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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나니
고전 11:17-34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전 11:17-34 / [주님의 만찬] 다음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동의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만찬을 위해서 모이는 자리가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18) 여러분이 모임에서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 간다는 말이 여러 사람을 통하여 자주 내 귀에 들려 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9) 물론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분열도 생기겠지요. 20) 그러나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나누는 식사는 성만찬이 아니라 그냥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21)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앞을 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지요? 그래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니 22) 그것이 사실입니까? 먹고 마시는 일이라면 자기 집에서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잘한 짓입니까? 이 일에 대해 내가 어떤 말을 해야 옳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합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23) 주님의 식탁에 대해서는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 나도 전에 여러분에게 전해 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던 그날 밤에 주 예수께서는 떡을 들어 24)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니 이렇게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25) 또 식사 후에 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하나님과 너희 사이에 세우는 새 계약이다. 이 계약은 내 피로 세우는 것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 이렇게 행하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의미를 되풀이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예식을 계속하십시오. 27) 만일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떡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28)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기 전에는 누구나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합니다. 29) 만일 누가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또 주님의 만찬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채 제멋대로 먹고 마신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볍게 여긴 탓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30) 여러분 가운데 약한 자와 병자가 많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 생긴 것은 이 때문입니다. 31)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심판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32)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심판하실지라도 그것은 다만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33)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성만찬을 하기 위해 모일 때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 34) 만일 매우 배가 고프거든 집에서 식사를 하고 오십시오. 그래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 밖의 다른 문제는 내가 그곳에 가서 일러드리겠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성만찬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서 왜곡하여 서로를 차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성만찬의 진정한 태도를 상기시켜 줍니다.
너희의 모임이 유익되지 못하고 해로움이라(17-22) 고린도의 성도들 사이에는 분쟁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예배가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잘못된 파당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는 자,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으로 인해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조차 자기와 함께 하는 무리들만의 저녁식사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만찬의 공동체적 측면을 망각하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공동체 식사에서조차 이들은 부자들과 특권층을 우대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굶주렸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런 성만찬이라면 차라리 집에 그대로 있으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23-26) 예수께서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제자들의 하나 됨을 상징하기 위하여 떡 한 덩어리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셨습니다. 예수께서 잔을 나누신 것은 식후였습니다. 주의 만찬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상호간의 관계를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고 선포하는 기회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선포입니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27-34) 사람들이 주의 만찬에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 됨이 없이 성만찬을 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신 피를 흘리고 몸을 주신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복음을 전하고, 형제 자매된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며, 더 깊은 관심과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 중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는 비유는 아주 짧은 비유입니다(마 13:44).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보화를 산 것이 아니라 보화가 들어 있는 세상을 샀다는 것입니다. 보화는 은밀한 장소나 귀중한 것을 숨길만한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보물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되는 밭, 곧 우리 삶의 현실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 설 교 >
애찬식과 성찬식
고전11장 17절 ~ 22절 / 김태복목사
오늘은 7장을 강해해야 순서지만,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다음주에는 성찬식이 있으므로 오늘은 11장을 강해하고 다음주 부활주일에는 15장중에서 강해할 예정입니다. 고전11:17-34에 보면 애찬식과 성찬식이 나옵니다.
1. 애찬식은 무엇이고 성찬식과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성찬식은 주님이 베푸시는 떡과 포도즙으로 거룩한 영적 교제를 이루는 것이라면, 애찬식은 각자가 정성껏 준비하는 음식으로 성도 간에 육적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 전통에 따라 애찬이 있었습니다. 이 애찬이라는 말은 아카페라는 원어에서 왔는데 사랑의 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교인들이 자주 모여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뜻에서 생긴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다른 교회들처럼 모든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금씩 먹을 것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 음식으로 예를 말한다면, 어느 분은 찰밥을 해오고, 어느 분은 떡, 어느 분은 통닭, 어느 분은 수정가, 어느 분은 나물, 어느 분은 잡채 등을 가져다가 뷔페식을 차려 놓고 즐겁게 나누어 먹으면 서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는 했습니다.
그 때는 부자나 가난한 자, 주인이나 노예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떡을 떼며 웃고 떠드는 속에서 뜨거운 교제가 이루어지고 주안에서 형제자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도 그런 장면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가 시험이 든 뒤부터는 애찬식이 교인 간에 유대관계를 깨드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주인도 있고 노예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음식을 잔뜩 가져올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은 음식이 신통치 않습니다. 특히 당시는 노예 신자들이 많았었는데 그들은 거의 빈손으로 왔습니다. 교회가 은혜가 충만할 때는 그래도 가난한 자들이나 노예를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부자들은 정성껏 싸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은혜가 떨어지니까, 부자들은 불만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자들이 음식을 가져오기만 하면 노예들이 염치 좋게 먹어 버립니다. 바클레이 주석에 의하면 애찬식이 노예들이 일주일 동안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푸짐하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댐으로 부자들이 먹을 것이 없을 정도가 됩니다.
마침내 부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때부터 부자들은 자기들끼리 먹어버립니다. 노예들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만 보아야 했습니다. 바람을 타고 강하게 전해오는 고기 굽는 냄새로 침을 삼키면서,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참아야 하는 비참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서러움, 서러움 해도 가장 큰 서러움이 무엇인지 압니까? 배고픈 서러움, 차별대우 받는 서러움이라고 합니다.
사회에서도 이런 서러운 냉대를 받던 노예들이 예수님의 말씀 듣고 교회 와서 그나마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데 교회마저 이런 박대를 하다니 너무나 상처가 큽니다. 교회는 배고픈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 나그네 된 자를 예수님의 소자로 알고 대접하는 곳입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는 곳이요, 애찬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나누어주기 위해서 시작된 방법입니다.
그런데 부자나 권세 있는 사람들끼리, 혹은 파벌들끼리 모여서 떡 벌어지게 잔치를 벌이면서 가난한 자들과 노예들은 외면함으로, 주님의 소자들을 고통을 주는 곳으로 변했으니 얼마나 한심한 모습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책망합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애찬식이 진행될 바에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더 덕이 될 것입니다. 그런 폐단 때문인지, 아니면 교회 내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어느 시기부터는 애찬식이 없어졌습니다. 여하튼 교회가 은혜가 떨어지면 이런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넘치면 부자나 빈자, 주인이나 노예, 유대인이나 헬라인 누구나 다 형제요, 자매로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점심시간에 비록 반찬은 한 두 가지지만, 온 교인들이 똑같이 먹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어느 교회에 오신 성도님이 말하기를 자기 교회는 담임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식사하는 방이 따로 있고 따로 차려드리는데 홍익교회에 와 보니 이나, 담임목사나 장로님들이나 차례로 줄을 서서 식사를 배식 받는 모습은 너무 귀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여하튼 고린도 교회는 애찬식으로 인해서 많은 가난한 신자들과 노예 신자들이 상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성찬식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보통 애찬식이 끝난 후에 성찬식을 거행했는데, 부자들은 자기들이 싸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어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성찬식에서 주는 떡과 포도주는 시시하게 여기고 마지못해 먹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은 달랐습니다. 그 당시 성찬식은 큰 빵을 가지고 돌아가면서 자기가 먹을 만큼만 떼어 먹고, 포도주는 큰 그릇에 담아서 한 모금씩 마시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배고팠던 사람들은 빵이나 포도주를 너무나 많이 먹음으로 나중에는 다른 신자들이 받을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먹으려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부자들은 애찬식에서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취하고 없는 이들은 성찬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취한 모습을 보임으로 거룩한 성찬식이 추한 성찬식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얼마나 안타까운지 20-2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또 33절에서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제일 거룩한 예식이 세례식과 성찬식입니다. 그래서 성례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예식을 이처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다니,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는 망령된 짓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몰라서 성찬식 때 실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신자는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성찬식 때 떡과 포도즙을 받아먹습니다. 어떤 시골교회에서는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성찬식 때 떡 하나를 집어가지고 “야, 너 먹 먹어라, 좋은 것이란다.”라면서 입에 넣어주기도 합니다. 성찬기를 들고 있던 장로님이 말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한테 좋은 것이면 애한테도 좋은 거지 뭐.”라고 하더랍니다.
이처럼 성찬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실수하는 분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도 웃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식은 얼마나 깊은 뜻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잡수실 떡을 주시면서 “이는 내 살이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는 내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얼마 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인간들을 위해 살과 피를 다 주실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만찬 시간에 예수님의 심정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처럼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실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자기를 은 30냥에 판 가룟 유다의 철면피한 모습을 보면서 더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은 예수님이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주시는 시간으로 너무나 감격적인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에 부자들은 술에 취해 있고 가난한 이들이나 노예들은 서로 먹으려고 싸움질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성찬식을 거룩하게 대해야 합니다. 성찬식에 대해서 교파마다 의미가 다릅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축도하는 순간부터 빵과 포도주가 변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합니다.
개신교끼리도 약간씩 의견이 다릅니다. 루터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믿음으로 받을 때에 우리 속에 들어가서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장로교를 시작했던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을 택하여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표시하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찬을 받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과 구속의 역사를 기념하는 뜻으로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근거가 오늘 본문 24절에 나옵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해석에 따라서 성찬을 주로 기념하는 뜻에서 거행하되 성찬식에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 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찬식에 임해야 합니까?
세 가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1)주님의 속죄 제사에 동참하는 자세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제단에서 친히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시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때 골고다 언덕에 없었으나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음으로 그 속죄 제사에 동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2)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지체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몸과 피를 나눈다는 것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것과 우리 성도들은 한 몸과 한 피를 이룬 형제자매가 된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때로 가정에서 형제자매가 불화하면 부모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한 핏줄이 아니냐?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핏줄이다. 가정이 어려워 보아라. 마지막에 의지할 것은 핏줄뿐인 것이다.”라고 합니다.
또한 형제자매는 한 솥에서 먹고 자란 관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에서 주는 떡이나 포도주는 우리가 주안에서 한 몸이요, 한 식구요, 형제자매라는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 안에는, 애찬식의 의미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 간에 사랑으로 돌보지 못하고 나누어 주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도들끼리 불화하던 사이라도 성찬식 전에 용서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참여하여야 하며 서로 화해하고 용납하여야 합니다. 인도의 마호멭 교도의 한 집단인 말라카나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현재는 그들의 사랑 받는 교사가 된 한 남자가 여러 말라카나 교도들이 끝에 쇠 날을 박은 죽창으로 싸우는 것을 보고 그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 그의 머리를 창에 갖다 댔습니다.
피가 낭자하게 흘러서 그 교사의 흰 옷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양편 모두는 싸움을 중지하고, 몇 사람은 의사에게 달려가고 몇 사람은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므로 양편은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피를 통한 화해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를 “만일 죄 된 인간의 피 몇 방울로 전 부락이 화해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전 세계를 구원한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이 화해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고 나서도 여전히 성도 간에 차별이나 분파가 있음으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 이런 사람들은 주의 떡이나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먹고 마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28-29절 “사람이 자리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성찬식은 그리스도 증인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24-25절에서 주님을 기념하라고 한 후에 26절에서 강조하기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영적 능력을 체험한 후에 힘을 얻고 나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밖으로 힘을 뻗치어야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자기들끼리만 교제하고 밖으로 나가서 그리스도 증인으로 살지 못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에너지가 안으로 뭉치면서 내분(內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다음 주 성찬식을 참여하기 위해서 이번 주간 열심히 기도하시면서 그동안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형제와 자매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십시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겠다고 결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성찬식을 바르게 참여할 때 어떤 은혜가 임합니까?
(1)믿음이 강해지고 심령이 깨어납니다.
고린도 교회는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성찬식을 바른 자세로 참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0절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 시간이라고 믿고 진정한 회개와 뜨거운 고백과 새로운 결단으로 임한다면 믿음이 더 강해지고 심령이 깨어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32절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어떠한 죄라도 십자가 보혈만 의지하고 회개하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3)영생을 얻습니다.
성찬식은 주님이 베푸시는 식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찬식이 형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주님은 이런 예식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찬식에 거룩하게 참석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요6:53-5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 2세기의 유명한 교부였던 익나티우스는 에베소 교회에 성찬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쓰기를 “같이 떼어 먹는 한 덩어리의 떡은 불사의 약이고, 돌려가며 마시는 포도주는 우리로 하여금 죽지 않고 마시는 영생케 하는 해독제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일년에 성찬식을 얼마나 자주 거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번의 성찬식이라도 성찬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하며 살던 죄, 형제들과 화해하며 살지 못한 죄, 특히 고통 받는 주님의 소자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지 못한 죄,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라우폴의 꿈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라우폴 공이 예수님께서 성만찬에 쓰신 은잔을 찾기 위해 자기가 살던 성을 떠날 때 말에 채찍을 가하여 막 성문을 나가고 있는데 아주 남루한 거지가 라우폴 공에게 자선을 청했습니다. 그는 그 내미는 손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돈 한 푼을 던져 주고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 잔을 찾는 것인 줄로 생각하고 멀리멀리 그 은잔을 찾아다녔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건강도 쇠하여졌으며 그는 지쳐서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백발이 성성하여 이제는 성화된 마음,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라우폴 공이 자기의 성을 향해서 쓸쓸히 돌아올 때 그는 무르익은 곡식처럼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동안 그에게는 깊은 죄의식과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가 출발했을 때 손을 벌렸던 그 거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구걸을 하자 그는 “네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지만 내가 먹을 빵이라도 나눠 먹자.”며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또 그 거지가 목말라 보여서 자기의 표주박을 가지고 손수 우물에 가서 물을 한 잔 떠다가 그 거지를 대접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거지가 홀연 예수님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찾는 은잔은 바로 이 표주박이고 이 냉수는 나의 피 이며 네가 나눠 준 이 빵 조각이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천적인 성만찬은 주님의 이름으로 고통 받고 고난 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사랑을 베푼 것을 곧 자기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고난 주간 동안 기도하기를 “주님, 다음 주 거행되는 성찬식에 그 어느 때보다 진정한 자세로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 동안 멀리했던 성도들이나 불우한 이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겠다는 결단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하심으로 참으로 귀한 은혜를 받는 부활주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다리는 마음
고전11장 17-29절 / 이수영목사
본문 중 23-29절은 성찬식제정의 말씀으로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듣곤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나누신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예수님의 성찬식제정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의 어떤 상황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성찬식제정의 말씀을 연결시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본문 17-2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17절에 보면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임"이란 다름 아닌 "성찬식 모임"입니다. 이 거룩하고 은혜롭고 유익해야 할 성찬식 모임이 왜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가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18, 19절에 보면 그들 가운데 있는 분쟁과 파당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그런 분쟁과 파당을 가지고는 함께 모여서 주님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행해진 그 성만찬을 성만찬이라 할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단지 분쟁과 파당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심각하고 아주 부끄러운 일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21절에 보면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성만찬은 보통의 회식을 겸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각자 음식을 준비해서 가지고 오면 그것을 다 차려놓고 다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갖다 먹어버림으로써 남은 사람들은 먹지 못하고 배를 골아야 하는 일이 발생하곤 했던 것입니다. 음식이 베풀어진 식탁에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더 이상 남아있는 음식이 없어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먼저 다 갖다 먹은 사람들은 술까지 거나하게 취해 있곤 한다니 이게 무슨 주님의 성만찬이겠느냐는 사도 바울의 한탄입니다.
더군다나 22절에서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했다고 한 것 보면 그 먼저 다 갖다 먹고 술까지 취하곤 했던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파당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렇다고 할 때 사태는 더 심각한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넉넉히 가져와서 없는 사람들이 먼저 충분히 먹도록 기다려줘야 할텐데 평소에 제 집에서 잘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바람에 가난한 사람들이 더 낙심하고 자존심 상하고 모멸감을 느끼며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교회 안의 분쟁과 파당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잊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짓은 단지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다함께 나누는 성만찬을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자리로 아느냐? 그렇다면 밥 먹을 장소가 없어서 교회에 나왔느냐?" 라고 질타하는 말이 22절 첫머리의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바른 성만찬을 가르치기 위하여 "내가 당신들에게 전해준 성만찬은 당신들이 지금 행하는 그런 성만찬이 아니라"는 뜻으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하면서 23절 이하의 말씀을 쓴 것이라 봅니다.
23-26절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성만찬에 임하는 바른 자세에 관해 언급합니다. 먼저 27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합당하게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떡과 포도주를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 답을 28, 29절에서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한 것입니다. 떡과 잔을 받으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살피고" 또 "주의 몸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자기를 살피고" "주의 몸을 분별"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먼저 "주의 몸을 분별함"이란 어떻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는 성찬식에서 나누는 떡과 잔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상징함을 알며, 상징물로서의 떡과 포도주와 그것들이 가리키는 구원의 사건과 진리를 구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러므로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물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자기를 살핌"이란 또 어떻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는 나의 죄를 씻으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의 고백과 함께 성찬식에서 내가 떡과 포도주를 받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성만찬이 그저 여럿이 모여서 함께 식사하는 행사가 아니라, 한 주님에 대한 같은 신앙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들 사이에 성도의 사랑을 나누는 교제임을 바로 알고, 내가 과연 한 형제자매 된 다른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 속에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태도를 확실히 지니고 성만찬에 임하는 것이 떡과 포도주를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이 행해지는 교회가 그저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 위한 회식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며 심령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집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모든 민족과 계층의 차별을 없애주던 것이 교회에서의 성찬식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민족과 계층의 차이 등 사람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지 않는 성찬식은 무의미한 것일 뿐 아니라 성찬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하나됨의 의식과 의지와 실천적 노력이 없는 삶은 온전한 신앙의 삶이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27절에 있는 대로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며, 28절에서 말하는 대로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찬에 참여하며 사람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헐고 하나됨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우리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16-17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했습니다. 교회 안에 파당이 있고, 또 그 파당이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으로 갈라진 파당이며, 게다가 가진 사람들이 먼저 다 먹고 갖지 못한 사람들이 늘 굶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찬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가까이 있는 말씀인 33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한 것은 이런 모든 생각을 담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기다리라". 기다리는 마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그 나의 행동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남을 먼저 앞세우는 마음입니다. 남을 위해서라면 내가 하고 싶고 나에게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는 여유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심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교회와 주의 만찬
고전11장 17절 ~ 34절 / 박조준목사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대할 때 가급적 책망보다 칭찬하는 일을 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예식을 행하는 데 혼란을 일으킨 일에 있어서만은 날카로운 책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 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일부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거룩한 예식의 의미를 완전히 전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예식은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오 히려 해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정해 주신 규례는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하면 해롭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돕지 못하면 해칩니다. 우리를 부드럽게 만들지 못하면 우리를 굳어지게 합니다. 바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부패가 일어나 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생명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없어지면 가장 추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백합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생명이 있을 때 향기를 발합니다. 그러나 그 생 명이 없어질 때 썩어 버리고, 냄새나고, 가장 추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생명이 없어질 때면 가장 더럽고 무서운 것으로 전락해 버립 니다. 짐승은 죽어서 길가에 있어도 그렇게 무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서 길가에 있으면 무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으면 가장 추해 집니다. 18∼19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 리라. 세상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저 그런 세상이지 하고 이해합 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도들이 다투게 되면 어떻게 사랑을 부르짖는 성도들이 싸울 수가 있냐 며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여기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교회에 모일 때마다 분쟁한다고 했는데 스키스마타 ( )는 분열 을 의미합니다. 규례를 지킴에 있어서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서로 싸웠습니다. 교제를 권하면 서도 분열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분당을 지으면서도 한 교회에 출석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틀린 마음을 가지고도 같은 식탁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불화하고 분쟁하며 분열을 일으킬 때 사랑이 없고 마음이 멀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떠나서 서로 미워할 수가 있고, 교제를 하면서도 사랑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말로는 사랑하고 축복하면서도 그 마음엔 미움과 저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분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듣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이단이 들 어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싸움 붙이고, 이간질하고, 당파를 만들고, 신앙의 터를 파괴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믿음과 양심을 파괴하면 사랑에 금이 가는 것이 당 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믿음을 저버리게 되면 범사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불참하고, 비협조적입니다. 이렇게 되면 양심을 버리기 때문에 파괴적 이고, 허위적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꾀이는 자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 나님의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은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악함과 실수가 성도에게는 경건과 충성의 금박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분열을 책망하면서 무질서를 꾸짖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에 있는 교회 의 경우에 아주 사교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다. 사람은 서로 나눠 먹을 때 마음이 열리고 사랑을 나누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당시 에라노스 라는 일종의 회식이 있었는데,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각각 먹을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전부 다 모아 놓고 다 함께 나눠 먹는 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관습이었습니다. 요사이 우리 교회에서 선교회 모임을 가질 때, 또는 구역 예배를 드릴 때 각 가정에서 한 가 지씩 음식을 해 가지고 와서 모아 놓고 나눠 드시는 것을 보면 얼마나 보기 좋은지요. 그리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는 이와 같 은 애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다 똑같은 형편에 있는 분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고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좋은 것으로 잔뜩 가져올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노예와 같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 습니다. 어쩌면 노예들에게 있어서는 이 애찬은 한 주일에 한번 배부르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사의 기회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는 똑같이 나눠 먹는다는 정신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들 은 음식을 많이 해 가지고 와서 서로 나눠 먹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부자들끼리 모여서 해온 음 식을 나눠 먹어 버렸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먹을 것도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형편 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사이의 사회적인 격차를 없애려던 회식이 오히려 격차를 더 심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제를 가져야 할 사람들이 계급 의식에 사로잡힌 무리 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주저 없이 책망했습니다.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 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고 했습니 다. 교회도 세상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세상 물결이 그대로 흘러 들어오기가 쉽습니다.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교회는 세상적인 장벽,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러 계층의 사람이 모여서 교제할 수 있 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일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만 모이면 참다운 의미의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에 오셔서도 세상적인 것을 마음에 두어 사장 노릇, 장관 노릇, 교장 노릇 하 려고 하게 되면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세상의 것은 다 벗어 놓고 교제하는 곳입니다. 초대교회 때만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이 지금보다 더 심하게 있었습니다. 자유인 과 노예, 헬라인과 야만인(헬라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로마 시민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수 종족, 교양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 등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서는 이런 차별이 있지만 교회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웠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어느 교회 역사 가는 초대교회의 회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있지만 로마를 괴롭히고, 지금도 유럽을 괴롭히고 있는 사회 문제를 이미 적당하게 해결했었습니다. 그들은 부 인들을 정당한 지위에까지 끌어 올렸고, 노동의 신성을 회복했고, 걸인을 없앴고, 노예 제도의 악을 뽑아 버렸습니다. 이 혁명의 비결은 종족과 계급의 이기주의가 주님의 성만찬상 앞에서 잊 어버리게 되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죽으신 인류 안에 분명히 보 여지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 안에 발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적인 계급과 차별이 있는 교회란 참된 의미의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참된 교회 란 그리스도께서 결합되었기 때문에 또한 서로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찬식도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눠주기를 잊어버린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물건을 혼자 가지 고 있거나 자기들 모임에서만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작도 못한 사 람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빈곤에 처했을 때 자기만 가지고는 괴로워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눠주는 데서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특권을 누립니다. 23절 이하에는 주의 만찬의 의미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가장 신성한 예배 중의 하나 인 성찬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보다도 먼저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찬식의 의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어떤 뜻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 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점에서 예수님의 몸과 이 떡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 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의미가 맞습니다. 성찬식 때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따뜻 한 존경심을 가지고 떡을 받아 입에 넣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단지 예수님의 몸을 기념하는 것만 이 아니라 주님과의 산 교제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만찬은 주님 앞으 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했 습니다. 언약이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옛 계약 관계가 있었습 니다. 그것이 곧 율법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이 계약 관계가 계속 성립이 되려 면 이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옛 계약 아래 인간들은 하나님을 다만 무서워하기만 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는 도저히 없었기 때문에 저들은 계약 불이행이란 죄로 문책을 받아 왔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관계가 사람에게 열렸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의 존하는 관계였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의 사랑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옛 계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범죄자가 재판장 앞에 나 오는 것 같았지만 새 언약 밑에서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가듯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 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라 고 율법은 말했습니다(신 12:23).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 기 위해서 예수님은 생명을 희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의 붉은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피가 없이는 새로운 언약,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 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에 참예하는 사람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거룩한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행 하고 있는 일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일의 신성함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합당 치 않게 먹고 마신다 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도 모르고, 형제와 싸우며, 그를 경멸 하고 이유야 어떻든 형제와 마음이 하나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식사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 하는데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가룟 유다 외에는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방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한번씩 두들겨 보고 다 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한 명씩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입니까? 주님, 저입니 까? 열한 제자가 똑같은 말과 떨리는 음성으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말에는 자신을 의심도 해 보고, 아니라고 부정도 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다짐이 들어있습니다. 이때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떡그릇에 손을 옮기셨습니다. 그때 마침 그릇에 와 있던 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손이 누구의 손이었습니까? 가룟 유다의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지만 은혜를 배반한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자기에게 좋을 뻔했 다. 예수님은 누가 그를 배반할 것을 분명히 아시고 최후의 순간 그에게 지도했습니다. 그런데 예 수님의 지목을 받은 유다도 다른 제자와 같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달랐습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했습니다. 그러면 유다의 질문은 무엇이 다릅니까? 가룟 유다는 주님 이란 말 대신에 랍비 라는 말을 썼습니다. 랍비는 율법 선생을 말합니다. 물론 교육자와 피교육자라 고 해서 다 그럴 수는 없지만 유대인의 율법 선생과 백성들 사이에는 따뜻한 정의 교류보다는 냉랭한 법의 선만이 왕래했습니다. 그러므로 랍비는 그 시대의 관념으로 존칭이기는 했지만 사 람들과의 마음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거리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 지만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이런 거리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존경은 하였지만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존경의 대상은 언제나 사랑의 대상보다 천대를 받습니다. 보통 때는 몰라도 우리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을 때,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할 수밖에 없을 때는 사랑의 대상을 택하고 존경의 대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존경하던 예수님은 버리고 그가 사랑하던 돈을 택했습니다. 전에 데마 같은 사람도 사도 바울을 존경하며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어려움을 함께 당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결국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 습니다. 다른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누구로 불렀습니까?
주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가룟 유다보다 나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판단력이 부족하여 가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 다. 용서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실수도 했습니다. 화목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비겁한 성격 때문에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저들은 예수님을 팔 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기보다는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랍비여, 저입니까? 라는 이 물음 속에는 주님께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랍비여 라고 부르면서도 자기의 계획과 음모를 다 실행하려는 숨은 악의가 그대로 그의 마음속 에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랍비여, 저입니까? 하고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 네가 말했다 고 대답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네 속에는 다른 주인을 모시고 나와는 거리가 멀어. 그래서 네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장면을 보면서도 다른 열한 제자가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자르던 베드로가 어떻게 가만히 있었을까요? 사마리아 동네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당장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망시켜 버리 고 말자고 제의하던 야고보와 요한이 어떻게 이처럼 가만히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이 가 룟 유다를 분명히 지적해서 말씀했는데도 열한 제자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 도입니다. 열한 제자들의 의분이나 유다를 향한 어떤 행동을 복음서 기자가 뽑았는지, 아니면 제자들 자신이 가만히 생각해 본 결과 자기 자신들도 가룟 유다보다 낫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 각하고 너무 부끄러워서 가만히 있었는지 어쨌든 만찬석은 물 뿌린 듯 조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고요히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손수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 이 내 몸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인류를 위하여 원수의 손에 죽으실 것과 십자가 에서 살이 찢기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나눠주시면서 이 것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 의 피 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인류의 죄를 속하는 구속의 피가 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속으로 주님, 저입니까? 한번 물어 보시는 기회가 되었 으면 합니다. 주님, 저는 약합니다. 실수는 과거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팔지는 않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만이 나 의 주요,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나의 선생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보좌를 차지할 왕이시며 영 원하신 생명이십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의 이와 같은 다짐과 고백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약속에 대한 소망의 기쁨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초대식탁
고전 11장 20절 / 이필재목사
예수님은 30년 동안 요셉의 집에서 평범한 자연인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30세에서 33세까지는 가출하셨습니다. 그 삶을 공생애라고 표현합니다. 집을 떠나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적 생활을 하셨습니다. 제일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매일 13명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요 잠을 자는 일이었습니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는 질문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그 말씀 속에 예수님 생활의 곤고함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스러울 만큼 도움을 입으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 1장에 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열두 제자와 예수님 이렇게 13명은 매우 건강한 젊은이들입니다. 이들을 돌보는 도우미 공동체 하나가 생겨서 선교 활동을 할 수가 있었는데 2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사도 공동체와 그들을 섬기는 봉사 공동체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은 식사 초대를 즐거워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삭개오의 집에서,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서,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서 많은 식사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두 번 자신이 식탁을 준비하시고 손님을 초대하셨는데 한번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해변에서 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구워 시장한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고 부르셨습니다. 또 한 번은 오늘 성경말씀인 잡히시기 전날 밤 다락방 만찬 장소였습니다. 두 번 모두 초대 손님은 열두 제자들입니다. 여기 특이한 사실들이 나타나는데 이 식탁은 육신의 배를 불리려는 식탁이 아니라 신비한 생명력과 영적 능력이 있으면서 영원히 계승되는 진리의 전달이 담긴 식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성찬의 식탁을 똑같이 의미화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영원한 의식 선포를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우리가 지금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찬 예식이 주는 영적 의미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영적 생명의 연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보존의 절대적 진리가 보존합니다.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 내 생명체가 보존되는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이렇게 건강한 생명체로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죽여서 우리가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식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생명체 보존을 위해 생명을 잃어버린 각종 음식물이 마련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만약 쇠고기를 먹었다면 소가 자기 생명체를 소멸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먹고 내 생명체가 보존되는 것이요 물고기 반찬을 먹었다면 그 생선 한 마리는 자기 일생의 삶이 결국 나에게 한 끼 식사의 보탬이 되려고 살아온 것입니다. 배추도 생명체요 나물도 생명체입니다. 생명을 먹어야 생명이 사는 절대적 진리를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같은 TV프로그램을 보십시오.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죽이셨는가? 그 생명이 버려짐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빵을 떼어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떼는 내 살이니라.” 포도주 한 잔을 주실 때 “포도주 한 잔 마시라.”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마시라. 이는 내 피니라. 생명체이다. 내 생명체를 먹고 너희 생명이 살아라.” 영생의 생명체와의 연결을 그렇게 의미화 하여서 이렇게 예식을 거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성찬은 똑같은 의미로 우리가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말씀에 이해하기 힘든 줄거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20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은 성찬 예식의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성찬에 쓸 빵과 포도주를 자신이 준비해 옵니다. 또, 매주일 성찬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그랬는데 간단한 의미적 음식을 준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배불리 먹는 음식 중심의 성찬이 되었고 술은 취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그런 말이 나왔는데 가난한 성도들은 성찬을 너무나 빈약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내놓고 먹지도 못하는 그런 경우가 생기고 또 매주일 하니까 이것도 굉장히 번거로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성찬식이 실컷 먹고 마시는 파티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의미적, 영적 내용을 잊어버리고 먹고 마시는데 집중하는 성찬 예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유교 문화에도 비슷한 순서 하나가 있습니다. 조상들의 제삿날이 되면 온 가족이 다함께 모여서 조상을 그리는 제사 의식을 행하는데 마지막 순서에 ‘음복’이라고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 제사에서 사용했던 술을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한 모금씩 다 일제히 마시는 순서를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조상의 은혜를 내 몸에 기념한다는 뜻으로 나누었습니다. 지금 가톨릭교회는 신학적으로 분명합니다. 성찬에서 사용한 포도주는 미사를 드린 후 주님의 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에 사용한 모든 포도주는 주님의 피가 되었으므로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신부님들이 그 자리에서 다 마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영적 의미의 기념입니다. 이것을 받음으로 영적인 의미가 내게 주어진다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는 지키는 것입니다. ‘아, 나는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생명체에 연결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나와 주님은 하나이다.’ 위대한 생명의 영적 결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피는 모든 사람의 성분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피와 나의 피의 결합은 내가 이제 주님의 성분이 되었다는 영적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식탁에 참여하는 자는 초대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문화는 많은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때를 따라 초대를 하며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초대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초대자가 누구인가?” 또,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입니다. 초대 손님과 초대자에 따라서 그 모임의 권위는 다르게 평가가 됩니다. 만일 친한 친구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초대했다면 응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다른 약속이 있으니까 내일 하자.”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을 대통령이 초대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휴! 그거 참 귀찮게 구네! 바빠서 못 간다고 해.” 그렇게 하실 겁니까? 저는 공식적으로 두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서 백악관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클린턴의 초대로 백악관에 갔던 일이 있고 공화당 대통령 부시의 초대로 갔다 온 일이 있습니다. FBI에서 조사해서 ‘소수 민족 지도자’로 평가했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를 받고 사실 고민했습니다. LA에서 워싱턴까지 가려면 비행기타고 6시간 가야 합니다. 번거롭지요? 그 다음에 비행기 값, 호텔비 자부담입니다.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데도 그날 가보니까 초대받은 사람 한 사람도 결석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초대자의 권위 때문입니다. 가서 보면 대통령과 마주보고 악수 한번 하고 격려해주는 말 한마디 듣고 사진 한번 같이 찍고 다 같이 식사 한번 하고 대통령의 국정 연설을 듣습니다. “우리 지금 미국의 가는 길은 이렇게 정책을 잡고 있으니까 지도자 여러분들이 이 일에 협조를 해주십시오.” 하는 연설을 듣습니다. 만약 그 날 대통령이 선물을 주었다면 평생 보관할 것입니다.
오늘 이 초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입니다. 선물이 있습니다. 영생과 구원입니다. 사실 이 성찬의 의미를 기억하는 성도는 절대 성찬에 빠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일보다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일 년에 몇 번 있는 이 성찬에 나는 절대 빠지지 말아야지.’ 모든 자기의 계획들을 취소해 버리고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초대는 어떤 것보다도 귀하다는 믿음의 고백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임금님들은 자신이 신뢰하는 신하를 격려하기 위해서 궁중으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려간 그 신하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인격 대우를 해주는 순서가 하나 있습니다. 임금님이 술 주전자를 들고 신하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주’라고 했습니다. 이 때 술잔을 든 신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너무나도 황송하여서 두 손으로 받들고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전하!” 그리고 임금님이 주는 그 술 한 잔을 먹는 것으로 영광을 삼았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은혜를 주님이 직접 주시며 “이것은 나의 피니라. 마시라. 이것은 내 살이니라. 먹으라.” 이런 의미이기 때문에 이 성찬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주님을 위하여 어느 때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겠나이다.” 그 각오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살면서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주님에게 쓰임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님에게 쓰임을 받는 중에 가장 거룩한 쓰임이 무엇인가? 저는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죽음과 똑같은 방법의 사역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적 축복이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 나타난 성령 충만의 사건을 보면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 때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이라고 하는 집사님 한분이 기독교 역사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사람을 가운데 세워놓고 사람들이 돌을 집어던져서 피를 터뜨려 죽이는 방법입니다. 신경조직이 정상인 사람이 그렇게 죽는다는 것은 고통의 극치가 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시간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주님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고 견딜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이 성령 충만으로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한 성도는 주님을 위한 어떤 일도 사양하지 않고 행하게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기회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별한 축복이라고 믿는 신앙 고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역사에 보면 어떤 때는 사실적 이야기로, 어떤 때는 하나의 전설로 전해지는 그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선택하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친구가 죽을죄를 지었는데 다른 친구가 “너는 어머니도 계시고 집안 사정이 있는데 네가 죽으면 안 된다. 내가 대신 죽을 테니 너는 살아라.” 하고 임금님에게 탄원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고, 우리나라 심청전에 나오는 이야기같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인당수 깊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다 전설이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다만 돌발적 사건이 터졌을 때 순간적 판단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던지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순간적으로 뛰어들어서 그를 구하고 대신 자기가 물에 빠져 죽는 일이라든가 강재구 소령과 같이 순간적 폭발 위험이 생긴 그 현장에서 다른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져 희생된 일들 말입니다. 사실 그런 일들도 너무나도 거룩한 희생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온 세상에 홍보하고 알려서 그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는 모습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은 인류적인 행사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하신 주님의 생명 희생 십자가 사역을 잊지 말고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라. 그리고 너희도 그런 기회가 올 때 그렇게 살아라.”
스티브 잡스가 죽는 날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도 더 슬퍼합니다. 토인비 박사의 역사관 “세상은 창조적인 소수가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 때문에 행복했어.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느라고 일찍 죽은 거야.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을 거야. I Love Steven. Thank you Steven. Good Bye Steven.” 전부 촛불들을 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던 청년들이 그렇게 애도하며 하루 종일 스티브에 대해서 방송합니다. 그가 가지고 살던 다섯 가지 삶의 철학 중에서 첫 번째와 다섯 번째가 기독교 정신입니다. 첫째가 뭐냐? “당신은 위대한 일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몸을 던지라.” 다섯 번째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면 당신은 잃을 것이 없다.” 그가 조금 일찍 갔지만 신념에 사는 사람들은 일찍 가는 것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은 가장 위대한 일에 몸을 바치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에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신념에 가득 찬 열정의 삶을 정신없이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조용히 영원의 세계로 본연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영생을 선물해준 주님의 희생을 오늘 이 성찬으로 영원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찬과 함께 영적 충만이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칭찬받는 교회
고전11장 22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 17절 상반절에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 “너희를 칭찬하지 읺는다�?쓰고있으며 22절 하반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합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파당 때문입니다. 무슨 파당입니까? 이번에는 성만찬을 둘러싼 파당입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행하기에 앞서 교인들이 함께 친교의 식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공동식사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 신자들의 모임은 대부분 교인 중 부유한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큰 방이 있는 집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사이에는 가진 자들도 있었고 갖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집의 주인은 의례히 부자였을 것이고 자연히 친한 지인들도 대부분 가진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보다 가까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로 따로 모여 각각 다른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큰 저택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식사공간이 있었습니다. 삼 면의 벽이 모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긴 안락의자가 달린 식탁이 차려진 식당(triclinium)이 있는가 하면 그저 똑바로 앉아서 먹어야 하는 마당을 향해 열린 식당(atrium)도 있었습니다. 물론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하는 방이 더 고급스럽고 편안한 식당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이들 사이에 나뉨이 생긴 것입니다. 가진 자들은 일찍이 와서 비스듬히 누워서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곤 했던 것입니다. 일하느라고 일찍 오지 못한 가난한 이들은 그저 앉아서 먹는 식당에서 먹여야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의 공동식사는 각자가 싸온 것을 풀어놓고 먹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가진 자들은 좋은 음식을 많이 싸가지고 와서 좋은 방에서 여유 있게 먹곤 했습니다. 게다가 거나하게 취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자연히 일하다가 늦게 와서 다른 방에 모여서 먹어야 하고 남아있는 것도 별로 없어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과 사이에 차별이 나타나고 그것이 파당이 되며 분쟁의 씨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만찬은 각자가 가져온 음식물을 한 자리에 풀어놓고 다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누어먹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3절에서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 배가 고파서 다들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할 사람은 아예 자기 집에서 미리 먹고 올 것이지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먹음으로써 시험 드는 사람 생기게 할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이 본문 34절 상반절의 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교회라고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성찬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신의 살과 피를 다 내놓으셨음을 기념하며 그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그와 연합하는 은혜의 예식 아닙니까? 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같은 믿음으로 함께 나눔으로써 다 같은 한 지체임을 확인하는 예식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찬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이에 대한 믿음이며, 그 목적과 결과는 주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다른 지체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며 모두 하나가 될 때 진정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 없이 남들이 먹기 전에 아니 다른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혼자 배고프다고 먼저 식사를 끝내버리는 등의 이기적인 행동을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한쪽으로 소외감, 박탈감, 열등감 등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전해주신 성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칭찬을 받을 교회이기는커녕 아예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쓴 것이 본문 20-22절의 말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사도 바울은 오늘의 두 본문 사이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되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님의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끼워 넣었습니다(고전11:23-25).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는 말 속에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성찬식은 지금 너희가 행하는 그런 성찬식하고는 다른 것이라”는 뜻이 무겁게 실려 있습니다. 26절에서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합니다. 주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입니까? 우리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는 죽으심이며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 없이 먹고 마시는 일이나 그래서 파당이 생기게 하는 행실들 가지고 주의 죽으심의 참 뜻을 어떻게 세상에 전하겠다는 것이냐고 힐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한 말이 27-29절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겠습니까? 우선 떡과 잔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믿음을 고백하며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깨우치려고 한 것은 신학적 의미 이전에 윤리적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과 그것을 통해 이루려고 하신 하나 됨을 실천하며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이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랑 가운데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모두가 한 지체가 되는 것이 주님의 만찬이지 그런 사랑의 배려 없이 자기 배부터 채우려는 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니며 그저 자기들의 죄 즉 이기적인 탐욕의 죄와 분열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고 모든 지체를 사랑으로 대하며 그러기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성도들의 모임이 칭찬받을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교회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기념하라
이필재목사 / 고린도전서 11:23~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던 때가 시간적으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시던 전날 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예식은 주님의 사역 마지막 부분으로 마태복음은 28장 중 26장에 기록되었고, 마가복음은 16장 중 14장에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는 24장 중 22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전도 사역은 이 밤이 마지막이라고 봅니다. 성찬 예식을 마지막으로 로마 군병들에게 물리적 힘으로 잡혀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이 예식을 행하시면서 나누는 떡과 잔의 의미를 “이는 내 살이요 내 피라.” 이런 정의를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신학의 차이가 여러 가지 견해의 성찬 의미를 세상에 가져왔습니다. 먼저 가톨릭교회의 견해를 보면 사제의 축도가 끝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사용했던 떡과 포도주는 절대 버리지 않고 모두 마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부님들 미사 드릴 때 보면 큰 잔을 가지고 따랐던 포도주가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제가 다 마시는데 이 잔을 거꾸로 들어서 마십니다. 우리 마틴 루터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믿음으로 취할 때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성분이 된다고 해서 가톨릭교회와 믿음의 차이를 두고 해석을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 받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믿음으로 받으면 살과 피의 성분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했고, 그 다음에 쥬잉글리 신학자가 있는데 이 분의 견해는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뿐이다.” 상징설을 신학적으로 정의했습니다. 그 다음에 장로교를 비롯한 대다수의 개신교회가 따르는 신학의 기초는 칼뱅 신학으로 우리 갈보리교회도 여기에 속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음으로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가 내게 동반하는 것이다.” 영적 임재설을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성찬을 받는다 하여도 떡이나 포도주, 물질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과 피를 의미하는 믿음은 영적으로 그렇게 효과를 가져오는 영적 능력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적 임재설입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세례 받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 또 세례는 받지 않았는데 ‘이 시간 나는 성찬에 참여하고 싶다.’ 그런 사람은 그 자체를 성령의 인도함으로 해석해서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지금 실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영적 임재의 뜻을 우리가 생각함으로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의 의미를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성찬의 떡과 잔은 주님과 나와의 생명의 결부가 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어떻게 주님 안에 들어갈 수 있으며 예수님이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가능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 몸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영적으로 함께 있는 임재설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은 자녀들의 관계를 설명할 때 피와 살을 나눈 관계라고 말합니다. 피와 살이란 사람의 구속 요소가 됩니다. DNA 검사를 하면 혈통인지 아닌지 아주 정확합니다. 건강한가 병이 있는가 알아보는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은 피검사를 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뭐냐? 영적으로 주님과 나와 같은 성분의 인간 형성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내 피를 마시지 않고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우리 바울 신학에서 주님과 나와의 동질성 성분의 신학적 설명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중의 하나가 감람나무 접목 예화입니다. 나무를 대각선으로 잘라내고 다른 나무를 거기에 붙여서 묶어버리면 진액이 통해서 돌감람나무도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결부입니다. 또 하나는 양자됨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칠 때 하나님이라고 사용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을 혼자 대면하실 때는 언제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라.” 그랬는데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아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위대한 생명의 결부의 영적 능력이 바로 이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나에게 부여되는 의미로 이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유월절 해방 역사의 완전한 성취가 이 속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 성찬의 밤은 히브리 민족이 출애굽할 때 하였던 유월절 행사를 민족 절기로 지키는 것을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해서 그 밤에 행하신 것입니다. “유월절 사건이 자신의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여러분! 유월절과 이 성만찬을 비교해보십시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에 실행했다고 했습니다. 성만찬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하셨습니다. 양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성분임을 말씀합니다. “양피를 문설주에 바르라. 그러면 재앙을 멸하리라.” 예수님의 피를 십자가에 발랐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깨끗한 양만 잡아라.” 예수님은 죄 없으신 어린 양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문설주의 피를 보시고 재앙을 면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피로 심판의 죄를 면죄 받습니다. 애굽 노예 생활에서 해방이 되어서 나왔는데 오늘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너희는 이 양의 고기를 먹으라.”라고 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양을 잡을 때 해가 질 때 잡으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해가 어두워졌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이 유월절을 영원히 기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영원히 기념합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유월절 사건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그림자였습니다. 성찬 예식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오늘 말씀에 이 땅에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하라고 했습니다.
1497년 이태리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성만찬 장면을 기도하면서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한 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성만찬 그림이 지금까지 인간이 그린 세계에 있는 단일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된 것입니다. 또, 온 세계에 가장 널리 전해진 그림이 되었습니다. 웬만하면 성도들의 가정에 그 성화 하나는 다 벽에 붙어있지 않습니까? 그 그림 한 장이 얼마나 귀한지 지금 밀라노 산타마리아 그라치에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데 아무나 안보여줍니다. 색깔이 변할까봐 제한적 관람을 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이 그림은 가장 귀한 그림이다. 색깔이 변하면 안 된다.” 우리 인간 존재의 최고 가치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경험해서 영적 능력이라든가 영감이라든가 영의 건강, 영의 빈약성, 요즘 흔히 사용되는 단어인 영성 훈련, 이런 말의 뜻이 무엇인가 알고 있습니다. 영적 존재인 인간은 성령과 나의 영의 건강한 교통 속에 복된 삶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으로 잘못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것에 방해가 될 때는 하나님은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하시는 사역 하나가 있는데 그게 심판입니다. 심판이란 무엇인가? 잘못 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잡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선택된 백성들에게 영적 무능은 모든 길을 막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보십시오. 축복과 저주가 계속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복의 종류가 무엇이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막혀있을 때 받을 수 있는 재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막히면 모든 것이 막힌다고 거기서 말합니다. 우리 문화대로 말하면 인간관계도 막히고 가족 관계도 막히고 출세도 막히고 물질도 막히고 다 막혀버립니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 구속 요소를 보면 영과 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데 육체는 혼의 지배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망나니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저 사람은 혼이 나간 거야! 이성을 잃어버렸어.” 맞습니다. 그런데 혼과 이성은 영의 지배 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이 병들면 그때부터 인간은 마귀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마귀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탄의 영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고린도전서로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마태복음에는 성만찬의 뜻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기독교 진리의 인간 정의!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었느니라.”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우리 한국의 정서와 문화, 부모님에 대해서 모든 자녀들은 불효의 죄가 있다고 교육했습니다.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일곱 가지라고 해서 ‘칠거지악’이라는 말이 생겼고, 그 중에 제일 큰 죄가 무엇인가? 불효입니다. 지금은 장례식 문화가 변했습니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굴건제복’이라는 옷을 베옷으로 입었습니다. 그런데 머리에 쓰는 모자가 있는데 그 모자의 모양을 살펴보십시오. 모자 가운데에 싸리가지 빳빳한 것 두 개를 넣어서 풀 먹여서 집어넣어서 모자의 내용이 한문으로 ‘넉 사(四)’입니다. 그런 모자를 쓰고 다리에는 양쪽으로 세 개씩 하얀 댕기를 매어놓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자를 쓰고 사람이 서있으면 한문으로 ‘허물 죄(罪)’가 됩니다. “부모님 앞에 나는 죄 자체입니다.” 그리고 부모님 시신 앞에 서서 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효자도 있습니다. 분당에 ‘효자촌’이라고 있는데 옛날에 그 동네에 국가에서 효자상 받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효자촌’이 되었습니다. 효자도 부모님 앞에서 죄입니다. 사람 자체를 죄라는 글자로 만든 것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을 죄인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그것이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 방법론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내가 먹고 영적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예식을 영원토록 기념하라 하셨으므로 오늘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겸손에 대한 말씀과 순종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죄를 지은 죄인은 어떤 경우에도 교만할 수가 없는 신분입니다. 아울러 그것을 인정하고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살면 하나님은 그 죄를 없애주시겠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는 무서운 것이지만 사함 받은 후에는 오히려 과거의 죄가 나에게 주는 유익이 있을 수 있도록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을 한 것이고 바울 사도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거의 죄가 클수록 내게 임하는 은혜가 큰 것이라고 하는 패러독스적 진리입니다.
저는 텍사스에서 목회할 때 충격적 사건을 듣고 그것이 제 목회에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개신교 목회는 침례교가 가장 큰 교단입니다. 또, 개신교회가 가장 발전한 나라가 미국과 한국입니다. 텍사스의 크리스웰 목사라고 침례교 담임목사 한 분은 미국 전체 침례 교인들이 침례교의 아버지라고 말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인교회에서 43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은퇴하게 되니까 43년을 기념해서 43층짜리 기념관을 건축하겠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만나는 후배 모든 목사들은 그를 만나면 언제나 질문이 똑같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목회를 하셨는지 후배들에게 비결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분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나요? 나는 살인자 목사요.” 젊었을 때 취미가 사냥이었습니다. 특히, 노루 사냥을 즐겼답니다. 사실 목사 취미로 사냥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동물 보호 차원의 취미라야 좋은 취미이지 살생 취미는 목사로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노루 사냥에 명사수로 얼마나 총을 잘 쏘는지 젊었을 때 노루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미국은 노루가 많습니다. 고속도로에 치어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 청년들 데리고 오스틴까지 축구 시합하러 운전해서 가는데 노루 두 마리나 죽였습니다. 노루가 막 튀어나오는걸 어떡합니까? 어느 날 그분도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에 사냥복을 입고 총을 가지고 산에 갔는데 멀리서 노루가 꿈틀하니까 “탕!” 총을 쏘니까 명중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노루가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목사는 목회 생명이 끝난 거였습니다. 사람 죽여 놓고 무슨 목사입니까? 이 사건이 터졌을 때 그 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는 그런 괴로운 십자가도 져야 목사이다. 툭툭 털어버리고 도망가지 말고 이제부터 당신은 설교하기도 부끄럽고 교인 쳐다볼 면목도 없고 우리 교인도 그런 일이 없는데 목사가 사람을 죽여 놨으니 그 죄인 된 양심으로 이 목회를 계속하라. 그래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목사 가운데 가장 큰 죄를 지은 목사입니다.” 그 죄인 심정의 고백을 하면서 목회를 했더니 침례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성만찬 참여는 우리가 예수님을 살인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우리는 살아난 진리! 오늘 이 성찬의 참여로 우리 모두의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것은 내 몸이니
이종철목사 / 고전 11:23-26
성만찬의 교회
교회 예식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말씀선포와 성만찬입니다. 그런데 중세 교회에서는 성만찬이 더 중요했습니다. 종교개혁 과정에서 요구사항 중 하나는 우리에게도 포도주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가톨릭에서 포도주는 사제들만 먹고, 일반 성도들에게는 빵만 주었습니다. 사제의 특별한 특권이었고, 또 포도주를 경망스럽게 먹다가 흘릴 우려 때문이라 추측됩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되어 첫 미사를 집전하며 부모님도 보고 있는데 너무 떨려서 그만 포도주를 흘리는 엄청난 실수를 했습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이기에 그냥 버릴 수는 없고 제단보를 오려서 태워야 합니다.
동방정교회 또한 성만찬이 예배에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정교회는 아예 예배당 구조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배실 안쪽은 마치 지성소처럼 벽으로 구분되었는데 이곳에 성만찬 제단이 있습니다. 사제들만 출입할 수 있고, 성만찬 제조 과정은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성만찬을 할 때는 금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일전에 정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포도주를 줄 때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줍니다. 귀중한 예수님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입니다.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합니다. 화체설의 기원이 바로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24절,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25절,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말씀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24절의 ‘이것은’ 일반적으로 빵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빵 is 예수님 몸’이 되어, 빵은 곧 예수님의 몸이 됩니다. 사제들이 성만찬 제정사와 성령 임재 기도를 드릴 때 실제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고 믿었습니다. 포도주 또한 ‘포도주 is 예수님 피’로 해석하여, 실제 포도주가 예수님 피로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초기 화체설의 모습은 안디옥 교부 이그나티우스의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빵으로 그리고 피가 음료로 주어지는 장소. 성찬은 ‘불사의 약’이며, ‘죽음의 해독제’” 물론 이 의미는 육체적으로 불로장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의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이를 매우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실제 보약처럼 이 빵을 집에 가져다 먹기도 하였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져다주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심방 제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과제 중 하나는 이 화체설의 미신성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매성찬 때마다 예수님의 골고다 희생이 반복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성만찬 의식만 참여하여도 구원과 거룩이 주어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조롱하며 그러면 천국은 쥐들로 들끓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쥐가 많아 성만찬의 빵을 훔쳐먹는 일이 잦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은 쥐는 거룩한 쥐가 됩니다. 조롱이었지만, 이 정도로 화체설은 성만찬에 엄청난 무게와 신비를 실어줍니다. 성만찬이 성상과 성물 숭배의 근원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성만찬을 버리고, 말씀 중심의 길로 갔습니다. 성만찬은 화체설이 아니라 기념설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의식 정도로 격하되었습니다. 그 결과 성만찬은 이제 주요 절기에만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현대교회는 종교의식의 상징성이나 신비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만찬에 무게를 두어 이를 실현하려 하지만 잘되지 않습니다. 화체설만큼의 무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중 성만찬이 살아 있는 곳은 루터교입니다. 루터교는 매주 성만찬을 드립니다. 루터교는 기념설이 아니라 공재설에 근거합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루터와 츠빙글리 간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진영이 분열할 정도의 심각한 다툼이었습니다. 공재설과 기념설의 다툼입니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화체설과 다른 점은 빵이 그리스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고백할 때 그 빵 위에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재설입니다. 쥐는 믿음이 없으니 빵을 먹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빵을 먹을 때 실제 그리스도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이를 문제 삼았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그 많은 빵 위에 임할 수 있느냐며 반박했습니다. 성만찬의 빵은 갈보리에서 단번에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만찬에서 실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성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기념하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대부분은 이 기념설을 받아들입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기념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성만찬의 신비가 사라집니다. 신비가 빠진 종교는 힘을 잃습니다. 단순한 기념설로는 부족합니다. 칼빈의 성령 임재설이 적절합니다. 빵과 포도주에 또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 곧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합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보이는 말씀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축제의 만찬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더 세밀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일반적인 성만찬 외에 다른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울이 전하는 성만찬 본문은 가장 초기 교회의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23절의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란 말씀은 바울이 직접 예수님에게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과 그들에 의해서 형성된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예수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24절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에서 ‘이것은’은 빵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헬라어 문법으로 보면 맞지 않습니다. ‘빵’은 남성형인데 ‘이것은’은 중성형입니다. 헬라어에서 지시대명사는 성이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빵이 아니라, 빵을 먹는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후 12장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비유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했습니다.
서로 하나의 빵을 떼고,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먹는 것은 교회가 한 몸인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다른 무엇보다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임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바울이 성만찬 의식을 설명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사이에 분열이 없고, 하나 됨을 유지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25절의 본문도 좀 세밀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는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 잔’ 하고 일치하는 것은 ‘내 피’가 아니라 ‘새 언약’입니다. ‘이 잔’과 ‘내 피’를 일치시키는 것은 마가복음의 성만찬 본문인데, 이는 바울 본문보다 시대적으로 후기에 속합니다. 그 차이는 유대 환경 탓을 들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피 채 먹는 것을 극히 꺼려합니다. 아무리 상징일지라도 인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잔, 곧 포도주와 일치하는 것은 새언약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만찬은 새계약 축제에 그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새계약 체결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서 이 땅의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하늘의 이스라엘 공동체, 곧 교회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새계약’ 곧 ‘신약’(新約)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그러니 성만찬은 기쁨의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이 피는 이제 예수님의 피입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듯이, 이제는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피로써 새 계약을 맺습니다.
이어지는 출애굽기 계약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성만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빵과 포도주로 임한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과 함께 먹음으로 새계약 백성이 되었음을 축합니다. 성만찬은 축제의 만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출애굽 승리의 만찬입니다.
성만찬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고난받으셨음을 생각하니 슬피고 비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계약의 축제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마치 혼인잔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어둠과 허무에 대항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성만찬은 미리 앞당겨 축하하는 승리의 만찬입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이 승리의 기쁨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능력으로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식탁
고전11장 23절 ~ 26절 / 조상호목사
제가 지난 번 한국에 방문했을 때인 12월 9일자 모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맛을 찾는 사람들> "맛있는 음식 있다면 하늘엔들 못가겠어요" 제목이 희한해서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벤처업계에서 일하는 여성 6명으로 구성된 ‘미래연구회’라는 모임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추구하는 일은 거창한 이름과 달리, ‘미래를 건설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서울 강남지역 ‘맛 집’만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날 선정한 음식을 맛보며 다음엔 뭘 먹으러 갈지 궁리하는 게 모임의 주된 관심사라고 합니다. 그 6명의 여성들은 맛있는 것 많이 먹기 위해, 남편 몰래 곗돈을 모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 중에 최모라는 여성은 용돈의 60∼70%를 먹는 것에 ‘투자한다' 라고 하지 않고, ‘바친다’고 했습니다. 기자가 “먹는 것에 목숨 거는 거 아니냐”고 질문하자, “먹기 위해 사는 거나, 살기 위해 먹는 거나, 목숨을 거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먹는 것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건 최 모라는 여성만이 아닙니다. ‘미래연구회’와 비슷한 모임이 인터넷 싸이트인 다음(Daum)에만 무려 2,000 여개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등장하는 모임 몇 개를 소개하겠습니다. “주꾸미집 좋아하는 분 모이세요”, “세계음식 시리즈 25탄, 네팔·인도 요리”, “뱅상의 중새우칠리·유산슬·새우바게트샐러드”, “훈래의 찾아라 맛 번개, 버팔로(닭쌈) 을지로” 등의 다양한 요리 모임들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TV나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주중에는 거의 매일 빠짐없이 유명한 요리와 소문난 식당들을 소개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식탐을 가지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다보니 그저 한 끼 때우는 식당들은 갈수록 문을 닫고 있지만,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음식이나 요리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식당에서 만든 식사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배설하신 마지막 만찬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십만 원, 수백만 원짜리 식탁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제정해놓으신 성만찬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장 귀한 식탁을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오늘 2,000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침례식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교회예식인, 이 성찬의 의미를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식탁
첫째로, 이 성찬은 주님께서 초대하신 식탁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3년반 동안 공생애를 지나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며, 함께 생활하며, 동고동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한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배설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마2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는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찬은 인간이 아닌, 우리 주님께서 배설해 주신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사람이 부엌에서 요리하여 차려주는 일반 식탁과 다릅니다. 비록 오늘날 목사가 성찬을 집전하며 베푼다 할지라도, 성찬은 2,000년 전에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이미 제정하여 놓으신 식탁인 줄로 믿습니다. 이 성만찬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떠한 레스토랑의 식탁보다도 가장 귀한 식탁인 줄로 믿습니다.
2)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식탁
둘째로, 이 성찬은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식탁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식탁과 다른 점입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까 중국요리 종류는 무려 3,00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중국 요리가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많게 된 기원이 있습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다스릴 때, 그는 매끼 동일한 음식을 먹지 않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중국 전역에 있는 모든 유명한 요리사들을 불러 진시황을 위하여 매 끼니마다 새로운 음식을 만들다보니 3,000가지가 넘는 요리를 개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네 발 달린 것 중에 안 먹는 것은 밥상밖에 없고, 날개 달린 것 중에서 안 먹는 것은 비행기밖에 없다.” 중국 사라들의 음식문화는 대단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할까요? 중국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개발했을까요? 쳐다만 보기 위해서 음식을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먹기 위해서입니다. 맛있게 먹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주부는 남편이 잘 먹도록 하기 위해서,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식탁을 차립니다. 그러나 성만찬은 세상의 식탁과 다릅니다. 세상의 식탁은 먹기 위해서, 즐기기 위한 식탁이지만, 성찬은 기념하기 위한 식탁입니다.
23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또 계속해서 25절을 보겠습니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여기에서우리는 성찬의 떡을 먹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찬을 대할 때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주님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기념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대할 때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떡을 대할 때마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몸을 찢기신 주님을 생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 잔을 들 때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을 생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 몸이 찢기신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예식이 이 성찬식입니다.
3) 사명을 다짐하기 위한 식탁
셋째로, 이 성찬은 사명을 다짐하기 위한 식탁입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과거 2,000년 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현재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우리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5절과 27절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영원히 기념하라. 그리고 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너희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고 묻거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사건이다‘라고 너희 자녀들에게 전하라.” 이처럼 유월절 사건은 영원대대로 기념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그리고 자손대대로 전해야 주어야 할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유월절만 되면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기념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피 흘리신 사건을 계속해서 기념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전하여 주는 것처럼,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만찬은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는 식탁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이라면 자식을 잘 교육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인이라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학생이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 사명 중에 가장 으뜸 되는 사명은 주님을 전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해야 할 우리의 사명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다 버리시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들 속에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4) 교제를 이루게 하는 식탁
넷째로, 이 성찬은 사랑의 교제를 이루게 하는 식탁입니다. 일반적으로 식탁에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어느 가정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말을 많이 하면 “침 뛰긴다, 말하지 말고 밥부터 먹으라”고 하기도 하고 또 배가 고파 밥을 먹는 사람같으면 “개들도 밥 먹을 때는 건들지 않는다더라, 제발 밥부터 먹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가정의 식탁에서는 하루 종일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로 나누는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서로 바빠서 잘 하지 못하던 부모님과 자녀 간의 교제나, 남편과 아내와의 교제가 식탁에서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만찬은 성도 간의 교제를 이루게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고 잔을 나누어 주신 후,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16절과 17절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한 피에 참여한 자이며 한 몸에 참여한 자라는 말입니다. 누구의 피에 참여한 자이고 누구의 몸에 참여한 자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 자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주님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278장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방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 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아마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족일 것입니다. 또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생이 있고, 한 직장에 다니는 동료들이 있고,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들이 있고, 같은 민족에 속해 있는 동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관계들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입니다. 신앙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때문에 한 형제, 한 자매,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에서의 관계와 다릅니다. 세상의 관계는 이 땅에서 끝이 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으면 그 관계가 끝납니다. 죽은 시신을 붙들고 아무리 울어도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루어진 신앙관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영적인 관계는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관계는 우리가 이 땅에서만 유지되는데 반해, 영적인 관계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천국에 가서도 계속되는 줄로 믿습니다. 천국까지 영원히 남는 관계는 바로 이 믿음의 관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관계를 매우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혈연적인 관계, 인간적인 관계, 사회적인 관계만을 중요시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떡과 잔을 나누게 하시면서 우리의 영적인 관계를 다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사랑의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나누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나누면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와 자매들인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배설하신 성찬을 통해 우리의 막힌 담들이 허물어지고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 실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두세 번 정도 소개한 적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삭이 된 여인이 크리스마스 전 날 밤 선교사 마을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영하 16도의 혹한 속에서 한 걸음 올라가면 두 걸음 미끄러지고 두 걸음 올라가면 세 걸음 미끄러집니다. 그러다가 아무도 없는 깊은 산 곳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신작로 바닥에 솔잎 가지를 꺾어 덮어놓고 치마를 벗어서 그 위에 깔고 출산을 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 여인은 속옷까지 벗어서 아기의 얼굴과 몸을 감싸주었습니다. 이른 새벽, 미국에서 온 선교사 한 분이 새벽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지프차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 선교사는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깜짝 놀랄만한 광경이 눈에 띄었습니다. 완전히 발가벗은 한 여인이 새우등처럼 몸을 꾸부린 자세로 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아마 갓 태어난 아기가 얼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의 옷을 다 벗어서 덮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온 산등성이에 피가 뿌려져 있었던 걸고 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그 주위를 뛰어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 선교사는 경찰과 함께 이 여인의 정체를 수소문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어서 그 시신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고, 갓 태어난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 아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선교사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불러놓고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야, 양아버지인 나를 따라 가겠니 아니면 너의 어머니 나라인 여기에 남겠니? 네가 선택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충격을 받은 아들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추운 겨울 맨발로 뛰어 나갔습니다. 달리고 뛰던 이 아이는 동구 밖을 빠져나가 하늘을 향하여 오열을 토하고 절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무덤에 달려가 무덤 주위에 난 가시나무를 꺾고, 갈대 잎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쌓인 눈을 다 쓸어 내렸습니다. 쌓인 눈 위에 발가벗은 채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만큼 추우셨습니까? 핏덩어리 같은 날 살리기 위하여 어머니께서 죽으셨다죠. 날 살리기 위해 벗으셨다죠.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뒤쫓아 온 선교사 부부는 너무나도 장엄하고 엄숙하고 위대한 이 상황에서 만류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큰 소나무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핏덩이 같은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그 어머니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몸 찢기시고 피 흘리셨습니다.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을 대할 때, 2,000년 전에 몸 찢기시고 피 흘려주신 주님을 기념하며,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배설하신 성찬을 통해 우리의 막힌 담들이 허물어지고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세우신 새 언약
고전11장 23절 ~ 29절 / 임덕순목사
만일, 우리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이 남북통일에 합의하고 평화조약을 맺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배석하는 영광을 얻었다면 정말로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만 배나 영광스러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죄와 영생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자리에 내가 참석한다면 말할 수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그것도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언약의 한편 당사자로 참석해서,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영생을 보장받으며,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내내 함께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 선포식에 내가 당사자로 참석한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형언할 수 없이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바로 그런 조약식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성례는 하나님과 나와의 구원과 영생언약을 맺는 것이며, 그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례가 왜 대단한 예식인줄 아십니까?
첫째, 성례는 주님이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주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멸망을 안타깝게 보시고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의 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우리대신 처형당하게 하시고 그 공로로 인생들의 죄를 사하신 그런 은혜로우시고 위대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들을 믿는다면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 죄를 완전히 사해주마"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예수님께서도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약속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성례에 참석할 것을 명령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서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이며, 이 성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교회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루살렘의 어떤 집 다락방에서 만찬을 준비하시고 열두 제자를 모아 떡을 친히 떼어주시며 "이것을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신이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흠 없는 새끼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르고 그 고기를 불에 구워먹으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서 매 가구마다 흠 없는 어린 양 한 마리씩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그 어린양은 애굽의 노예로 살다 죽게 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제물이었고, 장차 죄의 노예로 망하는 인생들을 구원할 예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으라 하신 분과, 오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예수를 믿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기념의 음식을 먹으라 하시는 분이 동일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공로로는 우리 죄를 사할만한 제물을 준비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당신께서 준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삼아 우리들의 구원의 길을 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입니다.
구약의 유월절에,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어서 피를 흘려주고, 불에 구워진 그 양은 예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피를 뿌리고 양고기를 구워 먹었던 그 저녁의 식사는 최초의 성찬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양의피로 죽음의 재앙을 면했을 뿐 아니라, 430년 동안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받아 약속의 땅으로 힘껏 탈출하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하나님의 지시대로 잡은 어린양의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구워 먹었던 그 식사는 이스라엘 민족적인 성찬식 이었고, 인류 최초의 성찬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성례를 행하고 나서 그들은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온 민족이 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고전10:1,2에 "우리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고 하셨는데, 세례란 옛 때를 씻어버리고 새 출발하는 계기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과정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날 밤에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려준 양고기를 먹은 사람들만 구원을 받았고, 그 음식의 힘으로 절망의 나라 애굽에서 탈출하였으며, 소망의 나라인 가나안을 향하여 달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성찬에 참여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 누릴수 있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과 하나가되는 생명언약에 가입하며, 날마다 삶의 능력을 공급받아 세상을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큰 자부심과 감사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례는 새로운 언약입니다. - "이 잔은 내 피로세운 새 언약이니"
성찬은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이 있습니다.
ㄱ, 새 언약은 은혜로운 언약입니다.
바울은 본래 옛 언약을 신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옛 언약이란,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 공로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서 탄식하기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도다. 내 안에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악을 행하려는 의지가 싸우니,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외쳤습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셔서 "내가 다 이루었으니 믿으라! 나를 믿으면 내 공로로 내가 구원하마" 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새로 공포하시는 새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는 아주 은혜로운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에는 여러 가지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 공로 없는 죄인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를 사하고 생명으로 옮겨주신다는 약속,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영원토록 내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해 주신다는 약속,
하나님의 소유인 영원한 천국을 우리에게 상속시키겠다는 약속,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언제나 졸지도 않고 지키시며 안전하게 인도하신다는 약속,
무슨 일을 만나든지 결국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네게 유익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
네가 기도할 때 마다 응답하겠다는 약속들이 모두 포함되어있는 엄청난 언약입니다.
이렇게 많은 내용들을 포함한 이 언약은, 아무 공로 없는 자에게도 믿기만 하면 적용되는 아주 은혜로운 언약입니다.
ㄴ, 대가가 이미 지불되었으므로, 이미 발효되어진 언약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에스컬레이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기만 하면, 그때부터 나는 자동적으로 위층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 에스컬레이터가 이미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내가 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끌어올려지는것입니다. 마찬가지로 30년 불교인으로 살다온 사람도, 40년 방탕하던 사람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즉시로 구원을 받으며, 새로운 축복의 삶으로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누립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모두가 이미 발효되어진 것을 의미하는 과거완료형입니다. 이 언약은 "내가 이미 대가를 지불하였으므로 나를 믿기만 하면, 즉 나와 계약만 하면, 즉시로 네 죄를 사하고 영혼을 책임지마" 라고 성경에 명시하신 계약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그의 공로를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이 성찬에 참여하기만 하면 이미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그 믿는 자의 것입니다. 이런 언약에 우리가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각별히 감사하시고 그 은혜를 더 깊이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ㄷ, 새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그것은 쌍방간의 계약이 아닙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도 이렇게 하겠다” 라는 식으로 쌍방간에 동등한 자격으로 맺는 조건부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언약하시고 혼자 맹세하시고 혼자 증인되시고 혼자 성취하시는 아주 일방적인 언약이며, 거기에 우리를 참여시켜 수혜자가 되게 하시는, 아주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언약을 맺자!"
예! 그럼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맹세할까요?
저는 맹세해도 책임질 만한 진실성과 능력이 없는데요?
"그런 건 필요 없다. 내가 다 책임져 주마!"
그럼 제가 누군가를 보증으로 세워야하나요? 보증 세울 사람이 없는데요?
"아니다 내가 보증도 서 주마!"
그러면 제가 무엇을 성취해야 하나요? 내게는 선을 행할 힘이 없는데요?
"아니다 내가 성취하마! 다만 너는, 내가 약속을 했고, 맹세했고 성취한다는 사실을 너는 믿기만 해라!"
이렇게, 일방적으로 한편에서 다 준비해 놓고서, 이 좋은 것을 다 줄테니 나에게 오라,
나를 믿으라는 일방적인 언약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그 언약의 원본을 가직하셨고 우리에게 사본을 주셨습니다. 그 사본이 성경입니다. 이 언약은 지금도 100% 유효하며, 하나님이 간직하신 계약서는 천년이가도 결코 변치 아니하며, 지금도 우리를 이 계약에 의해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언약에 수혜자로 참여하되 믿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한쪽의 당사자가 되는 특권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모든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 좋은 계약에 어떤 바보가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런 계약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전도자가 되십시오.
ㄹ, 날마다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언약입니다.
이것은 이미 체결된 언약이며 발효된 언약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언약을 잊고서 살아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이 언약을 새로 갱신하여야 합니다. 때때로 성찬식을 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 언약을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오늘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오늘 느끼는 그 감사와 감격을 여러분은 느끼고 있습니까? 누구나 처음에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감격하며 신앙을 시작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첫 신앙을 잃어버리고 감사가 희미해 진 모습으로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만 가진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세월이 가도 변치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변치않는 열정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계약서가 간직되어 있습니까? 혹시 찢겨져 있거나 잊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언제 그런 언약을 맺었던가? 기억조차도 나지 않는 불행한 신앙인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성찬식을 행하며, 성찬의 음식을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들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그 언약을 다시 읽고 변색된 부분을 채색하면서 마음으로 그 계약을 갱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찬을 먹고 마심으로서, 우리 마음 안에 희미해 졌던 하나님이 주신 언약들을 다시 채색하여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교제를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세워주신 은혜로운 언약의 갱신 행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언약의 보증물을 다시 가짐으로서 주님과 나와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신 말씀처럼, 다시 새롭게 이 언약을 기억하고 마음 안에 새겨서, 다시 뜨거운 신앙생활과 충성된 생활을 하기를 다짐할 뿐 아니라, 내 가족 모두를 이 은혜의 언약에 동참시킬 각오를 새롭게 하시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이렇게 말씀해 주신 이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주님의 뜻을 받들어 살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새 결심으로 출발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찬을 받기 전에
고전 11장 27절 ~ 29절 / 엄기호목사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맞은 거룩한 만찬을 기념하는 것으로써, 사도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이 성찬은, 떡을 받아 찢기신 ‘살’에 참예하고, 잔을 받아 흘리신‘피’에 참예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의미를 지닌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 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촐하게 준비된 저녁 식탁에 앉아 감사기도를 드린 뒤, 떡을 들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고 다시 잔을 들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를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신 후,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의 만찬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매월 첫 주, 행해지고 있는 성만찬의 출발이 된 것입니다.
또한 성찬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예식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과거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재화시키는 것이요, 또한 주의 영광스러운 재림이라는 미래와도 연결해주는 ‘영적인 연결고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성찬예식의 이러한 심오한 의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찬을 대하기에 합당치 않은 자세였기에 바울은 교훈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준 교훈을 통해, 성찬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주의 떡과 잔을 대하는 합당한 자세’인지 살펴야 합니다.
성찬이란, 신앙고백의 실천적인 행사입니다. ‘합당치 않다’는 헬라어 ‘아낙시오스’는 ‘무가치한 태도’를 뜻합니다. '성찬을 받기 전에' 주님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를 돌아봄으로써, 무가치한 자세로 성찬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 후 예식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기념하는 자세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념하라’고 분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도 나처럼 매번 이와 같이 실천하라”고 하심으로 때마다 우리도 살점을 찢고 동맥을 끊어 피 흘리지 않아도 되도록 주님께서는 다만, “나를 기념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념하라는 것’은 “기억한다.”, “따른다.”,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사명을 따르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방법을 배우라’는,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해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기념합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애굽 430년 종살이로부터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해방 사건은 단 한 번이면 됩니다. 그러나 그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것은 매년 반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통 받던 때를 기억하고 애굽을 떠나면서 먹었던 쓴 나물과 누룩 넣지 않은 떡을 유월절마다 먹으면서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민족적 결속을 다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나치 치하에서 학살당하고 핍박받던 역사적 사료들을 한데 모아 놓은 전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방문해서 나치의 잔학성을 재확인하고 쓴 나물 먹던 시절을 상기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고통의 시대가 있습니다.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쓴 나물먹던 시절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때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성찬을 받기 전에’, 거룩한 감격으로 참예할 때뿐만 아니라, 제대로 주님을 기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그동안 ‘이웃을 배려했는지’의 차원에서도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볼 때, 이웃을 위한 희생까지는 아니어도 배려조차 해줄 수 없는 상태라면, 성찬을 받기에 합당치 않은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다른 성도들과의 하나 됨의 교제는 무시한 채 성찬 예식을 이기적인 행사로 전락시켰습니다. 자신보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하면서 성찬에 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에 대한 범죄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님께 대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일은, 주의 만찬의 원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목적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성찬 예식에 합당치 않게 참예하는 것은, 인간이 습관적으로 도모하는 무의미한 행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주님을 기념하는 시간들이었지 돌아봐야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왔는지, 구속의 은혜를 감격하며 살았는지, 입술로는 감사를 표현하거나 복음을 전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봐야합니다. 또한 이웃에게 선행과 섬김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함으로 성찬의 정신을 계승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봐야합니다. '성찬을 받기 전', 말씀에 비추어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자마다, 성령께서 깨닫는 지혜로 임하여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자기를 살피고 성찬을 대해야합니다.
28절에 ‘살피고’라고 번역된 헬라어‘도키마제토’는 ‘검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라는 뜻을 지닌 명령형 단어입니다. 금속이 순전한 것인지 아닌지를 검사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적용해야 할 명령입니다. 성찬예식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뜻 깊은 의식이므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기를 검토하고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려 깊게 살피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오만할 정도로 경솔한 태도인 것입니다. 성찬예식의 참여자로서 불순한 마음이나 죄를 지은 상태 그대로 참예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당부하는 주의사항입니다. 내면의 동기와 겉으로 드러난 행동도 살펴보고, 성찬을 행하는 참 목적과 의미도 이해해서 검토해보고 참예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밥상에 둘러앉아 매일 먹는 음식을 대하는 것이라면, 굳이 진지하게 자기를 살펴야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끼니때마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과연 이 밥을 먹기에 합당한 존재인가?’를 살피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실 때마다 ‘나는 이 차를 마실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본문 28절에는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뜻은 ‘내가 왜 이 성찬에 참예 하는가’, ‘이 성찬에 참예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지금 내 신앙생활은 온전한 것인가’, ‘나는 무엇을 믿고 있으며, 무엇을 소망하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자신의 삶에 드러난 결과들을 반성하고, 생활속에서 범한 죄들을 낱낱이 고백하십시오, 회개한 후 성찬을 대하십시오. 그리고 죄 사함의 능력이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고 나서, 성찬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찬 앞에서, 그동안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벌써 2000년 전에 죄 용서의 값을 치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기 전에', 아낌없이 희생의 살과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쏟아 나를 살려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도 일일이 감사하십시오. '성찬을 받기 전에',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회개와 진정한 감사를 올려드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분변치 못하고 ‘성찬’ 대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분문 29절에서 분변치’로 번역된 ‘디아크리논’은 ‘구별하다’, ‘식별하다’‘분리하다’, ‘분별하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이것은 성찬시의 떡의 본질에 대해 이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다는 것은, 주의 만찬을 다른 식사와 구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제공된 주님의 ‘살’이요, ‘피’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 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날마다 나를 이긴다.”는 뜻이고 그러기위해“날마다 자신을 살핀다.”는 의미가 전제됩니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 주의 몸을 분변해야 함을 교훈했습니다.
29절에는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먹는 떡이나 잔은, 평소에 포만감을 위해 먹는 일반식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분변하라는 것은 성만찬은 다른 식사와는 달리 구별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의 성만찬에 임하는 시간은 방종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무분별하게 참예함으로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함은 기본이요 더 나아가 성찬이 주는 무한한 능력에까지 참여하는 축복 안에 거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찬예식을 단순한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하여 준비 없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성찬의 목적에 위배된다는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번번이 넘어지고 스러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해 흘려주신 ‘주님의 피’와 ‘찢기신 주님의 살’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뎌지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동일한 죄로 반복된 삶을 살지 않기로 작정할 뿐 아니라, 그러고도 잘 안 되는 것이 인간이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무한한 사유하심의 은혜로,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우리의 허다한 죄를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씻기시는 ‘용서의 주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잿물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로 쓸지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의 죄악을 위해 주님은 그 살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성찬을 대해야 비로소 죄를! 미워하는 수준에서 나아가 죄를 이기는 능력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성찬주일 뿐 아니라 날마다 성찬에 참예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에 참예할 때마다, 나를 위해 받으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 속에서 기념하고, 성도간의 교제에 이상이 없는지 돌아보며, 그리고 자신 스스로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깨닫게 하신 합당치 않은 부분 부분마다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한 후 성찬에 참예하여 마음의 평안과 치유의 은혜와 형통의 길이 열리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자기성찰의 축복
고전11장 27절 ~ 34절 / 지용수목사
이 시간에도 부족한 저, 길가의 돌멩이 같은 저에게 기대하지 마시고, 저를 쓰시는 하나님께 기대하셔서 여러분의 소원의 잔이 넘치고 만족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아!’하는 은혜, 평생 처음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초기에는 한국인 목사님이 한 분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1907년에 서경조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길선주 목사님 등 일곱 분이 안수를 받아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님이 배출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인 목사님이 계시지 않을 때 서양 선교사님들이 우리 나라에 오셔서 세례도 베풀고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우리 한국인을 잘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미국 사람들을 보면 눈도 다 노랗고,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분간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특히 미국 사람을 처음 볼 때는 더 이상하고 분간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서양 사람들도 우리 나라 사람들을 처음 볼 때는 다 똑같아 보이나 봅니다. 서양 사람들은 갈색, 은발, 금발 등 머리 색깔이라도 다른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머리 색깔도 거의 다 같으니 분간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10년 전 미국에서 만났던 한 미국인 교수가 제게 손자가 몇 명이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아직 청년이라고 했더니 도저히 분간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을 자주 접하면 분간하기가 조금 쉬운데 그렇지 않으면 참 힘든가 봅니다.
그러니 그 당시 선교사님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특별히 세례 문답할 때 고민이 많았답니다. 아이인 줄 알고 “예수가 네 구주냐?”하고 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른이고, 어른인 줄 알고 물었는데 나중에 보면 아이이고, 그래서 난처한 경우가 많았답니다.
그러다 나중에 선교사님들이 의논하여 결정했답니다. 얼굴을 보고는 모르니 머리 모양을 보고 상투를 했으면 어른, 머리를 땋았으면 총각으로 대하자고 했답니다. 그렇게 구별해서 세례 문답을 하니 별 어려움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머리를 다 깎은 스님이 왔답니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어른인지 아이인지 몰라서 선교사님이 “당신은 어른입니까? 너는 아이냐?”라고 물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정말 그렇게 분간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사람들을 잘 분별해야 됩니다.
이번 대구 지하철 사고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지하철 칸에 탔던 사람들에게 조금만 분별력이 있었어도 그렇게 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일 때 한 번 만에 붙지 않으니 라이터를 몇 번이나 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한 사람이라도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저러다가 큰 화재를 일으키겠구나. 저러다가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겠구나.’라는 판단을 해서 라이터 불만 켜지 못하게 막았어도 그런 큰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분별하지 못해서 우리가 이렇게 큰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을 분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기꾼을 사기꾼으로 몰랐다가 사기를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을 잘 분별해야 됩니다.
사람을 분별하지 못해서 잘못 사귀면 망합니다.
르호보암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나라를 거의 다 잃었습니다. 암논도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가 이복누이를 폭행하고, 2년 후에는 이복누이 오빠의 칼에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분별력이 있으면 그런 악한 친구를 사귀지 않았을 것입니다.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친구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 자동차를 태워 준다고 함부로 타는 것이 아닙니다. 길에 서 있는데 고급 승용차가 와서 태워 준다며 타라고 해도 타서는 안 됩니다. 그 때는 왜 타라고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것이나 잘못 탔다가 인생의 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 많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3분에 한 명 꼴로 여자들이 폭행을 당한답니다. 상대방을 믿고 따라갔다가 모두 그렇게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항상 반짝반짝 해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의 눈을 보십시오. 항상 반들반들합니다.
저는 늘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려고 애씁니다. 제가 우리 장로님들을 존경하고 여러분을 사랑하지만 누가 마귀의 도구로 쓰임 받을지 모르니 늘 살핍니다. 그래서 마귀의 도구가 될 사람은 사정없이 잘라버립니다. 그래야 암이 크지 않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저 허허허 하다 보면 한구석에서 큰 사고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위험한 사람은 멀리해서 인간 관계에 복을 누리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만나면 어차피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어 있습니다. 도박꾼과 자주 만나서 사귀면 결국 도박하게 됩니다. 술꾼과 자주 만나다 보면 반 잔, 한 잔, 두 잔 하다가 결국 술꾼이 됩니다. 새벽기도 하는 분과 자주 만나면 결국 새벽기도를 하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을 만나면 복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분별하고 성찰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성찰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 자기 성찰(self-examination)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혼자 하나님 앞에 계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한 나환자가 주님 앞에 엎드려서 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환자에게 따뜻한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하라.”
그 즉시 나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 혹 몸에 병이 있는 분은 오늘 밤에 우리 주님께서 손을 얹으시고 깨끗하게 치료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니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병도 치료 받으려고 모여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지 않으시고 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을 찾아가 전도도 하시고 말씀을 전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밀려와도 다 버리고 홀로 산에 가셔서 하나님 앞에 계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혼자 있는 것이 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이 말했습니다.
“대여섯 사람이 차를 마시는 것은 가치가 없는 저속한 모임이고, 서너 사람이 차를 마시는 것은 그래도 조금 유쾌한 모임이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는 것은 의미 있는 귀한 모임이다. 그러나 혼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최고이다.”
혼자 차를 마시면 자기를 돌아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시간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 말씀을 마무리하는데, 제 군 생활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군에서도 새벽기도회에 나갔고, 고등부 아이들도 가르쳤습니다. 주일 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 수요 예배 때에도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교회 생활도 잘 했지만, 특별히 여유 시간을 잘 활용한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후부터 일할 때까지 꼭 한 시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비가 쏟아지지 않는 한, 연못가에 가서 혼자 조용히 40분간 묵상하고 기도하고 또 저를 생각하며 살폈습니다. 3년 동안 아침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이 제 영성을 크게 키워 준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이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야 편안하고, 혼자 있으면 불안하다면 손해를 많이 보는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있으면 긴장해야 되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데, 혼자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큰 일을 할 사람입니다.
여러분, 혼자 있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혼자 있으면 늘 주님과 대화하고 자기를 살피니, 더 경건해지고 더 기쁘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평소에도 자기 성찰을 해야 하지만, 특별히 어떤 사건이 있거나 어떤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자기를 체크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성찬을 먹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면, 합당하지 않게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라고 27절에 말씀하십니다.
29절에는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찬을 먹기 전에 자기를 살피면, ‘나같이 부족한 죄인이, 허물 많은 죄인이, 영원히 지옥갈 죄인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렇게 성찬을 대하니 얼마나 감사한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깨닫고 감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살려고, 전도하며 살려고 맹세하고 결단했는데 그대로 살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 성찬식을 할 때마다 회개하며 죄송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빵과 잔을 먹고 마십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이고 능력이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피지 않고 그냥 성찬식을 하면, 성찬 전의 애찬 때 먹는 빵 한 개를 더 먹는 기분으로 먹고 애찬 때 마시는 포도주 한 잔을 더 마시는 기분으로 마시니 그 빵, 그 포도주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 때 먹고 마시는 빵과 떡이 애찬 때 먹고 마시는 것과 똑같아도 그 의미는 다릅니다. 애찬 때는 그냥 떡과 그냥 포도주이지만, 성찬 때는 주님의 몸인 빵이고 주님의 피인 포도주인데,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면 회개가 있겠습니까? 감사가 있겠습니까? 어떤 다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고,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죄가 되어서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본문 30절에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전에는 강했는데 성찬을 함부로 먹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성찬을 업신여기며 함부로 먹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채찍을 맞아 건강한 사람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하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셨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성찬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먹고 마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심판은 그 사람을 지옥에 던지는 것인데, 이들은 지옥에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찍질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지옥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성찬을 업신여기면 하나님께 채찍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에서 8절에 말씀하십니다.
『…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여러분이 죄를 계속 지어도 하나님의 채찍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증거입니다. 아주 작은 죄를 지어도 양심에 가책과 탄식이 오고, 조금 심하게 죄를 지으면 자식과 집안을 치시는 하나님의 채찍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찬식 때 자기를 살피지 않고 성찬의 떡과 잔을 함부로 먹고 마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약하게 하시고 병들게 하시고, 심한 사람은 데려 가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를 살피고 성찬의 떡과 잔을 먹고 마셨다면 주님의 그런 판단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살핀 후에 성찬을 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찬식 때뿐 아니라 예배드릴 때도 자기를 살피고 충성할 때도 자기를 살펴야 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기 전에 저를 살펴봅니다. 또 설교 준비를 하면서도 살피고, 강단에 올라가서도 살피고, 예배를 마친 후에도 저를 살핍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뛰어 내려가서 여러분 가까이에서 인사도 드리고 싶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저를 살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살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귀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이나 예배 앞에서 특별히 자신을 살펴야 하지만, 사실은 인생 백사만사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 때뿐 아니라 애찬 때도 함부로 먹지 말라는 말씀이 뒤에 나옵니다.
“너희가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왔다고 음식을 다 먹으면 나중에 오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기다렸다가 먹어라. 만일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고 와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라.”
애찬 때에도 자기를 살핀 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비판받지 않도록 먹으라는 것입니다. 애찬을 먹을 때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의 큰 교훈을 받습니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도 자기를 살피고, 퇴근해서도 자기를 살피고, 아내와 대화하기 전에도 자기를 살피고, 대화를 끝낸 후에도 자기를 살피고, 또 바이어를 만나기 전에도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미국인 바이어를 만날 때는 김치나 마늘을 먹고 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업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 자기를 살필 때 그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살필 때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일도 하지 않게 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재직 시 파티를 열었습니다. 미국의 정치 경제계의 고위층 인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대통령의 딸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딸이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는데 자신은 잘 부르는 줄 알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겼답니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 딸이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내 목소리가 기가 막혔나 봐요. 저 박수 소리를 들어보세요.”
“얘야, 박수 소리가 저렇게 요란한 것은 아빠가 현직 대통령이라서 그럴 거다. 아마 아빠가 대통령이 아니라면 박수 소리가 달랐을 걸. 아빠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너는 그때 너 자신을 알게 될 거다.”
트루먼 대통령의 딸은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온 과거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며 살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보다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별을 보고 나와서 저녁에 별을 보고 들어가며 열심히 일해도, 뛰고 뛰고 또 뛰며 열심히 일해도 생각 없이 그냥 일하는 사람은, 생각하며 천천히 일하는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성찰이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또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살피고 나 자신도 살피고 하나님께서 일하심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에브라함 링컨이 일리노이에서 친구 베리와 함께 잡화 가게를 했습니다. 원래 동업은 힘듭니다. 결국 링컨과 베리는 장사가 안 되어 가게의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망했으니 어떻게 하지?”하며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던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서더니 그 마차를 몰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우리는 서부로 가는 길인데 돈이 없어요. 팔 것도 없어요. 우리에게는 단지 좋은 나무통 한 개가 있을 뿐이오. 우리가 아끼는 것이지만 50센트에 팔 테니 좀 사가시오.”
그 당시 1달러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러니 다 망해서 가게 문을 닫는 사람이 필요도 없는 나무통을 50센트나 주고 사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링컨은 그 남자와 호소하는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그 남자의 아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마차를 세우고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나무통을 50센트에 팔려 할까?’
링컨이 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게 마침 50센트가 있습니다. 그 나무통을 제가 사겠습니다.”
그러자 친구 베리가 “이 사람아, 쓸데없는 걸 왜 사는가?”하며 말렸습니다. 그때 링컨이 말했습니다.
“어쨌든 지금 저분은 50센트가 필요하다고 하잖아.”
링컨은 자기의 전 재산인 50센트를 주고 그 나무통을 샀습니다. 마차가 떠난 후 나무통을 드니 안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서 쏟아보니 블랙스톤이 쓴 ‘영국법 주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때 링컨의 소원은 바로 법학자 블랙스톤이 쓴 법률책을 사서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책이 너무 비싸 감히 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나무통 안에 그것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링컨이 바로 그 책으로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고 나아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링컨이 잡화 가게 주인으로 성공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잡화 가게의 주인으로 성공하기보다 변호사가 되고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시고 그의 길을 그렇게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살피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는 일이 잘 되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 안 되어 문을 닫게 되어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나?’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가운데서 링컨이 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반드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살피고 이웃을 살피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은 의로워지고 또 어디에 가도 내가 한 말이나 나의 삶 때문에 어려움이나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또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글방의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이웃집 점심 식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잠깐 다녀오려고 하니 시렁에 가득한 곶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이들이 곶감을 다 보았으니 먹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저기에 감 과자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 독해서 먹으면 다 죽는다. 그러니 절대 손대지 말아라.”
그리고 선생님이 이웃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이들이 뛰어 놀다가 그만 선생님이 애지중지 하는 벼루를 깼습니다. 아이들 모두 큰일났다며 어쩔 줄 모르는데 그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아이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 감 과자를 먹고 죽자.”
그래서 아이들이 곶감을 다 먹고는 자리에 누웠습니다. 선생님이 글방에 돌아와 보니, 곶감은 하나도 없고 벼루는 깨졌고 아이들은 다 누워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엇하고 있느냐?”
똑똑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놀다가 실수로 선생님께서 애지중지 하시는 벼루를 깼습니다. 선생님께 너무 죄송해서 우리 모두가 죽으려고 감 과자를 먹었는데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말하고, 생각 없이 살면 얼굴이 부끄럽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피면서 살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빛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밤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성찬의 은혜, 남과 자신과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기다리라
고전11장 27절 ~ 34절 / 엄기호목사
예수님의 일생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시작하여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마쳐졌습니다. 그러나 구속적 의미에서 그의 일생을 조명하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므로 그의 공생애가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속의 공생애가 완성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알파와 오메가는 세례와 성찬으로 상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세례와 성찬을 교회의 유전으로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세례를 받으신 후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면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완성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잡히시던 밤 목요일 저녁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조촐하게 준비된 저녁 식탁에 앉아 감사기도를 드린 뒤, 예수님께서 떡을 들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잔을 들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를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 날 만찬이 바로 교회의 성만찬의 출발이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속에서 성찬에 임하는 바를 자세를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념하라
예수님은 ‘나를 기념하라’고 분부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주신 은혜입니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나처럼 너희도 매번 실천하라”고 하셨다면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유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님의 살점을 찢고 동맥을 끊어서 피 흘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쓴 나물을 먹고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어린양이 희생되므로 애굽의 430년 종살이로부터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습니다. 해방 사건은 한 번이면 됩니다. 그러나 그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것은 매년 반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통받던 때를 기억하고 애굽을 떠나면서 먹었던 쓴 나물과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매년 유월절마다 먹으면서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민족적인 결속을 다짐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쓴 나물과 같은 고통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쓴 나물을 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때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나치 치하에서 학살당하고 핍박받던 역사적 사료들을 한데 모아 만들어 놓은 전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또는 개인 적으로 그곳을 순방하면서 나치의 잔학성을 재확인하고 쓴 나물 먹던 시절을 상기하곤 합니다. 제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이라도 지난 시절 쓴 나물 먹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하고 겸손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기념하라는 것은 “기억한다”, “따른다”, “배운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성찬에 참예할 때뿐만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기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기를 살피고(28절) 주의 몸을 분변하라(29절)
주님은 오늘, 성찬을 대하기 전에, 우리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를 살피라고 했습니다. 매일 밥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자기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끼니때마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과연 이 밥을 먹기에 합당한 존재인가?’를 살피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실 때마다 ‘나는 이 차를 마실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찬에 참예할 때는 자기를 살피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본문 28절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습니다. 이 뜻은 ‘내가 왜 이 성찬에 참예하는가’, ‘이 성찬에 참예하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매우 바쁜 생활입니다. 하지만 그 바쁜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는지’ 그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지금 내 신앙생활은 온전한 것인가’, ‘나는 무엇을 믿고 있으며, 무엇을 소망하는가’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을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살피고, 생활 속에서 범한 모든 죄를 고백한 후에, 성찬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또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살과 피를 내어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십시오. 무엇보다 죽음의 형벌에서 구원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날마다 나를 이긴다”는 뜻이고 “날마다 자신을 살핀다”는 말입니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찬할 때 주의 몸을 분변해야 함을 교훈했습니다. 29절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먹는 떡이나 잔은 배부르게 만족감을 위해 먹는 일반식사와 성격이 다릅니다. 일반 식사는 배고파서 먹고, 손님 대접하느라고 먹고, 남에게 대접받느라 먹게 되고, 맛있다고 먹게되고 별미라고 먹게 됩니다. 그러나 성만찬은 주님의 희생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주의 분변하라는 것은 성만찬은 다른 식사와는 구별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서로 기다리라(33절)
초대교회에는 ‘애찬’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매 주일마다 예배 후에 함께 식사를 나누는 만찬을 가졌습니다. 이 만찬은 성도들이 서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자기의 것을 나누어줌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식사를 애찬 곧 ‘사랑의 잔치’라고 불렀습니다. 이 애찬은 고린도교회의 예배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들을 꺼내놓고 나누어 먹으면서 성도와의 교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교회 안의 모든 성도가 모여 떡을 떼게 됨에 따라 애찬의 성격이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 애찬이 교회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1) 그 이유는 먼저 고린도교회 내에 여러 파당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18, 19). 그 분쟁으로 인해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지 못하고, 자기 파 사람들끼리만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편당적인 행위를 책망했습니다.
2) 또 주의 만찬을 대하는 태도가 무질서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고전 11:20, 21). 애찬은 부자들이 음식을 많이 해가지고 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의 잔치가 되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는 빈부의 격차가 극심했습니다. 실제로 노예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이 ‘주의 만찬’이야말로 유일한 즐거움이요, 영양보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너무 많이 먹고 마심으로 배부르고 취했으며, 가난한 이들은 굶고 수치를 당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주의 만찬을 나누기 위해 모일 때에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연약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것은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다. 그런데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모여서 자기네들이 준비해 온 푸짐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므로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자기들끼리 먼저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또한 부자나 주인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먼저와서 기다리다가 자기네들끼리 모여 먼저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나 종들은 남의 집에서 일하거나 생업에 쫓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늦게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그때는 이미 부자들끼리 애찬을 끝낸 뒤였습니다. 이러한 폐단들 때문에 초대 교회의 좋은 분위기가 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바울은 서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시장하거든 차라리 집에서 먹고 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실시했던 애찬의 출발은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 허기를 채우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모여 계층 간의 담을 헐고, 신분상이 장벽을 헐고 빈부의 차이를 좁히자는 코이노니아에 그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고프다고 먼저 먹고, 좋은 것을 가지고 왔다고 자기네끼리 먼저 먹어 버리는 것은 코이노니아의 정신에 빗나가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의 애찬을 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매달 첫 주일에 한번씩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날마다 성찬에 참예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예할 때마다 기억해야할 것은 나를 위해 받으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서로 기다려야 합니다. 성찬을 대할 때마다 성도간의 교제에 이상이 없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배가 고파도 기다리고, 내게 손해가 와도 기다립시다. 서로 기다릴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되어 서로가 화평케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