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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 13. 그들에게 말한 비유의 의도 14. 이사야의 예언 15. 백성들의 마음 16. 눈과 귀가 들음으로
마 13: 13. 그들에게 말한 비유의 의도 -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
예수님은 외적 조건에 해당하는 보고 듣는 것을 먼저 지적하셨다.
1]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11절이 비유를 사용하는 궁극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본 구절은 그 현상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대로 말해도 그들을 수동적으로 보자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보자면 아예 알아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보는 것(seeing)이 그대로 아는 것(knowing)이 되지 못하며, 듣는 것(hearing)이 바로 깨닫는 것(perceiving)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영적 불구자의 심령 상태를 의미한다.
곧 영적 소경의 상태를 의미한다.
* 사 59: 10 -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우리는 어두운 데 처하여 죽은 자) 같은지라.
* 막 4: 12 -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 요 12: 40 -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 롬 11: 25 –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영적 청각장애인인 죄인의 영혼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 렘 6: 10 -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 겔 12: 2 –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 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 슥 7: 11 -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 행 28: 26 -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 사 6: 9-10 –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마 13: 14.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으니 -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
이것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의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을 예언하셨다.
1]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의 예언은 사 6: 9-10에 해당하는 70인 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상을 꾸짖는 간접적 예언이다.
이 문장은 이사야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지자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의 완악성(頑惡性)을 꾸짖는 말로 주신 간접적 예언이다.
예수는 이 말씀이 당시의 비유를 듣는 무리들의 심령 상태에도 잘 적용되었기 때문에 동질성(同質性)이란 측면에서, 즉 이사야의 말이 당시의 무리에게도 잘 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예언으로 보았다.
(2) 인용된 14-15절의 말씀은 70인 역(LXX)의 번역으로 문맥이 조금 불분명한 감(感)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사야서의 해당 본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말씀도 표면적으로만 살펴서 형식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백성이 악하기 전에 마치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악하게 만드신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其實)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따라 완악해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강조 표명한 것이다.
즉 사태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작정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11절에 인용된 바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란 심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2]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이루었으니'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레루타이'(*)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이라기보다는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예수 자신의 시대에까지 적용되고 있음으로써 예언적 본문이 된 것이라는 예수를 해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동사를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일부 사람들이 복음 선교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현상적 원인(13절)과 그렇게 된 궁극적 원인(14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3]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것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의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을 예언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진리에 대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믿음과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버림을 받은 자들은 진리에 관해 관심이 없고 깨달음도, 믿음도, 순종심도 없다.
그들의 마음은 무지하고 완고할 뿐이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깨닫고 믿는 자는 복되다.
옛부터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기를 원하였고 듣기를 원하였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친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복 받은 자들이다.
마 13: 15.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선택은 진리에 대한 관심과 이해와 믿음과 순종으로 나타나나, 하나님의 버리심은 진리에 대해 관심 없음, 깨달음 없음, 믿음 없음, 순종 없음으로 나타난다.
1]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완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퀴노'(*)는 살이 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제 스스로 살찐 자가 되어서 영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이 자기(육체적 삶) 중심적일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영적 생명력)과의 관계는 단절,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곧 허무와 절망의 제1보(步)이다.
2]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둔하고'란 말의 원뜻은 '눌러 내리다'(oppress), '짐을 지우다'(burden), '가리우다'(curtain)로서 가는귀가 먹거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한다.
3] 눈은 감았으니
눈을 '감다'로 번역된 '캄뮈오'(*)는 원래 '내리닫다'의 뜻으로서 눈에 밀랍이나 기름 등을 바름으로써 억지로 감기게 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눈에 밀랍을 칠해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스스로 눈을 감아 진리 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4]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돌이켜(*, 에피스트려소신)는 하나님 보다는 죄 된 세상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전 존재를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즉 '회심' 혹은 '회개'(*, 메타노이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돌이킴'은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1) 제1단계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과
* 마 5: 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고후 7: 10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2) 제2단계로서의 새 생활로 전반적인 변화로 나눠질 수 있다.
* 막 1: 15 –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눅 13: 3-5 –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행 2: 38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제1단계의 자각은 인간 자신의 반성과 회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제2단계의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께 '고침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선결문제는 인간 스스로 돌이킴(자각)이다.
* 눅 15: 17 -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자각조차 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이 자신의 길로 그대로 가도록 허락하심은 그들을 벌하시고자 결정하신 연고이다.
5]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접속사 '메포테'(*)의 지배를 받아 '내가 고치다, 내가 낫게 하다'의 뜻인 '이아오마이'(*)가 미래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고치면 'lest ... and I should heal them'으로, 주절과 합쳐진 전체 문장의 주어는 그들(they)이 된다.
따라서 이사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는 달리 본서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은 백성들 스스로가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증거를 접하고서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멸망 받을 자로 자처한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다.
* 행 13: 46 –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마 13: 16. 눈과 귀가 들음으로 복이다 -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
눈과 귀의 역할에 대하여 육신적 보고 들음이 아니라 영적 보는 것과 영적 들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문장을 '너희 눈은 보니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으니 복이 있다'로 보다 정확히 번역해 보면 15절의 닫힌 눈과 막힌 귀와 잘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제시되나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에 따라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를 역(逆)으로 보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 들으면 그만인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다.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필수(obligation) 문제이다.
봄으로, 들음으로는 11절에 전제한 천국의 비밀이다.
비밀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천국, 즉 메시야의 나라가 역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주권)에 의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국민)을 규합하여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영토)에 이르게하기 위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16절은 개인적 관점에서 지금 주어진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17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보고 또 들으려고 원해도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너희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음을 새삼 강조하면서 예수 이후 시대 사람들의 구속사적 특권과 책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2]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 마카리오이)는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행복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헛된 요구를 하지 않는 자들,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깨닫는 자들이 각각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불렸다.
* 마 5: 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눅 1: 45 -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 요 20: 2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요 13: 17 -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성경을 상고해 보면 복된 귀가 있고, 복되지 못한 귀가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1) 복되지 못한 귀는 듣지 못하는 귀다.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사람은 복되지 못하다. 사람들이 흔히 대화를 하거나 상거래를 하다가 말귀를 못알아 들으면 답답하다고 가슴을 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의 말귀를 못 알아 들어도 답답한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한다고 하면 그 답답함은 말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시편 58편 4절에 보면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다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를 틀어 막아 버린 귀머거리 독사와 같은 그런 존재들이었다.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란? 술사가 공교한 방술을 쓴다 할지라도 전혀 그 마술에 걸려들지 않는 독사를 의미한다.
왠만한 독사들은 술사가 방술을 쓰면 거기에 걸려들어 술사가 시키는 데로 독사가 춤도 추고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런 방술에 전혀 걸려들지 않는 독사가 있는데 그런 독사를 가리켜서 귀머거리 독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 뜻은 하나님의 공의나 가르침 또는 진실된 조언이나 충언을 전혀 받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악한 뜻만 고집하는 그런 사람들을 비꼬아서 하는 말로 영적인 귀머거리를 의미한다.
그러면 왜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는가? 그 원인은 마귀가 눈을 딱 감겨 버리니까 교회에 나와 앉아 있기만 하면 졸리기부터 하고 귀를 틀어막아 버리니까 귀가 있어도 아무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찌니라'고 책망하셔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어 주셨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의 하나는 귀먹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오셨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돌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보고하기를 예수님은 못 보는 자를 보게 하며 듣지 못하는 귀를 열어주시며 농아인의 혀를 풀어주시는 분이시라고 하였다. 그렇다. 마귀는 사람들의 귀를 틀어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귀머거리 귀신을 쫓아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시는 줄로 믿는다.
(2) 복되지 못한 귀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귀다.
본문 14절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였다. 전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귀를 복되지 못한 귀라고 하였다. 이런 귀를 가리켜서 우리말 속담에 마이동풍이니, 혹은 우이독경이니 하는 말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그런 귀를 말한다.
그런 귀를 가리켜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귀이며, 복되지 못한 귀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①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라고 하였다.
귀가 가려워서란, 간지러운 곳을 긁어서 만족감을 얻는다는 뜻으로 즉, 육체의 본성을 충족시켜 주는 솔깃한 말만 듣는다는 뜻이다.
* 겔 33: 31 -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말로는 좋다고 하나 마음으로는 제 좋은 데로만 행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색다르며 감각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서 그릇된 욕심을 충족시켜 줄 거짓 선생을 따르게 된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솔깃한 말, 가려운데를 긁어줄 말만 듣기를 좋아 하십니까?
그런 귀를 갖은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복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과 저는 그러한 사욕을 좇고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켜 주는 솔깃한 말만 들으려고 하는 그런 귀가 되지 맙시다.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복된 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②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렘 6: 10-11 –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다.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하지 못했고, 짐으로 여겨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추구하는 그런 자리에 있었다.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쳤을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그들은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성령을 거스렸다. 그들의 조상들처럼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의인들을 죽이는 일에만 열심을 품는 자들이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할 줄로 믿는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선민된 표시를 몸에 지니는 것으로 몸의 일부를 베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정욕이나 명예욕, 탐욕, 물욕 등 육신의 소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이므로 이 시간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모든 육체의 소욕을 베어 버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서 온갖 것을 희생하는데 자식들은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종종 있다.
70세 된 할머니가 아들 셋을 낳아서 잘 키워 장가들을 보내고 큰아들 집에서 살았다. 낮에는 아들이 출근하고 손주들은 다 학교에 갔으므로 며느리와 둘이 집에 있게 되었다.
점심때가 되자 속이 출출하여 할머니가 냉장고 문을 열고 과일을 꺼내서 먹으려고 했다. 그러자 며느리가 쫓아와서 야단을 치면서 하는 말이, 이 과일들은 저녁에 아범과 아이들과 같이 먹으려고 준비한 것인데 왜 미리 꺼내 잡수시느냐고 퉁명스럽게 야단을 치면서 냉장고 문을 닫고 가버렸다.
할머니가 속이 상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갈 곳은 양로원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저녁에 아들이 돌아오자 아들에게 말을 했다.
나는 늙어서 말벗이 필요하니 말벗이 있는 양로원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아들이 인상을 찌프리면서 어머니는 아들 체면은 생각하지 않고 무슨 양로원에 가신다고 하느냐며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결국 이 할머니는 양로원에 갈 수도 없었고 눈물겨운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런 잘못은 범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귀가 할례를 받아, 들을 수 있는 귀로 바꾸어 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복된 귀는 어떠한 귀냐? 하는 것입니다.
(3) 들을 줄 아는 귀가 복된 귀다.
본문 말씀에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다.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귀를 갖고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 들어도 그만이라는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고, 생과 사를 가름하는 필수(Obligation)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고 받아 들으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면 영원한 지옥불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귀가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육체에 귀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예수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다. 그 뜻은 영의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귀는 열러 있는 복된 귀들이 되기를 바란다.
요한계시록 2, 3장에서도 성령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지키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하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며,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돌을 주며, 철창 권세를 주고, 흰 옷을 입을 것이며,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며,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고 하셨다.
이 엄청난 복들을 받게 되길 원한다. 아담과 이브는 마귀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열려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는 닫혀 있었다. 그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자신도 불행해졌고 자자손손 불행을 안겨다 주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열릴 귀를 가지셔서 여러분 자신이 복을 받고 자자손손 복을 끼쳐 주는 분이 되시기를 기도 드린다.
(4) 옳고 그릇됨을 분별하는 귀가 복이 있다.
* 딤후 2: 15-16 –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오늘날 말세가 되어 너무도 많은 이단들이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진리와 비진리 또는 달콤한 말로 우리를 꾀이는 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사이 갖가지 이단들의 달콤한 말에 끌려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달콤한 말에 끌려가면 이단의 소리가 진리인 줄로 생각해 죽을 때까지 끌려다니며 비참한 생을 보내게 된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귀를 가짐으로 이단의 미혹에 끌려가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도 여러분은 진리를 분별하는 옳바른 복된 귀를 가지시기를 원한다.
(5)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귀가 복된 귀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할 때 양심의 소리가 들려 왔다. 예수님은 그릇된 것이 없으시며, 죄가 없으시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또 헤롯당원들이 뿌린 돈에 백성들이 매수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빌라도는 백성들 다수의 소리를 외면해 버리면 자기가 그 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육체의 행복을 따르느냐, 양심의 소리를 따르느냐, 갈등 속에서 고민하다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여 백성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받도록 정죄하고 말았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로 믿는다. 요사이 돈에 대한 이상한 명칭들이 생겼다. 길 잃은 돈, 검은돈, 세탁한 돈, 그런 이상한 말들이 생겼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돈은 세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떻게 세탁을 해야 하느냐? 하면 양털과 같이 희게 씻어 주고, 흰 눈보다도 더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정말 세탁이 된다. 검은돈은 양심대로 돈을 버는 깨끗한 돈으로 바꿔져야 되고, 길 잃은 돈은 참 길 되시는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하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검은돈의 소유자, 길 잃은 돈의 소유자들이 주님깨로 돌아와서 검은 마음이 깨끗해지고 길 잃은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참 길과 진리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지기를 원한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려져서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실천하는 자와 양심대로 살고 진리를 분별하며 사는 자가 복된 삶을 살게 될줄로 믿는다.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며 피땀 흘려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에 그쳤고, 노동의 댓가는 아무것도 거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새벽녁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인간의 지혜와 머리로는 아무리 피땀 흘려 애를 써도 헛수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면 엄청난 기쁨과 축복이 넘치게 임하실 줄로 믿는다. 듣지 못하는 귀,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귀를 가지신 분이 있으면 귀에 할례를 받아서 열린 귀, 복된 귀로 바꾸어 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