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3 / 누구의 죄인가?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스코틀랜드 어느 시골에 부모를 잃은 한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 옆집에는 아주 양이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렇게 굶어죽느니 양 한 마리를 도둑질해서 먹고 죽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밤에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가서 양 한 마리를 도둑질해다 그 밤에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서툰 도둑질이 발견된다고 그들은 옆집 할아버지에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심성이 고약하였던 것 같습니다. 매를 심하게 때리고 이마에 st라는 낙인을 새겼습니다. (sheep thief) 양 도둑이라는 말입니다.
형은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는 양 도둑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이곳저곳 이사 가서 살았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낙인의 의미를 물어보았겠죠?
그러면 다시 양 도둑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럼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이렇게 하다가 그는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반면에 동생은 양 도둑을 양 도둑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st라고 새겨진 것은 자신과 같이 양을 도둑질할 수밖에 없는 불우한 고아들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영접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는 노년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노년에는 어린아이들을 불러서 이야기도 해주고 잔치도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할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 할아버지는 참 좋으신 분인데 그 st라는 글자가 무슨 뜻에요. 할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saint라는 영어도 모르는 분이나 성자라는 뜻이란다.
두 형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사람을 원망하며 과거에 매여 산 것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열심히 산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자신의 불행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번째 표적 중에서 여섯 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때,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이렇게 앞 못 보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 땅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진흙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흙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 발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샘에 가서 씻어라.”
그 사람은 샘으로 가서 씻었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소경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는 눈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어두웠습니다. 그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벌써 인생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의 어둠이 있습니다.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조물주에 대한 원망의 어둠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소경을 보자 심각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이 사람의 불행이 어떤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라면 그 사람의 죄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사람의 죄가 아니라면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불행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죄 때문에 소경의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니 자신의 죄 때문에 불행하게 산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 질문을 했습니다. 부모의 죄도 아니라면 그 조상의 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실패작인가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리는 질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불행이 죄 때문에 생긴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고 부모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류의 조상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자 그도 고통을 당하였고 그 후손에게도 가난과 질병과 두려움과 원망과 죽음이 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다가 자신도 큰 풍랑을 만나고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자 그는 집안의 분란과 국가의 내란에 시달렸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통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은 아무 죄를 짓지 않았지만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죽었습니다. 열두 제자도 죄를 짓지 않았는데 순교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이나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더라고 누구의 죄 때문에 불행이 왔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죄냐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심각한 질문 앞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불행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행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의 선을 이루기 위한 좋은 뜻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형들이 자신을 팔아서 애굽에 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보내셨다고 요셉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편에서 보았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불행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