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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것에 대하여
고전 12:1-11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1-11 / [성령이 주는 선물] 형제들이여, 이제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특별한 재능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행여나 잘못 생각하는 일이 있을까봐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말 한마디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을 기억하겠지요? 3)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은 자기가 하나님의 영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 그렇거든 이 점을 잘 살피십시오.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특별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에게서 온 것입니다. 5) 하나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지만 우리는 다 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각기 여러 가지지만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 가운데서 또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7) 성령께서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주십니다. 8)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현명할 조언자가 되는 재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연구하고 남을 가르치는 뛰어난 재능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9) 성령께서는 또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나 10) 어떤 사람에게는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고 설교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말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분별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전혀 배운 일도 없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언어지만 사람이 말하는 것을 통역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11) 이렇게 같은 성령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십니다.
영적 은사들은 다른 이에게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유익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하여(1-3) 고린도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예배 때 경쟁적으로 그것을 과시했습니다. 영적인 은사는 좋은 것이지만 은사가 오히려 무질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 신령하다는 것은 은사의 기원이 사람이 아닌 성령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은사 있는 사람만 신령하다거나 은사가 사람을 신령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특별히 한 사람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보상이나 상급도 아닙니다. 특정 은사를 가진 자만 신령한 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신자가 신령한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짜 신령한 것은 바른 관계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성령과 은사(4-11) 성령은 은혜로 주어졌고 그리스도의 섬김과 같은 태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다양한 은사는 한 성령이 주신 것이기에 자기 것인 양 자랑하거나 비교하면 안 되고 각자 받은 은사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은사의 목록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을 분별함, 방언 말함과 방언 통역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열하는 이유는 어떤 은사는 성령에 속했고, 어떤 은사는 성령에 속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초자연적인 은사가 그렇지 않은 은사보다 더 크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들은 더 낫거나 못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나눠 주신 것임을 알고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사용되어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런던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는 애덤 스미스와 함께 고전경제학을 완성하고 대표하는 영국의 경제학자입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고 경제학과 자연 과학 연구에 전념하던 그는 런던 증권거래소의 중개인으로 일했던 유태인 아버지로부터 증권거래와 부(副)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윤획득에 대하여 “이윤은 남다른 현명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다른 어리석음에서 나온다.”라며 사람들은 남들보다 머리를 써서 약삭빠르고 눈치껏 적당히 속이면 더 빠르고 더 많은 이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정직하고 속임 없이 진심으로 할 때 가능하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 설 교 >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김영규목사 / 고전 12:10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고전12:10)
“a[llw/ de; diakrivsei" pneumavtwn,”
“to another discerning of spirits;”(KJV)
“to another distinguishing between spirits,”(NIV)
분별력의 중요성
일곱 번째 은사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분별함”이란 단어는 “diakrivsei"”(디아크리세이스)입니다. 동사형은 “diakrivnw”(디아크리노)인데, “구별하다, 나누다”는 의미와, 법적으로 “재판하다, 판결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판별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평생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판단과 결정을 내립니다. 그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내 인생이 좌우됩니다.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 직업을 결정하는 것, 창업이나 중대 사업을 결정하는 것, 친구를 선택하는 것,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하는 것 등등.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인생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배우자를 잘 선택하면 평생 행복한 가정생활을 합니다. 배우자를 잘못 선택하면 평생 불행한 가정생활을 합니다. 사업 대상을 잘 선택하고 결정하면 성공적인 사업가가 됩니다. 사업 대상을 잘못 선택하고, 거래처를 잘못 결정하면 하루아침에 빈 털털이가 됩니다. 오늘의 결정이 남은 인생 전체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바른 판단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세상 살면서 가장 중요한 판단은 바로 사람을 판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 선택하면 행복한 인생이 되고, 나쁜 사람 선택하면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얼굴에 써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나는 나쁜 사람이오!” 하고 얼굴에 쓰고 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쁜 사람이 더 천사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느 재벌 총수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관상쟁이를 불러서 면접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 사람 잘못 판단하는 바람에 큰 손해 보신 분들이 꽤 많을 겁니다. 사기꾼을 사업가인 줄 알고 돈 맡겼다가 뜯긴 사람, 나를 도와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인 줄 알고 가까이 했다가 배신당하고 상처만 받은 사람, 후레자식을 효자인 줄로 착각한 부모 등등. 기왕에 사람 잘못 판단해서 손해 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앞으로 남은 인생 살면서 사람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남은 생애가 결정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최소한 사람을 바로 보는 안목을 은사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들이 존재한다
오늘 말씀의 분별력은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분별하는 것도 사실은 영을 분별하는 것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 것은 영들의 존재입니다. “영들”(diakrivsei", spirits)이란 단어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많은 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천사들도 영입니다. 사탄, 마귀, 귀신들도 영적 존재들입니다. 사람도 영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삶은 육체적 삶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영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물질적 원리로 판단하지 말고, 영적 원리로 판단해야 합니다. 현대 과학은 나노(nano)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나노미터란 1미터를 10억 등분하여 쪼갠 크기입니다. 이 정도면 대략 분자 하나의 크기 정도입니다. 분자를 들여다본다고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을까요? 현대 의학은 뇌를 비룻한 인체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전보다 교육이 더 잘 됩니까? 인재 양성이 더 잘 됩니까? 유전자를 줄줄 꿰고 있어도, 아이들 인성교육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갈수록 사회는 악해지고, 이상한 인간만 늘어납니다. 인간을 물질로 보는 한, 바른 사회를 만들고 바른 사람을 만드는 것은 다 틀린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영에서 시작된 존재입니다. 하늘의 천체들, 동물과 식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다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물질세계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이런 물질은 대부분이 원소 주기율표에 나오는 기본 원소들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만물의 기본 요소는 현존하는 원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소들은 신비롭게도 물질과 비 물질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단위를 원자라고 합니다. 하나의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자는 딱딱하고 꽉 채워진 구조물이 아닙니다. 거의 빈 허공으로 된 구조물입니다. 원자 구조와 태양계 구조는 아주 비슷합니다.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돌고 있습니다. 태양과 행성들 사이는 빈 공간입니다. 원자 구조도 비슷합니다. 원자를 설명하는 흔한 비유가 있습니다. 원자 한 개를 축구장 크기에 비유한다면, 원자핵은 축구장 안에 있는 작은 곡식 알갱이 정도입니다. 원자는 거의 빈 공간 속에 아주 작은 핵이 놓여 있는 구조입니다. 그 핵 주위를 엄청나게 멀리서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전자는 너무 작아서 크기나 무게가 거의 없습니다. 원자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원자핵입니다. 이 원자핵을 이루고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도 더 작은 쿼크와 렙톤이라는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쿼크와 렙톤은 전자처럼 너무 작아서 크기가 거의 없고, 질량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작은 물질들이 어떻게 떨어져나가지 않고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물질 사이를 채우고 있는 에너지 때문입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책상은 크기도 있고 딱딱해서 변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상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은 거의 빈 공간이나 다름없는 엉성한 허공에 엮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이 공간을 일정한 에너지가 메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물질세계는 결국 에너지의 집합체입니다. 이 우주 에너지는 어디서 왔을까요?
현대 과학은 우주에너지의 근원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든 에너지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고유명사는 “여호와”(hw:hoy_)입니다. 이 단어는 존재하다는 의미의 동사 “hy:h;”(하야, be)에서 온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 또 다른 하나님의 칭호는 엘(lae), 혹은 그 복수형인 엘로힘(!yhil~a>)입니다. 능력자란 뜻입니다. 솨다이(yD'v), almighty)라는 칭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능력, 힘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유일의 존재요 능력자이십니다. 물질세계를 파고들어 가면 비 물질(非物質)에 가깝습니다. 질량이나 크기가 없는 존재, 어떤 에너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물질은 에너지와 그 변형입니다. 물질세계는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에너지는 능력자이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영적 세계를 인정하든지 말든지 자유입니다.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fact(사실)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영적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fact입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영적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것을 없다고 하면 내 삶이 곤란해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천사도 영입니다. 사탄도 영입니다. 귀신들도 영입니다. 인간도 영입니다. 내 자신도 영입니다. 영이기 때문에 영적 존재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영적 세계에 사는 사람이 물질로 삶을 해석하려고 하니, 해석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 자신이 영적 존재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
이 세상은 모든 영들은 두 가지 영의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탄의 영입니다. 천사들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에 속해 있습니다. 모든 귀신들은 다 사탄의 영에 속해 있습니다. 모든 인간도 이 두 가지 영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하든지, 아니면 사탄의 영에 속하든지.
하나님의 영은 모든 선한 일을 하게 합니다. 선하심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합니다. 평안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무엇보다 모든 선한 일을 하게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립니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온갖 악한 일을 하게 합니다. 성경에 마귀가 하는 일들을 보세요.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마4:1-11) 마귀는 알곡 속에 가라지를 뿌려 놓습니다.(마13:39)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눅8:12) 마귀는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만들었습니다.(요6:70, 13:2) 마귀는 살인자요, 진리가 없고,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마귀는 악행이 가득한 자요, 모든 의의 원수이며, 바른 길을 굽게 합니다.(행13:10) 죄를 짓게 만듭니다.(요일3:8) 마귀는 교만합니다. 정죄합니다. 비방합니다. 사람들로 걸려 넘어지도록 덫을 놓습니다.(딤전3:6-7, 딤후2:26) 쉬지 않고 두루 다니면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하나님을 대적하여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계12:9)
마귀가 전 세계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보세요. 요즘 전 세계를 파괴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이슬람 제국, IS 입니다. 종교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마귀 집단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전 세계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독일, 터키, 이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집단 살인이 발생합니다. 어떻게 젊은이들이 무차별 학살에 스스로 몸을 던질까요? IS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 사건이 번번이 일어납니다. 일본에서는 아사하라 교주가 나타나서 지하철에서 사린가스를 뿌리게 만들었습니다. 최근에는 한적한 시골 장애인 시설에서, 이유도 없이 수많은 장애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몇 년 전에는 북유럽에서 청소년 캠프에 총을 난사하여 수 십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인간 같지 않은 패륜적 사건이 많습니다. 부모를 학대합니다. 자기 자식을 때리고 굶주려서 죽게 만듭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들을 할 수 있을까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도, 개나 돼지도 이런 악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런 나쁜 짓을 합니다. 인간은 육체만 가진 동물이 아닙니다. 영적 존재입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혔을 때, 인간은 어떤 악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두 가지 영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해 있든지, 아니면 악한 영에 속해 있든지.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마귀에서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들은 사랑하고, 의를 행합니다.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미워하고 다툽니다. 죄를 반복하고 불의를 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속해야 합니다. 마귀의 영에 지배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천사로 위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단자들을 보세요.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정 모 교주, 안 모 교주, 이 모 교주, 다 자기는 의롭다고 합니다. 자기는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자기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속하면 천국 가고, 다른 교회에 속하면 지옥 간다고 합니다. 오직 자기에게만 붙어 있으라고 합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그래서 오늘 말씀은 영들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바로 분별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마귀를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들을 분별하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서 꼭 필요한 능력은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영들을 분별하는 것은 특정 성도만의 것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영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
눈이 밝아야 몸을 바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영을 분별할 줄 알아야 인생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영들을 분별하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합니다. 그러면 그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까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일까요? 분별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29-33)
예언 하는 자들은 질서를 지켜 차례로 하고 그 말씀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너도 나도 아무 말씀이나 마구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질서 있게 전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내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말씀을 질서 있게 분별하면서 전하라고 합니다.
“영들을 분별함”(diakrivsei" pneumavtwn)은 어떤 사람에게 작용하는 영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악한 영의 역사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참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분별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영을 분별하는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리적인 분별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셨으면 올바른 교리를 알고 계셔야 합니다. 교리는 성경에서 뽑아낸 신앙의 골격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나, 장로교인들이 신봉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먼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전능하사 천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상당히 길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단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그래서 이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아도 이단이고, 인성을 믿지 않아도 이단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벌써 예수님과 관련된 각종 이단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 혹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거나, 오락가락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다 이단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1-3, 5-6)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단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도 이단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불가분리적으로 가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단자들입니다. 사도들이 받아서 전한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무슨 새로운 계시를 받았노라고 주장합니다. 한국판 이단자들의 공통점이 그것입니다. 교주마다 무슨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어댑니다. 이들은 교주가 받은 계시를 사도들이 전한 성경의 복음보다 앞세웁니다. 안 모 교주, 이 모 교주, 정 모 교주, 박 모 교주, 문 모 교주등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실제적인 삶을 통한 분별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로써 그 나무를 평가하라고 하셨습니다.(마7:16,20, 12:33, 눅6:44)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 20, 12:33)
불륜을 일으키고 가정 파탄을 일으키는 교주를 구세주라고 따르는 것이 대부분의 이단 사이비들입니다. 왜 IS 를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까? 사람을 무차별로 죽이니까 그렇습니다. 사람 잡는 종교가 어떻게 종교가 될 수 있습니까? 저는 목회자로서 불가피하게 사람들의 신앙을 관찰합니다. 제가 판단하는 것은 신령한 체험담이나, 신앙 경력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신앙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 잘 드린다고 좋은 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당 밖에서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 표어는 바른 신앙 참된 삶입니다. 신앙과 삶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따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면 사람도 잘 섬깁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14, 22)
믿음이 있는 자는 행실로 나타납니다. 믿는다 하면서 행실이 없으면 가짜입니다. 사도 요한도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의를 행하면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거나, 형제를 미워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오늘 영분별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물질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도 육체에 불과하고 물질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영적 세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천사도 영입니다. 마귀, 사탄도 영입니다. 사탄이 부리는 귀신들도 영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영들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어떤 영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께 속해 있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에 속한 사람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에 속한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따라가면 남은 인생 망합니다. 분별력을 가지세요. 첫째로, 교리적으로 바른 자를 따라야 합니다. 교리를 깊이 모른다면 사도들의 전승을 이어받은 정통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둘째로, 그들의 삶을 지켜봐야 합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삶이 바르지 못하면 가짜입니다. 부디 악한 영에 속지 말고, 바른 영을 따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언의 은사
고전 12장 10절 ~ 절 / 김영규목사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고전12:10)
“a[llw/ de; profhteiva,”(고전12:10)
“to another prophecy”(kJV, NIV)
예언의 은사란?
고린도전서 12장 은사 목록의 여섯 번째는 예언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십니다. 예언이 뭘까요? 성경에 예언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이 몇 개 있습니다. 예언자, 선지자, 선견자, 대언자 등등. 호칭은 많지만 기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언이고, 둘째는 대언입니다. 예언은 미리 말하는 것이고, 대언은 대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예언함”이란 헬라어로 “profhteiva”(프로페테이아)입니다. 이 단어는 “profhvth"”(프로페테스)에서 온 말로, “prov”(before)란 말과 “fhmiv”(speak, tell)란 말이 합쳐져서 된 합성어입니다. 단어적 의미는 “앞에서 말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prov”(before)란 전치사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적 개념입니다. 시간적으로 앞서서 말하는 것, 즉 미리 말하는 예언입니다. 예언을 하는 사람은 예언자(豫言者), 혹은 선지자(先知者)로 부릅니다. 둘째는 장소적 개념입니다. “prov”(before)란 전치사의 두 번째 개념은 장소적 개념입니다. 누구 면전에서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대변인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 말씀을 대신 말하는 사람이므로 곧 대언자(代言者)가 됩니다. 예언과 대언은 선지자의 두 가지 중요한 역할입니다.
첫째로, 선지자는 예언자 역할을 했습니다. 예언자는 장차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 받아서 미리 알려줍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 특히 선지서에는 많은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짧게는 잠시 후에 일어날 일에서부터, 멀게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까지 미리 알려줍니다. 성경의 예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은 장차 다가올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런 예언을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 선지자입니다.
둘째로, 선지자는 대언자 역할을 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대언자였습니다. 대언의 내용은 예언적 부분을 제외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위로와 구원의 말씀입니다. 현재 고난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고, 미래적인 구원을 약속합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과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듣는 사람에게는 아주 껄끄러운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책망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그 대상이 왕이나, 권력자들이라면 대놓고 말하기 힘듭니다. 어찌 되었든지 성경 선지서의 많은 부분은 심판과 책망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혹은 이방 사람들을 향하여 죄를 책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는 예언의 은사는 무엇일까요? 앞날을 말하는 예언적 기능일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지만 주로 후자의 경우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의 대언입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는 주로 장래 일을 예견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특히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예언적 기능보다는 주로 대언적 기능을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를 예로 들어 봅시다. 목사가 강단에서 예언을 합니까, 대언을 합니까? 거의 100퍼센트 성경 말씀의 대언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울려나는 말씀을 선지자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대언한다고 해서 예언적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 말씀은 예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대언자이면서, 동시에 예언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다 선지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성도들은 다 예언자들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모두가 예언자들
신약 시대에 예언의 은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언자들이고, 대언자들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선지자요 예언자들입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두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자 역할입니다. 둘째는 대언자 역할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 즉 말씀의 전달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위로하라 하시면 위로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책망하라고 하시면 책망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경고하라고 하시면 심판을 경고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들입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도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가졌던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째는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다만 신약 성도들이 구약 선지자와 다른 것은, 예언 내용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새로운 예언을 받아서 전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모든 성도들은 완성된 예언서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성경 말씀 이외에 무슨 새로운 예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만 전하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 모든 성도들은 다 대언자들입니다. 즉, 신약의 모든 성도들은 구악 시대 선지자의 두 번째 기능인, 대언의 기능을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극히 일부 예언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가보는 천하에 흉년이 들리라는 예언을 했는데,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성취되었습니다.(행11:28) 그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당하고 결박된다는 예언을 했습니다.(행21:10-11)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예언은 그 외에 어디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신약 시대 가장 중요한 예언은 바로 성경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예언함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입니다. 믿으십니까? 정말 나는 선지자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내가 왜 선지자인지 성경으로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으로 돌아가 봅시다.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 사도는 이 사건이 요엘서 예언의 성취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6-18)
요엘 선지자는 성령 강림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강림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모든 사람이 실제로 예언을 했습니까? 사도행전 2장을 보세요.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오순절날 모든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들이 예언을 했다고 하지 않고 다른 언어들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예언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받은 사람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은 것일까요? 분명히 성취되었습니다. 성취되었다면 요엘이 말한 예언은 곧 오순절 성도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한 것이 됩니다. 오순절날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사도행전 2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2:7-11)
오순절 날 성령 받은 모든 성도들이 말한 것은 각 나라 언어로 된 복음입니다. 그들은 성령 받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즉, 성경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의 대언! 바로 그것이 신약 시대 선지자가 담당한 예언입니다. 신약 시대 모든 성도들은 성령 받은 선지자들입니다. 우리가 선지자로서 할 일은 성경을 대언하는 겁니다.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말씀합니다. 참고로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각종 외국어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14:2)
사도 바울은 이런 종류의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예언은 곧 성경 말씀의 대언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14:24-25)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다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그 예언이 뭡니까?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들 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입니다.
대언의 효과
그러면 이제 대언의 효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면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무슨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배 때마다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무슨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말씀 전달로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말씀 전달로 사람의 마음이 변할까요? 단순히 말씀을 전해 듣는 것으로 생각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사상이 변할 수 있을까요? 단지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무슨 축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해 들음으로써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구약 에스겔 37장에 보면 마른 뼈들의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어떤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바짝 마른 해골들, 사람의 뼈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습니다. 이 뼈들을 바라보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37:3상)
에스겔 선지자는 어정쩡한 대답을 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37:3하)
그런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7:4-6)
에스겔은 하나님 명령대로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육체적 회복입니다. 거기에 생기를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37:9)
그랬더니 살아 움직이는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장면에 대해서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들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소망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망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소망이 없는 백성은 죽은 백성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는 인생들은 마른 해골 같은 인생들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소망 없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다 영적인 사망자들이요 해골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단지 대언만 하라고 합니다. 에스겔은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머리털 하나도 바꿀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가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 마른 뼈들을 살려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나는 말씀을 전할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회개하게 하십니다. 나는 말씀을 전할 뿐인데, 듣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구원 받습니다. 거듭납니다. 나는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그런데 듣고 병 고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는 대언자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대언하세요. 에스겔의 심정으로 말씀을 전하세요.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14:24-25)
사도 바울이 말씀한 예언이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전할 때에 많은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책망을 듣습니다. 너는 죄를 지었어! 둘째로, 판단을 받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 이런 사람이야! 셋째로, 마음의 숨을 일들이 드러납니다. 넷째로,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게 됩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면 듣는 사람에게 이런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믿고 행하세요!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을 전할 때에 듣는 고넬료 가족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행11:15)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눅24:32) 말씀은 효능이 있습니다. 말씀의 효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세상 사람들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효력 있는 말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말이 많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언하면 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사람이 변화됩니다. 귀신이 쫓겨 갑니다. 병자가 치유됩니다. 이런 말씀 대언을 왜 안하겠습니까? 마음껏 대언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서나 에언자가 되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선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세우신 선지자입니다. 내가 말씀을 대언해야 될 장소는 어디일까요? 내가 말씀을 대언해야 될 대상자는 누구일까요? 신명기 6장에 보면 그 대상자가 명확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첫째는 자신을 향한 대언자입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에 새개라고 합니다. 자신의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대언해야 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남에게 전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에게 대언하세요. 먼저 내 자신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들을 향한 예언자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대언하세요. 선지자로서 평생의 과제입니다. 내가 선지자가 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는 바로 내 가정, 내 가족입니다. 셋째는 내 집을 출입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대언하세요. 나와 상관없는 먼 데 있는 사람에게 선지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나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 일상에서 늘 대하는 사람들에게 선지자가 되셔야 됩니다. 직장 동료들, 자주 만나는 친구들, 거래처 사람들, 동호회, 동창회, 이웃 등등,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대언의 대상자들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선지자 역할을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대언은 놀라운 효능이 있습니다. 마른 뼈들도 살아납니다.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
이정익목사 / 고전 12:9-11
신앙세계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신비함 속에 힘의 원천이 들어있습니다. 그 힘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입니다. 그 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로 주어집니다. 본문은 그 신비한 능력과 믿음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교회를 건실하게 받들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병 고침 은사
본문은 병을 고치는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9, 28). 이것을 신유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 병 고침은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병이 고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신유의 은사는 육신과 정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사도바울도 선지자들도 많은 전도자들도 이 능력으로 육신의 병을 고쳤습니다.
질병을 고치는 단계가 몇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규칙적인 생활입니다. 발병도 알고 보면 규칙적인 생활이 없어서 발병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질서와 무절제 그리고 폭식과 폭주 등은 모두 병을 유발하게 하는 원인들입니다. 무질서에서 유발된 질병은 대부분 질서를 찾으면 자연 치료가 가능합니다. 질서의 삶은 기초적인 치유의 삶을 이룹니다. 또 한 가지는 의학적인 치료입니다. 의학적으로 치료받는 것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방법이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간혹 신앙인들이 믿음으로 질병을 고친다고 해서 의학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고치려고 약도 치료도 거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을 그렇게 자꾸 시험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의사를 통해서 질병을 치료하시고 고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질병이 신적인 권위로 치유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와 있는 신유의 능력입니다. 신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경우는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신유로 고침 받은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유의 능력이 은사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신유의 능력이 주어지면 참 편리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입원한 성도들을 위해서 병원에 갈 때마다 갈증을 느끼고 무력함을 느끼고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때 무능함을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병원에 가서 기도할 때 그때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병자가 고쳐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하는 목회자 자신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전도되어 좋고 환자도 좋고 모두 다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느 개척교회 목사가 40일간 금식하면서 병을 고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이 마음으로는 간절하지만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그 보다 먼저 나에게 사랑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영웅심이 있어서 은사를 주셔도 대부분 영웅심을 위해서 사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사를 주시지도 않고 고침도 주시지 않습니다. 은사에는 이 신유의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신유의 은혜는 발병했을 때 고침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건강한 삶을 유지하도록 건강의 은혜를 힘입는 것이 더 좋은 은혜입니다. 진정한 신유의 삶은 평소 건강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능력 행함
은사에는 능력 행함의 은사도(10) 있습니다. 이것을 기적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때로 인간의 상식을 넘는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영적 능력을 은사로 주시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셨습니다. 무서운 파도를 향하여 호령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원주민은 바울을 신으로 섬기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선교사들이 때로 원주민 선교를 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원주민 추장 아들의 병을 기도하여 고쳤습니다. 그때 부족 전체가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선교초기에 그런 능력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능력 행함의 은사는 전도 초기에 많이 나타납니다. 아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곳에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이 같은 능력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기적의 모습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일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릅니다. 그런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난다면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그래서 때로 믿음이라는 구실 하에 시험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동네에서 예수를 믿는 분에게 동네 사람들이 전도할 때마다 “뭔가를 자꾸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분이 “믿는 자에게는 독약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농약을 마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입니다. 농약을 마시면 죽습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때로 동네에서 사람들이 보여 달라 그러면 믿겠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사람들이 전도되어서 좋고 누구도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여 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농약을 마시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순진하게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그 말씀이 주는 메시지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무모하게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시대에 그런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김익두는 시장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발견합니다. 그때 기도로 저를 고쳐볼까 생각하고 혹시 못 고치면 사람들이 비웃을까 생각되어 그를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안수했는데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음에 그것도 믿음이냐 하는 가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장날 보란 듯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뜨겁게 기도하여 그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김익두는 굉장치도 않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김익두의 인생은 요란했습니다. 그의 전반인생도 깡패로 요란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깡패도 그런 깡패가 없었습니다. 장날이면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반반한 여인들이 오면 끄댕이를 붙잡고 키스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김익두에게 끄댕이 안 잡힌 여인은 여자도 아니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변화를 받은 후의 인생도 요란했습니다. 성령이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였던지 그에게서 신유의 기적들이 일어났고 가는 곳 마다 전도의 폭발이 일어나는 요란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성령은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게 하기 위해서 때로 능력의 은사를 주십니다.
영 분별
본문에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영적인 부분 특히 예언이나 계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영적인 문제로 인해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그래서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영 분별의 은사는 지금 주어진 영적인 역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게 하는 능력입니다. 때로 사탄의 영을 분간 못해서 유혹에 깊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몇 군데 있습니다. 역대하 18장을 보면 아합왕 시대에 우상 숭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합왕을 심판하기로 작정 하십니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때 아합왕은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에게 나가서 싸우랴 말랴 하고 묻습니다. 그때 시드기야는 “나가 싸우소서, 반드시 이기리라”고 계시하셨다고 말합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미가야는 “이번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죽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두 선지자의 예언 중 누구의 예언을 믿어야 합니까. 계시는 이렇게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가야는 사탄의 영이 저 거짓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 지금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리면서 “언제 하나님의 영이 너에게 말씀하시더냐”고 따졌습니다. 그때 미가야가 말하기를 “네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할 때 그 음성을 들으리라”고 대답합니다.
왕상 13장 나타난 사례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 유다의 한 젊은 선지자에게 “네가 가서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죄를 외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 단 그가 주는 물도 선물도 향응도 받지 말고 돌아오라, 만일 네가 먹고 마시면 죽을 줄 알라”고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 젊은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로 가서 여로보암 왕에게 주신 계시대로 준엄하게 죄와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이 저 놈 잡으라고 소리칠 때 그 손이 그만 굳어 버렸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잘못했으니 기도해서 회복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서 고쳐줍니다. 그때 여로보암이 이 젊은 선지자에게 선물을 주고 향응을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향응이나 선물이나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겠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하고 돌아옵니다. 아주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때 북 이스라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그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니 참 창피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하지 못하니까 남 유다 선지자가 이곳까지 와서 죽음을 무릅쓰고 우상숭배를 당당하게 지적하고 돌아갔다니 자기도 선지자인데 얼마나 창피한 노릇입니까. 이 늙은 선지자가 창피했으면 더 기도하고 그 시대를 향해서 준엄하게 책망하고 죄를 지적해야 하는데 그 젊은 선지자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재빨리 말을 타고 그 선지자가 돌아갔다는 길로 쫒아가서 그 선지자를 만나서 내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내 집으로 가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 하자“. 그때 이 젊은 선지자가 “나는 북 이스라엘에서 향응은 물론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겠다, 하나님의 명령이다”하고 자신 있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 늙은 선지자가 말합니다. “나도 선지자요, 간밤에 나에게 당신을 접대하라 계시하셨소.” 이 말을 듣고 이 젊은 선지자는 아무 의심 없이 그 집으로 따라가서 먹고 마시고 향응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참 먹고 마실 때 이 늙은 선지자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소, 향응도 받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했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소.”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난 이 젊은 선지자는 짐을 챙겨 서둘러 돌아오다 산속에서 사자를 만나 찢겨져 죽습니다.
영 분별이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선지자요” 이 말에 그만 의심 없이 무장을 해제하고 말았습니다. “간밤에 나에게 당신을 대접하라는 계시가 있었소” 이 말에 의심 없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니까 “며칠 몇 시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니까 모두 집 팔고 직장 그만두고 쫒아가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단은 성경에 대해서 더 잘 알고 더 열심입니다. 병을 좀 고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사탄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 가서 많은 기적을 행할 때 애굽의 박사들도 그 기적들을 다 행했습니다. 문제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 분별하는 은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은사
본문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믿음의 은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지극히 단순하고 얇고 가벼운 그런 믿음입니다. 믿음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별 자자란 일들에 일일이 반응하고 걱정하고 울고 웃는 그런 가벼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층 성숙한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의지적 신앙고백이 포함된 믿음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제자들도 다 도망간 그 때에도 이 여인들은 십자가까지 무덤까지 따라가고 부활의 아침 일찍 무덤까지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그 위험한 시국에 자신들의 신분을 노출하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인수해 무덤에 장사를 주도했습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소리를 다 하다가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거의 다 회피합니다. 숨어 버립니다. 그런데 서슬이 퍼런 때 자칫 예수의 추종자로 몰리면 거세당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감수하고 자신을 보란 듯이 노출할 수 있는 그 용기, 이 용기가 믿음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그 외에 더 특별한 믿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믿음에 의지적인 신앙고백이 내포된 그런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내게 주어진 직분만큼의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용기를, 행동을, 손해도 감수하는 길을 걸어가게 작용합니다.
오늘은 이 의지적 믿음이 너무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행동이 요구될 때 모두 낙오하고 후퇴하고 손해 안 보려고 수단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집사는 교회를 건축한다고 하니까 헌금할 것이 걱정되어 슬그머니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다른 교회에 가 보니까 그 교회도 일 년 후에 교회를 건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새로 지은 교회로 갔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를 짓느라고 빚진 것 갚기 위해 헌금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족끼리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믿음입니까. 믿음은 평상시에는 평안을 주셔서 감사하고 아픔이 주어졌을 때는 내게 아픔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임을 알고 지긋이 기도하며 내가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는 그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려운 것 이것저것 다 피하고 무슨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그 믿음에 신앙고백이 들어있고 의지적 신앙요소가 들어있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고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갈 때 찬미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그 상황은 찬미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내일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참혹할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내일 져야할 십자가를 피해 달라고 피땀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회피의 기도가 아니고 잘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는 시간을 자신이 스스로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제물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주어졌으면 소중히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몫이고 사명이고 할 일이고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믿음의 은사
고전 12장 09절 / 김영규목사
믿음의 은사
구원의 믿음과 능력의 믿음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 목록, 세 번째는 믿음의 은사입니다. 은사로써의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분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데 분량이 많다 혹은 적다고 평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분량의 문제가 아닌, 내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것만 결정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예수님을 시인하면 구원 받고, 부인하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즉,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요1:12),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곧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눅12:8)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그러나 은사로써의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과는 다릅니다. 구원의 믿음은 분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지만 은사로써의 믿음은 분량으로 평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 모로 믿음의 크기를 평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8:26, 14:31, 17:20) “믿음이 없느냐?”(막4:40, 마17:17) 믿음이 큰 사람, 믿음이 작은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크기는 곧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남아 있던 제자들은 괴로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귀신 들려 간질병을 앓으면서 물속에, 혹은 불속에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환자를 놓고 이런 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이 아이의 아버지가 무릎 꿇고 간구합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17:15-16)
예수께서 이 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왜 고치지 못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믿음의 분량에 따라 큰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은사 목록에 보세요. 믿음의 은사 다음으로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의 은사가 언급 됩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나, 모두가 다 믿음에 따라 좌우되는 은사들입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도 있고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마14:27) 믿음의 분량에 따라, 풍랑 위를 걸을 수도 있고 풍랑 속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마14:28-31) 믿음의 분량에 따라, 능력 있는 삶을 살 수도 있고, 무능하게 초라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내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해 보세요. 큰 믿음의 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만능 도구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인생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믿음으로”라는 말이 스무 번 이상 나옵니다. 믿음으로!(Pivstei) by faith, 혹은 through faith! 믿음을 수단으로, 수만 가지 일들이 벌어집니다. 믿음 때문에 내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 일들을 히브리서 11장을 중심으로 정리해 볼까요?
첫째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맺어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만드신 것을 어떻게 알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히11:3)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내 인생에 개입하고 계심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인정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를 보내심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사도신경 중)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뭡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는 겁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예배는 무엇일까요? 화려한 조명, 잘 짜여진 예배 순서, 수준 높은 성가대, 많은 회중, 뭐 이런 것들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아벨이 왜 가인보다 나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핵심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둘째로, 믿음으로 미래를 확신합니다. 최근 유명한 미래 학자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라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장차 일어날 일을 궁금해 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변해 갈까? 내 인생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미래를 말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결정권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플러의 말보다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의 모든 장래를 다 맡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인생을 설계합니다.
노아는 맑고 창창한 하늘 아래서 홍수를 대비했습니다. 비가 내려 온 천지가 물에 잠길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히11:7)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 받았을 때에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히11:8)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당장에 큰 민족이 되고 넓은 영토를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자기 부인의 매장지만 겨우 자기 소유로 삼았을 뿐입니다.(창23장)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나, 손자 야곱이 당장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손들에게 주시고, 자손들을 창대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히11:9-10)
여러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혹은 자녀들의 앞날에 대해서, 어떤 설계를 하고 계십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의 구원을 믿었기에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히11:17-19) 이삭은 야곱과 에서를 놓고 축복하면서, 하나님이 반드시 그 축복대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히11:20)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요셉의 아들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장래를 위해 축복했습니다.(히11:21)
장차 들어갈 천국도 마찬가집니다. 오직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봅니다.(히11:16) 누가 천국에 가 봤습니까? 천국이 눈에 보입니까? 지옥이 어디 있는지,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디 있는지 누가 압니까? 오직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약속 또한 믿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마귀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냅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엡6:16)
믿음은 우리 인생에 만능 방패입니다. 내 인생에 다가오는 어떤 악한 일도 다 막아낼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으로 대답하신 분들 중에는, 잘 못 알고 대답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면 병도 걸리지 않고, 재앙도 없고, 힘든 일도 없고, 가난 궁핍도 없고, 속 썩이는 사람도 없고, 만사 형통할거야!” 그렇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아픕니다. 병듭니다. 고생도 합니다. 배신도 당합니다. 가난하기도 합니다. 남에게 속아 돈도 뜯깁니다. 욥을 보세요.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자녀를 잃었습니다. 재산이 다 날아갔습니다.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막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아끼는 어떤 것도 지켜주지 못했는데 그래도 믿음이 방패가 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막아주는 것은 내가 아끼는 돈이나, 재산이 아닙니다. 현세의 모든 영달이 아닙니다. 믿음의 방패가 지켜주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합니다. 즉, 신앙을 잃지 않게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믿음은 신앙의 방패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를 지켜주는 방패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나 사이를 끊어놓지 못합니다. 욥을 보세요. 모든 것을 잃었어도 하나님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내가 아끼는 것들은 하나님이 다 되돌려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잃지 않는 겁니다.
다시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2-38)
순교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지켜낸 것이 뭡니까? 그들의 재산입니까? 소유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지켜낸 것은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믿음의 방패가 끝가지 지켜주는 것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입니다. 기댈 곳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근심 많은 사람이 누굽니가?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의심 많은 사람이 평안한 것 보셨어요? 세상 사람들이 왜 불안합니까? 믿을 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항상 평안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매를 맞고 監獄에 갇혔습니다. 발목에는 쇠사슬을 채워놨습니다. 매 맞은 상처가 욱신거리고, 내일이면 또 무슨 변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천하태평입니다. 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속으로 작게 한 게 아닙니다. 다른 죄수들이 다 듣도록 크게 불렀습니다.(행16:25)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평안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저는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진정한 하나님 자녀들은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만능 도구, 만능 수단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갑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확신합니다. 믿음으로 마귀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냅니다. 믿음으로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오늘 내게 있는 믿음을 보세요. 과연 나는 믿음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믿는 사람들의 만능 수단인, 믿음의 은사를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분량을 키우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믿음의 분량을 키우는 문제입니다. 변화산 아래에서 예수님께 나왔던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9:22)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9:24)
기왕에 주님께 도움을 청하시려면 크게 청하세요. 오늘 나도 믿기는 믿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작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세요!” 이 기도를 항상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최대 사용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첨단 기기를 갖고 있습니다. 스마트폰도 있고, 아이패드도 있습니다. 성능 좋은 컴퓨터도 있습니다. 그러나 활용도는 아주 낮습니다. 기껏해야 몇 가지 프로그램들만 사용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 겨우 몇 가지만 합니다. 프로그램들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만능 수단입니다. 그런데 근근이 주일 신자노릇 하는 정도에만 사용합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능력을 나타내는 믿음의 용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항상 하나님께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더 큰 믿음을 내게 주소서! 믿음을 키워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큰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고전12장 08 / 김영규목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고전12:8)
“w|/ me;n ga;r dia; tou' pneuvmato" divdotai lovgo" sofiva", a[llw/ de; lovgo" gnwvsew" kata; to; aujto; pneu'ma,”(고전12:8)
“For to one is given the word of wisdom through the Spirit, and to another the word of knowledge according to the same Spirit;”(NASB)
지혜의 말씀(lovgo" sofiva")
오늘부터는 바울이 언급한 은사 목록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아홉 가지 은사를 언급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등.
오늘은 이 은사 목록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은사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혜”(sofiva"), “지식”(gnwvsew")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방점은 “말씀”(lovgo")에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을 뒤집으면 “말씀의 지혜”, “말씀의 지식”입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같은 말씀의 은사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은사입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좁게는 복음을 의미하고, 넓게는 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 세상의 지혜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 성경 말씀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지혜, 말씀의 지식입니다. 우리는 이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지혜의 말씀(lovgo" sofiva")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지혜의 말씀이 뭘까요? 말씀에 대한 어떤 지혜를 말하는 것일까요? 고린도전서의 문맥에서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한 지혜의 말씀이란 바로 복음을 이해하는 지혜, 복음을 전하는 지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지혜에 대해서 길게 언급했습니다.(고전1:17-30) 고린도 교인들은 헬라인으로서 지혜를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십자가에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제아무리 지혜를 자랑해도 그것은 철학적인 지혜에 불과합니다. 그런 지혜로는 죄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철학으로 하나님 자녀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미련해 보여도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이해하는 자라면 진정한 지혜의 말씀을 가진 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말을 잘하고 지혜로워도 십자가 구원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참다운 지혜 자가 아닙니다. 입으로 천만 마디 말만 떠벌이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무슨 지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이해하는 자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지혜의 말씀 속에는 복음을 전하는 지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도는 인간적인 설득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과 설득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방법은 전도(khvrugma)의 미련한 것입니다.(고전1:21, 2장) 바울이 말한 전도란 단어는 “선포”(khvrugma)라는 뜻입니다. 영문 성경에는 대부분이 “preaching”이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말씀 선포, 복음 선포입니다. 말씀 선포로 죄인을 구원합니다. 전도는 철학적인 설득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단순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도 방식은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해 보입니다. 어떻게 십자가 얘기를 전함으로써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을 수 있나?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십자가를 전해 들음으로써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지혜의 말씀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경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어떤 영문 성경에는 8절 말씀을 이렇게 풀어 썼습니다. “To one person the Spirit gives the ability to give wise advice; to another the same Spirit gives a message of special knowledge.”(NLT)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적인 두뇌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해의 능력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인생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되 스토리를 읽는 게 아닙니다. 문법적인 해석을 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알아차립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내 인생 문제를 해석합니다. 나아갈 길을 찾습니다. 바로 그것이 지혜의 말씀, 즉 말씀의 지혜입니다. 오늘 이 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말씀(lovgo" gnwvsew")
두 번째 은사는 지식의 말씀(lovgo" gnwvsew")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 역시 세상의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의 지식, 복음의 지식, 성경의 지식입니다. 지식은 지혜와 성격이 다릅니다. 지혜(sofiva")란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지식(gnwvsew")이란 말씀에 담긴 정보 자체를 의미합니다. 복음의 정보, 성경의 정보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지식, 즉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방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가?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둘째는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영혼은 무엇이고, 육체는 무엇인가? 인간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셋째는 역사의 시작과 마침입니다. 만물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끝날 것인가? 만물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특히 성경은 구원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어떤 불행에 빠졌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고난이란 무엇인가? 왜 고난이 오는가?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이러한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성경은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체계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 말씀으로 각 개인의 모든 인생 문제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119:105)
우리는 항상 지식의 말씀을 구해야 합니다. 세상 지식을 구하기 전에 말씀의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지식이 넘쳐납니다. 인터넷 검색어만 치면 알고 싶은 것은 거의 다 나옵니다. 요즘 종이로 만든 책이 거의 필요 없습니다. 출판사가 왜 망하는지 알 만 합니다. 요즘 저는 집수리를 좀 하고 있습니다. 방바닥이 낡아서 교체를 하려고 하는데, 문제는 쌓여 있는 물건입니다. 그 중에서도 처치 곤란인 것이 바로 책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먹지도 못하면서 사서 모은 책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첫째 이유는 지나간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월 지나 새로운 정보가 넘치는데 옛날 정보가 무슨 소용입니까? 둘째 이유는 인터넷과 컴퓨터 정보입니다. 검색어만 치면 알고 싶은 정보가 거의 다 나오는데, 무슨 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 지식입니다. 성경에 담겨 있는 복음, 성경에 담겨 있는 각종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가는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그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 가지 지식을 제쳐두고 먼저 성경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릅니다. 성경을 모르면 인간을 모릅니다. 성경을 모르면 만물의 존재 이유를 모릅니다. 성경을 모르면 인류 역사를 모릅니다. 세상 지식은 몰라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면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 담긴 무수한 정보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세요.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세상 학문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내 인생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지식의 말씀을 은사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담당한 자들에게
그러면 이제 이 은사들의 수신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받은 자들은 누구일까요? 물론 모든 성도들에게 이 은사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들은 특정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본문 말씀을 어떤 영문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For to one is given the word of wisdom through the Spirit, and to another the word of knowledge according to the same Spirit;”(NASB)
여기서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특정인에게 지혜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divdotai), “is given” 어떤 목적 때문에 특정인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누구에게 주어졌을까요? 아마 28절에 그 답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8절의 은사 목록과 28절의 은사 목록을 대조해 보세요. 8절의 은사 목록에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맨 앞에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첫째, 둘째, 셋째 직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직분들의 공통점은 말씀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말씀 맡은 직분이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설교자들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입니다.
목회자가 받아야 될 첫 번째 은사는 말씀의 은사입니다. 말씀의 지혜, 말씀의 지식! 이것이 없다면 설교할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들에게 직분에의 소명과 함께, 말씀의 은사를 주십니다. 말씀은 성도들의 영혼을 살리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매일매일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 영혼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먹이는 것은 목회자가 담당할 첫 번째 의무입니다. 말씀의 은사를 받지 못한 목회자는 없을 겁니다. 정말 주님이 부르신 목회자라면 말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
말씀 이해와 전달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말씀의 이해와 전달의 중요성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이해와 말씀 전달은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입니다. 만일 이 사역이 잘못된다면 교회 공동체는 영양실조에 걸려 다 죽습니다. 즉,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말씀을 잘못 적용하면 곧바로 불량 식품이 됩니다. 성도들이 불량 식품을 영의 양식으로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단에 빠집니다. 잘못 된 신앙에 빠집니다.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고, 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영혼이 죽습니다.
첫째로, 말씀의 바른 해석과 전달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 족보가 나옵니다. 종전의 개역 한글판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세계”(世系)라는 말은 계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세계(世界, WORLD)의 의미로 설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요구한 갑절은 스승의 갑절이 아닙니다. 상속자가 받을 장자의 몫을 의미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영문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Let me inherit a double portion of your spirit,”(NIV) 현존하는 이단 교주들은 대부분 어디서 신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하는 해석이 소위 말하는 영해(靈解)입니다. 영적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한글로 된 단어의 뜻부터 제대로 해석한 후에 영해를 해야지, 성경의 문맥도 모르면서 영적 해석부터 합니까? 특히 요한계시록 해석이 문제입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성경을 다 영적으로 푼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이단 교주의 이름이 계시록에 들어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른 해석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런 이단 사이비들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제대로 될까요?
말씀은 예배의 중심입니다. 예배 순서를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가 있고, 하나님께 받는 순서가 있습니다. 드리는 순서가 뭡니까? 첫째는 헌신입니다. 몸과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정시에 몸과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져 있어야 합니다. 헌금의 순서도 있습니다. 헌금은 헌신의 표현입니다. 찬송도 드림의 순서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칭송하는 순서입니다. 기도 역시 드림의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소원을 드리는 순서가 기도입니다. 헌신, 헌금, 찬송, 기도, 모두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받는 순서는 무엇일까요? 바로 설교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배 중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습니다. 내가 부딪친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습니다. 설교 말씀은 예배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강단의 중앙에 무엇이 있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강대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특히 설교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전달입니다. 설교의 핵심 콘텐츠는 바로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연설에 매료되는 청중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사람의 말만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듣기 싫은 말씀을 자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지금 잘못하고 있어! 회개해야 돼! 고치지 않으면 징계 당할 거야! 그런데 인간적인 연설자들은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큰 죄를 져서 망할 사람한테도 만사 잘 된다는 소리만 합니다. 성경에 그 대표적인 예가 나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서로 사돈지간입니다. 둘이 연합군을 만들어 아람에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출정에 앞서 먼저 여호와께 물어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에게 속한 선지자 시드기야를 불렀습니다. 시드기야는 자신만만하게 예언합니다. 왕이여 출정하시면 적을 찔러 멸하실 겁니다.(왕상22:11) 전쟁터에 나가서 화살에 맞아 죽을 사람에게 적을 찔러 멸한다고 예언합니다. 듣기는 좋습니다. 그러나 가짜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요즘도 가짜 선지자들, 가짜 설교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회개하고 고쳐야 될 사람들에게 그저 잘 된다는 소리만 합니다. 도둑질을 해도 잘 되고, 거짓말을 해도 잘 되고, 이기적으로 살아도 잘 되고, 예수 믿기만 하면, 이래도 잘 되고 저래도 잘 된다고 합니다. 교회 자랑의 문구들은 한결 같이 “행복, 성공, 축복”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성경에 보세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23:16-17)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평안하리라 합니다. 완악한 행실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직 축복만 외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다 자칭 선지자, 자칭 예언자, 자칭 교주들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렘14:14-15)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3:21, 32, 참고, 렘27:15, 28:15, 29:9,31)
오늘날 강단마다 인간적 메시지가 차고 넘칩니다. “너는 할 수 있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봐! 하나님도 네 뜻에 동의하실거야!” 그렇습니까? 사람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까? 신앙을 인간 중심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사람의 뜻을 관철하라고 합니다. 도대체 미신 우상 숭배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 되고, 내 뜻을 관철한다는 점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의 소리를 전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외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직 성경으로! 인간 이성에서 믿음으로! 인간 철학에서 성경 계시로!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인지, 인간 연설을 들을 것인지, 그 결정을 항상 해야 합니다.
둘째로,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설교자도 중요하지만 설교를 듣는 자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청중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23)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먹여주실 때에는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하시니까 어렵다고 다 떠났습니다. 듣기 좋은 말씀은 듣고, 듣기 어려운 말씀은 도망갑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0, 6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7-68) 예수님 설교도 힘들다고 다 도망갔는데, 오늘 내 설교 듣겠다고 미사지구로 몰려오는 사람을 기대해도 좋을까요? 혹시, 드문드문이라도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고 결단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감성으로 듣지 말고 이성으로 들으세요. 말씀을 분별하세요.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람의 소리인지? 내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들을 귀를 갖춰야 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 목회자에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평신도로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분별하여 듣는 귀가 오히려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세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반복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11, 17, 29, 3:6, 13, 22)
들을 귀를 갖추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내 영혼이 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말씀만 잘 들으면 하나님 자녀로서 충분히 은혜 생활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의 은사(I)
고전12장 07절 ~ 10절 / 최성규목사
성도라면 누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고,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은사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는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 12: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상)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왜 주어지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은사를 받으면 "나에게" 좋은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이 은사입니다. 한 마디로 은사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연합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연합 사역의 목적은 성도를 성숙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는(은사)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그러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깨달음으로, 받은 은사를 확인하고, 은사에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쁘게 사역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지혜의 말씀의 은사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첫 번째인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전하는 것입니다(고전 2:6-7).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는 "지혜롭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세상에서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고 증거합니다. 결국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예수님에 대해서 지혜롭게 증거하는 은사입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위대한 복음 증거자인 사도 바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지혜의 은사를 받으면, 사도 바울처럼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에게 다른 지혜는 자연히 주어집니다. 솔로몬이 누렸던 지혜의 영광을 우리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주십니다.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혜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여지느냐, 아니면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느냐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지혜"의 은사라고 하지 않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 "말씀"으로 증거되고 함께 나눌 때,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2-13)고 말했습니다.
이 은사를 받은 분은 성령께서 그 마음의 눈을 밝히사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빨리 깨닫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성경을 잘 가르쳐 주는 분이 그런 분입니다. 여건상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일반글자는 잘 모르지만, 성경 말씀을 잘 전하는 나이 드신 분들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비유로,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설교라고 한다면,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교사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은사를 받은 분은 성령께서 무엇이라고 가르치시는지 예민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듣고, 혼자서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야 합니다. 혼자서만 깨닫고 나누지 않으면, 성령이 그 은사를 거두어 가십니다.
우리가 깨달은 지식을 가르칠 때, 다른 영혼이 참된 지식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 정보 시대라고 해서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부와 명예, 권세는 줄지언정, 결코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심과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이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식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다른 것은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종말의 주의 날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날입니다(사 11:9).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해지는 종말의 날까지 열심히 진리를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셋째, 믿음의 은사
믿음의 은사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시고, 그 뜻대로 성취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일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은사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은사는 일의 성취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불가능이 기적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은사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과 조용기 목사님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히 11:17). 하나님을 믿음으로 조용기 목사님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는 자세로 천막 교회에서 세계 최대의 교회를 바라본 것입니다(히 11:1).
또한 믿음의 은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울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그 이유는 사랑이 없으면 믿음의 열매가 잘 맺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홍수 심판 당시 사람들이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였듯이, 현대인들은 믿음의 은사자가 하는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믿음의 은사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을 내기 쉽습니다. 여기에는 모두 사랑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손길과 표현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은사를 함께 공유함으로, 온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맛보아야 합니다
구원받고 성령충만한 성도에게는 한 가지 이상씩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를 확인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성도는 기쁘고 즐거운 신앙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받은 은사대로 봉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를 세우며,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선한 청지기가 됩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성령의 은사(II)
고전12장 07절 ~ 11절 / 최성규목사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가운데 신유, 능력 행함, 예언, 이 세 가지 은사는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은사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도나 목회자들이 유독 이 세 가지를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섬기는 은사나 구제하는 은사를 소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롬 12:6-8).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섬기는 은사와 신유의 은사 중 어떤 것을 받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신유, 능력 행함,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직접 보고 체험하기 때문에 은사자가 우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 은사를 잘 사용하면 복음 증거의 효과적인 도구가 됩니다. 은사와 관련하여, 성경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구하고,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이처럼 은사자가 교회와 성도를 섬겨야지, 교회와 성도가 은사자를 섬겨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지, 은사가 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와주는 성령의 도구로서 신유, 능력 행함,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신유의 은사
신유의 은사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병을 치유하는 은사입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역사하시면 못 고칠 질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당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고, 성령을 통해 지금도 동일하게 고치십니다(마 9:35).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향해 치료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내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은사자는 단지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병을 고치고 난 뒤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내"가 아니라,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고치고 나서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께서는 못 고치시는 것이 없으나, 안 고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병들은 현대 의학으로 나을 수 있거나, 성령의 특별한 뜻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병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경우입니다. 그 뜻에 대해 사도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신유의 은사를 통해서 병이 낫는 것보다 환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중요합니다. 신유의 은사가 일어나는 것도 효과적인 복음 증거를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므로, 때에 따라서 신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둘째, 능력 행함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신유의 은사가 병과 관련되어 있다면, 능력 행함은 자연계의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역사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 은사는 특히 영적 전쟁터인 선교의 현장에 나아갈 때 많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능력을 주셨듯이, 지금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보다 우리가 더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이에 성도는 사단과 세상을 향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능력 행함의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자기 과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적을 많이 행하신 예수님조차도 표적만을 구하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 16:4). 이처럼, 기적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비록 초보적이지만 놀라운 기적을 행합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와 대결한 바로의 술객들도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일어나는 결과가 중요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참된 기적의 결과입니다.
셋째,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란 현재와 미래의 일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사실은 그 예언이 결코 성경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예언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은 성경의 계시를 밝히 드러내고, 곧 되어질 일에 대해서 좀 더 잘 깨닫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미래를 점치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사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이처럼 예언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나면 성도들은 위로 받고 힘을 얻습니다(고전 14: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면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성경은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고 증거합니다.
이와 같이 예언을 통해서 불신자가 회개하고, 성도들이 성숙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거짓 영에 속지말고, 성령이 주시는 예언의 음성을 선포하여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약 10여년 전부터 "성경적 효"를 예언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다 명확하게 가르치고 선포함으로 성도들은 성숙하고, 불신자는 회개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의 부재로 인해 어려움에 빠진 이 나라에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 섬김, 부모공경, 가족·이웃 사랑, 나라 사랑, 자연 보호, 인류 봉사의 6대 실천신앙을 지닌 "성경적 효"를 더욱 행하고, 전함으로 개인과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일에 적극 동참합시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은사는 더 이상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이 주시는 선물을 풍성히 누림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의 덕을 세우고, 개인의 덕을 세웁시다.
성령의 은사(III)
우리는 그동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신유, 능력행함,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은사는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의 은사입니다. 우리가 모든 은사를 사모하여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성령의 은사를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에서가 하나님의 축복권인 장자권을 등한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이삭에게 팔아먹은 것과 같이,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등한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 4:14)라고 말합니다. 즉 은사를 “등한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성도들 중에서 은사를 등한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등한히 여긴다는 것은 은사를 그 본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본인의 영적 성장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더욱이 은사에 관심도 없고,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등한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은사를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를 받아 누리고,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어느 은사보다도 영의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된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에 대해서 깨달음으로, 우리의 영적 감각을 날로 새롭게 합시다.
첫째, 영 분별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는 어떤 말, 행동,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영들과 마귀에게 속한 영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종말이 다가올수록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정체를 분별해야 합니다(요일 4:1). 성경은 미혹의 영인 사단의 가르침에 성도들도 속아넘어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기독교 역사상 한국 교회는 짧은 시간에 놀랍도록 부흥, 성장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많은 곳에 사단의 역사도 심하다고, 한국은 전 세계에서 이단이 제일 많은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 성령과 사단의 역사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단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할 정도로 교묘합니다. 따라서 큰 기사와 이적이 나타난다고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마 24:24). 우리는 말씀과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악령의 정체를 밝히고, 성령의 역사를 자랑해야 합니다.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보다 사단에게 더 관심 갖는 것은 잘못입니다. 영 분별은 사단만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도 분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 분별의 은사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고,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귀신만 분별하다 보면,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귀신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를 말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히 3:1).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묵상할 때, 성령께서는 영 분별의 은사로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요일 4:2-3상)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하고, 배우지 않은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 영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방언은 표적방언과 은사방언으로 나누어집니다. 표적방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으로 성령세례의 외적 증거입니다. 그리고 은사방언은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이자, 우리가 흔히 하는 방언으로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많은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할 수 있습니다(고전 14:2). 그리고 방언의 은사는 개인 신앙의 향상을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상)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덕”이란 헬라어로 “오이코도메”라 하는데, 이는 집을 지을 때 벽돌을 한 장 두 장 쌓아 올리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개인적인 신앙의 집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은 더 깊은 기도와 찬미의 도구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합니다. 이처럼 깊은 절망이나 큰 문제에 직면해서 말문이 막힐 때, 방언기도는 이 한계를 뛰어넘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날마다 성령충만함으로 방언으로 말하고,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셋째, 방언 통역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는 방언의 내용을 일상 언어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방언을 말하는 당사자가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통역해 줄 수도 있습니다. 방언 통역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하)고 말씀합니다. 방언만으로는 개인의 덕을 세울지언정, 교회의 덕은 세울 수 없습니다. 교회의 덕과 개인의 덕을 쌓기 위해서는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고전 14:13).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있을 때, 우리는 영으로 비밀히 말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전하는 다섯 마디가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고전 14:19). 따라서 우리 모두 방언뿐만 아니라, 통역의 은사까지 받아서,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나누는 기쁨을 누립시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가 충만한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은사에 대해서 잘 아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밥은 “먹어야” 하고, 숨은 “쉬어야” 하고, 기도는 “해야” 하고, 성령은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풍성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초대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의 강한 역사와 은사가 풍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교회와 개인과 성도들 간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고 말합니다. 또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상)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은사가 풍성해지는 가장 좋은 길은 사랑입니다. 한 몸이요, 지체된 성도들을 섬기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맺혀질 때, 그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우리 안에서 맺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며, 교회가 성장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세워집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맺혀질 때, 그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우리 안에서 맺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며, 교회가 성장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세워집니다.
성령의 은사
고전12장 07절 ~ 11절 / 최성규목사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신앙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말씀운동과 성령운동, 영혼구원과 사회구원, 기도와 행동,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균형을 갖출 때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과연 내 신앙은 균형 잡혀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특히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해 균형 잡혀 있는가? 혹시 은사만 좇는 신앙은 아닌가? 또는 열매만 가치 있게 보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은사가 풍성할 때 좋은 열매도 많이 맺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고전 12:7).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은사를 알아야 하고(고전 12:1), 더 많은 은사를 구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고전 14:12).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은사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균형 잡힌 신앙을 이루고, 모든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복의 근원이 됩시다.
첫째, 친교의 은사(말하는 능력)
친교의 은사는 말하는 능력입니다. 친교의 은사는 방언, 방언 통역, 예언의 은사입니다. 말과 관련된 은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주고,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할 때, 나에게 큰 유익이 있습니다(고전 14:4). 바울은 이 은혜가 커서 방언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고전 14:18). 우리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방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은 성령충만의 확신을 줍니다(행 2:1-4).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가능하게 합니다(고전 14:2).
지친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줍니다(사 28:11-12). 방언통역의 은사는 방언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방언에는 사적방언과 공적방언이 있습니다. 사적방언은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방언기도 하는 것입니다. 공적방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므로 통역이 필요합니다(고전 14:27). 공적방언은 특히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기 때문에 방언통역이 있어야 합니다(고전 14:22). 만약 통역이 없다면 불신자들은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고전 14:23). 그러므로 이웃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방언통역의 은사를 구할 때,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미래를 점치거나, 개인의 앞날을 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확실한 예언은 성경입니다. 아무리 큰 환상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성경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었지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벧후 1:18,19).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과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바로 전하는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됩시다.
둘째, 능력의 은사(행하는 능력)
능력의 은사는 행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행하신 예수님의 긍휼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능력의 은사는 치유, 능력 행함,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치유의 은사는 성령의 역사만으로 질병을 고치는 능력입니다. 치유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모든 약함에서 회복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성령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예수님만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행 3:16). 치유의 은사를 얻기 원하십니까? 먼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합시다. 또한 병든 자의 아픔과 마음을 품읍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사와 이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성경은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주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우리에게 능력 행함의 은사를 지금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신다는 믿음과 이웃을 향한 긍휼입니다. 성경의 기적은 이웃을 향한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눅 7:13-15).
분명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능력 행함의 은사를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뜻대로 특별한 일을 행하실 것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막11:22,23). 이때 중요한 사실은 일의 성취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불가능이 가능케 됨을 믿는 것입니다(빌 4:13). 믿음의 은사를 소유한 자는 반드시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고전 13:2).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큼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롬14:1). 믿음이 강할수록 믿음이 연약한 자를 감싸 안아야 합니다(롬 15:1).
셋째, 계시의 은사(앎의 능력)
계시의 은사는 앎의 능력입니다. 계시의 은사는 하나님께로 오는 초자연적인 깨달음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이 알기 어려운 것을 알게 해주고, 깨닫게해 주십니다. 계시의 은사에는 영분별의 은사,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가 있습니다. 영분별의 은사는 어떤 말이나 행동과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도 실제로는 사단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고후 11:14). 큰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다고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마 24:24). 종말이 가까울수록 성령과 악령의 역사를 분별해야 합니다(요일 4:1).영분별의 지름길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분별한다고 사단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진짜를 알면 가짜는 저절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악령은 속히 떠나갑니다(히 3:1).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깨닫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식이 더해져가고 있습니다(단 12:4). 거기에는 잘못된 지식과 사단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점점 진리와 비진리,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려워져 갑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게 하실 분은 오직 성령뿐이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밝히 깨닫게 됩니다(고전 2:12,13). 지식의 은사는 깨달은 바를 나누고 가르칠 때 풍성해집니다. 바울의 풍성한 깨달음은 선교 현장에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힘쓸 때 얻어진 것입니다. 성령이 주신 깨달음을 구역식구들과 나눌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함께 나눌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깨달은 진리를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지식이 많아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모르면, 죽은 지식입니다. 듣고 실천할때 역사가 나타나듯, 지식과 지혜가 함께 할 때 힘이 있습니다. 나와 우리의 자녀에게 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할 때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지혜 중의 지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3,24).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선포할 때, 최고로 지혜로워집니다. 자녀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이 지혜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지혜로 충만해서 21세기의 솔로몬이 됩시다.
성령의 은사는 받는 것보다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선물을 받고 아무데나 던져놓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용할 때, 더 풍성해지고, 열매도 맺습니다. 우리 모두 주신 은사를 가지고 힘써 사역합시다(벧전 4:10).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예수를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모하는 자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교회와 이웃을 유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믿음 위에 믿음
고전 12:7-11 / 최성규목사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믿음입니다. 믿고,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마 9:28). 이만큼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도 있고, 작은 믿음도 있습니다(마 15:28 6:30). 강한 믿음도 있고, 약한 믿음도 있습니다(골 2:5 롬 14:1). 진실한 믿음도 있고, 거짓 믿음도 있습니다(딤후 1:5 딤전 1:19). 산 믿음도 있고, 죽은 믿음도 있습니다(히 10:39 약 2:26). 더 중요한 사실은 마귀도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떤다고 말씀합니다(약 2:19). 그렇다면 나는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8:13). 믿음은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하면, 예수님도 일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용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을 때 뿐 아니라, 삶 속에서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은사로서의 믿음을 갖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고전 12:7-9). 그러면 믿음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알아봄으로, 모두 믿음 위에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첫째, 구원받는 믿음
우리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좋은 집은 살 수 있어도, 행복은 못 삽니다. 돈으로 좋은 시계는 살 수 있어도, 시간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예수님은 경제학자로 오셨을 것입니다. 만약 가장 필요한 것이 첨단 기술이었다면, 예수님은 과학자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약속합니다. 구원받는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이 주신 이 선물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 복락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받았습니다(요 1:12). 우리 모두 구원받은 믿음을 사용합시다. 삶 속에서 죄를 다스립시다. 가난을 꾸짖읍시다. 나는 질병과 상관이 없다고 선포합시다. 저주와 사망을 물리칩시다. 날마다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갑시다. 믿음으로 선포할 때, 날마다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행복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은사 믿음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 기록된 ‘믿음’은 은사 믿음입니다. 믿음의 은사란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은사 믿음이 절실합니다. 안타깝게도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너무 나약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환경 때문에 넘어지고, 환경에 눌려 삽니다. 조금만 고난이 다가와도 주저앉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것저것 계산하느라,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안 될 이유만 자꾸 찾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노아가 머리로 믿었다면, 방주를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계산했다면, 하란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환경을 바라봤다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입니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롬 4:18)다고 증거합니다. 10년 째 안 믿는 가족이 있습니까? 반드시 구원받을 것을 믿읍시다. 20년 째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올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읍시다. 30년 째 품고 있는 꿈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읍시다. 믿음의 은사로 충만함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롬 4:20). 우리 모두 믿음의 은사로 충만하여 일합시다. 믿음의 은사로 살면, 매일이 기적입니다.
셋째, 열매 믿음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충성’이 열매 믿음입니다(갈 5:22). 충성을 헬라어로 보면, 믿음과 같은 단어인 ‘피스티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충성의 열매입니다. 과연 우리는 열매 맺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동네에 잡화상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교회 목사님을 계속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이를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목사님을 칭찬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잡화상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신 이후로 성도들이 외상값을 잘 갚아요.”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칭찬받았습니다(행 2:47).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교회는 욕을 먹고 있습니다. 신문 사회면에 목사, 장로, 권사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구원받는 믿음이 열매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낳습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됩니다. 성경은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입술에 정직이 흘러넘칩니까? 우리의 손이 사랑으로 봉사하는 손입니까? 우리의 발이 좁은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자녀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까?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합시다. 무기력한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백이 넘치는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환경에 짓눌린 삶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넷째, 상 받는 믿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뿐만 아니라, 은사뿐만 아니라, 열매뿐만 아니라, 상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말씀합니다. 어떤 인생이든 결승선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시상대에 서게 되는 때가 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등수를 매겨서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잘했다면, 100명이면 100명 모두에게 금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우리 모두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만 살지 않으면 됩니다. 눈앞의 즐거움만 좇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모세처럼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우리 모두 끝까지 모세와 같이 상 받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옮겨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믿음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믿음이 없다면, 믿음을 달라고 간구합시다.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 위에 믿음을 달라고 간구합시다. 우리 모두 크고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됩시다. 믿음의 용사가 될 때, 불가능이 가능케 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