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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멕시코로 팔려간 한국인 노예이민
조 창 용(칼럼니스트/한말이민사 전공)
2003년 8월, 필자는 쿠바 마탄사스를 찾은 적이 있었다. 필자가 쓰고 있는 대하역사소설 '어저귀' 무대를 찾아 나선 문학여행길이었다. 쿠바는 지구상에서 북한과 더불어 유일하게 폐쇄적 사회주의를 고집하는 나라다. 우리와는 몇 안 되는 미수교국이다. 그리고 문호 헤밍웨이 말년의 생가가 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욱이 100년 전 정착한 우리 노동자들의 흔적을 찾는 기대감에 잔뜩 흥분된 여행길이었다. 마탄사스 방문은 멕시코 유카탄에 이은 또 다른 감동 속에 시작되었다. 이 글은 그 때의 감동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쓴 것이다. - 필자 주 - |
그림1 쿠바 마탄사스 어저귀농장
에네켄(Henequen)이 본래 명칭이다.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龍舌蘭)의 일종으로 잎이 넓고 알로에 같은 가시가 있는 식물이다. 높이가 4∼8m에 길이가 1∼2m, 너비 20㎝로 잎에서 원료를 뽑아 선박의 밧줄이나 거친 천을 생산한다. 당시 멕시코정부는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여 어저귀를 생산했다.
멕시코이민은 일본인 이민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가 모집한 1천33명을 멕시코 유카탄주에 이주시킨 노동이민이다. 이들 이민은 주로 『대륙식민합자회사』의 꾐과 납치 등 강제에 의해 서울과 인천, 부산 등지에서 모집되었다. 대부분이 소작농·부랑인·어부·품팔이·무직자들이지만, 200여명의 광무군인 출신과 전직관리 등도 탑승했다. 이종오와 같은 황족 출신은 물론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다양한 신분층이 이민대열에 가세했다.
이들 이민은 1905년 4월 4일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40여일의 긴 장거리 항해 끝에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메리다시 주변 첸체(Chenche), 사실(Za-Cil) 등 24개 어저귀 농장으로 각기 팔려갔다. 어저귀는 본래 헤네켄(Henequen)이라 하여 선인장과에 속하는 알로에와 비슷하게 생긴 식물이다. 유카탄주는 어저귀 잎에서 실을 뽑아 주로 선박의 밧줄이나 마대용 천 등을 만드는 주요 산지다.
그림2 이민들이 거주했던 가옥 <파하>
첸체농장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비교적 양호한 주거지다. 양철로 지붕을 만들고 나무기둥과 나뭇가지로만 둘레를 쳤다. 대게 출입구만 있고 창문은 없는데 실내는 흙바닥이다.
그림3 멕시코 한인노동자 초창기 사진
1905년 농장에 도착 직후로 추정되는 어저귀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 사진. 한복을 입고 있으며, 어린아이들이 눈에 띈다.
이민들은 같은 ‘노예’ 신분이긴 하지만 원주민인 토인보다도 더 심한 대우를 받았다. 매일 할당된 어저귀 잎 따는 일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을 맞으며 밤늦게 까지 일을 해야 했다. 항의라도 하면 가차 없이 채찍이 날아들었다. 밤이면 토굴과 같은 움집에서 기거하며 겨우 죽이나 끓여서 연명하는 정도였다. 병이 나면 치료는 고사하고 배로 실어 바다 한가운데 수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농장주 맘에 들지 않으면 물건을 사고팔듯 돼지가격보다도 싼값에 거래되는 처지가 되었다. 여자는 농장주의 성노리개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농장생활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살을 하는 일이 속출했다. 탈출하다가 잡히면 물에 적신 로프로 알몸을 맞는 형벌이 가해지고, 토굴에 가두어 며칠씩 밥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발목을 자르는 참혹한 경우도 있었다. 이민들은 토굴집과 농장을 오가는 일 외에는 바깥출입도 허용되지 않았다. 흡사 한국판 앨릭스 헤일리의 ‘뿌리(ROOTS)’를 보는 것과 같은 처지였다.
그림4 어저귀농장에서 노동자
1920년대 이후로 추정되는 멕시코 어저귀농장에서 한인노동자의 작업모습이다. 이 시기는 노예상태를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가운데 노동을 했다.
이런 가운데 서울 상동교회내 비밀구국단체인 상동청년회는 이범수·박장현을 현지에 파견해 이민조사에 나섰다. 미주지역에서는 『대한인국민회』가 황사용과 방화중을 파견했다. 이 같은 이민구제 사업은 한동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일합방을 계기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1910년을 기점으로 멕시코 이민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농장에서 해방된 일부 이민들과 탈출자를 중심으로 군인양성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1910년 11월 17일에 설립한「숭무(崇武)학교」이다. 이는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와 미국 네브라스카주의 「한인소년병학교」그리고 하와이의 「국민군단사관학교」의 독립군 양성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들 학교는 각 지역과 연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장차 있게 될 일제와의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멕시코 이민사회가 ‘노예이민’이라는 어려운 환경을 겪으면서도 짧은 기간에 「숭무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으로 나선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이민 중에 광무군인 출신이 200여명이나 있어 군사교육이 용이했던 탓도 있지만, 미국 본토 『대한인국민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일제와의 독립전쟁은 무산됐지만 「숭무학교」를 통해 양성된 군인들의 활약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양성된 군인들 중 일부는 1913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과 과테말라 혁명군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는 곧 이민들이 멕시코 사회의 주류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셈이다.
그림5 쿠바 마탄사스 전경
멕시코 이민 288명이 처음으로 정착한 쿠바 마탄사스 전경. 아름다운 해변을 뒤로 하고 작업현장인 어저귀 농장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1921년에 멕시코이민은 또 한번의 전기를 맞게 된다. 이들 이민들 중 288명은 쿠바 마탄사스로 집단 이주하게 된다. 이것은 쿠바에 정착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식적인 이민이다. 이들 중 일부는 1959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 이들은 카스트로가 집권하면서 혁명정부의 고위직까지 진출하여 한인들의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들은 온갖 학대와 고통을 겪다가 끝내는 쿠바에까지 흘러 들어가 곤궁함을 면치 못하는 처지의 연속이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멕시코나 쿠바 교포사회의 뿌리는 한말 멕시코 ‘노예이민’에 비롯된다. 지금 멕시코나 쿠바에는 이민1세가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2세 3세로 내려가면서 정부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 뿌리의식마저 상실된 채 현지사회에 급속히 동화되고 있다. 특히 쿠바교민은 그 실체마저도 파악하지 못한 채 85여년을 단절한 상태로 있다. 그러나 이들은 1세대가 그랬듯이, 버림받은 조국을 원망하기는커녕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한글교육을 하는 등 눈물겨운 조국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05년 5월 멕시코이민 100주년은 다소 무관심 속에 맞았다. 오는 2021년이면 쿠바이민 100주년이 된다. 쿠바이민 100주년 역시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이때를 위해 멕시코·쿠바이민사의 재조명을 위한 사업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소홀히 다뤄왔던 이민사에 대한 복원을 위해서도 그렇고, ‘노예이민’으로 온갖 수모와 역경을 감내하며 조국사랑을 실천했던 선조들의 얼을 기리는 차원에서도 그렇다.(《휴먼메신저》창간호 2007년 봄, 한국휴머니즘문인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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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주 좀 올려주세요~^^*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