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에 영화 팬들에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시나리오 작가가 있었다.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의 각본을 쓴 박훈정이다. 두 영화 모두 익스트림무비에서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작품이기에, 박훈정이란 인물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 후 박훈정은 <혈투>로 감독 데뷔를 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절치부심, 박훈정 감독은 <신세계>란 제목의 느와르로 다시 돌아왔다. <부당거래>의 매력적인 스토리텔링과 강렬했던 캐릭터의 마력을 떠올려보면, 이번야말로 박훈정의 솜씨를 제대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세계>는 묵직한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다. 흡인력 있는 이야기와 배우들의 호연이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영화가 살아있으니, 이번엔 인터뷰를 지나칠 수 없었다.
날짜 : 2013년 2월 18일
장소 : 홍대 어느 카페
인터뷰어 & 정리 : 김종철(다크맨)
(영화의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으니, 가급적 영화를 보신 분들만 읽기를 권합니다.)
첫 번째 영화 <혈투>는 흥행에서 실패했다. <신세계>의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 굉장히 클 것 같다. 정신적으로 부담이 굉장히 심하다. 이번엔 정말 잘 만들고 싶었다. <혈투>를 찍을 때는 멋모르고 했다. 제작 상황이 열악했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게 너무 많았던 영화이고, 흥행이 실패해서 다음 작품을 하는데 걱정이 많았다. 게다가 이번 영화는 센 배우들도 붙어 버려서 부담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꼭 <신세계>가 아니어도, 영화를 내놓는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개봉을 앞두고는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다.
첫 시사를 하기 전에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큰일이야, 그냥 도망가 버릴까? 이거 어떡하지?” 안절부절 근심 걱정에 살이 많이 빠졌을 정도다. 지금도 잠을 제대로 자기 힘들다. 흥행을 떠나서는 같이 작업을 했던 배우들과 스탭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 현재 영화적으로만 봐서는 그렇게 된 거 같아서 마음은 놓인다.
이야기꾼이란 소문이 자자하다. 시나리오를 쓴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는 익스트림무비에서 굉장히 좋아하고 지지했던 영화들이다. 두 분 감독님 인터뷰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쓴 박훈정은 누구일까? 호기심을 가졌다. 인터뷰마다 반복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을 하게 된 과정을 듣고 싶다. 고등학교 때 만화가가 되려고 했는데, 아무리해도 그림이 늘지 않았다. 그 후 일 년 정도 중심을 못 잡고 방황했는데, 영화 세 편을 동시상영해주는 극장에 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신세계'같은 느낌을 받았다. 영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관련 자료도 구하기 힘들었고, 영화학과도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법서와 영화 잡지를 열심히 읽었다. 그 결과 영화를 하려면 시나리오를 먼저 써야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무진장 영화를 보러 다녔다. 동네 비디오가게를 싹 훑었고, 일본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을 들락날락되며 영화를 봤다. 자막이 없어서 무슨 내용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반복해서 보니 이해가 되더라. 그 후엔 비디오를 보면서 시나리오 쓰는 연습을 했다. 장면과 대사를 쓰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대사도 새로 쓰고, 엔딩도 바꿔보고 했다. 그렇게 쓴 시나리오는 내가 본 영화와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다.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계속 써오다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장편 하나를 완성했다. 이야기 중에 지하철이 탈선도 하고 갖가지 사건도 많아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이야기였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엔 주로 어떤 영화들이 영향을 끼쳤나?홍콩영화나 독일영화들이 영향을 많이 주었다. 그땐 한국영화가 지금처럼 활발하게 제작이 되던 시기가 아니었다.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은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할리우드나 홍콩영화와 비교해서 많이 심심한 편이었다. 그러니 한국영화를 잘 안 보게 되더라.
비디오가게에서 영화를 고를 때 선호한 장르나 감독이 있다면? 처음 좋아했던 감독은 데이빗 린치였고, 그가 찍은 영화들을 선호했다. 영화는 딱히 선호하는 장르를 골라서 보는 건 아니었고, 닥치는 대로 보고 즐겼다. 유독 좋아했던 장르물은 미스터리나 스릴러, 정치물이며, 특히 갱스터나 느와르에 환장했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는 자신이 없다. 사람들이 정말 저러나 싶기도 하고, 여자들 심리를 알 수가 없으니.
혹시 결혼은 했는지?했다.
그럼 연애할 때 과정을 떠올리면 로맨틱 코미디물도 쓸 수 있지 않을까?잘 모르겠다. 그쪽 장르는 정말 자신이 없다. (웃음)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쓴다면, 소설이나 TV드라마 쪽도 생각해봤을 것 같은데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TV드라마 쪽 생각해본 적 없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다. 영화를 선택한 건 소설보다는 영화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고, 막연히 그쪽을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창작의 고통이란 게 있는데, 내 경우엔 그게 마냥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또 내 성격이 얌전하고 무거운 편도 아니어서, 다이내믹한 영화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는 어땠나.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은데.시나리오를 완성하면 출력하고 봉투에 넣고, 밤이 되면 공중전화박스를 찾아갔다. 영화제작사 전화번호를 찢어와서 다음날부터 전화를 돌렸다. 제작사와 연결이 되면 시나리오를 우편으로 보내라고 하는데, 나는 봉투를 들고 직접 방문했다. 그렇게 해서 연락이 온 곳은 한 군데 밖에 없었다. 미팅을 하면서 내가 들은 얘기는 회사 상황이 좋지 않고 어렵네 식의 넋두리다. 당시엔 주변에 영화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영화판이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고, 이 길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나에게는 장점이었던 것 같다. 자세하게 잘 모르니까, 계속 도전하고픈 의욕도 생겼고. 사실 영화를 가지고 밥을 먹고 산지는 5~6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한때 그만두자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양아치 같은 인간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영화판에 저런 인간들밖에 없나해서다.
<혈투>에 이어 <신세계>가 두 번째 연출작이다. 시나리오를 쓴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혈투>는 뜻밖의 선택이다. 무협만화의 스토리도 한 때 쓴 걸로 아는데, 원래 그쪽 장르를 좋아해서 <혈투>를 쓰게 된 건가?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중학교 이후로 그림이 늘지 않았다. 어느 장면에서든 캐릭터의 얼굴을 유지시켜야 되는데, 나는 캐릭터의 액션에 따라서 얼굴이 달라졌다. 아!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대신 만화 스토리 작가로 2년 정도 일을 하게 됐다. 만화방에 들어가는 소위 공장만화 스토리를 짜는 일이었다. 만화 스토리 작가들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호황인 때도 있었지만,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시장이 나빠졌다. 그래도 금전적인 면에서는 괜찮았던 것 같다. 영화의 경우 시나리오 작업을 많이 했는데 돈을 받은 기억이 없다. 만화 쪽은 금액이 크든 작든 약속한 날짜에 약속한 금액이 정확하게 통장에 찍혔다. 어떤 때는 미리 입금시켜주기도 했다. 지급일이 토요일인데 금요일에 돈이 들어와서 깜짝 놀라곤 했으니. 전화를 해서 "왜 돈을 미리 보내셨어요?" 하니, “내일이 주말이어서 보냈지”라고. 그때 정말 감동받았다. 만화 일을 하면서도 계속 시나리오를 쓰곤 했다.
<신세계>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나?원래 가지고 있던 스토리의 중간 부분이다. 써둔 이야기는 1990년의 어느 날이 배경이며, 항만노조의 파업 현장에서부터 시작한다. 파업이 일어나면 회사와 용역 계약을 맺은 조폭이 투입되고, 경찰 쪽에서는 그것을 묵인해준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항만노조를 장악을 해나가는데, 그때 최민식이 연기한 강과장이 항만에서 잘린 목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사건으로 돌입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에픽 느와르였다. 1990년부터 20년의 세월이 배경이며, 세 남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2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력다툼을 해온 조직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기자간담회 때도 얘기했는데, 깡패들이 넥타이를 매고 정치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신세계>는 계속 고민을 하다 지금 현재 내 연출 역량을 고려했을 땐 중간부분만 빼와서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만들어졌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인가?그런 건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삐딱한 면이 있었다. 어른들이 얘기를 하면 곧이곧대로 안 받아들인다. 태도가 좀 반골기질도 있고 해서, 어떤 결과가 벌어지면 그 과정이 어떤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어쩌다 저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을까? 라며. 흔히 선악의 관계가 모호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결과가 나왔다. 피의자와 가해자가 있고, 결과만 놓고 보면 가해자가 비난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 이면을 따지고 보면 피해자가 원인 제공을 했을 수도 있다.
나는 선악이란 게 그 과정을 되짚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것이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다고 본다. 나는 뉴스를 절대 믿지 않는다. 그들이 얼마든지 정보를 가공해서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서 말이다. 단체나 조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팩트를 가공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뉴스를 삐딱하게 본다. “그게 그럴만한 일인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이런 내 성격이 영화에 반영되는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배경이나 사건, 인물을 만들어가면서 취재를 많이 하는 편인가? 취재를 하면서 그쪽에 대해서 공부한다. 그렇다고 너무 팩트에 매몰되면 이야기가 자유롭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의를 한다. 사실 이야기는 한 줄짜리 팩트만 있어도 만들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럴듯한 구라를 치는 거니까, ‘왠지 있을법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주면 성공적이다. 그래도 그 분야나 세계에 대해서 취재나 공부는 많이 하는 편이다. 나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는 써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자료 조사와 취재를 충분히 하여 먼저 이해를 해둔다. 그리고 남은 자료들은 최대한 빨리 잊어야 한다.
<신세계>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90년대부터 국내에 들어왔던 삼합회나 야쿠자들에 대해 조사했다. 그들의 폭력 자금이 흘러 들어와서 생겨난 신생 조직에 대한 자료를 찾고, 그들의 파트너가 어떤 사업을 했는지를 알아봤다. 검찰이나 경찰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관련 정보들이 굉장히 많다.
<혈투> <부당거래> <신세계>는 세 남자가 주인공이다. 삼각구도의 관계를 선호하는 이유는?
굳이 의도한 건 아닌데, 이야기를 완성하면 그렇게 돼버린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보통 캐릭터보다 이야기를 먼저 만든다. 나는 사건과 상황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엮이게 되는 인물을 등장시켜 나간다. 그 과정에서 삼각구도가 가장 재미있는 것 같다. 때론 같은 편이 되어 한쪽을 공격하고, 손을 잡은 인물들이 서로 뒤통수를 치면서 물고 물리는 상황은 삼각관계가 최고인 것 같다. 만약 네 명이 된다면 2:2로 편을 먹을 수도 있는데, 세 명이면 편을 먹기도 애매하지 않나. 신이 내린 가장 공정한 게임이 가위바위보라고 생각한다. <스타크래프트>도 세 종족이 피터지게 싸우지 않나. (웃음)
작업하는 영화들이 모두 남성 위주의 이야기인데다,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나 활약이 미미한 것은? 여자를 모르기 때문에 쓰기가 어렵다. 그런 질문들을 많이 듣는데,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휘말리는 인물의 직업은 뭐고 반응은 어떤지 머릿속에 그려져야 하는데, 여자 캐릭터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하다. 그리고 장르물에 흔히 나와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를 내 영화에 심는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캐릭터가 정형화될 것 같고, 남자들 이야기에 여자들이 들러리를 서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스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염두에 두었는지? <신세계>를 포함한 네 작품의 시나리오 중에 최민식과 황정민이 각각 두 영화에 등장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캐스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미리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면 캐릭터가 갇혀버린다. 그건 내가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를 따오게 되는 거라서, 쓸 때는 그런 걸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작업이 끝나고 나서 제작에 들어가면, 그때서야 이 인물은 어떤 배우가 좋겠다는 고민을 한다. 최민식 선배와 황정민은 내 작품에 두 번씩이나 참여했지만, 우연의 결과다. <부당거래>의 ‘철기’를 황정민이 한다고 했을 때는, 내가 생각했던 인물과 매치가 안 됐다. 결과가 어떨까 궁금했는데 시사회 때 보니 정말 최적의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정민이 얇은 담배를 피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진짜 죽이는 거였다.
<신세계>의 캐릭터들은 캐스팅이 쉽지 않겠다 싶었다. 제작 진행되면서 최민식 선배와 황정민이 딱 박히니까, 그 조합은 끝내주는데 그럼 자성은 누가 좋을까? 또 다시 제작자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때 최민식 선배가 이정재를 제안해서 결정됐다.<신세계>는 처음부터 클래식하게 가고 싶었다. 진중하고 묵직한 느낌의 어른 영화가 목표였다. 영화 특성상 스피디하거나 현란하게 갈 수는 없었다.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질척거리는 걸 정적으로 보여주자는 생각이었고, 그 세 배우가 최적의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관객들도 일단 배우가 주는 무게감에 기대할 테니 유리할 것 같았다. 솔직히 캐스팅이 다 되었을 때는 “이거 내가 사고를 쳤구나! 어떡하지?” 싶어 걱정이 장난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쓰면 유난히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을 텐데, <신세계>에서는 누구인가?내가 쓴 캐릭터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그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상황이 되면 고통스럽다. <신세계>에서는 강과장 캐릭터를 가장 좋아하고, 또 미안하고 안쓰럽게 생각한다. 강과장은 외로운 인물이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일에 중독이 된 사람이다. 일 때문에 개인 사생활이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세 인물 가운데 심정적으로 봤을 때 가장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 강과장에게 유난히 마음이 간다.
캐릭터에 애정을 쏟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인물의 비중을 크게 가져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원래 이야기에서 강과장의 비중은 영화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있는가? 원래 시나리오에는 일 중독자로서 강과장의 면모들이 있다. 그걸 묘사하면 강과장이란 인물에 대해 더 잘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신세계>에서 강과장의 역할은 자성(이정재)이나 정청(황정민)과 비교해서 조금 가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판을 깔고, 뒤에서 은밀하게 작업도 해가면서 굿은 일을 도맡아서 한다. 이야기의 베이스가 되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을 움직이도록 설계하는 사람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하고자 비중을 크게 가져가지 않았다. 최민식 선배도 그걸 정확하게 캐치해서, 강과장이란 인물이 영화에서 도드라지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강과장이 늘 낚시를 하던 장소가 인상적이다. 내부는 세트 촬영일 텐데, 외부가 독특한 것 같다. 거긴 재개발 구역이다. 이야기의 무대 자체가 재개발 지역이어서 전국을 돌면서 제작진들이 장소를 찾았다. 외부는 인천에 있는 곳이고, 내부는 전라도 쪽 세트다. 건물 외관까지 세트로 만들기엔 여건이 되지 않아서, 전국을 돌면서 찍었다. 최대한 실제로 있는 장소를 이용해 찍고 부족한 것만 현장에서 손대는 식으로 작업했다.
강과장의 죽음은 <올드보이>와는 정반대 상황이다. <올드보이>에선 최민식이 김병옥을, <신세계>에선 김병옥이 최민식의 배를 갈라 죽인다. 의도적인 상황 연출인가? 촬영할 때도 두 배우가 그런 얘기를 했다. 이제야 복수를 하는 거라고. <올드보이>를 생각해서 캐스팅을 한 건 아니고, 하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면 의례히 나올 법도 한 뜨거운 우정 같은 테마를 다루지 않는다. ‘믿을 놈 하나 없는 비정한 세상이다’ 이런 생각에서인지?홍콩영화를 좋아하면서도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었다. 너무 과한 우정 묘사였다. 내가 이야기를 쓴 영화들의 성격이 우정을 묘사하기엔 다소 힘든 부분도 있고.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혈투> 같은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나부터 살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신세계>는 그럴만한 여지가 있어서 자성과 정청 사이에 뜨거운 우정이 조금 표현이 되긴 했다.
정청과 이자성의 관계가 끈끈하다. 황정민이 이정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우정인가? 아니면 자신보다 약한 동생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인가? 만약 우정이었다면 오랜 시간 자신을 속인 자성을 용서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정청과 자성의 관계는 안타깝기도 하고 슬픈 감정이 녹아있다. 사건이 일어난 후에, 그 둘 또한 가장 먼저 자신을 생각했을 것이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정청의 심리가 복잡해진다. 자성의 경우 정청 때문에 조직에서 힘을 쓰는 건데, 정청이 자리에 없게 되면 조직원들이 자신을 가만둘까? 아마 정청이 자성을 바라볼 때는 극중 대사처럼 진짜 형제처럼 마음을 주었을 것이다. 시나리오 초고에는 정청이 죽기 전에 자성에게 "너를 만나서 손해 본 게 없다"라고 말한다.
정청이 자성을 처음 만난 건 여수 밑바닥에 있을 때였다. 정청은 자성을 만나면서 진짜 일이 수월하게 잘 풀렸다. 그에게 자성은 행운의 상징이자 복덩어리인 셈이다. 그 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성의 진심을 보고 형제처럼 아끼지 않았을까. 경찰인걸 알게 되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분명 갈등이 있었을 것 같다. 살벌한 후계 전쟁 와중에 정청의 경우 본인이 쓰러지면 식구들은 살아남기 힘들다. 정청이 봤을 때 자성은 자기 후계자라고 여겼을 것 같다. 그게 하나의 계산이고, 또 하나는 강과장의 존재로 인한 계산이다. 자성을 직접 쳐버리면 강과장과 전면전을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놓이게 된다. 내 생각에 자성이 배신을 했음에도 여전히 동생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80%는 인간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계산적이지 않았을까?
세 명의 인물 중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이 가장 튀는 것 같다. 강과장과 자성이 차분하고 냉정하다면, 정청의 경우 어떤 때는 저런 또라이가 거대 조직의 2인자가 어떻게 되었을까 싶기도 했다. 정청은 여수 화교 출신이고 대한민국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소수자에 대해서 억압이 심한 나라인데, 거기서 살아남아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면 보통내기가 아닌 거다. 그렇게 살아남은 소수자들은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번 잘라내야 된다고 여기면 가차 없이 쳐버리고, 자기 동료는 진짜 형제처럼 대한다거나. 어릴 때부터 자라오면서 그런 것들이 형성이 되지 않았을까. 정청이라는 인물은 여수 바닥에서 굴러먹었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존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똑똑한 인물이었을 거다. 황정민과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도, 정청은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미친놈처럼 보여도 머릿속으론 끊임없이 계산을 하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자성과 정천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 형성의 과정을 보여주며 마무리가 된다. 결말을 그렇게 가져간 이유라면? 정청이 자성을 왜 특별하게 대하는지, 과거의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이 형제처럼 가까워지는 관계 발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장면을 찍기 전에 배우들과 제작자가 모여서 어떤 상황으로 갈지를 의논했다. 나는 두 사람의 과거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고, 다들 동의하면서 의견이 통일되었다. 처음 생각했던 건 자성과 정청이 횟집에 앉아있는 가운데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대사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정청이 자성에게 “너는 뭐로 할래?” 그럼 자성이 “나는 아무거나 할게요”라고 한다. 둘이서 얼굴만 보이는 상황에서,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궁시렁거리는데, 자성은 잘 모르겠다며 핀잔을 준다. 이때 카메라가 빠지면 사시미를 쫙 깔아놓은 게 보인다. 그리고 횟집을 나가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 막바지에 이르면 새로운 보스를 따르던 천안파가 결정적 순간에 자성의 편에 선다. 영화에서 이 과정이 생략돼 있다. 자성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나?원래 시나리오에는 자성이 그들을 끌어들이고자 미끼를 던지는 장면이 있다. 다른 조직이 볼 때 골드문이란 곳은 동경의 조직이다. 조폭계의 삼성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한 식구가 되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천안파도 그런 게 있었을 것이고, 가장 강했던 재범파가 무너진 상황이다. 조직이란 게 어차피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자성은 이들에게 돈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골드문과 관계된 유가증권도 같이 준다. 천안파는 그걸 받고 한 식구로 받아주어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원래 시나리오에 있던 내용이다.
<신세계>가 상업영화이기 때문에 마지노선이 있다. 반드시 맞춰져야 하는 시간이 있어서 편집하고 삭제했다. 현재 영화의 경우 원래 이야기에서 좀 빠진 부분들이 있다. 이야기를 다 살리지 못해 아쉬웠지만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을 더 살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고, 그 부분을 더 중요시하다 보니 넣을 수가 없었다.
영화의 폭력 묘사가 굉장히 살벌하다. 특히 드럼통에 사람을 넣고 콘크리트를 채운 뒤 바다에 던져버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드럼통을 이용하는 살인과 은폐의 아이디어는? 자료 조사를 하다가 어디선가 그런 게 실제로 있다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게 소문인지 진짜인지는 몰라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살벌했다. 영화에서처럼 드럼통에 사람을 넣고 콘크리트로 바르고 바다에 던지면 그걸 어떻게 찾아내지? 완전범죄가 저렇겠구나 싶었다. <신세계>는 액션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폭력 묘사가 애들 장난같이 보여서는 곤란했다. 무술감독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실제로 살벌한 폭력을 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걸 보며 쾌감을 느낄까? 아니면 두려움? 대게 그런 상황에 놓이면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을 만큼 얼어붙지 않을까. <신세계>는 액션으로 쾌감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끔찍하게 느껴지도록 구성했다.
<신세계>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자성이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밖을 나서는데, 문이 열리면 그를 맞이하는 익숙한 한국식 조폭들의 모습이 나오는 거다. 니들이 폼 잡아봐야 결국 조폭에 불과하다는 의미여서 재미있었다. 합법적인 사업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시미와 야구 망방이를 휘두르고 있으니.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넥타이를 맨 깡패들이 정치를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합법을 가장했지만, 결국 조폭인거다. 비즈니스를 할 때는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다가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본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의 합법화 사업이란 건 결국 방패막을 치고자 하는 의도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조폭이 합법적인 사업으로 전환한다고 해서 개과천선하는 건 아니다. 조폭을 미화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원래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겉으론 우아한척해도 근본은 조폭일 수밖에 없는 이들. 극중에서 이사회도 열지만 이사회를 통해 정상적으로 일처리가 되면 멀쩡한 기업이지 않나. 강과장이 뒤로 작업을 해놓는 것은 그들이 절대 자신들의 근본을 잊지 않을 거라고 봤기 때문인 거지.
<신세계>를 보는 관객은 <도니 브래스코> <무간도>와 같은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보스 장례식에서 사진을 찍던 경찰관의 카메라를 이준구가 부수고 돈을 바닥에 던지는데, <대부>의 소니 콜레오네의 장면과 겹쳐졌다. <대부>의 그 장면을 의도한 것이 맞다. 워낙 좋아하는 영화인데다, 그 장면을 유난히 좋아해서 한번 따라해 보고 싶었다. <대부>를 보면 소니 콜레오네가 당시로서는 절대권력이었을 FBI에게 강하게 저항하고, 카메라를 부수고 돈을 던지는데 그 장면이 왜 그렇게 후련하던지. 두 장면 정도는 의도한 것이 있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 약간의 오마주를 표하고 싶었다. 장르영화를 하다보면 내가 좋아했던 작품들의 영향을 어쩔 수 없게 받게 된다. 그 안에서 스토리를 내 식으로 다르게 구성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느와르에 유난히 애정을 쏟는 것 같다. 느와르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는가?느와르는 솔직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느와르들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랄까? 그런 쪽으로 솔직하게 표현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느와르 영화를 보면 남자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고, 쉽게 빠져드는 것 같다. 그리고 묵직한 이야기를 선호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연출과 시나리오를 병행할 계획인가?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연출과 시나리오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연출의 경우 내가 쓴 작품을 내가 구현을 해내는 것이어서, 슬슬 재미를 느끼는 중이다. 최근에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 사실 국내에서 시나리오 작가의 포지션은 애매한 편이다. 시나리오에만 국한한다면 그걸로 돈을 많이 벌든지, 아니면 좋은 영화로 남든지 해야 되는데 국내는 한 쪽도 성공하기 힘이 든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시나리오만 계속 쓰기는 쉽지 않다.
꿈꾸는 영화의 신세계가 있다면?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 나에게 영화의 신세계다.
첫댓글 다음에 다시볼게....(신세계 감독 인터뷰~ )
삭제된 댓글 입니다.
헐 나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두 월욜날 한 번 더 보러가ㅋㅋㅋㅋㅋㅋ
헐나돜ㅌ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우리빨리 400만만들잨ㅋㅋㅎㅋㅎㅋㅋㅋㅋ
ㅋㅋㅋㅋㅋ두번봤는데도 존잼이야..또보고싶어
내친구엉터리 얌황정민이경찰이엇는데 조폭으로되서 이정재살려준거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빵터졌넼ㄱㅋㅋ
자성이는 복덩어리♥
황정민과 이정재의 사이가 너무 흥미롭게 진행되었음
황정민은 정말 이정재를 많이 아꼈고 배신한다고 한들 곁에 두고싶었던거 같아
재미쪙
신세계 재밌었덩 ㅜㅜㅜㅜㅜㅜㅜ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번더보고싶어ㅠㅠ
진짜재밌어.......
세 번 봐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디 또 보고 시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봤는데 넘 멋지더라.....연기도 맛깔나고! 역시 권력이란ㅜㅜ 한번더ㅏ보고파ㅋㅋㅋㅋ
재밌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