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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또는 그루지야 [Gruziya] 중앙아시아 국가
수도-트빌리시
화폐-라리(GEL)
언어-조지아어
인구-4,942,157명 (2013), 118위 전체순위
면적-69,700㎢, 121위 전체순위
종족-조지아인 84%, 아르메니아인 6%, 아제르바이아인
정체-중앙집권공화제 |
의회형태-다당제&단원제
국가원수-대통령 |
정부수반-대통령
대(大)카프카스 산맥 주봉의 남쪽 사면에 있는 흑해의 동쪽 끝에 위치한 자카프카지예 국가.
공식 이름은 그루지야 공화국(Sakartvelos Respublika)이다. 과거에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이다. 흑해 동남해안을 끼고 있으며, 카프카스 산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터키, 동남쪽과 남쪽으로 아제르바이잔 및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그루지야에는 3개의 민족 자치공화국이 포함되는데, 북서쪽에 아브하지야(주도는 수후미), 남서쪽에 아자르(주도는 바투미), 북쪽에 남오세티아(주도는 츠힌발리) 자치공화국이다. 수도는 트빌리시이다. 면적 69,700㎢, 인구 4,934,000(2003 추계).
그루지야인들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깊으며, 그들의 문화유산 역시 유구하고 풍부하다. 중세에 강력한 그루지야 왕국을 건설했으며,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10~13세기였다. 그 후 오랫동안 터키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918~21년에 그루지야 독립국을 유지했다가, 1921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 1936년 그루지야는 소련의 위성연방공화국으로 편입되어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될 때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기에 그루지야의 경제는 현대화되고 다양화되었다. 가장 독립적 성향이 강했던 연방공화국 가운데 하나였던 그루지야는 1989년 11월 19일 독립적 주권을 선언했고, 1991년 4월 9일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1990년대는 그루지야에 있어 불안정하고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시기였다. 독립 후 최초로 구성된 정부가 전복되었고,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주의 운동들이 등장했다.
국기
지도
자연환경
그루지야 대부분의 지역은 산악지대로, 카프카스 산맥에 속하는 봉우리들의 평균 높이가 4,600m 이상에 이른다. 카프카스 산맥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흑해의 영향을 받아 기후는 온난하다. 그루지야 서부에서는 습윤한 아열대성 해양기후가 나타나는 반면, 동부는 온대성 습윤기후에서부터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까지 다양하다. 흑해 연안에 비옥한 콜히다 저지가 있으며, 리오니 강과 잉구리 강이 그곳을 지난다.
국민
그루지야인들은 처음부터 카프카스 산맥 주변에 정착한 민족으로 추측되며,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6세기부터 여러 봉건국가들이 이 지역에 세워졌으나 13세기에 몽골을 비롯한 이민족들에게 침략당하면서 500만 명에 이르던 인구가 크게 줄어드는 대참사를 겪었다. 19세기초 러시아에 합병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3세기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그루지야인(그들 자신은 카르트벨레비라고 함)들은 카르트벨리야어족(남카프카스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대부분이 그루지야 정교회의 신자이다. 소수민족으로는 아르메니아인(약 8%), 러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등이 있다.
경제
공업이 발달했으며 수력발전·광업·기계산업 등이 특히 활발하다. 석탄, 망간, 비금속계 광물이 채광되며 1956년부터는 철도 생산되고 있다. 전동차·대형차량 및 토목공사 장비를 비롯하여 선반·정밀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며 무기질비료·합성섬유·의약품 등의 화학공업도 이루어진다. 그밖에 면·모·실크 등의 천연섬유와 그것을 소재로 한 의복이 생산된다. 그루지야의 농지는 부족하고 경작하기도 어려워 홍차·감귤류·포도·사탕무·담배 등 노동집약적 농업에 적합하다. 이밖에 교통 기반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다.
정치와 사회
1990년 복수 정당의 참여가 보장된 가운데 자유총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비공산당 연합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들은 1991년 그루지야의 독립을 선언했다. 1992년 그루지야는 1921년에 제정된 소비에트 시대 이전의 헌법을 복원시켰다. 같은 해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행정부 권한의 허용범위에 관한 오랜 논쟁 끝에 1995년 새 헌법을 채택했다.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며 총리와 내각을 임명한다. 입법부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23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최고회의이다. 사법부는 지방·시 법원과 최고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0년대까지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그루지야 공산당이 유일 정당으로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점차 고조되는 민족주의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힘입어 많은 정치집단이 등장했다. 현재 주요 정당으로는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결성한 그루지야시민연합, 개혁 성향의 국민민주당, 그루지야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1989년에 결성된 그루지야인민전선, 1893년에 결성되었다가 그루지야의 소련에 병합으로 해산되었던 그루지야사회민주당 등이 있다.
그루지야는 최고 수준의 의료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온천으로 유명하다. 중등교육까지는 무상 의무교육이며, 각 단계마다 높은 진학률을 보인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루지야어를 사용한다. 대표적인 고등교육 기관으로 1918년에 설립된 트빌리시국립대학교가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발행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루지야어를 사용한다. 라디오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그루지야는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4세기에 문자가 만들어졌고, 5세기부터 그루지야 특유의 문학이 나타났다. 그루지야인·그리스인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친 고대의 고등교육 기관이 그루지야 중부의 콜치스에 있었으며, 중세에는 중세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인 이칼토·겔라티의 학당들이 12세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했다. 12세기에는 그루지야인의 민족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 의 민족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 Vepkhis-tqarsani〉가 나왔다. 그 후 18세기에 작가 술칸-사바 오르벨리아니, 소설가·시인·극작가 일리아 차프차바제 등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극작가 기오르기 에리스타비가 근대 그루지야 연극을 확립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서정시인 아카키 체레텔리, 카프카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 자연시인 바자 프샤벨라 등이 활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그루지야 출신인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많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소설가 미헤일 자바히슈빌리, 시인 티치안 타비제가 처형되고 시인 파올로 이아슈비리는 정부의 비판을 받고 자살했다. 1987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텐기즈 아부라제 감독의 영화 〈후회 Repentance〉는 당시의 억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루지야는 연극과 건축 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루지야 연극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연극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왔으며, 아르메니아 건축과 더불어 비잔틴 양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루지야의 건축문화는 오늘날 많은 수도원·교회 등의 대형 건축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그루지야어로 발행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
그루지야 일대에 처음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던 부족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콜치스 라고 알려진 전설적인 부(富)의 땅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까지 알려졌다. BC 65년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AD 337년 이후 3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분쟁에 휘말렸다. 654년 이후 아랍의 칼리프들이 이 일대를 다스렸는데, 그들은 티플리스(트빌리시) 시를 거점으로 토후국을 건설했다.
8세기 말부터 12세기까지 아르메니아에서 기세를 떨쳤던 바그라티드 왕조가 그루지야인들과 카프카스 혈족이 살던 이 지역을 통일했다. 바그라트 3세(975∼1014)는 그루지야 동부와 서부의 모든 공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루지야는 타마라 여왕의 재임(1184∼1213) 동안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서 북서쪽으로 체르케스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범(汎)카프카스 제국을 이루면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범카프카스 제국이 몽골의 침략을 받은 1220년부터 그루지야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386∼1403년에 티무르의 맹공격을 받고 경제적·문화적으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함락되면서 그루지야는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와 교류할 수 없게 되었고, 그후 3세기에 걸쳐 투르크와 페르시아인들의 계속되는 침공에 시달렸다.
1783년 러시아와 그루지야 조약 을 맺어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으나, 1795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러시아로부터 원조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1801∼64년 그루지야 내의 왕국들은 차례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모든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그 실체가 말살되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킵차크 한국).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그루지야는 1917∼21년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배권에 속하는 자카프카지예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자카프카지예 독립국으로, 이어 그루지야 독립국이 되었다. 그루지야 독립국은 처음에는 독일 보호령이었으나 이어 영국에 점령되었다가 1920년 1월 사실상 독립했고, 1921년 연합국으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1921년 2월 적군에 의해 소비에트의 지배를 받는 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36년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대체되면서 소련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90년 그루지야 역사상 최초로 복수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자유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독립을 기치로 내세운 비공산 연합이 승리해 정권을 잡았고, 1991년 4월 9일 그루지야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한 즈비아트 감사후르디야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감사후르디야의 권위적 통치는 지지세력의 반발을 초래했고, 1991년 말에는 내전이 발발했다. 결국 감사후르디야는 1992년 1월 대통령직에서 축출되고, 3월에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소련 외무장관 출신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루지야는 1992년 국제연합(UN)에, 1993년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했다.
1992년 북서쪽에 위치한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이 분리 독립을 선언하자 그루지야 정부가 군사적 대응에 나서면서 그루지야는 내전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1993년 7월 러시아의 중재로 양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에 따라 UN 그루지야 정전감시단(UNOMIG)이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 움직임과 다른 내부적 위협들에 대처하는 한편,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신생 공화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과의 관계
그루지야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듬해인 1992년 12월 14일 한국과 수교조약을 맺었다. 양국은 현재 각각 주러시아 대사에게 공관 업무를 겸임케 하고 있다. 한국은 특히 1994년 10월 대위·소령급 장교 5명을 UN 평화유지활동(PKO)의 일환으로 그루지야에 파견했으며, 1999년 4월 현재 군 옵서버 3명이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7년 현재 그루지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수는 교민 250명, 체류자 5명이다. 아직까지는 양국간 무역이 활발하지 않지만 그루지야는 한국으로부터 의료기기, 설탕, 과자류, 플라스틱 제품, 의류 등을 수입하고 있다.
조지아 > 국가정보 > 국가개요 > 조지아(Georgia)
◈ 수도 : 트빌리시(Tbilisi) ◈ 정치 : 의회주의, UN, NATO, EU 가맹국 ◈ 인구 : 4,474,000명(2005년 기준) ◈ 면적 : 69,700㎢ ◈ 주요도시 : 트빌리시(Tbilisi), 바투미(Batumi), 카케티(Kakheti) ◈ 주요민족 : 조지아인(83.8%), 아르메니아인(5.7%), 아제르바이아인(6.5%), 러시아인(1.5%), 기타(2.5%) ◈ 주요언어 : 그루지아어(Gruziya) ◈ 주요종교 : 조지아 정교(83.9%), 이슬람교(9.9%), 카톨릭(0.8%) 개요 유럽과 중앙아시아, 중동의 접점에 위치한 그루지아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오랫동안 열강의 침입과 충돌이 잦았던 지역이다. 지역적으로 북부지역은 여전히 위험요소가 있어 여행이 어려운 지역이지만,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다양한 문화와, 훼손되지 않은 자연, 따뜻하고 소박한 사람들로 인하여 매력적인 나라이다. 최근엔 개방정책을 통하여 새롭게 비상하고 있으며 앞으로 점차적으로 유럽여행에 확장에 있어서 새로운 여행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리 및 기후 그루지아의 기후는 서쪽의 아열대성과 동쪽의 지중해성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거대한 코카서스 산맥은 북쪽으로 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의 장벽역할을 해준다. 그루지아는 면적이 큰 나라는 아니지만 다양한 기후대가 존재하여 흑해로 부터의 거리나 고도에 따라서 지역마다 기온차가 크다. 언어 공식적인 언어는 그루지아어이며 고대 문자를 그대로 사용한 코카서스어족을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이런 독특한 알파벳과 더불어 러시아어, 오세트어, 바브카지안 등의 말들이 지역별로 사용된다. 종교 그루지아 정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 하지만 동부 정교회와 모슬렘, 유대교와 그 밖의 소수종파들이 존재한다. 경제 그루지아의 주요 경제활동은 시트러스열매와 차, 헤이즐넛, 포도와같은 농업에 의존한다. 망간과 구리와 같은 광물생산이 주요 산업이다. 그리고 알콜과 비알골 음료와 금속, 기계부품과 화학물질 등의 산업이 있다. 그루지아는 천연가스와 석유 등의 에너지원료를 수입하고 유일한 대규모의 내부에너지라면 수력발전을 들 수 있다. 도시내부의 파벌정쟁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루지아는 IMF와 월드뱅크의 도움으로 1995년에는 GDP성장과 인플레이션이 감소하는 등,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루지아 정부는 세금징수에 있어서 장기간 실패를 하는 동안 제한적인 자원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에너지 고갈로도 어려움을 겪었다.1998년 트빌리시는 많은 구역들이 사유화 되었고, 적절치 않은 투기로 말미암아 국가 점유율이 낮아졌다. 그루지아는 파이프라인과 무역의 교차로로써의 역할을 통하여 장기적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바쿠-트빌리시-시안간 원유파이프라인과 바쿠-트빌리시-에르제룸 가스파이프라인이 대단위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될것으로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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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정보 |
일반정보
GMT + 3 통화 그루지아의 공식통화는 Georgian Lari (GEL)로 모든 상점과 시장에서는 신용카드보다는 현금이 통용된다. 큰호텔이나 은행에서는 신영카드와 수표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많이 통용되는 외화는 달러이며 때에따라서 러시아 루블이나 유로를 받기도 한다. 1 Lari(1달러=1.40라리) 1 Lari (GEL) = 100 Tetri. 지폐:1,2,5,10,20,50,10 0라리,주화:1, 2, 5, 10, 20 ,50 테트리 전압 110/220 Volts AC 60 Hz 전화 그루지아 (GEORGIA) 995 현지연락처 휴일 1월 1일 신년휴일 1월 7일 크리스마스 1월 19일 예수공현축일 3월 3일 어미니의 날 4월중 부활절 5월 26일 독립기념일 8월 24일 제헌절 8월 28일 마리아모바 10월 14일 스베치스코블로바 11월 23일 성조지의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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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 |
따뜻한 유황온천의 도시, 트빌리시(Tbilisi)
Vakhtang Gorgasali 이 험한 Mtkvari (Kura)계곡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갑자기 꿩이 덤불로 부터 날아와서 왕은 그를 활로 쏘았다. 왕은 말에서 내려 그것을 집으려고 했을때 그는 꿩이 온천안에 떨여져 이미 요리되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 이후로 Vakhtang 왕은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그곳의 이름을 트빌리시라고 하였으며 이로써 트빌리시는 그루지아에서 '따뜻한 온천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트빌리시는 반복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침략당했으며 730년에는 수세기동안 트랜스 코카서스를 지배했던 아랍인들의 지배하에 놓여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력간섭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트빌리시는 12~13세기에 많은 인구와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발전가운데서 트빌리시는 점차부패해갔고.이것은 유목민족들의 지속적인 침략과 그루지아 공화국의 분리야기시켰다. 트빌리시는 80번이 넘게 외세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트빌리시의 평화적인 발전은 14세기로 돌아서면서 시작된다. 비로 그루지아는 러시아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지만 억압정인 러시아의 통치는 오히려 정치적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트랜스코카서스 철도의 건설은 편리한 가장 중요한 내륙과 해상 무역의 출구가 되었으며 수많은 회사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무역과 수공예는 급속도록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도시에 문화적인 삶을 야기시켰고, 학교망이 확장되고, 신문과 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극장이 오픈되었다. 1897년이후로 도시의 인구는 대체로 증가하여 20만명에 이르게 된다. 트빌리시의 또다른 특별한 시기라면 1918년 그루지아의 독립과 함께 시작한다. 군주국가가 3년동안 유지되고 트빌리시는 번영하고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트빌리시 주립대학은 1918년에 세워지고 많은 새로운 회사들이 운영되었지만 이러한 발전은 1921년 소련에 의해서 합병되어진다. 하지만 소련의 지배하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구역이 개발되고, 연구소가 새워지고, Mtkvari강의 제방공사와 같은 대단위 사업들이 1930년에 시작되었다. 1883년 현재의 Agmashenebli 거리를 따라 최초의 트램이 운영되었으며, 1937년에는 같은 루트로 트롤리버스가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트빌리시의 외관과 위치는 굉장히 독특하다 도시는 3면이 Trialeti ,Saguramo, Ialoni 산맥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의 분지에 남동쪽에 있는Kartli라는 낮은 평야와 동쪽에 위치한 Samgori평야와 함께 트빌리시가 놓여있다.해발 380에서 550m에 이르는 경사가운데 도시의 대부분이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시는 건축양식이나 문화에 있어서 동서양의 결합된 양식을 틴다. 구시가는 좁고 전형적인 동양 스타일을 느낄 수 있다. 독특한 온천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인다. 다양한 문화의 혼합, 향신료 냄새, 다양한 국가들이 거리에서 만나고, 다른 신앙이 같은 한 정원아래 있는 곳이 바로 트빌리시다. 무역상과 군인들, 군주들과 독재자들에게 차래로 지배당했던 곳이다. 구시가를 걸어서 둘러보고 그안에 살아있는 과거를 느낄 수 있는 곳, 북적거리는 시장, 고대 유황온천과 휘황찬란한 보물들과 화려한 교회들을 통해 코카서스의 교차로에 놓여있는 트빌리시를 경험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