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국민대학교 :: 국민*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감성원숭이
이 글은 멋지게 꿈을 이룬 선배가 쓰는 성공담이 아닙니다.
위인들의 전기도 아니고, 유명인사의 자서전도 아니죠.
다만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만 살다가 이제 막 어른으로서의 삶에 뛰어들게 된 신입생 여러분
또는 아직 방황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학우 여러분을 위해서
평범한 대학생이 쓰는, 그저 재미삼아 읽기엔 조금은 길고 지루한 인생이야기입니다.
성적이 우수하신 분이나 이미 계획을 갖고 착실히 그 꿈을 이루어나가고 계신 분,
명문대생의 이야기가 아니면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등에겐 단순한 시간낭비일 수도 있으니,
이에 해당하는 분들은 지금 바로 뒤로가기 또는 닫기버튼을 누르시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습니다^^
그럼 긴 인사는 생략하고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평범한 중위권 대학의 법학과에 재학 중인 올해 스물여섯, 복학 2년차 대학생입니다.
저는 머리가 특출나게 좋은 편도, 근본적으로 성실한 노력가도 아닙니다.
그런 대신 남들보다 집중력이 월등히 뛰어나거나 했다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러한 케이스 역시 아닙니다.
집안이 빵빵해서 돈 걱정 없이 하고픈 걸 하고 살 수 있었다거나, 특정 분야에 타고난 재능이 있지도 않습니다.
음주가무를 즐기고(아마 저보다 노는거 좋아하는 분 별로 없을 겁니다),
이성에도 관심이 많으며(여자도 만날만큼 만나봤어요),
여전히 공부는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는(친해질래야 친해질 수가 없네요),
말 그대로 평범한 이십대 중반, 아저씨가 되기 직전의 청년입니다.
썩 긍정적이거나 착해먹기만 한 성격도 아니라서, 사석에서는 욕도 자주 하고 남이나 상황을 탓하기도 하죠.
굳이 남들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일반적인 또래들보다는 경험이 약간 더 많다는 것,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는 것,
그리고 대단한 건 아니지만 복학한 후로는 학기당 두 건 이상의 장학금을 받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요?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를 한 번 들려드려 볼까 합니다.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펼쳐진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저로서는 이 글을 쓰는 보람이 있겠네요^^
그러면 저한텐 어떤 이득이 남냐구요?
혹시 아나요, 나중에 여러분들을 제 직장동료로 만날지, 처가 식구로 만날지 말이예요.
혹은 굉장히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말이죠.
세상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좁거든요^^
86년 범띠, 이 또래의 수많은 여러분들이 그랬듯이, 저희 가정도 IMF 한파의 희생양 중 하나였습니다.
대기업 과장이셨던 아버지의 명예퇴직과 세 건의 보증채무, 주식투자의 연이은 실패 그리고 부모님의 이혼..
아마도 이 시기에, 참으로 상투적이고 뻔한 몰락 절차 중 하나였을 겁니다.
세 채였던 집이 두 채, 한 채로 줄었고
욕실이 두 개인 집에서 욕실이 하나인 집으로,
욕조가 있는 집에서 욕조가 없는 집으로,
창문을 열면 햇살이 들어오는 베란다가 있는 집에서
창문을 열면 행인들의 발목과 자동차가 뿜고 지나가는 매연 밖에 보이지 않는 반지하로 집이 바뀌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장마철이 되면 창문으로 물살이 들이닥치고, 하수도가 역류해서 온 집안에 물이 차는 경험도 해보게 되었죠.
아버지를 찾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는 좁은 거실 냉장고 앞에 이불을 깔고 자는 게 당연해졌고,
아직까지도 독립을 해서 혼자만의 공간을 가져보는 것은 저의 가장 큰 소원 중 하나입니다.
이혼 후부터는 빚만 잔뜩 짊어지신 어머니 혼자서 저와 누나를 키우시느라 굉장히 고생하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엔 배가 고플 때면 친구의 빵을 대신 사다주고 내 몫의 빵을 얻어먹거나(요즘엔 빵셔틀이라고들 하죠^^;),
쉬는 시간만 되면 돈도 없으면서 매점 앞에 달려가,
친구들이 빵을 사서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한 입씩 뺏어먹는 게 일상이었죠.
사실 중학생 시절까지의 저는 독불장군에 다혈질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존재감 없는 아이였습니다.
게다가 키도 작고 뚱뚱하기까지 한데다가 독특한 한글이름 탓에 우스운 별명으로 놀림 받기가 일쑤였죠.
그렇다고 공부를 잘했을까요? 전혀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 시절에는 게임을 더 좋아했고,
어린 시절, 공부를 하다가 잘 못한다는 이유로 아버지께 혼났던 경험들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서
공부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잔뜩 팽배해있던 터라 성적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하위권이었습니다.
잘하는 것 하나 없고 친구들과도 썩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던 데다가,
콤플렉스가 많아 자신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던 아이..
솔직히 이 시절의 저는 제가 봐도 참 못난이였어요. 하하.
그러다 아마..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즈음일 거예요.
이제 나도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루에 뛰는 것만 최소 네 시간씩, 거기에 무작정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켜기를 했습니다.
인생사새옹지마라 했던가요. 반지하로 이사를 갔던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죠.
TV를 틀어놓고 제자리뛰기를 한다고 해서 올라와 따질 아랫집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몸짱열풍이 불기 전인 그 당시에는 학교에서 손에 꼽을만 한 몸짱이 되었죠.
안 하던 운동을 하니까 성장판이 놀랐는지 어느 샌가 키도 킹오브루저는 될만큼 컸구요.(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이와 더불어 저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악기를 사고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베이스를 치다가 보컬로 영역을 넓혔고,
농구와 복싱까지 시작하며 학업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성적은 늘 바닥을 기었죠.
외고를 졸업하고 명문대학에 다니던 누나와는 달리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음악을 하겠다는 고집을 부렸기에
어머니께서 속앓이를 많이 하셨습니다.
3학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매진해 수학을 제외한 전과목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성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바닥을 기는 내신점수와 이를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상위권대학만을 고집했던 원서지원전략의 실패로 재수를 하게 됐고,
그나마 담임선생님께서 지인이 계시는 학원의 재수종합반에 장학생으로 넣어주셨던 것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수강인원 미달로 폐강되어 버렸습니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재수를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이듬해 합격 발표일,
어머니께서 조용히 저를 부르셨습니다.
지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누나의 등록금을 대기도 벅차니 먼저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씀에
저는 눈물을 흘리며 딱 일 년만 대학생활을 즐겨보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죠.
결국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한다는 조건 하에 첫 학기를 맞이했지만,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먼 거리에서 통학하는 것이 그 때의 저에게는 생각보다 힘들었기 때문에
엉망인 성적과 함께 일 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께 드린 말씀처럼 1학년 때에는 공부하기보다는 즐기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휴학을 하고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고 있을 무렵,
하루 반나절씩은 구두를 신고 넓은 홀을 뛰어다니며 서빙을 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왼쪽 발목에 간헐적인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뒤늦게 시작한 운동에 재미를 들이는 바람에 고교시절부터 발목을 지나치게 혹사시키기는 했었죠.
원래 자주 접질리기도 했구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가족과 친구들의 권유로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는데
4급에 해당하는 좌측거골하후방퇴행성관절염 진단을 받았고,
천안함 사건이나 금마호 사건을 통해 이제는 여성분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UDT에 입대하겠다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제가 그 때부터는 치과질환이라던가 족저근막염, 편도선궤양 등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신세를 지는 일이 잦아져 등록금을 모으는데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 되기도 했죠.
세상이라는 게 참 얄궂게도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 주지는 않았습니다.
뭔가 될 성 싶다 하면 번번이 예상치 못 한 장애물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구요.
한 때는 상황을 탓하며 스스로를 동정한 적도 있고, 좀 더 일찍 깨닫고 노력하지 못한 과거의 나 자신을 탓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꾸어보니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사자성어가 아니었습니다.
가세가 기울 당시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을 때라 상황을 잘 몰랐지만,
계속되는 이사와 부모님의 이혼 등으로 차차 어렴풋하게나마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게 되면서
전단지 배포 등의 아르바이트로 필요한 돈을 벌어 쓰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혼자서는 버스 하나도 맘 놓고 타지 못하던 융통성 없는 철부지에게 자립심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의 저는 각종 레스토랑 등의 서버 및 코치, 바텐더, 소믈리에, 학원강사, 헬스트레이너, 영화홍보모델, 과외교사,
편의점 AT, 오프라인 단체미팅 주선클럽 운영자, 찜닭집 매니저 및 각종 판촉·홍보행사요원 등
다양한 장·단기 아르바이트 경험에 걸쳐 어느 정도의 융통성 또한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운동과는 거리가 멀던 어린 시절에는 축구나 게임 등을 즐기는 친구들에 비하여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그 시절의 많은 독서량과 글을 쓰던 경험이 지금의 저에게 풍부한 상식과 약간의 글재주라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열등감은 긍정적인 자존심으로 승화되어, 후에 심적·신적으로 많은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비록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미처 해보지 못했던 운동이나 음악 등의 도전들을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이러한 자신감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비록 뒤늦게 시작한 학업이지만 최상위권에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수능공부에만 전념하느라 입시정보에 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에 재수를 하게 됐고 그 결과가 좋지는 못했지만,
재수를 하는 일 년 동안 자원교사로서의 봉사활동을 통해 사랑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얻었고,
난생 처음 장기적인 직장을 구하여 성인으로서의 사회를 일반적인 학생들보다 먼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하게 된 대학교에서의 첫 1년은 성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비록 주6일제로 일을 하며 통학을 해야 했기에 피곤하기는 했지만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회와 소모임의 기장 및 회장을 맡게 되었고,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경험들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간관계에 있어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음은 두말할 것 없죠.
이 시기에만 방송에 3차례 정도 출연하고 온갖 무대에 올라가는 등 후회없이 놀기도 했구요.
또 발목에 생긴 문제로 인하여 더 이상 취미였던 농구나 권투를 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 대신 저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습니다.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상체 위주의 운동을 계속했고 누구 못지않은 노력을 통하여
나중에는 헬스트레이너로서도 반 년 간 근무를 하게 됐을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공익근무를 하는 2년간에도 퇴근 후 투잡, 쓰리잡을 뛰면서 등록금을 모으는 한 편
집안 빚을 갚아 나가는데에도 조금씩 손을 보탤 수 있었죠.
어느덧 복학을 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간의 경험과 각오들 덕분인지 복학 첫 학기에는 여전히 일을 하면서도 1학년 때에 비해서 비약적인 성적상승을 이루었고,
총 세 건의 상금 수상 및 장학금 수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자금대출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죠.
학자금대출로 등록금을 대고, 등록금을 위해 번 돈으로 일부나마 빚을 갚을 수 있었으니까요.
더욱이 요즘은 든든학자금대출이라고 해서 금리도 낮고 취업 시까지 상환을 보류해주는 제도까지 생겼더군요.
생활비도 학기 당 1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구요. 저의 경우는 이 생활비대출 역시 빚을 갚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는 5년 만에 처음으로 일을 쉬고 그 간 짬짬이 모아두었던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경제적으로는 많이 여유가 없어지긴 했지만 그 대신 서울 디자인마켓 서포터즈, 자유기업원 홍보대사, 보브옴므 포스맨 등
많은 대외활동을 하며 더욱 많은 사람과 활동을 체험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죠.
그 결과로 성적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역시 세 건의 장학금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스물다섯 살까지의 제 인생이야기를 마쳐볼까 합니다.
글 초입부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여러분과 같이 평범한 대학생이니만큼
감동적인 해피엔딩으로 장식할 수는 없는 점이 아쉽네요.
솔로 1년차로서 딱히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제 앞에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구직난과 '한국에서 서민남자로 살기'라는 험란한 과제가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길고 지루한 글 읽어주신데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저 역시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만
세상을 두려워하고 이에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전합니다.
“남들보다 못한 자신의 상황이 원망스러운가요? 과거의 오점 때문에 더 이상의 발전은 무리라고 생각하나요?
이미 주어진 상황을 탓하고 바꿀 수 없는 과거의 미련에 얽매여있을 시간에 그들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치는 건 어떨까요?”
살다보면 언젠가는 또 생각지도 못한 크나큰 역경이 찾아와 저를 위협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것 또한 잘 견뎌내고 난 뒤에는 저를 더욱 더 예리하게 벼려줄 수 있는 숫돌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저는 앞으로도 늘 적극적이고 개척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해나갈 것입니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ark. - Nietzsche.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 니체)
더 많은 대화를 원하시는 분은 http://cyworld.com/dense 로 방문하시거나
denseraindrop@hanmail.net (네이트온)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직은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깨우치셨고 본인이 무엇을 잘하시는지도 깨달으신 것 같네요. 항상 적극적인 마음으로 잘하는 것을 살려 꿈을 이뤄가시길 바랍니다.
이런경험들이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었습니다
참 속깊은 학생이네요.. 님과 거의 동일한 성장과정과 경험을 거친 1人으로.. 참 많이 공감하고 보기좋습니다. 지금처럼 적극적이고 개척적인 마음 잃지말고 살아가길 바래요.
우와 아직은 젊은 나이신데 , 경험도 많으시고 대단하신것 같아요. ^^