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임지휘자 김종덕
지휘자 김종덕은 동아음악콩쿨 오보에 부문에 1위로 입상함으로서 일찍부터 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서울대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서울시립교향악단 오보에 수석주자로 전격 발탁된 그는 10여년간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는 한편 수많은 실내악 연주회와 독주회 등을 통해 목관악기의 연주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84년 Temple대학과 Rotterdam음악원에서 오보에와 실내악 디플롬을 받고 귀국한 후에도 그는 끊임없는 연주활동과 후진양성에도 열성을 다하여 우리나라 대표적·인 목관분야 연주자와 교육자로 인정받으면서 관현악 지휘에도 활동 범위를 넓혀 서울시향,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등을 객원지휘 하면서 활발한 지휘활동을 동시에 펼쳐왔다. 1993년 서울특별시로부터 서울시립청소년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위촉받은 그는 음악회에 영상을 도입하는 등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기획 개발하! 여 청소년층뿐 아니라 음악계 전반에 큰 영향을 불러 일으켰다. 기획의 참신성과 그에 걸맞는 수준높은 연주력이 평가받아 일본시즈오까에서 개최된 국제 청소년음악제에 초빙되어 성공적으로 연주함으로서 이 교향악단의 연주력을 크게 향상시키며 그 위상을 한껏 높여 놓았다. 이와 같이 연주자로서, 그리고 지휘자로서 이룬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한국음악협회에서 수여하는 한국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충남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충남교향악단을 정상의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소프라노 한예진
·Milano G. Verdi 국립음악원 수석 졸업
·동 국립음악원 최고 연주자 석사 수료
·이태리 SICILLIA MARSALA "L.V. BEETHOVEN" 국제콩쿨 1위
`이태리 COMO MALFALDA FAVERO "PUCCINI" 국제콩쿨 Best Voice Pucciniana 특별상 수상
`이태리 PADOVA "IRIS ADAMI CORRADETTI" 국제콩쿨 3위
·오페라 ‘MADAMA BUTTERFLY’ ‘LA TRAVIATA’ ‘LA BOHEME’ ‘시집가는 날’ 등 다수 주역 출연
테너 박영범
목원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이태리 국립음악원 “Giuseppe Niccolini" 만점 졸업
ROH 국제 성악 콩쿠르 1등 수상, 그외 다수 콩쿠르 입상
국립극장 오페라 페스티벌 출연
Amilcare Ponchielli의 “Messa Solenne" Solo(세계초연, 오케스트라 반주)
현, 목원대학교, 대전예고 재직
바리톤 길민호
이태리 빼스카라 국립음악원 졸업
이태리 빼스카라 아카데미 만점 수석 졸업
산타체칠리아 아카데미 졸업
씨에나 끼지아나 졸업
국제성악콩쿨 등 다수의 콩쿨에서 특별상 및 입상
대전시향, 충남교향악단, 인천시향 등 다수의 교향악단과 협연
오페라 요셉, 잔니스키키, 라보엠, 사랑의 묘약 등
Giuseppe Verdi(1813-1901)
쥬세페 베르디
1813년 10월10일 이탈리아 파르마 공화국의 한 도시 부세토에서 약 4Km 떨어진 레 론콜레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부터 초보교육을 받고, 후에 부세토와 밀라노에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였다. 1839년 스칼라극장의 지배인 메렐리의 후원으로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 후 두 아이와 아내를 잃고 또 희가극 <왕국의 하루>의 상연마저 실패하여 극도로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데 메렐리와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등의 격려로 용기를 얻어 다시 활발한 작곡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 쓴 작품이 <나부코>이다. 이 작품은 1842년에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 애국적이어서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그 후에도 <십자군 롬바르디아(1843)> <에르나! 니(1844)> <아틸라(1846)> <레냐노의 전쟁(1849)> 등 애국심 넘치는 많은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따온 <맥베스<1817)> 실러의 <간계와 사랑>을 각색한 <루이자 밀러(1849)>등으로 극적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그 후 베르디는 밀라노를 비롯하여 베네치아, 로마 파리 카이로 등지에서 잇달아 오페라 초연을 가졌으며, 오늘까지 상연되고 있는 <리골레토(1851)> <일 트로바트레(1853)> <라 트라비아타(1853)>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1887)> <시몬 보카네그라(1857)> 1873년에는 <현악4중주마단조>를 작곡했고, 1873년에서 74년까지는 소설가 만초니의 추모를 위해 <레퀴엠>이 작곡된다. 이 레퀴엠 초연 이후 오랫동안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중단된다. 1879년이 되어서야 베르디는 보이토의 권고로 <오텔로(1880-1886)>를 작곡했고,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 서정적 코믹 작품인 <팔스타프(1893)>를 작곡했다.
베르디는 바그너와 동시대의 인물로 로시니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하였고 이는 푸치니에게 계승되어졌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속에서 19세기 전반의 벨칸토 오페라시대의 유일한 개성적 작곡가로서 이탈리아 가극의 성악적 장점을 활용하고, 극적 진실성을 존중하는 작품을 이루었다. 그는 극의 구성과 연기에 유의하여 이탈리아 작곡가로서 항상 유려한 선율성을 주장하였고 대오페라의 요소인 청각적이며 무대적인 효과들도 그의 오페라에 적용시켰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내면적인 감정표현과 상황에 맞게 세밀하게 구성되어있는 멜로디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오페라에 있어서 개성적 스타일의 하나는 복합선율적인 앙상블로 가장 긴장이 고조되는 부분에서 서로 대립되는 선율들을 대치시켜 동시에 울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오케스트라는 한 번도 극? ?전체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요소로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베르디는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의 음악스타일을 따르면서도 단순하면서 힘있고 긴장감 있는 자신의 음악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의 음악은 예술의 어법을 최대한 사용하여서 말하는 자연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작가 Alexandre Dumas (1824-1895) 알렉상드르 뒤마
<몬테 크리소토백작> <삼총사> 등으로 유명한 작가 뒤마의 아들이다.
파리의 사교계에서 요염함으로 이름을 날렸던 마리 뒤플레스라는 실존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감수성이 풍부한 24세의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통렬하게 사회를 비판한 소설 <춘희>는 1848년 발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은 대단한 호평을 받아, 이듬해에 그 자신이 극화했으나, 엄중한 검열제도 때문에 상연이 허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1853년에야 겨우 상연되어 각광을 받았고 그 후로 극작가로 맹활약하여 사실적인 문제극을 많이 썼다. 남성이기주의를 중심으로 이것을 조장시키는 돈의 힘, 그것을 묵인하는 항간의 관습이나 법률을 테마로 하였다. 그의 희곡은 견실한 기법으로 솔직하게 사건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1866년 이후 아카데미프랑세스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오페라 La Traviata가 만들어지기까지..
실존인물에 대한 소설 <춘희>를 만난 베르디는, 평소에 항상 찾고 있었던 ‘진실’에 대한 갈망이 이 작품의 주제와 일치하여 크게 공감을 느끼게 된다. 창작의욕을 느낀 베르디는 오페라 <리골레토(1851)>의 대본가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에게 대본을 의뢰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과 계약을 한 베르디는 거의 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정으로 거의 한 달 반만에 작품을 완성하였다.
실존인물 춘희...
실제로 19세기 중반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파리 사교계의 남성들의 심금을 울렸던 ‘마리 뒤플레시스’를 본 사람은 그녀가 전세기의 궁녀(왕의 첩)가 아니면 공작부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했다. 뒤마피스의 소설<춘희>의 서문을 쓴 저널리스트 쥘 자냉은 그녀를 본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가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을 보면 그녀는 날 때부터 머리에 관을 얹고 발치에 추종자를 달고 태어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는 고급 여인들의 모임에서도 이 여인보다 그녀의 살롱에서는 부유층뿐만이 아니라 문학계의 거물등도 왕래했었고, 음악가 리스트도 연주로서 그녀를 매혹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그녀의 여권에는 키가 165cm 혹은 167cm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로 보아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며, 현재 남아있는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볼륨도 없고 병약해 보인다. 한마디로 섹시한 여인이라기보다는 문학적 교양이 사교계의 필수적 조건으로 지배했던 19세기 부르조아 사회의 이미지에 맞는 여인이었던 것 같다.
노르망디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하였고 14살에 가출하여 파리에서 험한 일을 하며 살았고 몇몇 학생들과 동가하기도 했으며, 어느 무도회에서 어느 레스토랑 주인의 눈에 띄었고 그를 통하여 드 기쉬공작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이를 발판으로 작가, 예술가, 부유층이 모이는 밤의 사교계 여왕으로 입지를 굳혀 나갔다.
밤이면 밤마다 파리의 5대 극장 중 특별석에 나타나 한 달의 25일간은 흰 동백꽃을, 나머지 5일간은 붉은 동백꽃을 가슴에 꽂음으로서 돈 많은 호색가들에게 월경일을 대담하게 밝히는 여인이었다.
작가 뒤마는 아버지와 함께 사교계에서 이 여인을 만났고, 동거까지 하였으나 빈털터리가 되어 아버지와 여행을 다녀온 사이 이 여인은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후 이 사실을 소설로 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