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스로 인해 두달 가까이 북경에 갇혀 지내다가 다른 지역에서 이제는 북경에서 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격리 수용치 않는다고 하여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은 강열한 욕망을 참지못해 지도책을 여기저기 뒤지다 山東省 德州 陵縣 神頭 附近에서 東方朔墓라는 곳을 봤다.
동방삭이라,
초등학교 시절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기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오전 10:00시 바로 차를 몰았다. 마침 덕주(德州) 근처에 소록왕묘(蘇祿王墓)라는 곳도 있어 같이 구경하기로 하고.
京津塘高速道路에서 빠져나와 京후高速道路로 들어서니 싸스검문소가 있어 차를 세우고 러시아 룰렛하는 기분으로 눈을 꽉 감고 머리에 체온계 총을 한방 맞고 통과하여 南을 향해 달렸다.
前週에 비가 많이 온 때문인지 공기가 비교적 쾌청하여 오랜만에 중국의 고속도로에서 조금은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다.
사실 중국의 고속도로는 우리의 고속도로와 비교하여 자동차 여행으로서의 맛이 정말 없다.
우리의 고속도로는 산이며 강이며 굽이굽이 끼고 돌아 미려한 산과 천이 어우러진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청량감 있는 여행을 맛볼 수 있는데 중국의 고속도로여행(북경을 중심한 京字가 앞에 붙는 고속도로만 다녔으므로 혹 그렇지 않은 다른 곳이 있을 수도 있음)이란 광활한 대지에 그어진 선을 따라 끝없이 밋밋하게 달려가는 것 외에는 별 맛을 볼 수 없다.
대체로 북경을 경계축으로 하여 동쪽편의 도로들 양옆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 옥수수밭이고 산이 있다 하여도 나무 한그루 없는 헐벗은 밋밋한 구릉이 거의 전부이며, 왼쪽편의 도로들은 황량한 황토의 평원과 고원과 구릉의 땅만이 눈에 가득한편이다.
왜 하북지방과 그 근처 성들의 산들은 나무가 없을까?
중국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산의 바위가 많은 지질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에 약간 의심이 간다.
옛날에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으니 전쟁시 산불도 많았을 것이고, 크고 작은 왕조의 변동이 무수히 있었으니 신 왕조가 생기면 궁궐 짓는 다고 엄청난 나무를 베었을 것이고 또 인구가 많으니 많은 사람들이 베어서 집도 짓고 뗄감으로도 쓰고 그러다가 홍수가 나면 흙이 쓸려 내려가고 이같은 과정에서 산의 토층이 벗겨져 이젠 완전히 바위가 드러난 상태가 되어 나무를 심어도 잘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 본다.
중국에 와 보니 왜 중국인들이 해동국에 가면 금강산을 가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한반도를 아름다운 강산이라고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 넓은 땅덩어리에 금강산, 설악산, 지리산 등등 보다 좋은 산이 몇이나 있나. 黃山? 泰山?, 華山?, 恒山?, 嵩山?, 衡山?
황산정도는 비교대상이 될까? 물론 경치 좋은 명승지는 땅이 넓으니 많겠지만 산은 정말 우리의 산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중국의 京石高速道路 동쪽에 있는 거의 어떤 도로에서나 그 광활한 대지가 항상 운무에 뒤덮혀서 - 무엇이 타는 냄새와 먼지 안개, 한마디로 옅은 스모그 상태 - 공기가 메케하여 숨을 크게 쉬기가 싫었는데 사통팔방이 탁 튀어 어디 막힐 데 없이 광활한 평원에 왜 공기가 그렇게 좋지 않은지 이유를 모르겠다고(아시는 분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투덜거리며 운전을 하곤 하였다.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은 싸스의 내습으로 인하여 중국인의 위생관념이 많이 각성이 된 탓인지 전보다는 훨씬 깨끗해 진 것 같다. 좀 잔인한 말 같지만 가끔은 이러한 재해가 있어서 중국인민들이 위생관념 등을 각성치 않으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 보는 것이 중국의 장래를 봐서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중국의 시골구석을 다니다 보면 너무 위생상태가 엉망이어서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싸스로 인해 많이 정신 차렸겠지.
언젠가 山西省 渾源이란 곳에 갔었는데 그날이 무슨 명절인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래도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胡笛 불고 꽹과리 치고 秧歌兒(양걸) 추고 모두들 흥겹게 노는 모습이 우리의 시골에서 풍물놀이 하는 것처럼 보여 사람 사는 곳이면 노는 방식이 거의 비슷하구나 생각하며 따라가면서 구경하였다.
그러다 그곳에서는 큰길 축에 드는 어느 곳에 쓰레기와 사람 오물의 범벅이 온 길에 질퍽하게 깔려 그것이 튈까봐 기겁하여 그곳을 피해 나왔던 기억이 난다.
휴게실의 식당에서 파는 大排當(?)(여러가지 찬을 비치하고 찬마다 돈을 받아 찬을 선택하는 먹는 방식) 음식이 좀 께름직하여 康師傅 컵라면을 사서 휴게실에 비치된 뜨거운 물에 기름장은 풀어넣지 않고 먹었는데 배가 고팟던 탓인지 아주 맛있게 먹었다.
가끔 북경근교 나들이 갈 때 식당에서 먹지 않고 그냥 강스푸 컵라면으로 한끼를 때우곤 하는데 나로서는 별 식도락이 없기 때문에 훌륭한 한 끼가 되어 자주 애용하는 편이다.
한 4시간을 달려서 덕주의 소록왕묘를 찾는데 도심지에 있기에 위치를 잘 알려 주어서 편하게 찾았다.
소록왕은 필리핀 남서부에 위치한 수루열도의 왕으로 明 永樂帝 時代에 鄭和의 원정외교의 일환으로 아마 중국에 朝貢온 것 같은데 돌아갈 때 덕주부근에서 전염병에 걸려 아들과 같이 병사하였기에 무덤을 덕주에 조성하였다 한다.
묘 초입에 청진사가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수루왕은 이스람교를 믿었던 것 같고 그의 수행원들 중 필리핀에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서 그대로 산 사람들이 있는데 현재 북경 천진 화북지방 등에 그 자손들이 있다고 한다. 입장료 5元
그런데 그 초상화를 그려 놓은걸 보니 중국식 복장(조선시대 왕의 복장과 흡사하였음)을 하고 생김새도 중국인 바로 그 자체로 그려 놓았는데 실제 코가 낮고 옆으로 퍼졌으며 얼굴은 양쪽으로는 넓고 위아래로는 길지 않는 필리핀 사람들의 생김새와는 완전히 다르게 그린 것을 보아 최근에 적당히 그린 것 같았다. 이것 또한 중국식이지. 하하. 코카콜라를 可口可樂로 표기하는 것처럼.
묘당 뒤에는 묘가 있었는데 직경이 한 7-8m 높이가 한 3m 정도의 우리나라 임금의 릉 보다 좀 작은 규모이었다. 그래도 타국의 국왕이니 조금의 대우는 해 주었던 것 같았으나 왕이 만리타향 외국에 와서 병사하여 제나라 땅에 묻히지도 못한 것을 보니 약소국의 설움을 다시한번 느꼈으며 대한민국이 계속 발전하여 중국을 압도하여서 예전과 같이 중국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경우가 없도록 단단히 정신차렸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현실은 그 작은 땅덩어리조차도 두조각으로 갈라져 한쪽은 집단이기주의와 편가르기로 인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상황에 빠져있고 또 한쪽은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음을 무릅쓰고 살던 땅을 도망쳐 타국으로 넘어오는 아수라의 땅이 된 우리 조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조금 마음이 답답해 졌다.
그러나 오늘은 놀러왔으니 마음 가볍게 놀자.
그곳에서 나와 한 30분 달려 陵縣 근처에 가서 물어물어 동방삭묘를 찾아 나섰는데 찾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주위가 모두 끝없이 펼쳐진 밭이고 길가에 집이 있다고 해보았자 그만그만한 특징없는 붉은 벽돌집이니 찾기에 중심점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직도 그곳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중얼거리며 가르쳐 주는 것을 보니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중국와서 얼마 되지않아 아마 97년 5, 6월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연히 지도를 보다 북경 남쪽에 탁州(중국발음 zhuo zhou) 라는 곳이 보이고 누상촌(樓桑村)이라는 곳이 있기에 혹시 삼국지의 촉나라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한 樓桑村이 아닌가 하고 무작정 찾아 나선 일이 있었는데 정말 그곳에는 桃園結義를 했다는 장소가 있었고 유비와 장비의 자손이라며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과도 잘 통하지 않는 중국말로 즐겁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또 부근에 유비의 고향이 있다기에 물어물어 가보니 밭 한가운데 요즈음 세운 듯 한 비석 한 개만 덩그러이 서 있고 비문에는 "이곳이 유비의 옛 집이 있던 곳이며 이곳에 거대한 뽕나무가 있었는데 몇 층 누각처럼 보였다" 라는 글도 있었다.
이곳에서 유비가 돗자리를 짜서 팔아 자기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던 곳이구나, 여기서부터 삼국지 이야기가 시작되었지 하는 생각을 하며 2000년 전 군마와 창검이 난무하고 영웅호걸이 세상을 호령하였던 그 시기의 장면들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감을 잠시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지도에 劉備故里라는 표시는 되어 있지만 시골 밭 한귀퉁이의 초라한 비석 한 개만 덩그러이 놓여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하였는데 이 곳도 그와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농부들로부터 물어서 간신히 찾아 간 곳은 온통 누렇게 익은 끝없이 펼쳐진 밀밭 한 귀퉁이에 소록왕 무덤 규모 비슷한 크기의 묘가 외로이 누워있었고 묘 한쪽에 북경의 四合院의 대문을 들어서면 내부를 외부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影壁墻 비슷하게 벽을 세워 동방삭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는데 사람의 형상부분은 오래되어 그림 그려진 곳은 완전히 뜯어져 나가 버렸고 주위는 비닐봉지가 굴러다니고 전혀 관리를 하지 않아 스산하였다.
자손들도 관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묘 옆 5m 정도 떨어져 서 있는 커다란 비는 최근에 만든 것이었는데 역사문물을 설명하는 아무런 설명문도 없고 단지 00문물보호단위라는 것과 동방삭묘 4자 뿐이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촌로들에게 동방삭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였느냐고 물어보니 잘 알지 못하여 다시 큰길로 나와 몇 곳에서 물어보니 근처의 00농약가게에 가면 알려줄 것이다 라고 하여 갔었다.
중국의 상점 같은 곳의 입구에 처진 비닐로 된 차양발을 밀치고 들어갔다. 한 60정도 보이는 할머니가 밀가루로 반죽을 하다가 나왔는지 손에 밀가루를 뭍이고 나오기에 물어보니 자기는 잘 모르고 할아버지가 곧 올 터이니 물어보라고 한다. 5분정도 그 할머니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와서 물어보니 있는 성의를 다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동방삭은 前漢 武帝때 사람으로 옛 염차(厭次 現 山東省 平原縣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文人이고, 활달하고 재치가 있었으며, 황제의 측근에서 조언을 해주었다고 하니 일종의 책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에 대하여 듣고 싶어 이리저리 유도질문을 하여도 전혀 오래 살았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서왕모가 武帝에 선물하려고 가지고온 천도복숭아 30개중 3개를 훔쳐먹었는데 이 복숭아는 하나 먹으면 1,000년을 산다는 천도복숭아로서 3개를 먹었으니 3000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러면 한무제는 27,000년을 살아야 하는데 나원참... 좀 적당히 아귀를 맞추어 허풍을 떨어야지 한무제가 27,000년 살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동방삭만 3,000년 살았다면 어떻게 하냐?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혹시 동방삭의 설화에 대하여 더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세요)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남시를 흐르는 탄천의 유래에(인터넷 상에서 따왔음),
동방삭이 3,000년을 살고 이젠 명부의 수명이 다하여 저승사자가 잡으러 다녔으나 얼굴을 알 수 없고 너무 오래 살아 노회하여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기 때문에 동박삭이 탄천 근방을 배회한다는 소문을 듣고 염라대왕이 꾀를 내었다.
염라대왕의 지시대로 저승사자가 숯을 탄천에서 씻고 있었는데 동방삭이 탄천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까만물이 흘러와서 올라가 보니 어떤 사람이 숯을 씻고 있기에 "왜 숯을 씻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숯을 하얗게 만들기 위하여 씻고 있다"고 하자 동박삭이 "내 3,000년이나 살았지만 숯을 희게 하기 위해 씻는다는 것은 생전처음 보았노라"고 하여 저승사자가 아 이노인이 동방삭이구나 하고 알아차려 잡아갔다고 하며 이 후로는 이 천을 탄천이라고 하였다 라는 설화가 있다.
하여튼 너무 열심히 성의껏 설명을 해주기에 정말 고맙고 그냥 가기가 너무 미안하여 돈을 20원 쥐어주면서 "담배나 사 피우시라" 하였더니 "아니다. 나는 이 시골구석까지 동박삭을 알려고 온 한국사람에게 설명해 준 것으로 충분히 마음이 뿌듯하고 좋다. 그러니 돈은 전혀 필요 없다" 라며 정말 절대로 받지 않으려고 하여 계속 실갱이하고 있으려니 자꾸 시간이 가기에 고마운 마음을 "정말 고맙다" 라는 말로 표하고 하고 그냥 나왔다.
그 촌로로서는 20원 정도면 가질 마음이 생길 수 있는 돈일 터인데 절대로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니 못살고 풍족하지 못하여도 자존심을 지키는 모습에서 좋은 인상이 마음에 와 닿았다.
중국 여러 곳을 다녀서 이런 경험 저런 경험 많지만 그렇게 나쁜 경험은 없는데 왜들 중국, 중국인 하면 치를 떠는지......
가끔 다닌 여행지마다 옛날 우리 시골의 장삼이사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순박하고 정감가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기념품 파는 때 꾀죄죄한 아낙네, 노인네, 어린아이, 아저씨들의 기갈스러움은 가끔 느꼈으나 그것도 우리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 갔다 물건사지 않고 나오면 뒤통수에 대고 퍼붓는 상소리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나 생각이 들었는데......
그리고 중국에서 물건 사다가 그냥 나오더라도 뒤통수에 대고 상소리 하는 것은 못 보았는데(내가 중국말을 잘 모르니 못 알아들어서 그러나)......
하기야 나로서는 商事를 전문으로 하지 않으니 속고 당하고 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생길 것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
그러나 사람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이 생기게 마련인데 여기 중국통에 올라오는 중국에 대한 저주 비슷한 나쁜 인상을 느끼도록 하는 나쁜 일이 없었는데......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리 속에서 왔다 갔다 한다.
그럭저럭 오후 6시가 되어있었다. 바로 북경으로 북경으로 달려서 올 때의 싸스검문소에서 다시 한번 총맞고 좀 더 달려서 숙소에 도착하니 10시 반. 씻고 꿀맛같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 동방삭을 만나서 천도복숭아 반쪽만이라도 얻어먹을 수 없는가 하고 물어보기로 하고......
재미도 없는 것을 읽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추신 : 동방삭묘는 거대한 역사유적이나 볼거리가 많은 곳은 절대 아니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