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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 7 그 후에 - 고전 15: 10 내가 나 된 것은
고전 15: 7 그 후에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넷째로 그는 야고보에게, 다섯째로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
1]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이니, 그로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의 본래 형이신 사실을 더 잘 식별(識別)할 수 있었겠다.
그는 이렇게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후에 기둥같이 여김이 된 일군이 되었다.
* 갈 1: 19 -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 갈 2: 9 -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2]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여기서 "모든 사도"라고 한 것은, "열둘"이란 단체에 국한(局限)된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사도"란 명칭을 좀 넓은 뜻으로 써서 다른 사람들, 예컨대 바나나와 같은 사람들도 포함한 말인 듯하다.
고전 15: 8 만삭되지 못하여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이 정도면 그의 부활의 증인들의 명단이 충분하지 않는가? 이 정도의 증인들을 가진 사건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사건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와 형벌을 대속하신 자이시며 따라서 기독교는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거들에 근거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
1]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 인격이 전적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 증거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원수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사실은 순 객관적 사실(純客觀的事實)이다. 그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원리에 비추어 알려진다.
(1) 부활을 목격한 증인 수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상대한 사람의 수효가 일정(一定)하지 않아서 어떤 때엔 한 사람을 상대하셨고, 어떤 때엔 십여 명, 어떤 때엔 오백 명까지 상대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졌다고 할 수 없다.
그만큼 그의 부활 사실을 본 자들의 증언은 일방적(一方的)이 아니고 완전하다.
(2) 예수님의 부활
주로 그의 제자들(그의 동생 야고보도 포함됨)에게만 나타났으니, 이는, 그들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전 예수님과 부활하신 후 예수님과의 동일성(同一性)을 식별(識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주님을 핍박하던 불신자 바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
이것도 주님의 부활의 객관적 사실(客觀的事實)됨을 확증한다.
주님의 원수도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4) 주님의 부활이 무차별(無差別)의 대중 상대로 나타나 보이기를 기필(期必)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주님의 부활 사실은 하나님이 택하신 일군들을 통해서만 증거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 행 10: 41 -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둘째,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경륜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주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야 증거되며 또 믿어지는 까닭이다.
* 행 5: 32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5-8절에 있는 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본 자들을 들어서 그 부활의 역사성(歷史性)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칼. 바르트(k. Bart)는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망이나 어두움이나 신앙도 무덤 앞에는 있을 수 있다"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ranslated by H. J. Stenning).
이 말은 그리스도의 비인 무덤이, 그의 부활을 증거함의 역사적 증거품으로서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하는 그릇된 말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바울은 왜 이렇게 부활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기사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부활의 역사적 증거를 들기 위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바르트 말을 보면, 그는(바르트) 확실히 계시(啓示)의 역사적 성격을 부인하고 잘못 말하였다.
고전 15: 9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
바울은, 이 부분에 있어서 자기의 부족을 말하고, 자기와 같이 악한 자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보고, 변화되고, 은혜로 사도가 되어짐을 지적하였다.
1]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즉, 큰 죄인이 변화하여 신앙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가 본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진리이기 때문이란 말이다.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표현한 이유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며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에 대하여서도 말하기를 "진리는 보이는 역사적 모습을 취하지 않을 때에 그것은 아무리 초조할지라도 유력하다. 진리는 그것이 인간의 이름을 취하거나 일정한 슬로간에 의하여 학파(學派)나 운동으로 나타날 때는 죽었거나 혹은 치명적(致命的)으로 병든 것이다"라고 하였다(같은 책 p.145-146).
바르트의 이 말은 복음 진리에 대한 역사적 체계가 있을 수 없다는 그릇된 사상이다.
고전 15: 10 내가 나 된 것은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신자와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 그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간증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참된 모든 종들의 고백일 것이다.
1]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도 바울의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을 만난 증거는 겸손에 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도 교만할 때가 있는데, 지금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주님께 가까이 가게 되면... 겸손해진다. 바울처럼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긴다!
▲ 태동(생명의 움직임)을 못 느끼는 사람
미국에 몸무게가 190kg인 한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결혼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더니, 그만 아기를 출산하고 말았다. 지난 10개월간 한 번도 태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유인즉, 부인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배에 기름기가 많아서 웬만큼 아기가 태동을 해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기 몸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었는데, 전혀 느끼지 못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새 생명을 받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간 이후로, 그 새 생명을 일상에서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말이다.
살다 보면, 근심, 걱정, 불평 같은 것들이 군살처럼 내 영혼에 가득 달라붙어서 내 영혼의 새 생명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세상의 쾌락과 유혹도 우리 영혼에 커다란 비곗덩어리가 된다. 지금 우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태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부부가 처음 아기를 가지면, 엄마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태동을 보고 감격한다. 부인은 물론이고 남편도, 막 뱃속에서 움직이는 아기를 보고 흥분하며 놀란다. 그 때의 감격이 기억나시는가? 생명이 꿈틀거릴 때, 그 감격은 엄청난 기쁨으로 다가온다.
오늘 우리 속에 있는 새 생명의 태동을 우리가 설교를 듣는 중에, 내 속에서 (애가 발로 차듯 쿵쾅거리며) 감격적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는 고백을 새롭게 하시게 되기 바란다.
(1) 중생은 눈 뜨는 것
보통 출산하면, 얼마 지나서 아기들이 눈을 떠서 보게 된다. 아기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여러분 가운데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기억나시는가? 아무 것도 못 본다.
그러나 배에서 나오면 비로소 보게 된다. 눈을 떠서 사랑스런 엄마의 얼굴이나 아빠의 얼굴을 본다. 처음 바라보는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우리가 중생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제 주님을 보는 눈이 새로 열리게 된다. 그래서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될 때 - ‘중생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내가 거듭나는 순간이다.
세계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이다. 거기에‘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가 나온다. 영어는 I once was blind but now I see이다. ‘내가 전에는 소경이었으나, 이제는 (주님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2) 중생하면 자기를 보게 된다.
만삭되지 못한 자신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났다, 조산 되었다고 말한다.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를 한번 상상해 보라.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산 것도 아니다. 아직 눈도 못 뜨고 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조산’ 정도가 아니라, ‘유산’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전혀 능력이 없는 완전히 버림받은 가치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그런 자기에게 와서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주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보면, 자기가 자격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다. 자기는 모든 것을 잘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인다. 자기가 있는 자리는, 자기에 비해서 너무 형편없이 낮은 자리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자는 자기를 알게 된다. 그때, 자기가 너무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있는 이 자리는, 내 처지에 비하여 너무 과분한 자리로 여기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 9)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에게 있어서, 지위가 올라가고, 직분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내면적 가치가 더 올라가야 한다. ‘나는 부족합니다!’하며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서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나는 자격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도 과분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감격하는 그 사람이 진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정치적 선거에 나오는 후보들은 제각기 ‘나는 자격이 넘칩니다!’라고 말한다. 자기에게 맡겨주면 나라가 잘살게 된다고 자신감을 피력한다. 우리는 많은 정치가들에게서 ‘나는 준비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맡겨 봐도, 생각만큼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자격이 넘친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성도들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면 안 된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부족합니다. 나는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도 과분합니다.’ 이런 고백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을 향해,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는 자식 앞에 무슨 마음을 느끼시는가? 나를 아버지로 불러주니 너무 감격스럽지 않으신가! 갓난아기들이 “엄마!”를 입을 떼기 시작할 때, 큰 감격과 축복이 넘친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아버지, 어머니!’ 하고 부를 때, ‘나는 자격 없어, 내게는 과분한 자식들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다.
배우자가 여러분에게 “여보!” 하고 부를 때, 감동하시기 바란다. ‘난 자격이 없는데, 내게는 과분한 사람을 하나님이 내게 주셨어!’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란다. 교회 오면 여러분을 향하여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하고 불러준다. 그 소리를 들으면 여러분, 깜짝 놀라시기 바란다. 너무 내게는 과분한 직분이라며,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제게 ‘목사님!’ 부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가만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보면, 자격이 없는데 과분한 직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각자가 처한 것이, 나에게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를 깨닫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랬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었기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았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성도는, 바울과 같이,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 10)
2]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이것은 내 능력 때문이야, 난 역시 똑똑해!’ ‘우리 집안은 역시 명문 가정이야! 나는 탁월한 사람이야!’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혭니다!, 주님이 도와주셨죠! 주님이 은혜 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한다.
(1)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나의 나 된 것’이란 - 내 존재, 내 삶의 자리, 내 지위 모든 것을 통 털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2) 내가 더 많이 수고한 것도 은혜다.
내가 행한 것, 내가 이룬 것 모두, 심지어는 40에 하나 감한 매 5번 맞은 것, 3번 태장으로 맞고, 3번 파선 당한 것도, 수고하고, 애쓰고, 자지 못하고, 주린 것 모두 자기 자랑이 아니라,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거 내가 했습니다!’, ‘내가 제일 공로잡니다!’,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저런 말들은, 주님을 바로 만나지 못했거나, 주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다. 주님을 바로 만난 사람은 이말 저말 길게 하지 않고, 오직 한마디만 한다.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이시간, 한 번 직접 고백해 보시기 바란다.
중요한 자리든지, 하찮은 자리든지 그것은 은혜의 자리인 줄 믿는다. 심지어, 신앙 때문에 믿음 지키느라고 극심하게 고생했던 자리라도 ‘내가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도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남은 여생에 무엇이 더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다. 많은 고생을 당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 은혜로 인하여 곤란과 핍박도 견딘 것이다.
연로하신 권사님이 천국 가실 때가 가까워서 숨을 헐떡이고 계셨다. 그는 이렇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고백했다. “나는 지금 요단강을 건너가기 직전입니다. 요단강 이편에도 주님이 계셨고, 요단강 저편에도 주님이 거기 계시니, 나는 어디서든지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렇다. 중생한 성도는, 괴롭든지, 기쁘든지 죽든지, 살든지 눈물이 나든지, 기쁨이 넘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높아져도, 낮아져도 병들어도, 나아져도 죽게 되어도, 살게 되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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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