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있는 대한민국 국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반환받을 수 없을까??
필자는 2009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관람했다.
책에서만 읽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보았다.
필자는 미술에 대하여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저
구름 같은 관람인파에 밀려 눈으로만 보았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폭 85㎝,길이 11m에 달하는 두루마리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이 작품의 제자(題字)가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9일 간의 귀환(歸還)이었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1996년 이후 13년 만에 일본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라 하였다.
그것도 우리 국보미술을 일본에서 빌려 왔다는 설명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안평대군의 꿈을 3일 만에
안견(安堅)이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몽유도원도 발문(跋文) 내용 중에서
【그것참, 기가 막힌 꿈이었어.
1447년(세종 29년) 4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어젯밤 꿨다는 꿈 얘기를 했다.
“내가 박팽년과 함께 어느 산 아래 이르렀지.
그랬더니 우뚝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보였어. 기암절벽과 구불구불한 냇가
길을 따라가니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왔는데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것은 신선들이 산다는 별천지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꿈속 풍경을 그와 절친한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그려달라고했다.
안견(安堅)은 사흘 만에 그 별천지(別天地)를 비단 위에 생생하게
그려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기암절벽, 험준한 바위와 계곡이 복숭아밭을
둘렀고 안개 자욱한 언덕엔 복사꽃이 만발했다.
폭포수는 두 줄기로 쏟아지고 물가엔 출렁이는 빈 배도 보인다.
이 작품이 바로 한국미술사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안견의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최고의 명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과 시,
그와 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했던 선비 20여 명이 친필로
쓴 글이 적혀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서예사(書藝史)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글씨를 남긴 선비들은 4군과 6진을 개척해 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혔던 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해 안평대군과 꿈속에서
도원(桃園)을 함께 거닐었다는
박팽년, 신숙주, 정인지, 이개, 성삼문 등이다.
그러나 불과 6년 뒤 이들의 운명은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
세종이 1450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맏아들인 5대 왕 문종도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문종의 아들 6대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한 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1453년 정변을
일으켜 좌의정 김종서 등을 살해한 계유정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국보 세한도(歲寒圖)도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개성 출신 골동품 수집가 손창근씨가 일본소장가에게
사정사정하여 반환받아 2018년 국가에 기증했다.
지금 대한민국과 일본은 외교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부차원이든 민간 관계를 통해서라도 몽유도원도를 꼭 반환
받기를 바란다.
반환받는데 돈이 필요하면 국민모금을 해서라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꼭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래에 있는 그림은 중국이 최고의 국보라 자랑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의 이름은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다
12세기 북송 때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풍속화(風俗畵)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비교가 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