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 名曲, 名詩와
詩人이야기 ◇
<세월이 가면>
댄디보이 시인, 박인환
훤칠한 키에 용모가 수려한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시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그는 여름에도 곧잘 정장을 차려 입고 나타나서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라고 불평을 하곤 했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도 늘 외상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술이야?”
“어이구, 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 꽃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함도 없이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차츰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 1956년의 이른 봄.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한 막걸리를 주로 파는 ‘경상도집’에 박인환을 비롯해 송지영, 김광주, 김규동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도 함께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였다. 그러나 나애심은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청을 거절했다.
이때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이어 완성된 시를 이진섭에게 넘겼고, 이진섭은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나애심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한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테너 임만섭, 소설가 이봉구 등이 새로 합석을 했다.
임만섭이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부르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주 기이한 음악회가 열린 것이다.
술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이후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여기저기서 사람들에 의해 흥얼거려졌다.
그리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담고 있는 듯한 이 노래는 "명동 엘리지"라고도 불리었다.
참고로 그 경상도 술집의 옥호는 "은성" 이라 불렸고 "은성"의 사장은 최불암의 모친이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마음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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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朴寅煥, 1926∼1956)은 1926년 강원 인제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8·15 광복과 함께 상경한 이후 종로에서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이때 김광균· 이한직· 김수영· 김경린· 오장환· 김기림 등 시인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