감각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오감에 의해 감각되지 않는 것은 추상적인 것, 관념적인 것, 불교식으로 말하면 의식계 혹은 법계의 것을 뜻한다. 그것이 사물 바깥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실제로 감각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 안이비설신, 색성향미촉,시청후미촉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편안히 감각되지 않는 것이 있다. 불교의 예불문 앞머리에 나오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등도 그것들 중의 하나이다. 일상의 나날에서 이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등을 구체적으로 감지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일정한 정도의 정신적 깊이와 높이, 넓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생생하게 느끼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들 감각, 이들 향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더라도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감각되지 못하는 것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일이 사실이라고는 하더라도 나날의 시에서 깊이와 높이와 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제로 있기는 한 것인가. 시가 시인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시인의 마음에 깊이와 높이와 넓이 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투사하는 시에도 깊이와 높이와 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늘 이러한 생각을 하며 시를 읽고 쓴다 시에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을까. 다음의 예는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의 일부이다.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습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ㅡ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니 부분
시가 지니고 있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백석의 이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구절이다. 이 중에서도 내가 가장 주목하는 구절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 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백석의 이 시구절에는 두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에게는 첫째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도록 한다는 점이고 둘째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게 한다는 점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사는 삶과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사는 삶이 시인의 마음을 깊고 높고 넓게 만들 것은 자명하다. 깊고 높고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 깊고 높고 넓은 시를 쓰리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시는 시인의 삶과,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사는 시인의 삶이 시를 깊고 높고 넓게 만들 것은 자명하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깊고 높고 넓은 시'가 뜻하는 바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오감에 의해, 색성향미촉에 의해 쉽게 감각되지는 않지만 죠고 높고 넓은 시가 숭엄하고 장엄한 기상을 갖는 시,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시일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한 시인이 '숭엄하고 장엄한 기상을 갖는 시,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저 자신의 마음속에 그것을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야 하리라. 이는 내 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에 들어있는 이러한 시의 기준, 곧 '숭엄하고 장엄한 기상을 갖는 시,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시'의 기준도 늘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기 때 문이다.
언제나 나는 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에 맞는 시를 쓰기 위해 끊임없이 언어를 매만지고 다듬는다. 하지만 내가 끊임없이 매만지고 다듬는 시의 언어는 자주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 밖에 자리한다. 그렇다. 내 시의 그것은
너무 많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아마도 그동안 시를 매개로 해 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의 안에 들어가 그것과 더불어 직접 숨쉬어본 적이, 직접 살아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거의 없는지도 모른다.
따져보면 내가 쓴 시가 앞에서 말한 '승엄하고 장엄한 기상을 갖는 시,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시라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 밖에 자리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내가 그러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시를 쓰지 못하고 있는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에 언제나 자주 아무렇게나 늘 도달해 향유하고 있는 것이 나일 수도 있다. 모든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은 본래 멀리 떨어져 애타게 그리워하는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 같은 것이면서도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깊고 높고 넓은 시, 다시 말해 숭엄하고 장엄한 기상을 찾는 시,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시를 숨 쉬고 살고 쓰기 위해 지금 이곳의 내 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와 관련해 가장 필요한 것은 앞에서도 줄곧 말해 온 것처럼 온몸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사는 삶,"넘치 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사는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삶이자 자발적 소외, 자의적 고독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정작의 시인이라면 기꺼이 그것을 감수해야 마땅하다. 기꺼이 자발적 소외. 자의적 고독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삶이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을 깊고 높고 넓게, 성스럽게 만들리라는 것이다.
삶과 시에 대한 이러한 내 생각이 부디 복되기를 빈다.
2. '성스럽다'는 말의 의미망
성스럽다'는 말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聖스럽다'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스럽다'라는 말 앞에 신神자를 덧붙여
神聖스럽다'라고 한다. 신은 무엇이고 성은 무엇인가. 맹자는 신과 성의 관계를 두고 "성위불가지지위신(聖而不可知之之謂神)이라고 말한다. 직역하면 "성스러워서 가히 알 수 없는 것, 그것을 일러 신이라고 한다' 라는 말이 된다. 맹자의 이 말로 미루어 보면 성의 개념과 신의 개념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맹자의 견해에 따르면 성즉신이거니와, 이를 매 개로 생각하더라도 성의 의미망과 신의 의미망은 서로 겹쳐 존재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신과 성을 아무런 논리적 인과 없이 곧바로 일치시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신이 인간과 자연, 곧 만물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성이 인간과 자연, 곧 만불 의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신은 인간과 자연, 즉 만물의 밖에 존재하고, 성은 인간과 자연, 즉 만물의 안에 존재하는가.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논리적 추이를 거칠 필요가 있다 우선은 먼저 신의 의미망부터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신을 인격과 관련해 인격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신을 유일한 것으로 절대화한 기독교의 경우에도, 곧 여타 종교에 비해 월씬 고급한 종교인 기독교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에서도 얼마간은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마도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짐승들과 온 땅과 그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창세기 1장 26절, 27절) 등의 구절에서 비롯되는 듯싶다 신을 인격적인 존재와 관련해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신을 인간을 비롯 한 만물을 주관하는 조물주로 이해한다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특별한 인격인 신은 불가피하게 인간과 자연, 곧 만물의 밖에 거주하는 '외재적 존재'가 된다. 신을 외재적 존재로 받아들이면 신즉성(神卽聖)이 되기 어렵다. 성은 언제나 귀(耳)와 입(口)을 지닌 인간과 자연, 곧 만물의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이라는 한자말을 파자하면 耳 +口+壬 귀와 입을 상대에게 맡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근본적으로 인격과 함께하는 성에 비해 신은 인격 밖에서 인간과 자연, 곧 만물을 짓고 만드는 위대하고 거대한 어떤 무엇이 된다. 따라서 성은 자연 만물 중에서도 인간의 마음이 이를 수 있는, 도달할 있는 가장 드높은 경지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러한 점에서도 성은 기본적으로 내재적이다. 따라서 내재적인 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이룰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깊고 높고 넓은 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내재적인 성에 비해 외재적인 신은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인간 밖에서 세상 만물을 주재하는 조물주일 수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 곧 만물의 외부에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신, 유일하고 절대적인 어떤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갖고 있는 외재 적인 신을 인간이 만드는 예술의 하나인 시가 갖는 성스러움과 관련시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편 편의 시에 어떤 질서와 원리로서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시가 갖는 성스러움과 관련시켜 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신은 외재적 존재가 아니라 내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때의 신은 인격신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아니 인격신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실제의 삶에서도 외재적 존재가 아니라 내재적 존재로 신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동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서도 간혹 신을 내재적 존재로 이해하는 예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국문과의 방민호 교수는 <성스러움에 관해 다시 생각한다.>라는 논문에서 특별히 스피노자의 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신은 기독교적인 신이 아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은 초월론적인 신에 의해 파생된 존재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곧 무한으로서 신을 구성한다. 그들의 유한성은 무한성이라는 대립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으나 유한성은 곧 무한성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인 것이다.
방민호 교수의 논리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는 "우주 만물과 인간"이 그 자체로 "무한으로서 신을 구성"한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생각은 신이 "우주 만물과 인간"의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과 인간" 자체가 무한으로서 신을 구성"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이러한 견해는 "우주 민물과 인간" 속에 이미 신이 들어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스피노자의 주장은 유한한 "우주 만물과 인간"은 무한한 신의 부분이 면서도 전체라는 얘기이다. 신과의 관계에서 "우주 만물과 인간"은 저 스스로 부분이면서 전체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논의를 이렇게 진전시키다 보면 "우주 만물과 인간"은 "우주 만물과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논리는 이내 신은 신이면서 동시에 우주 만물과 인간이라는 결론을 낳게 된다.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이 떠오르거니와 물론 이때의 우주 만물과 인간은 외적 형상으로서의 존재이기보다는 내적 원리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신을 내적 원리로 받아들이면 곧바로 신즉이(神卽理)가 된다. 신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이치나 원리가 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적인 신(하느님/하나님)은 무한한 존재로서 언제나 저 스스로 존재 한다. 저 스스로 존재하는 신은 영원하여 시작도 끝도 없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존재라면 이때의 신은 아무래도 생사의 인과 과정을 거칠수 밖에 없다. 2,000년 전에도 살아있고, 지금도 살아있는 만큼 이때의 기독교적인 신은 무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방민호 교수는 스피노자에게 "우주 만물과 인간" 자체가 지니는 "유한성 은 무한성이라는 대립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주 만물과 인간"인 신에게는 유한성과 무한성이 대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된다. 방민호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스피노자의 신에게, 곧 그의 "우주만물과 인간"에게 "유한성은 곧 무한성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신, 곧 그의 "우주 만물과 인간"은 유한한 존재인 동시에 무한 존재가 된다.
스피노자의 신은 신즉이(神卽理)이니만큼 유한즉무한 , 무한즉유한의 존재라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선불교의 존재론 혹은 인식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불교의 존재론 혹은 인식론은 일즉다 다즉일의 역설에 기반한 불이론을 가리킨다.
성속불이라고 할 때의 불이말이다. 하나는 여럿이고, 여럿은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의 역설을 현대식으로 번역하면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부분, 개인은 사회(공동체)이고 사회 (공동체)는 개인이 된다. 이를 스피노자의 논리에 대입하면 신은 "우주 만물과 인간"이고, "우주 만물과 인간"은 신이 된다.
물론 이때의 불이론은 당연히 공즉시색 색즉시공으로 요약되는 반야심경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인 공은 여럿인 색이고, 여럿인 색은 하나인 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공은 없는 것(비가시적인 것)이고 색은 있는 것(가시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무즉 유 유즉무 역설과도 그대로 통한다. 있는 것은 가시적인 것. 곧 여럿인 것이고, 없는 것은 비가시적인 것, 곧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 만물과 인간"이 곧 신이고, 신이 곤 "우주 만물과 인간"이라는 스피노자의 신관은 결국 공은 색이고 색은 공이라는, 곧 공(본질)과 색(현상)이 불이라는 선불교적 연설과 맞닿아 있다.
또한 스피노자의 신에게 "유한성은 곧 무한성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라 는 방민호 교수의 견해는 노자의 [도덕경 제1장에 실려있는 모순논리를 떠오르게도 한다. 무명은 하늘과 땅의 처음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무와 유는 한곳에서 나왔는데 명칭, 곧 기표는 각기 달라도 그 내용, 곧 기의가 현묘하기는 같다)라는 글에 드러나 있는 유무의 상호 관계가 갖는 순환성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방민호 교수는 예의 논문에서 "스피노자의 무한 개념은 어떠한 초월성도 인간의 상상적 고안물로 간주하는 내재성의 용호론에 다름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신관은 기독교의 신, 즉 여호외와 관련된 신관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양적 신관, 나아가 동양적 존재론이나 인식론을 서구의 언어로 풀어 말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편 방민호 교수는 이 논문에서 강신애의 시 지옥의 환인/을 예로 들어 자신의 논리를 진전시키기도 한다. 강신애의 이 시의 2연에는 "산란 후 유년으로 회춘한다는" "누트리쿠라라는 해파리"와 관련해 "어느 별의 쪼개진 돌맹이에서 태어나 바다의 신이 되었니?"라고 자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돌멩이와 바다의 신'이 이루는 관계이 다. 시인이 여기서 "어느 별의 쪼개진 돌멩이"를 "바다의 신"이 태어난 모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강신애 시인이 세계를 이렇게 인식하는 데 작용하는 철학적 기반도 실제로는 노자의 천지지시天地之始로서의 무명과 만물지모万物之母로서의 유명이 이루는 관계가 아닌가 싶다. 이때의 '돌맹이와 신의 관계'는 서구적 신성보다는 노자의 유무관을 연상시킨다는 것인데, 물론 이는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인간 및 우주 만물과 신이 이루는 관계와도 그대로 상응한다.
제목만으로 보면 방민호 교수의 논문 <성스러움에 관해 다시 생각한다>는 신성에 대한 사색보다는 성스러움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는 듯싶다. 여기서 구태여 이러한 논의를 하는 까닭은 동양에서는, 특히 성리학 등 유교사상에서는 성이나 성스러움에 대한 인식은 있지만 신성이나 신성스러움에 대한 인식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흔히 신이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 관념이 기독교의 유일신인 여호와'를 번역하는 과정에 구체화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의 여호와라고 하더라도 개신교 하나님의 개념과, 가톨릭 교 하느님의 개념은 조금쯤 다르다. 전자가 유일신을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천주. 한울님, 곧 조물주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이들 두 신, 두 절대자가 모두 외재적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 신을 닮으려는 데서 성스러움이 비롯된다면 개신교와 천주교의 경우에는 그것이 밖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 하기가 어렵다.
물론 동양의 철학에서는 불교이든, 노장이든, 유교이든 모든 성스러움이 안에서 비롯된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성스러움은 주체의 정신 차원이 성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의 성불이나 해탈이 무자기 혹은 무자성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러한 점은 시에 실현되고 구현되는 성스러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자기 혹은 무자성의 내포를 특별히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것의 내포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나'인 만큼 불변하 는 나', 항구적인 나'는 없다는 생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변하는 내가 없다, 항구적인 내가 없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나와 타자, 유와 무, 색과 공, 생과 사가 불이의 관계에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불이의 관계에 있는 것은 이들 각각의 관계가 순환하는 관계에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들 각각의 관계를 순환하는 불이의 관계로 자각하고 그것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 각각의 관계를 순환하는 불이의 관계로 받아들여 나날의 삶에서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것이야말로 성인으로 사는 것, 곧 성스럽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이나 성스러움의 가치를 정작 소중히 여긴 것은 논어의 중심 화자인 공자인 듯싶다. 공자가 이루고자 하는 성질의 경지는 물론 거룩한 것, 고결한 것, 뜻이 매우 높고 큰 것, 맹자의 표현을 빌리면 호연지기의 마음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일단은 성이라는 한자를 파자해 그것의 개념을 좀 터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이라는 한자를 파자하면 耳(귀)+
口(입)+壬 (크다, 맡기다)이 된다. 귀와 입을 세계에, 곧 객체에 맡기는 것이 성이라는 글자의 본래 뜻이라는 것이다.耳 (귀)와 口[(입)는 안이비설신,색성향미촉, 시청후미촉 곧 색즉시공의 색, 그러니까 오감, 즉 오온을 대표한다 객체의 자극으로부터 야기되는 주체의 감각 일체가 이(耳)와 구(口)로 상징된다는 것인데, 이것들을 세계에, 곧 객체에 맡긴다는 것은 결국 주체를, 즉 자아를 무화시킨다는 뜻이 된다. 표면적인 내포로만 보면 주체를, 자아를 무화시키는 경지는 불교의 <아함경>에서 말하는 무자기, 무자성의 경지가 된다. 물론 정작의 무자기, 무자성의 경지는 주체를 무화시키기보다는 주체와 객체가 순환하는 불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성의 내포는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는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의 이순(耳順)의 내포와 다르지 않게 된다. 耳(귀)+口(입)+壬 (크다, 맡기다)
와 耳(귀)+順(순하다)이 실제로는 동일한 의미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에게는 성인의 경지나 성스러움의 경지가 육십이이순의 경지, 더 나아가 칠십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논어 위정편품)의 경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인이나 성스러움의 경지와 관련해 '나이 70이 되어서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쫓아도 법도로부터 어긋나지 않았다'는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크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말 그대로의 성의 세계가 되고 성스러움의 내용이 되기 때 문이다. 강조하거니와, 논어의 이 구절, 즉 '칠십이종십소욕불유구 '에는 이처럼 심(心)이라는 주체와 구(矩)라는 객체가 이루는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성질의 내용 혹은 성스러움의 경지가 들어있다.
주지하다시피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에서 주체인 심은 욕망의 존재인 공자의 자아를 가리킨다. 그리고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에서 객체인 구(矩)에는 타자로서의 '모서리', 나아가 네모를 뜻한다. 구는 본래 구규(矩規), 곧 외적인 척도를 가리킨다. 이 외적 척도의 의미가 변형되어 구라는 점차 상법, 법치 등의 내포를 갖게 된다. 나아가 옛날에는 땅이 네모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는 땅, 즉 대지, 자연을 뜻하기도 한다. 구는 주객일치라고 할 때의 객, 물심일여나 치라고 할 때의 물 전체를 요약하고 상징하는 셈이다. 요즘 식의 언어로 말하면 구는 타자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나 내용은 좀더 분명해진다. 나이 70이 되어서야 심으로 대표되는 주체와 구로 대표되는 객체 사이에 갈등이나 대립이 없어졌다는 것이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정신 경지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스러움의 경지나 성품의 내용은 자못 분명해진다. 그것이 주체와 객체 사이에, 나와 남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도 존재하지 않는 대자유가 실현되는 경지를 가리 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이로 미루어 보면 공자님도 나이 70이 되어서야 성인의 경지, 성스러움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된다. 어찌 보면 그것이 실제로 내포하는 것은 주체 혹은 자아라는 에너지가 약화나 절약, 무화나 멸화와 무관 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부처님이 <아함경>에서 무자기 나 무자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생노병의 연기를 거쳐 사의 연기에 가까워질 때라야 성인의 경지, 성스러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해도 좋다.
이러한 논의는 무엇보다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나 내용, 곧 성스러움이나 성인의 경지나 내용이 실제로는 주객일치나 물심일여의 경지나 내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물론 이러한 경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의 경지나 내용과 다르지 않다. 일체라는 객체가 유심이라는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경지도 궁극적으로는 일체와 유심의 합일과 일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의 성인이나 성스러움의 내포가 주체와 객체의 단순한 합일, 소박한 하나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정작의 성스러움이나 성인의 내포는 주체와 객체가 상호 화이부동하는 합일. 즉 불이하는 합일의 경지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때의 불이의 관계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색과 공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옳다. 이는 곧 색과 공이, 공과 색이 불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색은 가시적인 오감의 물질계를 가리키고, 공은 비가시적인 법이나 의의 정신계를 가리키거니와, 이들이 순환하는 불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덧붙여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불이의 관계에 있는 합일, 곧 하나됨은 성스러움이나 성인의 경지일 뿐만 아니라 선(禪)의 경지이기도 하다. 禪(선)이라는 한자말을 파자하면 示(시)+單(단)이거니와, 示(시)+單(단)은 '하나로 본다' '하나로 보인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이때의 하나 역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일 것은 불 문가지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선(禪)의 경지와 성(聖)의 경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둘의 경지가 좋은 시의 경지와 함께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좋은 시는 본래 시선일치의 경지를 갖기 때문이다. 좋은 시가 갖는 경지, 곧 시선일치의 경지가 선승들의 선시에 의해서만 구현되고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 때의 이백이나 두보, 왕유나 소동파 등의 시에 의해서도 구현되고 실현되었던 것이 시선일 경지이다. 대한민국 시인들의 좋은 시, 곧 정지용이나 이육사, 영랑이나 백석, 오장환, 이용악, 김현승 등의 좋은 시에서도 넉넉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시선일치의 경지, 곧 성스러움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정지용의 시 1 편을 읽으며 이 글을 매조지하는 단계로 넘어가기로 하자.
골짝에는 흔히
유성이 묻힌다
황혼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도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ㅡ정지용, 구성동 전문
3. 인간과 자연의 품격 있는 재통합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시에서의 성스러움은 신이 갖고 있는 외재적 가치로서의 신성보다 인간이나 자연, 곧 만물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로서의 성이나 성스러움이 진정한 깊이와 높이, 넓이를 이룬다. 시가 갖고 있는 성이나 성스러움의 내용과 가치는 이처럼 인간과 자연, 곧 만물의 안에서 내재적으로 그것을 움직이는 근본으로서의 이기(理氣)에 가깝다. 물론 이理와 기氣는 공과 색처럼 순환하는 불이의 관계로 존재하는 가운데 인간과 자연, 곧 만물의 안에서 유한하면서도 무한하게 그것을 움직이는 근본으로 존재한다. 만물을 움직이는 근본이라는 말은 만물이 저 스스로 운동하는 근본을 가리킨다. 만물이 저 스스로 운동하는 근본은 언제나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며 이기로서의 생명의 에너지를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시의 에너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흔히 시는 통합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예술 양식이고 드라마는 같등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예술 양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의 안에 통합의 자질만 있는 것은 아니고, 드라마의 안에 갈등의 자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안에도 더러는 갈등하는 것이 있고, 드라마의 안에도 더러는 통합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만물이 저 스스로 운동하는 근본과 관련해 옥타비오 파스(1914-1998)는 (활과 리라)에서 "시는 자연과 인간의 재봉합을 지향하는 문학 양식이고 여기에는 두 개의 방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때의 두 개의 방향에 대해 옥타비오 파스는 "하나는 과거적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적이다"'라고 덧붙인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하는 "과거적"이라는 것은 과거에 상실된 파라다이스에의 의지에 닿아있다는 뜻이고, "미래적"이라는 것은 미래에 건설해야 할 유토피아에의 의지에 닿아있다는 뜻이다. 이들 과거적 파라다이스나 미래적 유토피아는 공과 색이 불이의 하나이고, 유와 무가 불이의 하나이듯 하나이다. 구태여 과거에 미래가 들어있다는 헬레나 노르 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의 '오래된 미래"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는 자명하다.
'자연과 인간의 재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시라는 옥타비오 파스의 주장은 김준오 교수가 시를 가리켜 '동일성의 양식'이라고 말한 것과도 다르지않 다. 이때의 동일성의 세계는 조동일 교수가 '서정 양식이 이성과 감성이 미 분화되어 있는 세계'를 추구하는 장르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본래 시(서정시)는 자연을 포함한 세계와의 재통합, 새로운 하나된, 곧 새로운 순환하는 불이의 경지를 추구하는 언어예술 양식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물론 시가 그러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오늘의 인간과 자연이, 곧 만물이 서로 분리된 채, 서로 소외된 채,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고통과 상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새로운 재통합, 새로운 하나된, 곧 새로운 순환하는 불이의 경지가 곧 성이나 성스러움의 경지이고 내용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공자의 '종심을 말하면서 이미 상세하게 강조한 바 있다. 방민호 교수는 스피노자의 신관을 받아들여 성이나 성스러움이라는 말보다는 신성이나 신성스러움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어 나와 얼마간 견해를 달리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논의가 사실이라면 서정시의 구체적인 실제에서는 성이나 성스러움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준오가 자신의 시론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정도나 방법의 차이가 있기는 하더라도 제대로 된 서정시라면 공히 서정적 조화의 정서, 곧 시적 합일의 정서, 순환하는 합일의 경지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따져보면 제대로 된 서정시는 모두 성이나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동화의 방법이든 투사의 방법이든 합일의 정서, 일치의 정서를 추구하는 것이 제대로 된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김준오 교수의 동일성 , 존 듀이의 통전(統全), 에밀 슈타이거의 회감(回感)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서정시가 하나의 세계, 둘이면서 하나인 세계를 추구 한다는 것은 이미 보편화되고 정당화된 이론이다.
더러는 서정적 일치, 곧 합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극적 갈등의 정서, 곧 파토스적 대립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시도 창작되기는 한다. 지난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의 저항시, 혁명적 낭만시 등이 그 구체적인 예 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분리나 분열에 따른 갈등과 대립, 길항의 세계를 넘어 참된 평화, 참된 공동체, 곧 화합과 일치, 합일과 통전소, 즉 주 객일치의 세계, 물심일여의 세계를 진실하게 추구하는 것이 서정시의 본질인 것은 사실이다. 서정시는 파라다이스에 기초한 시원의 과거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유토피아에 기초한 문명의 미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의식의 지향을 함유하고 있다. 파라다이스와 유토피아의 관계 역시 무와 유의 관계, 공과 색의 관계, 곧 불이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사람에게 품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듯이 시에게 품성 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품성에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있는 만큼 그것을 반영한 시의 품성에도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서정시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정도나 질, 품위나 기품 등에 있어서는 일정한 정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 존재 하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 곧 성스러움이 좋은 시가 갖고 있는 운기, 곧 호연지기를 만든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더불어 그것은 시인의 정신이 갖고 있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 곧 성스러움을 반영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