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박물관
소재지 : 경남 함안군 가야읍 고분길 153-31 번지
관람정보
관람시간
3월 ~ 10월 : 오전9시 ~ 오후6시까지
11월 ~ 2월 : 오전9시 ~ 오후5시까지
※ 마감 시간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신정, 설날 · 추석 연휴
관람료 : 무료
단체신청
20인 이상의 단체는 원할한 운영을 위하여 사전 일정 조율 부탁드립니다.
해설요청은 관광교육과(055-580-3413)로 별도 문의 바랍니다.
어린이체험관 이용
초등학생 이하만 입장가능
평일은 10명이상 단체 우선 운영 : 하루 30분씩 8회 운영
예약필수
평일 예약 운영시간 : 10시~12시, 14시~16시
주말은 단체 및 예약 불가
평일 단체 예약 문의(055-580-3908)
관람 시 유의사항
사진 촬영시 플래쉬나 삼각대를 사용하여서는 안됩니다.
동물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음식물을 반입할 수 없습니다.
1.제1전시관
아라가야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지질, 선사시대에서 아라가야 멸망 이후인 남북국(통일신라)까지의 유물을 다루고 있어 아라가야의 흥망성쇠를 살펴볼 수 있다.
함안의 지질환경과 지질시대
함안은 경상남도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지리적으로 내륙과 해안으로 이동이 편리하여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이자 요충지였다. 강이 주는 풍요로움과 외부로의 우수한 접근성은 오랜 기간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함안 전통문화의 원동력이다.
함안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함안층에서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의 퇴적층으로 새 발자국과 공룡발자국 등이 확인되고 있는데, 당시 함안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대규모 호수 주변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호수 주변의 부드러운 땅에 남겨진 여러 흔적들이 굳어진 뒤, 융기되고 침식되어 현재의 지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함안 각지에서 화석이 확인되고 있어 공룡이 번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함안 용산리 백악기 새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함안 외암리 공룡발자국 화석(기념물)
최초의 함안인
함안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중기 구석기시대인 약 13만년 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구석기 유적이 다수 확인되고 있으며 지표조사에서도 구석기가 넓은 지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어 향후 더욱 많은 구석기 유적이 확인될 것으로 전망된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정식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야 도항리, 군북 동촌리에서 신석기 전기(약 6,500 ~ 약 5,500년 전)의 토기가 확인되고 있어 주변에 관련 유적이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긁개와 찍개
빗살무늬토기
청동기시대 함안인, 강과 바다를 잇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경과 정착생활이 이루어지면서 크고 작은 마을이 생겨나게 된다. 함안에서는 가야 분지의 함안천, 군북 분지의 석교천, 칠원 분지의 광려천 주변으로 청동기시대 유적들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사람들이 함안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함안은 강과 바다를 모두 접하고 있어 경남 동부권과 서부권 청동기문화의 연결지점으로서 상호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문화를 갖추어 나갔다.
여러 가지 청동기시대 유물
옥 장신구
화살촉
돌칼
아라가야의 성장과 발전
선사시대 문화를 토대로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신라에 멸망하는 6세기 중엽까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아라가야가 성립된다. 아라가야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로,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 진주, 의령의 일부를 포함할 정도로 광활한 분지와 넓은 해안을 영토로 하였다. 가야 전기에는 금관가여, 후기에는 대가야와 함께 전기와 후기를 통틀어 여러 가야국을 이끌었다.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이, 남쪽에는 진동만이 있어 내륙과 해상으로 진출하기 유리하였는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아라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4세기 전후에 더욱 성장한 아라가야는 5세기 무렵 말이산의 크고 높은 고분과 우수한 유물을 만들 정도로 정치·경제·문화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여러 가야국들을 대표하여 백제, 신라, 일본 등과 외교 활동을 주도하였다.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도기 일괄(보물)
굽다리등잔
불꽃무늬 토기
남조(중국)제 청자
별자리가 새겨진 덮개돌
봉황장식 금동관
말갑옷
아라가야의 쇠퇴
아라가야는 5세기 후반 삼국시대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최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6세기 초반에 이르러 가야, 백제, 신라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압박을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아라가야는 외교를 통해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백 년 넘게 지속되었던 나제 동맹이 와해되었고, 554년에는 백제와의 관산성전투에서 승리한 뒤 큰 장애물 없이 가야로 진출하였다. 결국 6세기 중반 아라가야는 대병(大兵)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고 만다.
아라가야, 변방의 중심으로
신라는 아라가야 옛 터를 다스리고 방비하기 위하여 성산산성을 쌓고 지방의 군사 조직인 소삼정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757년(경덕왕 16년)에 군의 명칭이 비로소 ‘함안군’으로 변경되었으며, 속현으로 현무현과 의령현을 두어 관할하였다. 그 중심지는 과거 아라가야의 중심지가 아닌 지금의 성산산성 남쪽 일대(지금의 함안면)로, 이곳에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또한 창림사 탑기에 지방의 불교 관련 업무를 담당한 승관직(僧官職)인 군통(君統)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아라가야가 멸망한 후에도 함안 지역이 여전히 정치·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인장
목간과 항아리
굽다리접시
귀신얼굴모양 기와
암막새 기와
수막새 기와
2.제2전시관
제2전시관 상설 전시실은 아라가야 이후 함안의 고려시대부터 근현대시대까지 함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려시대의 함안
고려시대의 함안은 함안군(咸安郡)과 칠원현(漆原縣)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함안군은 함주지(1587)에 의하면 본래는 아시량국 또는 아나가야라 이름하였는데 신라 법흥왕 때 나라가 멸망함으로서 군으로 되고,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함안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995)에 함주 자사가 파견되었고, 현종 9년(1018)에 다시 함안군이 되고, 금주(김해)에 예속되었다. 이후 명종 2년(1172)에 감무가 파견되었고, 공민왕 22년(1373)에는 함안군으로 승격되었다.
칠원현은 신라시대의 칠토현(漆吐縣)에서 경덕왕 16년(757)에 현재 창원시 지역인 의안군(義安郡)에 속한 칠제현(漆堤縣)으로 되었다. 이후 고려 태조 23년(940)에 칠원현(漆原縣)이 되고, 현종 9년(1018)에는 김해부에 속하다가 공양왕 2년(1390)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수키와
청동합과 청동수저
청자와 도기 그릇모음
함안의 불교
함안 지역 사찰(寺刹)과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 등의 문헌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헌과 지표조사 성과를 통해 살펴본 결과, 남북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함안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 사찰은 총 23개소이다.
의곡사지는 함안면 강명리 양지골(큰어덕골)에 위치한 폐사지이다. 의곡사에 대한 기록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으나, 양지골 일원은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불당골로 불리우며 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초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에서 실시한 현장조사 결과 '○○寺'·'重熙十五年丙戌二月初僧具奇'명문이 새겨진 기와편 등이 수습되며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남북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조성된 건물지, 석축, 배수로, 담장열 등의 많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 사세가 커지면서 대대적인 중창이 일어나 가람배치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으로 파악된다. 대표적인 출토유물로는 금동불상, 금동소탑, 명문기와 등이 있다.
금동불상
연꽃무늬 수막새
풍탁
명문기와
조선시대의 함안
아라가야 이후 함안군과 칠원현으로 나눠진 두 개의 함안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15세기 말~16세기 초에는 왜적으로부터 해안에서 내륙으로의 침투를 막기 위해 함안읍성과 칠원읍성을 쌓았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던 함안 고유의 전통문화인 함안 낙화놀이와 화천농악은 조선 후기에 유래되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함안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는 『함주지』, 『함안총쇄록』, 『칠원현읍지』 등의 기록유산으로 남아있다.
대사리 도요지 출토 명문 분청사기
청동 장신구 모음
고사관수도
목판수장고
함안박물관이 개관한 이래 2004년부터 현재까지 기증이나 기탁을 받아 관리하고 있는 목판들을 한 자리에 모은 공간이다. 이 목판들은 고려 말 안축(安軸)부터 조선시대 유학자 조려(趙旅)·조임도(趙任道)·이경무(李景茂)·주재성(周宰成)이 남긴 글(時文)을 후손들이 모아서 책으로 간행하고자 해서 만들어졌다.
함안의 근현대
아라가야 이후 분리되었던 함안군과 칠원현은 1906년에 칠원현이 함안군에 편입되면서 다시 하나의 함안이 되었다.
함안은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애국충절의 고장이다. 1919년 3월 함안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은 경남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함안의 대표적인 무형유산인 함안 낙화놀이·화천농악·함안농요는 경상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각 보존회를 통해 그 고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함안농요
함안의 시간
'함안의 시간'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함안이 지나온 시간을 각 시대별 장면들을 모아 먹과 붓을 이용한 수묵화 라이브드로잉으로 표현한 함안박물관 제2전시관의 인트로 영상이다. 영상에 삽입된 음악은 일정 구간을 녹음하여 반복 재생시켜 소리를 하나씩 쌓는 방식의 '루프 스테이션(Loop station)'으로 제작되었다.
'함안의 시간' 라이브드로잉
함주지
함주지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사찬읍지(私撰邑誌)로서 함안군수로 재임하던 한강 정구(鄭逑, 1543~1620) 선생과 함안 지역의 선비들이 당시 함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1587년에 편찬하였다. 함주지에는 함안의 연혁, 풍속, 산천, 성곽, 학교 서원, 고적, 성씨, 인물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어 16세기 함안의 현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00년간의 조선시대 함안을 기록한 함주지는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기록유산이다.
함주지 실감 영상
함안 낙화놀이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석가탄신일) 밤 함안면 괴산리 괴항마을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마을에서 제작한 숯가루를 한지에 말아 만든 낙화봉을 줄에 걸어 불을 붙이고, 숯가루가 타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불꽃을 즐기며 마을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했던 함안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함안 낙화놀이는 부재료 없이 숯가루와 한지, 광목만 사용하는 독특한 독자성을 인정받아 2008년 경상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낙화놀이 실감영상
함안총쇄록
함안총쇄록은 함안군수로 재직한 오횡묵 군수가 1889년 4월부터 1893년 2월까지 함안군수로의 취임과정, 행정업무, 함안읍성 내 건물 배치, 지역인사와의 교류 등 함안군의 전반적인 사항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함안총쇄록 실감 영상
3.고분전시관
아라가야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말이산고분군을 소개하는 전시관이다.
말이산고분군의 무덤 변천과정과 축조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는 화려한 영상과 음향이 어우러진 미디어아트를 구현하여 아라가야 문화를 더욱 친숙하게 접할 수 있다.
말이산고분군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아라가야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함안의 대표적인 고대 유적이다. ‘말이산(末伊山)’은 순우리말인 ‘마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두머리’라는 의미이다. 즉 ‘말이산’은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봉토가 확인되는 것은 160여기이며 면 적이 약 80만㎡나 되어 국내 최대급 규모를 자랑한다.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2023년9월24일에 김해 대성동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등과 함께 가야고분군이란 명칭으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말이산고분군에 대한 기록은 선조 20년(1587)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에서 확인된다. 아라가야가 멸망하고 1,000여 년이 지나도록 말이산고분군이 가야 왕릉이라는 인식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장점기 말이산고분군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상으로 수난을 겪게 된다. 1914년 말이산 1호분을 시작으로 4호분, 25호분, 13호분, 12호분이 발굴되었지만 역사성 규명 보다는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을 선전하는 것과 유물 수집에 치중되어 가야사 규명을 위한 많은 고고학적 자료를 망실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을 제정(1933)하고 행정 구역에 따라 말이산고분군을 조적 제118호 도항리고분군과 제119호 말산리고분군으로 분리지정(1940)한다.
한국전쟁 이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1962)됨에 따라 말이산고분군은 사적 제84호 도항리고분군과 제85호 말산리고분군으로 지정(1963)되었다. 이후 가야문화권 학술조사(1981)와 가야문화권 정밀조사(1982)를 거쳐 가야문화권 중요유적에 대한 학술조사 및 보존사업(1992~1996)을 계기로 말이산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연구와 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30여 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 만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최근 고분군의 원래 이름인 ‘말이산’을 되찾자는 지역민의 뜻을 모야 행정구역에 따라 분리지정된 두 고분군을 말이산고분군으로 통합하여 사적 제515호로 재지정(2011)되었고, 같은 유적으로 인식한 『함주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던 ‘남문외고분군’을 말이산고분군으로 확대지정(2021)하여 지금의 규모를 가지게 되었다.
말이산고분군의 무덤 변천
널무덤(木棺墓)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이 안치된 나무널을 묻는 무덤으로 영남지역에서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널무덤은 구릉의 경사면 아래나 평지에 만들며 그 규모는 구덩이 크기를 기준으로 길이 3m 내외, 폭 1m 정도이다. 널(棺)은 통나무나 판재를 사용하였다. 널 속에는 구슬, 팔찌, 부채 등을 넣고 토기, 철기, 칠기 등은 널 밖에 둔다.
덧널무덤(木槨墓)
덧널무덤은 나무널과 껴묻거리를 보호하는 덧널을 설치한 무덤으로, 넓은 구덩이를 판 후 바닥을 고르고 점토를 바른 후 자갈돌은 1~2겹 골고루 쌓아 바닥 시설(시상)을 만들었고, 중앙에 관이 놓이는 자리는 자갈돌을 2~3겹 더 쌓았다. 널과 덧널의 사이공간에 유물을 놓았으며, 널무덤에 비해 껴묻거리의 종류와 수량이 많다. 구덩이와 덧널 사이는 점토와 흙으로 채워 덧널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했으며, 판재로 덧널을 덮고 점토로 틈을 메워 밀봉한 후 봉문을 만들었다.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5세기 중엽 대형봉토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는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대형화된 봉분의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덧널을 돌덧널과 덮개돌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말이산고분군의 대형봉토분은 대부분 이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 아라가야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다음과 같은 독창적인 특징이 있다.
들보시설
지질학적으로 약한 함안지역 암석의 약점으로 인한 무덤 붕괴를 막기 위해 거대한 덮개돌을 떠받치는 ‘들보’라는 목가구(木架構)시설을 설치하여 거대한 봉분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암반대 조성
쉽게 부스러지는 말이산 기반암의 특징을 활용하여 흙을 쌓는 대신 상대적으로 높은 곳을 선정하여 암반을 깎아 거대한 고분의 아랫부분을 조성해서 적은 힘으로 고분을 더욱 크게 보이게 하였다.
3분할 공간구성
아라가야 구덩식돌덧널무덤의 내부는 모두 3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 무덤 주인의 공간을 중심으로 머리 위쪽에는 껴묻거리를 두는 유물부장공간이, 발 아래에는 순장자 공간이 위치한다.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굴식돌방무덤은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아 무덤방(玄室)을 마련한 지상식 구조의 무덤으로, 한쪽 벽면에 통로인 널길(羨道)을 만들어 놓아 시신을 추가로 매장할 수 있는 무덤이다.
아라가야 굴식돌방무덤은 서말이산(남문외고분군)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굴식돌방무덤의 수용과 더불어 아라가야의 중심 묘역이 동말이산에서 서말이산으로 이동한 것을 보여준다.
굴식돌방무덤은 무덤방과 널길, 무덤길, 둘레돌, 제단 등을 갖추고 있으며, 무덤의 축조방식과 껴묻거리를 통해 볼 때 고구려, 신라, 백제 등 당시 아라가야의 대외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실감영상관
디지털 실감영상관은 프로젝션 맵핑을 활용한 실감영상관으로 아라가야 유물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미디어아트에 접목하였다. 온몸을 감싸는 초대형 영상과 3면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의 체험은 강력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4.야외전시실
박물관앞뜰과 측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야외 전시장에는 군북 동촌리 26호 고인돌과 삼기마을의 선돌, 10배 크기로 조형된 수레바퀴토기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군민들이 기증해 주신 석제유물과 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 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을 원상으로 복원하여 무덤 속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칠서 대치리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을 이전복원하고, 보존처리를 통해 야외전시함으로써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5.온라인전시관
함안박물관 팝업 전시 「아라가야의 불꽃」
'아라가야의 불꽃'은 아라가야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뮤지컬 애니메이션입니다. 주요 배경은 아라가야 역사지구(사적 가야리 유적, 가야읍과 법수면 일원 아라가야 토기 생산유적, 말이산고분군)로 했고, 말이산고분군 출토유물(말이산 45호분 사슴모양뿔잔, 말이산 출토 유리조각, 불꽃무늬 등)을 모티브로 캐릭터 및 상징물을 구성했습니다. 또한 흥미로운 모험과 판타지적 요소를 더해 어린이 관람객들이 아라가야의 문화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함안박물관 기획 전시 「말이산에서 아라가야를 보다」
함안박물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하는 특별전으로 박물관 내 소장 중인 말이산 고분군 동릉 및 서릉 출토 국가귀속문화재 250여 점을 전시함으로써 아라가야의 흥망성쇠와 말이산 고분군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함안박물관 20년 운영 성과를 패널로 전시함으로써 그동안 함안박물관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6.아라홍련 안내
전국 최다(最多) 목간 출토지로 유명한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 사적 제67호) 유적지 내 연못에서 연씨가 다수 수습되었다. 함안박물관은 2009년 4월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부터 인수받은 씨앗 중 2개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하여 연대를 분석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즉 고려시대 연씨로 밝혀졌다. 이에 함안박물관에서는 농업기술센터와 공동으로 연씨의 싹을 틔우기 위해 씨담그기(浸種)를 실시하여 이 중 3개의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데(發芽) 성공하였다. 이 후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은 끝에 2010년 7월 첫 꽃을 피움(開花)으로써, 고려시대의 연꽃은 70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 연꽃을 ‘아라홍련’ 이라 이름 지은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함안이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과거 융성했던 아라가야의 옛 땅(古都)으로 기억되고 있었음에 착안한 것으로, 그 모습은 고려시대 불화나 불상에서 보이는 연꽃대좌를 연상하게 한다. 아라홍련은 한 해 중 7~8월에 꽃을 피우며, 하루 중 오전 6~11시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함안박물관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