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부이신 나의 어머니 와 덕수궁에서( 학교공부중에 ...)
나는 웃기도 잘 하시만 .....
눈물도 많다.
한참 자다가 보면 어머니는 어렷을적에 ' 물레'를 돌리시면서 그냥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맨날 한량처럼 모시옷의나 입고 향교 제관이다 문중일이나 보려 다니시는 남편
농촌에서 할일도 많은데......
돼지새끼는 뛰쳐 나오고 ,바당에는 할 일은 태산 같은데 .....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의 심정을 몰랐지만,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그 고생의 대변을
눈물로 승화를 하였나 보다, 끝으로 너희 두남매(막네누나 그리고 나) 만 아니라면 .......
나는 빈한한 농촌의 촌놈이 둘째 누나만 믿고 한양으로 올라 왔다. 공부를 하여 큰 세상에서
내 꿈을 펼쳐보고 잘 되어보기 위하여 .....
남산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공원쪽으로 내려 오면서 북한산을 바라 보면서 적어도 저 '중앙청'
건물에서 근무를 하면서 내 꿈을 이루겠노라고 다짐을 하여보곤 하였다., 그래서 그 아래인
서울시청에 내 평생을 보냈나.......
나는 서울에 올라 와서 대학을 다니다가 부모님이 오셔서 학교를 중단하고 직장을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다. 돈벌이의 직장이라고 해 보아야 '인쇄소' 문선공(文選 工) ,그래도 대학을 다니고
선비의 후손이 기껏해야 인쇄소의 문선공으로 .......
인쇄에서 근무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마포 꼭대기 도화동 산 8 번지 ,앞으로 당인리
발전소가 보이고 한강이 유융히 서해로 흐르고 여의도에는 미루나무가 있고 가끔 헬리곰터가
날으면서 저속으로 비행을 하면서 오르기도 ,혹은 내리기도 .....
나는 검정 가방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직장인 인쇄소를 갔다가 돌아오곤 하면서 한강이 흐르고 보이는
마포강변을 바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내가 이시간에 공부를 하여도 시원찬은데.....
언재 공부를 할 것이며,나의 꿈을 이울것인가 ? 하염없이 나의 눈에는 눈묾만 흘 릴 뿐이다.
인쇄소에 다닐때 '유진오박사'가 공동집필하신 검정 '육법전서'(六法 典書) 이;책을 부등켜 안고 기필코
나의 꿈을 이루리라 ......
주경 야독을 하여 겨우 인천교대 단기 과정을 어렵사리 합격을하여 이제는 인쇄소의 공원의 신세를
면 하느나 보다 내가 하고 싶은 섬마을의 선생님이 되리라 ,교육중에 어머니는 병환을 얻어 막네 아들이
학교선생님이 된다는 소식만 듣고, 인천교육대 교육중에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이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걸 느꼈고,그게 어머니였다. 그 허전함 , 어머니를 잃은 마음,하늘이 무너진것
같으며 이세상에 누구를 믿고 살아 갈 것 인가? 더구나 나혼자의 막네둥이인 연약한 아들.....
한강을 바라 보면서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을 또 많이 흘리고 또 흘렸다. 그것도 인천교육대 교육중에 ...
어렷을적에도 이른새벽에 '정한수'를 떠 놓고 늦게 둔자식을 위하여 공을 드리고 나의 생일날이나
특별한 날에도 ,서울로 아들을 따라 살림을 정리하시고 올라 오실때도 목포의 앞 바다에 모든 액운을
띄우고 오로지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셨던 우리 어머니 .......
그 어머니의 은공으로 내가 교사라도, 서울시에서 마지막으로 정년을 하였을까?
역시 다음은 아버지가 서울시 재직중에 돌아 가셨으나, 그래도 며느리가 해 주시는 따스운 식사를
대접받으셨고,착한 머느리를 만나 편하게 손주를 안아 보고 사시다 돌아 가셨으니, 어머니처럼
힘들지는 않했다.
다음은 서울시공직의 퇴직을 앞두고 아내가 유방암이라는 병으로 판정이 받아 눈 앞이 노랬다.,
퇴직을 앞두고 원자력병원에 수술을하고 항암치료를 받으려 아내를 모시고 출근 하는게 내 일이다.
직장에서 나온다는것도 힘이 든데,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암환자로 전락을 하였으니 .....
뤈자력병원에서 암세포를 들어 내고 수술은 하였고 항암치료를 받고 1년은 그런데로 보냈고 그 다음해에
겨울에 재발이란다. 이거 또 놀랬다. 만약에 생명을 잃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것인가?
화순에 있는 아들이 엄마를 저희 병원으로 모시고 오란다. 다음해 4월달에 아내는 아들이 근무하는
전남대병원에서 1년1개월의 투병을 마치고 편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아내를 잃은 가슴 아픈 사연 ,고생만 하다가 가버린 아내 , 자녀들의 교육을위하여 오로지 희생만 하고
한평생을 남편의 뒷바자라지만 하다가 저 세상으로 떠나간 아내의 그리움 ,만장봉을 마라보며 흘린
눈물이 얼마나 될 까? 중량천을 걸어 다니면서 남몰래 흘린 눈물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중량천에서 흐르는 물과 함께 한강으로 흘러서 가는 나의 눈물은 상당히 많이 흐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 한 많은 사연을 이 좁은 공간에 어이다 필설로 대변을 하리오 .....
글/ 竹 谷 용상
수락산과 도봉산의 사이에 중량천이 한강으로 흐르고 .....
첫댓글 읽다가 그만 목이 메이고 눈물이...ㅠㅠ
다행히 앞을 가리지는 않네요... 주르르 흘러내려서요...
잘 읽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눈물로 공감을 하여주시니 .........
저의글에 눈물이 흘렀으니 제가 눈물을 닦아 드리리다
오랜만입니다.
저의 눈물이 섞여흐르니
한강은 마르지 않는다고
제 자식들에게 이야기 하곤 합니다.
아내로
엄마로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이
사람
가치관을 확립시켜 주었나
싶습니다.
내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나 보다는
내 가족을 위한 헌신을 중요시 하면서
보람으로 여기면서
행복이라고 말 하려구요.
글 에서 여자로서 삶 보다
엄마,아내로서 존재 가치가
더 크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윤정여사님 ....
여자의 인생이 이러한것인지.....
어머니가 그렇고 아내가 그렇고
조윤정여사님이 그렇고
가정을 위하여 크신사랑을 주신 분
진정감사합니다
그래도 여짓껏 꿋꿋하게 잘 사신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려운 환경에도 좌절은 않하는 것 같습닏자
만장봉님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 당시에는 보릿고개로 흰 쌀밥은 설날에나 한번 구경했을뿐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가족 부양에는 관심이 없었던 부친으로 인해 고생이 많으셨던
만장봉님
만장봉님 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에서도 이런 현상이
많았었지요
모든 것은 어머니가 해결하고 살림 또한 꾸려 나가는
가정이 많아서 思母曲이 더 가슴을 찢어 놓았지요;;
늘 곁에 있어줄 것 같은 반려자마저 이제 저 세상에서
고이 잠드시고, 병원 근무 아드님이 만장봉님께 효자
역할을 다해 주기를 바래 봅니다^^
굿보이스님때문에 또한번의 눈물을 흘려 보게 됩니다.
정말 그때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하여주신 님;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래서 공직을떠나서도 문중일은 절대로 보지않는답니다
열심히 살아오셨군요.
글을 읽으면서 울 오빠 생각이 났습니다.
건강하시고 힘내시길 ....
감사합니다
오빠가 그러 하셨군요
나의어려웠던 추억을 글로 서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죽곡님 고생많으셨습니다. 인천교대나와 선생님도 하시고 서울시공무원 봉직하신게 다 부모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남다른 공부를 하고 싶어서 고생을 많이하였습니다
그래서 하고싶은공부는 좀 했습니다
@만장봉 잘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눈물 거두시고
서울이여, 안녕!
이름다웠던 추억만 생각하시길요.
그리고 후손들의 효도를 받으시면서 정든 화순땅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수락산밑의 베리꽃올림.
삶의 야기는 어려웠던 이야기도 .....
힘든시기만 생각하면서 글을/써보니......
감사합니다
수락산밑의 베리꽃님 ....
그눈물은 나를 성장하겠큼 하였던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